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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a Rhee 1900∼1992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 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 신는 등 절약 생활을 몸소 여준 모범적인 영부인이었다.
이화장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도 연료 절약을 위해 겨울철이면 본채 대신 경비실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술고래였던 청와대 요리사 양학준 노인은 프란체스카를 "깍쟁이 사모님"이라고 불렀고 모든 면에서 절제하고 아끼는 그녀를 "소금 조금","간장 조금" 이라고 하면서 흉내를 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상당히 근검절약하는 여성이었다.(프란체스카, 1988:39-40)
이런 영부인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녀는 파란 눈의 거리감 있는 영부인이 아니라 알뜰하고 자상한 이웃 할머니와 같은 친근감으로 국민들에게 다시 다가올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평생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협립우산 한개를 30년 넘도록 사용했고, 옷은 물론 양말과 스타킹도 기워 신었다. 열 두폭 스란치마를 휘날리지 않았어도 생활에서 배어나던 그의 기품이 아직도 이 화장 거실에 배어있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가 손수 꿰멘 양말을 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들은 두 사람의 가정부를 고용하였고, 1층 응접실과 두 개의 사무실, 2층에 침실과 식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혼시절 윤치영(뒤에 내무장관·서울시장 ·공화당 의장)씨 내외가 방문해 프란체스 카에게 한복을 선사하였는데 그녀는 한눈에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李박사가 한복을 입은 모습을 몹시 흐뭇하게 생각하자 그녀는 그날 이후 생애 대부분을 한복 차림으로 지냈다.
그녀는 한국 음식을 배우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다. 李박사와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남 궁염씨의 부인 조엔 남궁씨에게 김치 담그 는 법, 콩나물 기르는 법, 찌개와 국 끓이 는 법 등 한국요리법을 배우면서 한국의 예 의범절과 명절 풍습도 익혔다. 얼마 안 가 프란체스카는 한국음식 솜씨로 방문객들에 게 환영을 받았으며 동포 유학생들에게 김 치를 담가 나눠주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새우젓 국물로 간을 맞추어 달 걀찌개를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프란체스카 는 달걀 프라이보다는 달걀찌개나 두부찌개 에 새우젓 국물을 넣고 끓이는 때가 많았다 .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남편의 생일날 프란체스카는 미역국, 잡채, 콩나물, 물김치 와 함께 쌀밥을 차려 남편을 감격시켰다. 李承晩 박사는 30여 년간 독립운동을 하면 서 건강을 돌보거나 제때 식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결혼 후에도 『내 짐은 내가 정리 할 테니 염려말라』고 할 정도로 독신생활 에 익숙해 있었다. 독신생활을 할 때 사과 한 개로 하루를 지내기도 했으며 심지어 생일날 굶은 적도 있다. 프란체스카는 나이 많은 남편의 건강을 염려해 식생활에 각별 히 신경을 썼으며 남편 입맛에 맞게 가급적 한식을 준비했다.
프란체스카는 1983년 「여성중앙」과의 인 터뷰에서 『몸이 힘든 것보다 외롭고 서러 운 시간들이 많았어요.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각하마저도 제가 제 목숨이 아까워 피난 가자고 말한 것으로 오해를 하더군요. 그땐 정말 서럽고 외로웠지요. 언제나 죽을 각 오가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 는 차를 탈 때면 대통령에게 날아오는 총탄을 막을 요량으로 오종종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까닭을 모르는 대통령은 그녀에게 『목숨이 그리도 아까우냐』는 핀잔을 주곤 했다.
전쟁 중에 물이 부족해 빨래도 물사정을 봐 가며 해야 했다. 홀로 내려온 정부요인들과 비서관, 경호원들은 옷을 사 입을 형편이 못 되어 군복을 얻어 입었고 빨래도 손수 했다. 남자들이 해놓은 때가 덜 빠진 빨래 를 보면서 프란체스카는 가슴아파했다. 특 히 팬티는 해지기 직전의 천조각에 불과했 다. 프란체스카는 노블 참사관이 갖다준 침대시트로 팬티를 여러 장 만들어서 직원들 숙소에 갖다 놓도록 했다.
1990년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프란체 스카 여사는 『역사의 잘잘못을 따질 능력은 없지만 6·25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들이 꿋꿋한 줏대와 배짱으로 전쟁을 치렀다는 점이다. 참상을 겪으면 서도 남의 것을 훔치는 국민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여성
의 정조관념도 대단해 서울의 어느 처녀는 유엔군 흑인병사가 껴안자 수치심을 못 이겨 한강에 투신자살까지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비서가 몇 명 있었지만 국제적으로 오는 편지나 신문을 분석하는 일은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여사가 직접 타이프를 쳤습니다 . 李대통령도 직접 타이프를 쳤어요. 외교 문서는 두 분이 처리했지요』 연세대 柳永益 교수는 프란체스카를 「최상 급의 비서이며 정치적 동반자」라고 표현했다.
결혼 직후부터 李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프란체스카 여사의 최대 관심사는 대 통령의 건강이었다.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자신이 장수한 원인을 『과식을 피했으며 여유가 있을 때라도 비 싼 고기류를 못 사오게 해서 동물성 지방이 많은 음식을 먹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모든 성인병이 자동적으로 예방되었고 아내 인 나도 덕을 보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프란체스카는 경무대 손님들에게 커피보다 는 건강에 좋은 국산차를 대접했다. 여름에 는 시원한 오미자차, 겨울에는 따끈한 모과 차와 유자차를 내놓았다. 율무를 볶아서 율 무차를 만들거나 결명자를 콩과 함께 볶아 서 차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머리를 많이 쓰는 남편을 위해 밀눈을 살짝 볶아서 밀 눈차를 만들어 대접했다.
모과차와 유자차는 특히 외국 귀빈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은 프란체스카에게 모과차 만드는 법과 불 고기 양념하는 법을 배워갔다. 경무대에서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 콩나물 잡채와 닭찜을 주로 했다. 죽순, 밤, 잣, 은행, 표고, 대추를 넣은 닭찜은 늘 외국 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1968년 1월21일 북한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은 오스트리아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사건 직후 가장 먼저 대사관에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란체스카였다. 흥분된 어조로 朴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없는지,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물었다. 10여 일 후 그녀는 1·21 사건에 관한 각종 기사를 스크랩해서 대사관을 찾아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해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며 이번 사건은 철저히 규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장을 개방했을 때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녀는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못 받게 했다.프란체스카는 이런저런 단체에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으나 대부분의 경우 거절하고 이화장에서 조용하게 지냈다. 정동교회 예배 참석과 매주 금요일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해 李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외출의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어서는 프란체스카 일행을 보고 오스트리아인이 다가와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이죠. 저도 오스트리아에서 왔습니다』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어쩌다 보니 오스트리아에 태어났을 뿐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李仁秀씨는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한국적으로 살다 가신 분』이라고 했다.
『머리를 뒤로 쪽을 찌고 늘 한복을 입고 지내셨어요. 양식은 거의 안 드시고 한국음식만 드셨지요. 나라 걱정, 국민들 생각으로 하루해를 보내셨어요.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게 보이면 이산가족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라고 당부하셨지요. 무슨 물건이든 어머니는 그것을 영구적으로 아니 영원히 사용하셨어요』프란체스카는 영구 귀국할 때 속옷 안쪽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3000달러를 넣어왔는데 우선 그 돈으로 틀니를 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느리 曺惠子씨가 왜 외국에 있는 동안 틀니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할 때 단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물었다.메디컬센터 치과과장 최상열 박사가 만들어 준 틀니를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프란체스카는 외국인이 방문할 때면 『한국에서 틀니를 하고 가라. 틀니는 한국이 최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귀빈들이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틀니를 하라고 당부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절약정신
프란체스카의 절약정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李仁秀씨가 양자로 하와이에 가면서 선물했던 국산 양산을 30년 가까이 사용하는 등 절약에 있어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이 함께 생활한 사람들의 평이다. 1946년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져온 냉장고는 무려 35년간 사용했다. 1976년에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하자 프란체스카는 전력난이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입장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금성사에서 다시 작은 선풍기를 보냈는데 아주 더울 때 겨우 한두 번 트는 것이 고작이었다.1917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입한 앨범에 옛날 사진을 떼고 손자들 사진을 붙이기도 했다.
40년간 아껴서 입은 검정예복을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1958년에 최초로 생산된 국산 모직으로 만든 옷을 34년 동안이나 입었으며 1904년에 산 타자기로 남편의 독립운동과 한국 외교를 돕고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프란체스카의 옷은 어느 것 하나 깁지 않은 것이 없으며 속옷과 스타킹까지 기워 신었다. 손자들의 체육복을 몇 번이나 기운데다 아랫단을 여러 번 내는 바람에 손자들이 창피하다며 학교 가기 싫어했을 정도이다.
프란체스카는 가난하던 시절 경무대에서 알뜰하게 살던 것보다 더 알뜰하게 여생을 보냈다. 이화장에서 콩나물을 기르고 두부도 만들어 먹었다. 점심에는 감자가 주식이었고 저녁에는 국수를 들거나 현미, 보리 콩 등을 섞은 잡곡밥을 지어먹었다.가뭄이 들었다는 TV
뉴스가 나오면 손자들 목욕도 시키지 못하게 했다.
며느리에게 세세한 것까지 가계부에 적게 한 후 15일마다 검사했다. 검사할 때마다 『全국민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근검 절약을 생활화해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曺惠子씨는 어머니가 늘 겨울에 추위에 떨었던 것이 가슴 아프다고 회고했다.『기름값을 아끼려고 겨울이면 비좁은 경비실로 옮겨서 생활하셨어요. 기름을 함부로 때는 것
은 달러를 태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죠. 너무 추울 때면 저에게 72도 작전을 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둘이서 껴안고 있으면 온도가 72도가 된다는 뜻이에요. 어머니와 가난해서 더 친해졌을 정도예요. 너무 추워서 1985년에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이화장 본관 아래 이층집을 지었어요. 말년에 좀 따뜻하게 지내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어머니는 정말 지독하게 절약하신 분이에요. 밥알 하나, 두부 한 모, 콩나물 하나 버리면 큰일이고 식사를 할 때 늘 접시가 깨끗했어요. 평생 돈 한번 마음놓고 써보지 못하고 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죠』
22년 동안 미장원에 한번도 가지 않고 머리를 길러 쪽을 졌다.
세제는 반드시 정량만 사용하고 빨래한 물을 모아서 걸레를 빨았으며, 세탁기는 남북통일 되면 사용하라고 해서 曺惠子씨는 1985년이 되어서야 겨우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어느 해인가 독도사랑회에 프란체스카는 10만원을 기탁했다. 曺씨는 남들에게는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어머니에게는 10억원만큼 큰돈이라고 말했다.프란체스카는 영구 귀국한 뒤 22년 동안 한 번도 오스트리아에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화도 하지 않았다. 李仁秀씨가 1972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 8년간 공부하는 동안 아들에게도 국제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曺惠子씨는 어머니가 자신에게도 전화를 못하게 하여 두세 번 정도 몰래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지척에 있는 가족을 못 만나는 이산가족들이 내는 세금으로 생활하면서 어떻게 전화를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어요. 남편도 8년 동안 딱 두 번 한국에 다녀갔어요. 生父(생부)가 돌아가셨을 때와 논문 작성을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모든 연락을 편지로 했는데 항공우편 대신 가격이 훨씬 싼 배를 이용했다. 추석 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 12월에 받아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생일카드도 생일 몇 달 전에 미리 발송했다. 미8군사령관을 지낸 매구르더 장군에게 생일 몇 달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 장군이 이미 사망한 일도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집에 선물이 들어오면 그냥 두었다가 선물 보낼 일이 있으면 그걸 다시 이용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해진 옷을 기웠다. 경무대 시절 그녀는 천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헌 양말을 넣어 통통하게 만든 구두 속주머니를 만들어 미국 대사와 미국 상공회의소 부인들에게 선물했다. 구두 모양이 변하지 않도록 구두에 끼워놓으라는 당부와 함께 선물을 하면
서 고아와 전쟁미망인들을 도와줄 물품을 요청했던 것이다. 재봉틀과 각종 악기를 지원받아 전쟁미망인과 고아원에 전달했다.
프란체스카는 전쟁 중에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고아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는데 나중에 고아 중에 한 명이 이화장을 찾아온 일도 있었다.선물을 싼 끈도 모았다가 엮어서 찻잔 받침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이런 알뜰한 유품들은 현재 이화장에 전시되어 있다.
아들 편애하는 한국 시어머니
曺惠子씨는 프란체스카를 완전한 한국 시어머니라고 말한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언제나 아들 앞으로 밀어주었으며 겨울이면 남편의 신발을 따뜻하게 해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마흔이 된 아들 仁秀를 미국으로 유학보내면서 속옷에 주머니를 달아 달러 몇 장을 다려서 넣어주었다. 1973년에 이화여대 金玉吉(김옥길) 총장이 가스레인지를 선물하자 『아들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말라』고 해 몇 년 동안 석유곤로를 사용했다.
근검절약하기로 소문난 프란체스카는 1974년 8월 朴正熙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을 TV로 지켜본 뒤 『내가 죽거든 꽃을 사용하지 말아라.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비싼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고 당부했다.프란체스카는 틈만 나면 며느리에게 유언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대개 그것은 근검절약과 관계된 것이었다. 曺惠子씨는 시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님은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된 것이 아니니 내핍생활을 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죠.』프란체스카는 말년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보냈다. 건강도 좋아 귀국할 때보다 살이 찌고 안경을 안 끼고 책을 읽을 정도였다. 매일 코리아 헤럴드를 비롯한 영자신문과 한국 TV, AFKN을 시청했다. 어지간한 한국말은 할 줄 알아 집안에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81회 생일 때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녀는 당시 근황을 이렇게 말했다.『고향에 있는 언니에게 가끔 카드가 와요. 언니를 생각할 때마다 더욱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절감해요.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은 게 바로 우리나라니까요. 늙어서도 축복받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끝까지 이곳에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가족제도야말로 세계 으뜸가는 자랑거리죠』
특히 손자들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고 피력했다. 특히 첫 손자인 丙久(병구)의 출생소식을 빈에서 듣고 『당장 남편 산소에 달려가 우리도 손자가 생겼습니다 하고 힘껏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책에 기록했다.
1990년 90회 생일 축하연이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렸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생일잔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국가유공자 가족들을 초청하는 자리로 대신한 축하연이었다.프란체스카는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장수 비결을 묻자 『무엇에든 감사하는 마음이 저의 생활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수의 비결이지요』라고 답했다.며느리 曺惠子씨는 시어머니를 이렇게 평했다.『하루에 두 시간씩 산책하고 小食(소식)한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감자를 쪄서 간식을 자주 드셨어요. 명랑하고 유머가 있고 자기 자랑을 절대 하지 않으셨어요.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게 웃으셨어요』
프란체스카는 살아 생전에 손자들이 장가가는 것을 본 뒤에 죽고 싶다고 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992년 3월19일 타계했다.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죽거든 틀니를 반드시 끼워주고, 남편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관뚜껑은 남편의 친필휘호인 南北統一(남북통일)로 덮어달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말을 늘 유언처럼 했다고 한다.
1992년 3월23일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결식이 엄수되고 소원대로 국립묘지 남편의 옆에 안장되었다. 영결식은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정동제일교회서 영결식을 가진 뒤 경찰차 한 대가 선도한 장례행렬은 승용차와 버스 10대뿐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 이화장을 찾는 이가 급격히 줄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연금과 李仁秀 박사의 월급 대부분은 이화장을 보존하고 수리하는 데 들어갔다.역대 대통령들도 이화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78년에 비가 많이 새서 지붕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는데 당시 朴正熙 대통령이 돈을 보내서 고쳤다. 崔圭夏 대통령과 全斗煥 대통령이 퇴임 후 이화장을 찾았을 뿐 퍼스트 레이디 중에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 있을 때도 미장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실핀으로 머리를 감았다가 드라이로 말리는 게 고작이었다. 옷도 산 적이 없다 고 한다. 천을 구입해 와서 비서인 김신영씨와 함께 블라우스를 만들어서 입었다. 경무대에서도 옷을 꿰매 입는 건 여전했는데 어느 날 대통령이 方在玉씨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했다.
『대통령께서 내복을 들고 저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라 그런다」하시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던 기억이 나요. 너무나도 알뜰하신 영부인이었죠. 양말도 기워 신고 가루비누도 숟가락으로 재서 썼어요. 무 섭게 절약하셨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영구 귀국하실 때는 다 떨어진 행주까 지 갖고 오셨더군요』
14년간 한집에서 생활하면서 대통령의 수발을 들었던 方在玉씨는 두 사람이 부부싸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통령이 급한 성격이어서 화를 내면 할머니(方씨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할머니라고 지칭했다)가 일단 피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되지 않아요. 할머 니가 李대통령의 음식을 일일이 만들어 드리고, 또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 을 일일이 확인해 봤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지시를 하면 우리들이 알아서 척척 했지요. 우리들에게 많이 맡겼어요. 소탈한 성격이어서 아랫사람들 하는 일에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았 어요. 다만 두 분 내의와 양말은 항상 할머니께서 직접 손으로 세탁하셨어요. 언제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사람 차별하지 않고 일하는 우리들에게도 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하셨지요. 한국말을 배워서 우리들에게 간단한 명령어와 단어를 사용해 말씀하셨어요. 두 분은 아랫사람들과 격의없이 지내셨어요. 그야말로 인정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셨어요. 제가 허리가 아파 고생할 때 할머니께서 허리에 안티프라민을 바르고 손으로 맛사지해 주셨던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할머니는 명절 때 선물 이 들어오면 모아두었다가 일하는 사람들 생일이 되면 나눠주셨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李起鵬씨의 아내 박마리아와 유일하게 친분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것도 잘못된 점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열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윤치영 내무장관의 부 인들과도 친밀하게 지냈으며 정운수 의원 부인 편정희 여사, YWCA 총무였던 박에스더, 이화여대의 金活蘭 박사, 김신실·김영의 교수, 중앙대 설립자 임영신씨 등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경무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김활란 박사와 임영신씨는 李承晩 대통령 영결식 때 흰족도리를 썼을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프란체스카 (Francesca Rhee 1900∼1992)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부인. 오스트리아 빈 출생. 한국 이름은 이부란(李富蘭). 오스트리아에서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스코틀랜드에 유학해 국제통역사·속기사 자격을 획득하였으며, 1933년 독립운동을 위해 방문한 이승만을 만나 다음해 결혼하였다. 그 뒤 망명생활을 하는 남편을 12년 동안 뒷바라지하였으며, 45년 광복이 되자 한국에 왔다. 48년 이후 대통령 부인으로 6·25와 4·19 등 한국의 격동기를 체험하였고, 남편의 하와이 망명길에 동행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병상을 돌보았다. 70년 귀국하여 이화장(梨花莊)에서 여생을 보냈다.
90대까지 장수한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의 며느리가 공개하는 ‘건강 상차림 & 생활습관’ |
[2006-10-27 11:04:01 / 조회수: 2848 / 꼬리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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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요 영부인의 그 많은 미담을 들을 때마다 관료들이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년에는 두분 다 불행했지요
근검 절약....다시 한 번 내 생활을 뒤돌아봅니다.
처음 알았는데 두분 나이 차이가 25살이었데요. 그냥 보기엔 잘 모르겠는데..저 정도 나이 차이면 돈 아니면 진짜 사랑하는거겠죠? 자신의 부모, 형제, 나라, 문화,부유함 모든 것을 접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한평생 헌신하고 동반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어떤건지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나의 것은 버리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드리면서 산다는 것이 너무 숭고한거 같아요.
그래요 두분 모습이 정말 정겨워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