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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감사절을 노래하자
지난 10월 중순에 신문을 읽다가 활자 제목이 눈에 확 뜨였다. 혹시나, 싶었다. 기사 제목은 ‘고려인 부부 예술가의 고려인 홍범도 장군 진혼’이었다. 역시나,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20년도 넘은 일이지만, 아직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홍 장군이 여생을 보낸 카자흐스탄 고려인 후예 김겐나지(77) · 문공자(76) 부부는 음악으로 홍 장군을 진혼한다. 부부는 카자흐스탄 예술인 최고 권위인 ‘공훈 예술가’ 반열에 올랐다. 기타리스트인 김 선생은 카자흐스탄 알마티 음대에서 기타를 가르쳤으며, 고려극장장을 지냈다. 고려극장은 말년의 홍범도 장군이 수위로 일하기도 했다. 김 선생은 ‘판타지아 아리랑’ 연주를, 문 선생은 ‘사할린’ 등을 노래할 참이다.”(‘한겨레’ 10월 13일자)
광복회 충북지부 등이 주관하는 행사가 다음 날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열린다는 예고기사였다. 이날 산오락회 음악가들과 아리랑 협연할 것이란 내용도 있었다. 문제는 내가 신문(新聞)이 아닌 구문(舊聞)을 읽는다는 점이다. 워낙 귓등으로 날아다니는 뉴스가 많으니 일일이 챙길 새 없이, 쌓아둔 신문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자료 찾듯 일견(一見)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예의 고려인 음악가 기사를 본 것 역시 며칠 지나고서 였으니, 이런 낭패가!
이미 연주회는 끝났다. 어쩌면 출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관련 인물을 검색해 보았지만 더 이상 추가 기사나, 연결할만한 단서가 없었다. 딱히 알만한 사람도 없어서, 유일한 제보자인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신문 기사 아래 작성 기자의 메일주소가 있는 이유는 기사에 대해 소통을 하겠다는 선한 의도가 아닐까 싶었다.
“오 기자님께.. ‘고려인 부부 예술가’ 기사를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의왕시 색동교회 목사 송병구라고 합니다. 제가 산오락회 연락처를 알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제가 독일 복흠교회에서 목회하던 2001년에 김겐나지 극장장과 문공자 님을 초청하여 독일에서 수차례 공연한 일이 있어, 꼭 다시 뵙고 싶습니다. 10여 년 전까지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기사를 읽고 연락을 드립니다. 도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 연락처는 ... 입니다.”
급한 마음에 간절한 심정을 담아 메일을 보냈지만, 지금까지 보낸 메일함 수신확인에 따르면 ‘읽지 않음’ 상태이다. 다른 기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부탁할까 했으나, 나 역시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아쉽게도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기사 속 사진으로 본 두 분은 얼굴에서 노년의 기색이 짙었다. 처음 만난 것이 1999년 봄이었으니 무려 24년 전 일이다. 더듬어보니 그들은 50대를 막 시작한 때였다. 부부 음악가는 고려극장 극장장과 극장에 속한 가수로서 활약 중이었는데, 단원만 8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 구 쏘련 시절, 알마티에 있는 4대 극장 중 하나인 고려극장은 고려인이 있는 곳이라면 소비에트 전역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꾸렸다.
그들과 만난 것은 쏘련 해체 이후 실낱같던 국가지원이 끊겨, 극장이 해체될 위기에 처하면서이다. 그때 지푸라기처럼 등장한 것이 독일에서 답사차 방문한 우리 일행이었다. 실제로 2년 후에는 기타리스트와 가수 두 사람일망정 15차례 정도 크고 작은 규모의 독일 초청공연을 성사시켰다. 안팎에서 실효성을 이유로 반대도 있었으나, 고집스럽게 관철시켰는데 고려인 부부 음악가의 독일방문은 동포사회에 신선한 관심을 불러왔다.
그들이 복흠과 지겐에서 추수감사절 때 불렀던 특송을 나는 지금도 부른다. 얼마 전 I대학교 추수감사절 채플에서 설교 중 노래를 불러, 조는 학생들을 깨우기도 하였다. 바로 고려인 노동요(고려인 1세대 작곡가, 연성용 작)이다.
“이 넓은 논판에 씨뿌려/ 풍년의 가을이 돌아오면/ 누렇게 누렇게 벼이삭/ 우거 우거져 파도치지/ 에헤이야 뿌려라 씨를 활활 뿌려라/ 땅의 젖을 짜먹고 와싹 와싹 자라나게
콜호즈 농장에 깨뜨려/ 봄을 마중 해 소리치니/ 뜨락또르 또르르 굴려라/ 파종의 씨앗이 늦어 말게/ 에헤이야 뿌려라 씨를 활활 뿌려라/ 땅의 젖을 짜먹고 와싹 와싹 자라나게”
두 분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얼마 전 여론을 들끓게 했던 홍범도 장군에 대한 모독이 계기가 되었다. 홍 장군도 말년에 고려극장 직원이었다. 고려인 공동체는 한국 사회의 의리없는 행동에 대해 몹시 분개했을 것이다. “이럴 거면 왜 모시고 갔냐”는 그들의 성난 얼굴이 눈에 선하다.
다시 감사절이다. 나라 잃고, 남의 나라에서 온갖 차별에 시달리던 고려인들은 황무지에 물길을 내어 논을 만들고, 마침내 벼농사를 짓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들 두 음악가는 감사를 잃어버린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감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호소한다. 그럴 것이 해마다 감사제를 드려야 마땅한 우리 민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