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요?
2023.10.31
“공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여행을 할래? 명품 가방을 살래?”
이런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은 어떤 쪽을 택하시겠나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행을 꿈꾸는 삶이 곧 일상인데 공돈까지 생겨 가는 여행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텐데요.
하지만 의외로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휴가철에도 여행 계획을 잡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피곤한 일상, 여행하느라 돈 써가면서 고생을 하느니 집에서 시원하게 여름을 나는 게 훨씬 낫다고 말이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여행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travel’이 원래 ‘고생’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온 것인 만큼, 애초 고생을 전혀 하지 않는 여행이란 있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 세상에 내 집 만큼 편안한 곳은 없으니 아무리 만만한 곳을 선택하더라도 여행지 예약이 곧 ‘고생 예약’인건 사실이니까요.
전에는 여행을 싫어한 적이 있습니다. 여행을 하려 면 꼭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데, 막상 떠나보면 여행은 그만큼의 대가를 돌려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힘들게 도착해서 마주한 풍경들은 멋지긴 했지만 사진 몇 장 찍고 나면 감흥이 흐지부지 흩어졌고, 숙소는 비싼 만큼 편안하지 않았죠.
가는 곳마다 관광객 호주머니를 노리는 상혼에 질리고, 낯선 곳에서 계획이 어그러지는 스트레스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다녀와서는 지친 몸으로 마주하게 되는 산더미 같은 빨래들. 나는 여행을 행복이라든지 경험이라든지 하는 의미 있는 것들과 연결 지으려는 수많은 권유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을 좋아하는 가족들과 친해져 그들을 따라다니다가 여행의 매력을 알게 되었죠.
알고 보니 여행은 수많은 평범한 순간과 고생이 뒤섞여 있는 시간들 틈에서 ‘반짝’ 하고 빛나는 몇몇 순간들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을 잘하는 사람들은 그 반짝임만을 여행 자체로 기억하고,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됩니다.
한때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초저녁에는 그럭저럭 잠들겠는데 중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드시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디에선가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온몸 구석구석 긴장을 풀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에 집중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또다시 새벽에 눈이 떠졌을 때 행복한 장면을 떠올리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떠올린 기억 모두가 여행지에서 가족과 함께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보석 같은 해변, 가족과 황홀하게 올려다보던 은하수, 미각을 자극하던 낯선 음식들… 그 기억 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는 사이 어느덧 잠이 들었습니다. 그 일로 불면증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기억들은 대부분 여행에서 나왔다는 것을 말이죠.
그 이후부터 여행이 싫다는 완고한 지인들에게도 여행을 권하곤 합니다. 철학자 칸트는 여행을 혐오했고,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 베르크를 평생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의아한 것은 한 번도 여행을 해보지 않은 칸트가 그게 나쁜 것인지 어떻게 알았겠느나는 것이었습니다. 버나드 쇼는 ‘이 세상에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말이죠.
“내가 해봤는데 별로더라고.” 이렇게 말하는 이들에게도 할 말은 있습니다. 여행은 단 한 번으로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창의력이 샘솟는 마법의 도구는 아니지만, 자꾸 해보면 그 가치를 알게 됩니다. 나중에 여행에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건강임을 깨닫는 나이가 되면 영원히 그 가치를 알 기회는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편안한 내 집 소파에서 간식을 쌓아놓고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상은 수백 번 반복될 때 의미를 잃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되었건 새로운 자극 속에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뇌를 가졌기 때문이죠. 끊임없이 새로움을 주는 여행은 사람이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내는 데 꽤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한 가족은 주말에 무작정 휙 떠나 톨게이트에서 행선지를 정합니다. 여행이 꼭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거창한 일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여행은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그 모든 과정 자체를 즐기려는 열린 마음일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어디 얼마나 좋은가 보자하고 바득바득 종 주먹 진 자세로는 어떻게 해도 ‘그것 봐, 역시나..’ 하는 결과를 얻을 뿐입니다.
여행은 그저 삶이라는 방의 창을 여는 일입니다. 창을 열어도 방 안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새 공기로 숨 쉬는 내 호흡이 나도 모르게 달라집니다.
나이 들수록 여행에서 얻는 게 많아집니다. 아마 스무 살 때 보았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을 느끼고 배웁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 정신에 비해 육체가 점점 여행에 부적합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참 소름끼치게 인생은 공평한 것 같습니다.
(행복한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