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아들이었다"
궁예 영정
강원 철원 명성산에는 '비운의 왕' 궁예의 전설이 여기저기에
서려 있다. 부하였던 왕건에게 쫓기게 된 궁예가 이곳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크게 울었다고 해서, 산 이름이 '울음산', 즉
명성산(鳴聲山)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미륵불을 자처하며 사회 변혁을
꿈꿨던 궁예. 후삼국 시대 견훤, 왕건과 각축을 벌였던 궁예의 출신에 대해서는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예,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철원 명성산
궁예가 지었다는 보개산성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의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왕 헌안왕(재위 857-860) 또는
제48대 왕 경문왕(재위 861-875)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인 송은일 박사는 연구논문 '궁예의 출자(出子)에 대한 재론'에서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송 박사는 '삼국사기' 등
사료를 토대로 궁예의 출신과 가문을 추적했다.
그는 궁예가
태어나자마자 나라에 해를 끼칠 인물로 낙인찍혀 왕으로부터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주목했다.
'삼국사기'에는 "왕은 중사(中使)를 시켜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송 박사는, 왕의
명령을 받고 궁예를 죽이러 간 '중사'는 중사성(中使省)의 관리로, 중사성이란 관부가 존재한 시기는 경문왕 즉위 초기였다면서 "궁예를 죽이려
했던 왕은 경문왕이었고 그러므로 경문왕은 궁예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분석했다.
당시 신라의 왕족들이 재상 등 주요 관직을 독점해 왕권을 강화했던 점에 비춰볼 때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아들을 왕이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게 송 박사의 분석이다.
그는 "경문왕의 혼인 과정과 가족 사항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서도 궁예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혐의는
드러나지 않았다"면서 "결국 궁예는 헌안왕의 아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결론내렸다.
헌안왕은 조카인 제46대 문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헌안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계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중 계명의 지원
때문이었다.
송 박사는 "계명이 헌안왕의 왕위계승을 지원한 것은
다음 왕위를 자신에게 물려주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헌안왕은 즉위 후 계명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직계로 왕통을
이으려 했고 지방 진골 귀족 김인문 가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 궁예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논문은 13일 전남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발표된다
********************************************<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궁예가 도성으로 삼았던 궁터에 남아있는 석등(신라말
또는 고려초 작품)
※ 삼국사기 인물열전-궁예조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
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그 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이리하여 그는 한 쪽 눈이 멀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양육하였다.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니 이를 어찌 하랴?"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곧 세달사로 갔다. 지금의
흥교사가 바로 그 절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열전
궁예열전 중에서>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어났다. 국고가 바닥이 나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草賊)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영월)·울오(鬱烏:평창)·어진(御珍: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다.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저족(猪足:인제)·금성(金城)·철원(鐵原)을 점령한 뒤,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을 했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楊州)·견주(見州)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지금의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괴산)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궁예도성의 모형(철원군청)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했다. 이때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이해에 왕건에게 바닷길로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을 점령케 하여 서해상권을 장악하고 견훤(甄萱)을 견제했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이처럼 강성한 세력을 이루어가면서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고, 신라 조정에 반발하는 세력을 포섭하는 등 신라에 대한 강한 적의를 보이고 신라 사회를 파괴시켜갔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이념이 뚜렷하지 못했고
요역과 세금을 무겁게 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이때문에 민심을 잃게 되자, 918년(정개 5)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궁예는 옷을 바꿔입고 도망가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