이인영은 정권 나팔수와 하수인 되려고 학생 운동했는가 묻고 싶다.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에게는 그리고 문희상 같은 사람에게도 애당초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치열하게 학생운동 한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는 어리석은 짓이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도 말려야 할 사람이 감투하나 쓰고 조일병을 구하려는 것을 보니 안쓰럽다.
큰 인물이 되려면 꼭둑각시 놀음 하지 말고 원내대표도 내려 놓고 조국의 사퇴를 주장해야 한다.
서술이 시퍼런 박정희 정권시대에도 여당에 양심적인 정치인들이 있었다.
1969년 월 8일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의결에서 공화당 내 양순직, 예춘호, 정태성, 박종태, 김달수 의원 등 3선 개헌안 반대세력은 야당과 합세해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키는 소위 4·8 항명파동을 일으겼다.
또 1971년 9월 30일 야당인 신민당은 물가폭등과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소요 사태 등을 이유로 김학렬 경제기획원, 신직수 법무,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안을 국회에 제출했을 때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길재호 등 이른 바 ‘공화당 4인 체제’는 약 20명과 야당에 동조하여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박정희는 1974. 815. 육영수를 총탄에 잃고도 끝에 정권에 대한 집착을 못버리고 독재를 하다가 고 18년 독재끝에 1979. 10.26. 김재규의 총탄에 사라졌다.
386 학생운동은 4.19세대에 비하면 역할이나 중요도에서 새발의 피도 안되지만 독재를 증오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그 정신은 같다고 본다.
원래 학생운동하면 순수하게 학생운동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에 따로 과실을 챙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기왕 정치인이 되었으면 누구 보다도 앞장 서 수호하고자 했던 민주와 정의를 실현해야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마구잡이 일반통행 악습을 답습하고 있다.
殷鑑不遠(은감불원) 覆車之戒(복거지계). 商鑑不遠(상감불원). 不踏覆轍(부답복철)이라고 앞 사람의 나쁜 선례를 밟아서는 안된다.
1960년 4월 혁명의 주역의 변신의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고 모르고 있다면 알아야 할 것이다.
이세기. 이기택. 설송웅....
1. 이세기
이세기는 고려대 교수하다가 광주 학살의 원흉 전두환에 붙어서 어용 교수되고 통일원장관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세기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새끼"라고 불렀다.
이세기(20세기)는 이제 다른 세기(21세기)가 되었다.
돈도 많이 받고 좋았을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될 것이다.
그 아들 딸들도 부끄러울 것이다.
하나 더 1894년 고부 민란의 단초를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증손이 지금 민주평화당 조배숙의원이다.
물론 조배숙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쨋든 조배숙은 막석보, 탐관오리, 동학농민운동이 나오면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다.
2. 이기택
고 이기택도 잘 나가는 정치인이였다가 노태우와 김종필이 합당한 쪽에 붙었다가 국물도 못 얻어 먹고 이미지만 구기고 쓸쓸히 잊혀졌다.
3. 설송웅
설송웅은 요즘 한국사 강사로 잘 나가고 있다는 설ㅇㅇ의 아버지이다.
설송웅은 참으로 이당 저당을 유랑하고 다닌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정당도 맨처음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자유민주연합(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새천년민주당(김대중) 대통합민주신당(김대중) 새누리당(박근혜) 자유한국당(박근혜) 국민의당(안철수) 현재는 무소속으로 알려지고 있다.
설송웅은 1995년 새천년민주당에서 초대 민선 용산구청장과 2000년 대통합민주신당에서 16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새누리당으로 당을 갈아탔다.
그래서 설아무개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할머니한테 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아이러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