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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2코린 11,18.21ㄷ-30 마태 6,19-23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오 6,19-23)
사랑, 천국의 화폐 /김찬선신부님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진주 목걸이를 하늘에 보관하라는 뜻일까요?
진주 목걸이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금고에 보관해야겠지요.
그런데 이 진주 목걸이를 금고가 아니라
하늘에 보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러시아에 가면 러시아 화폐로 돈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 돈 5만 원 권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아니 그 이상의 화폐가 있어도 러시아에서는 아무 쓸 모가 없습니다.
하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늘의 화폐를 써야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늘의 화폐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화폐의 한 면에는 사랑해야 할 하느님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른 한 면에는 역시 사랑해야 할 이웃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5만 원 권이 이 세상에 유용하고 하늘에서는 아무 쓸 모가 없지만
이 화폐는 이 세상에서도 쓸 모가 있고 하늘에서도 쓸 모가 있습니다.
5만 원으로 향수를 사면 자기 몸을 향기롭게 하지만
5만 원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세상을 향기롭게 하고
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바꿀 것입니다.
존재의 향기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여기서 은은히 풍겨오는 존재의 향기입니다.
“하느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좋으신 하느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이,
또 알게 모르게 이웃에게 베푸는 모든 자선 행위가
하늘에 쌓는 보물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보물을 땅에 쌓는 삶, 바로 소유의 삶을 상징합니다.
욕망 따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
땅에 보물을 쌓으면서 소유가 존재인양 착각하며
소유에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갑니다.
소유에 노예 되어
참 나를 살지 못하는 불행한 부자들 얼마나 많은지요!
마치 외양은 크고 화려하나
향기 없어 공허한 서양 란 같은 삶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소유에 소유되어 사는 사람들,
결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하늘이신 하느님 안에 쌓아 놓는
믿음, 희망, 사랑의 보물들 아무도 손대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정 지혜로워 살줄 아는 자들,
끊임없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들입니다.
하늘 은행에 믿음, 희망, 사랑을 저축하는 자들입니다.
하느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의 보물이,
이웃 향해 베푸는 자선 행위의 보물이 축적되면서
비로소 내적 평화에 안정이요 참 기쁨에 행복입니다.
자유로운 삶입니다.
말 그대로 소유의 삶이 아니라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마치 작고 소박하나 향기 은은한 동양란 같은 삶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유에 중독되어
참 나의 존재를 잊고 막 살아가는지요!
존재의 향기요 소유의 악취라 할까요.
소유냐 존재냐?
양자택일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사람 있고 돈이 있듯이 존재 있고 소유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이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들의 마음은
그대로 하늘마음이요
눈빛 또한 하늘처럼 맑고 푸를 것입니다.
이런 맑고 밝은 마음이요 눈일 때
몸 또한 맑고 밝아져 영육의 건강도 저절로 뒤따를 것입니다.
1독서의 그리스도의 일꾼인 바오로의 삶,
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자기 초월의 내적 힘이
온갖 위험과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 했음을 깨닫습니다.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약함이 바로 자랑이고 힘이 될 수 있음은
하늘에 쌓아 놓은 믿음, 희망, 사랑의 보물 덕분입니다.
매일의 성무일도 시간은 물론 이 거룩한 미사시간,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이자
‘참 나’로 충만히 존재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 /양승국신부님
어린 시절, 형과 함께 강가로 놀러갔을 때의 일입니다.
좀 더 좋은 낚시 포인트를 찾아 물을 건너다가 그만
급류에 휩쓸려버리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손에는 이것저것 들고 있었는데, 무의식중에 그것들이
떠내려가지 않게 꼭 쥐고 있으니, 몸은 더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꼴까닥 꼴까닥 물을 몇 번 먹고 나니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하며
이게 죽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겨우 겨우 물속에서 자라난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게 되었는데,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에 든 것 다 버리고 가까스로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정신이 다 아찔해집니다.
하느님께서 평생 3번 정도는 기회를 주신다는 데,
그때 한번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한 번은 모험심 강한 형제들과 어설픈 뗏목 하나를 만들어 타고
바다로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마침 썰물 때라 바다를 향해 잘도 나갔습니다.
먼 바다로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와도 너무 멀리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빨리 돌아가자며
노 비슷한 것을 저었지만, 워낙 썰물의 흐름이 심해 전혀 진척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바다 위에 떠서 죽을 고생을 하다 겨우
지나가던 어선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모험 같은 것은 절대로 안해야겠다,
남들이 안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 을 했습니다.
이런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소개되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고난의 여행길’을 눈여겨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세계여행을 몇 차례나 하게 됩니다. 당시 교통수단이라는 것이 변변치 않았습니다.
주로 도보여행이었습니다. 재수가 좋으면 마차를 얻어 탔을 것입니다.
너무 먼 거리는 배로 여행을 했는데, 안정성이
별로 보장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목선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오로 사도의 회상처럼 바다를 건너다가
파선되는 경험을 3번이나 했습니다. 겨우 나무 조각 하나를 붙잡고
하루 온종일 바다 위에 떠있기도 했습니다. 구조를 기다리는
그 순간의 두려움과 고통은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됩니다. 투옥된다는 것,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
자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제약을 받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갇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도 엄청 맞았습니다.
유다인들에게 39대씩 다섯 차례나 맞았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사용한 매가 회초리, 눈금자는 아니었겠지요.
한 대 맞으면 신음이 자동으로 새어나올 정도의 모진 매였습니다.
그 매 몇 대 맞으면 보통 사람들 평생 후유증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런 매를 바오로 사도는 195대나 맞은 것입니다.
몇 대 맞았냐 하는 것보다 누군가로부터 이유도 없이
폭력을 당한다는 것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바오로 사도의 생애,
외적, 인간적인 눈으로 보니 참으로 혹독하고도 험난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스스로 나열하고 있는 ‘고난의 여정’을 하나하나
챙겨 나가보니, 정말 눈물이 다 날 정도로 힘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그 모든 고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고생이었으므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오히려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너무나 끔찍해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들이었지만
스승 예수님으로 인한 사건들이었기에
바오로 사도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여정도 돌아보면 결코 순탄치만은 않겠지요.
다들 소설로 쓰면 몇 권은 될 스토리들을 갖고 계시겠지요.
때로 도무지 수용하기 힘든 사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사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연들도 겪으셨겠지요.
그래서 때로 하느님을 원망도 하셨겠지요.
그리고 지금도 힘겨워하고 계시겠지요.
이런 우리 모두에게 바오로 사도의 태도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는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통을 겪을수록 더 강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통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
‘십자가에 대한 가치부여 작업’이
바오로 사도의 생애 안에 이미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 그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연결시키려는 노력,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가 다가올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참 사도로 거듭나는 노력입니다.
연중제11주간금요일(11,06,17.금)
2코린 11,18.21ㄷ-30 마태 6,19-23
돈 /송영진 신부님
이번 주 가톨릭 신문 1면에, 국내 일부 성물 제조업자들이
인체에 유해한 납으로 성물을 제작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원래는 주석으로 제작해야 하는 십자고상 등을
납으로 제작해서 유통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납은 인체에 아주 해로운 독성 물질인데,
가격이 주석의 십분의 일도 안 되기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납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전에 제가 보좌신부로 있었던 어떤 성당의 신축 공사 때
음향설비를 맡았던 회사에서 계약서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중고 부품으로 조립된 앰프를 설치한 사실이 드러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단순히 사람들을 속이고 부당 이득을 취한 죄 외에도
하느님을 모독한 신성 모독죄에도 해당되는 일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돈만 밝히지 말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19-20)."
예수님께서는 도둑이 훔쳐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을 속이고 부당이득을 챙기는 자들 자신이 도둑이니
도둑이 들어올까 봐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남의 것을 훔쳐서 자기 창고에 쌓아두는 자들이 많습니다.
뇌물, 공금 횡령, 탈세, 기타 등등 ...
온갖 부정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돈만 벌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사법기관에 적발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돈, 돈, 돈 ...
사람들을 돌게 만들기 때문에 돈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라가 죽었을 때, 떠돌이였던 아브라함은 사라를 안장할 묘지가 없어서
현지 주민들에게서 땅을 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현지 주민들은 아브라함에게
아무 무덤이나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마음대로 고인을 안장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기가 생각했던 곳의 밭을 양도해 달라고 하면서
값은 부르는 대로 다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밭의 주인이 그 밭과 밭에 딸린 동굴을 그냥 다 주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제발 밭 값을 받아 달라고 사정하듯이 말합니다.
땅 주인은 시세로 은 사백 세켈이지만 공짜로 그냥 주겠다고 다시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 주인이 말한 대로 은 사백 세켈을 지불하고 밭과 동굴을 사서
사라를 안장합니다(창세 23장).
지금 세상의 기준으로는 참으로 이상한 흥정이고 거래입니다.
파는 사람은 공짜로 주겠다고 하고,
사는 사람은 제발 정당한 가격을 받아달라고 사정합니다.
요즘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반대로 진행되는 상황이 대부분입니다.
사는 쪽은 어떻게든 가격을 깎으려고 하고,
파는 쪽은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또 그것을 다들 정상적인 일로 생각할 것이고,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비정상적인 일로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마저 비정상적인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가 너무나도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의 이야기는
돈에 눈이 멀어서 하느님과 교회를 속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경고가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사도 5,3-4)."
그들 부부는 전 재산을 봉헌한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일부를 빼돌리고 나머지만 봉헌했습니다.
그냥 정직하게 일부만 봉헌한다고 해도 되었는데, 왜 거짓말을 했을까?
전 재산을 봉헌했다고 하면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은데,
가지고 있는 재산을 봉헌하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일부를 빼돌린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부부를 꾸짖기만 했습니다.
그들이 회개했다면 새로운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자마자 그 부부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과 하느님의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만 심장마비에 걸린 것 같습니다.
회개할 틈도 안 주고 천벌이 내린 것이 아니라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에 스스로 심장마비에 걸린 것입니다.
돈 때문에 한 번 돌아버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올바른 모습으로 다시 돌려 세우기가 아주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늘의 보물 /김훈일 신부님
성경에서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땅에 보물을 쌓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헛된 삶을 살 것이냐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천국에 쌓는 보물이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고,
땅에 보물을 쌓는 일은 결국
자기가 대접을 받고 추앙받으려는 욕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당 활동에만 집착되어 있고
미사 참례에만 국한된 것을 봅니다. 말하자면
하루 중 신앙적인 행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참여하는가로
하늘 나라에 무언가 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삶이 신앙생활과 관계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식과 금육제를 지키거나
많은 돈을 기부해야만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물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하루하루의 삶에서 용서하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 희생하는 마음,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쌓는 보물 /이자희수녀님
하늘나라에 쌓는 보물은 사랑 실천입니다.
남을 도와줄 때는 소리 없이 티 내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도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나약한 사람인지라 실패를 거듭합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후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왜냐면 티 내기를 좋아하고
후원받는 아이가 받았는지를 확인하고
때로는 큰소리까지 오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대개 1년 반 정도로 끝이 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때나
후원을 중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의 변덕에 저도 지쳤습니다.
언젠가 성숙한 사람이 되면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로 청했습니다. 그 후원자가
소리 없이 가난한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는 불교신자인데도 가톨릭 수도자인
제가 추천해 주는 곳을 좋아합니다. 한번은 고아들을 돌보아주는
스님을 소개해 드렸는데, 무엇인가 못마땅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그 스님이 전 재산을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고 사는 분이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그는 믿지 않았고 급기야는 후원해 준다는 약속도 어겼습니다.
결국 저는 이제까지 도와준 것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분은 도움을 주고도
칭찬을 못 받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이 하늘에 보화를 잘 쌓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 기도가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은총과 자비 베풀어주소서.
보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한창현 신부님
요즘 대학생들의 기말고사 기간입니다. 집에서든 도서관에서든
모두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합니다. 어떤 학생들은 시험만 없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경험한 분들은 ‘그래도 학생 때가 제일 좋다.’ 라는 말을 합니다.
시험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자신의 실력을 향상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학교가 있습니다. 모든 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합니다.
때문에 공부시간이나 체육시간, 심지어 휴식시간도 함께합니다.
아침 기상 벨이 울리면 다같이 일어나고 취침을 알리는 소리에 모두
불을 끄고 잠을 청합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더욱 잘 알아갑니다. 눈빛만 봐도 고민이 있는지 알아냅니다.
시험 기간 동안 평소 보지 못한 간식이 저녁마다 배달됩니다.
작은 간식 하나로 시험 기간의 긴장을 잠시나마 풀어봅니다.
시험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학년대표가 시험문제를 받아 와 칠판에 적습니다.
시험지에 답을 쓰는 데 커닝을 하는 사람도 없고, 커닝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감독도 없고요 …. 신학교 얘기였습니다.
복음을 보면서 신학교 생각이 났습니다.
일등을 하려고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되
혼자 잘하려 하지 않는 곳입니다. 저는 가끔 일반 학교에서 커닝을 하거나
혼자만 열심히 하려는 것을 볼 때면 괜히 숨이 막힙니다.
신학교라는 공간 ! 여기서는 최고이든 꼴찌이든 졸업을 하고
사제품을 받으면 신부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기만 한다고 해서 졸업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고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우리의 마음도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때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하느님의 말씀대로 따라나서기를 다짐해 봅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마음과 시선은
늘 하늘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
나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김기현신부님
장영희 교수님의 ‘위대한 순간은 온다.’ 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야학에서 가르치던 용호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성적이 안 되어서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속초로 내려가 자동차 정비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그 학생이 내려가기 전에 교수님은 책 한 권을 주며,
그 앞 장에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 주는 사람이 되거라!’ 라고
써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용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에이, 선생님. 제가 어떻게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줘요. 저는 신부님이 돼서
위대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했어요. 그랬는데...”
자동차 정비공이 어떻게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주겠냐는 말인데,
그 말을 들으며 교수님은 예전에 유학 중에 알게 된 토니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나이가 예순 정도로 기숙사 경비였는데, 전직이 콜택시 기사였다고 합니다.
언제가 그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당번이었던 그는 시내 어떤 주소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어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마치 40년대 영화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복장에 모자까지 단정히 쓴 아주 나이 든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방에는 가구가 다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차에 타자 할머니는 주소를 주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돌아서 가는 건데요, 할머니.”
“괜찮아요. 난 시간이 아주 많아.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식구도 없고, 의사 선생님 말씀이 이젠 갈때가 얼마 안 남았대.”
어둠 속에서 할머니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토니는 미터기를 껐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토니와 할머니는 함께 조용한 크리스마스 새벽 거리를
드라이브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엘리베이터 걸로 일하던 빌딩,
처음으로 댄스 파티를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 등을 천천히 지났다.
때로는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냥 오랬동안 어둠 속을 쳐다보기도 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이제 피곤해. 그만 갑시다.” 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토니는 몸을 굽혀 할머니를 안아 작별인사를 했다.
“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아주 행복했다우.”
나중에 토니는 이런 말을 했다. “난 그날 밤 한참 동안 할머니를 생각하며 돌아다녔지.
그 때 내가 그냥 경적만 몇번 울리고 떠났다면?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당번이
걸려 심술 난 다른 기사가 가서 할머니에게 불친절했더라면... 돌이켜 보건대
나는 내 일생에 그렇게 위대한 일은 해본 적이 없어.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아마 그렇게 중요한 일은 하지 못했을지 몰라.” 】
누구에게나 그 위대한 순간, 곧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과 행복이 되어줄 수 있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우리의 보물이 돈이나 명예나 인기나 좋은 학점이나 좋은 직장에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그 기회가 왔을 때, 바쁘다고 지나치고,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지나치고, 도움도 안 되고 실적도 안 되는 일이라며 외면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들 수 있을 겁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할 때에, 어떤 사람은 ‘내가 시간을 내서 봉사한다고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스펙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성당 일을 시간 낭비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의 보물이 하늘 나라의 가치들, 예를 들면 하느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일에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아깝지 않을 겁니다.
또 성당에서 봉사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대한 순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곧 나의 가르침으로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고, 나의 성가로 신자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고, 나의 기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나의 보물은 무엇인지,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소유 보다 존재 /양승국신부님
라이크(like)와 러브(love) 사이의 차이점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게(like) 되면 먼저 드는 느낌은 소유요, 집착이랍니다.
들길을 가다가 좋아하는 꽃을 만나게 되면 소유하고픈 마음에 꺾는답니다.
결국 꽃 입장에서는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나
꽃을 사랑하게 되면 그 꽃 존재 자체로 행복합니다.
그 꽃을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합니다.
가장 바라는 바는 그 꽃이 활짝 만개하는 것입니다.
다소 어색한 논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관계에 적용해보면 ‘말’이 꽤 됩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소유하고, 집착하기보다는
그가 더 높이 비상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고,
그의 삶이 더욱 찬란히 빛을 발하도록 자유를 줘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사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하겠지요.
자연에게도 자연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 숨 쉬도록 자유를 주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재물이나 사물도 자연스런 흐름이 필요합니다.
돈이 왜 돈입니까? 돌고 돈다고 돈입니다.
누군가가 막대한 돈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면,
큰 지하 비밀금고에 엄청난 돈을 보관하고 있다면
말만 돈이지 참된 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돈입니다.
보다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정말 요긴한 곳에 사용되기 위해 돌고 또 돌아야
진정한 화폐로서의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난리법석들입니다.
인간은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수단으로
자꾸만 전락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만사를 지배하고 있는
소유 양식과는 대비되는
존재 양식을 향해 나아가야 할 시점에 서있습니다.
‘소유’보다 ‘존재’에 더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속화되어버린 이 땅에서,
모든 것이 경제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없이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먼저 세상에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소유보다는 존재가 더 중요하고,
더 우선적이며, 훨씬 우위에 서있음을
우리들의 나눔을 통해서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소유보다 존재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 잔뜩 움켜쥐고 있는 이 세상의 재물들,
우리가 보기에 더없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다
부질없는 것이란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보물을 쌓는 일보다는 천상에 보물을 쌓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나눔과 섬김, 이웃봉사와 사랑의 실천의
수치를 기록한 우리 각자 영혼의 통장에
적힌 잔고가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자주 점검하며 살아갈 일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력 /안승태 신부님
인간이 생각할 수 있음은 눈을 통하여 무엇인가
외부의 세계를 접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인간의 나약함을
통해 생겨난 아름답지 못한 어둠의 모습도 함께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너무 밝은 하느님과
그분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곳을 향하기보다
인간적이라고 생각되는 어둠과 죄와 연관된 곳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익숙해지면
밝은 빛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듯이 우리의 영혼도
자주 바라보고 머무르게 되는 곳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우리는 영혼과 육체 안에서 분열을 체험합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로마 7,22-23)라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는 내적이고 영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시력은 우리가 청해야 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부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빛이신 하느님 안에서만 참행복과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눈을 넘어서서 영적인 눈이 갈망하는 주님과
주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움에 우리의 마음을 둘 수 있어야겠습니다.
재물에 마음을 두는 자 : 영적 어두움 상태 /박상대 신부님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 재물과 눈의 상징어를 어록에서 비교적 충실히 옮겨 적습니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가르치시는데,
땅위에 쌓아둔 재물은 좀과 녹과 도둑의 대상이 되지만 하늘에 쌓아둔 재물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19-20절) 그러나 대부분의 부자들은
"나는 내 재산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재물이 있는 곳에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있다는 것입니다.(21절) 재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곧
재물에 눈이 어두운 것과 같습니다.
눈이 몸의 등불이듯이 마음은 영혼의 등불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면 마음까지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영혼을 밝혀야 할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23절)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부자다" 할 때는 부의 척도를 세 가지로
보고 있는데, 1) 값지고 정교한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 2) 곡간에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있는 것, 3) 집안에 금은 보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세 가지를
하나 하나 들어,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늘에 두라고 하십니다.
즉, 첫째로 값지고 정교한 좋은 옷은 좀 먹게 되고 변질되어 못쓰게 되는
그런 것들을 소유하는 것은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녹이 쓴다는 말은 그들의 말에 "먹어버린다"라는 것을 의미했고
창고에 쌓아 둔 그러한 부도 녹슬거나, 벌레나 쥐가들어 먹어버리기에
영구히 소유할 수 없음을 지적하시면서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세째로 도둑이 많고 들어와 훔쳐간다는 말은 그들의 집이나 담은 대개가
진흙으로 만들었기에 도둑이 그 담의 흙만을 파내면 얼마든지 들어가서
집안에 숨겨둔 보물을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적의 손에 좌우되는
그런 보물을 지키기에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그렇게
귀하다는 이 모든 것이, 그 무엇도 자신이 끝내 지킬수는 없으며, 그것을
지키고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모으고 하다보면,
마음이 재물과 보화로 사로잡혀 어두어 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노바즈 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모든 재물 보화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조리 흩어 버렸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습니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두었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습니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빛을 영혼에 비추며 사는 방법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왜
재물을 주시는지를 생각해 보면 될 일입니다. 재물은 "쌓아두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재물은 "쓰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만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출애 16,4)고
분부하였지만, 모세의 당부를 어기고 내일 양식을 걱정한
"그들이 남겨 둔 것에서는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났다"(출애 16,20)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재물은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재물은 개인의 정당한 권리 속에 공동선을 위해 사용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요즘은 개인의 소유만 지나치게 강조되고 공동선을 위한
사용은 약화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창고나 금고나 은행에
모아둔 재물에도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나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 /전삼용신부님
대학 다닐 때 관상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보며 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얼굴에 그 사람의 성격이나 과거와 미래까지도 쓰여 있었고 재미로
관상을 보아주면 사람들이 놀라워하였습니다. 평균 70-80%는 맞았습니다.
마흔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이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짓는 표정들이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새겨지게 됩니다.
너무 많이 찡그리거나 웃으면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 일단 한 번 새겨진 모습은 거의 바뀌지가 않습니다.
군대에 가서는 선임들이 자신들의 관상을 보아달라고 난리였습니다.
급기야는 여자 친구의 사진까지 들고 와서 자신과 잘 되겠느냐고 물어보았고
그게 내 알바가 아니기 때문에 다 잘 된다고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좋아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막 내어놓았습니다.
‘관상보고 돈 버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관상에 흥미가 없어진 이유는, 관상에선 복이란 것이,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자손이 번성하는 등의 매우 현세적인 것이었고 그런 것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행복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눈은 외부를 볼 수 있는 동시에 외부에서 눈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과 같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대로 눈이 등불이라면
마음이 맑으면 온 몸도 환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떤 면에서는
관상적인 면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많은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약을 한 사람들의 눈이 맑을 수 없고, 가끔 CCTV에 잡힌 도둑이나 강도의 모습을 보면
무서운 마귀의 모습이 저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겉모습을 치장합니다. 지나치게 겉모습을 치장한다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을 더 감추고 싶어 하는 심리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허영심에 외모를 치장하기도 하지만,
물 위에 나타난 빙산을 포장하거나 깨어버린다고 해서 물 밑에 있는 거대한
얼음덩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속에 있는 것을
변화시켜야 겉모습까지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내 속이 원숭이인데 아무리 사람 흉내를 내며 살아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속을 변화시켜야 하고 본질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예수님처럼 느끼며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속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은
세상 것이 아닌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보물을 바라는 사람은
걱정으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어두워지지만
하늘나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평화로운 얼굴로 다른 사람까지 평화롭게 만듭니다.
얼굴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옳은 일이고
예수님, 성모님의 외모도 아름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사람들이 성형하고 꾸미는 아름다움이 아닌
하느님나라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품고 사시기에 저절로
우러나는 아름다움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쁜 연예인들끼리 결혼해도 이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쁜 사람끼리는
하느님나라의 사랑으로 서로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늘 여행 /김찬선신부님
어제는 한우리 카페의 400번째 회원이신
이 종원 형제님이 지으신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분은 여행 작가이신데 당신이 지금까지 가 본 곳에 대한 소개와
여행하면서 느낀 소회들을 이 책들에 엮어 놓으셨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복음이 자연스럽게 여행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있다는 말씀.
우리는 가끔 근심 걱정을 털어내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원인은 그대로 놔 둔 채
근심 걱정만 털어내려고 합니다.
근심 걱정의 원인인 재물은 계속 쌓으면서
근심 걱정은 털어내려는 것이지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은
한자어로 얘기하면 慾心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욕심이 있는 곳에 애착이 있고
애착이 있으면 재물에 매이게 되고 그것을
떠나 어디를 갈 수 없게 됩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어디를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요.
가는 것이란 어디를 가는 것이요 떠나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그저 산다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고,
삶을 하나의 “가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는 존재들입니까?
하늘 여행을 하는 존재들입니까?
하늘 여행을 하자면
이 세상에 재물을 쌓지 말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굳이 이 세상에서 쌓는다면 善業, 德을 쌓으라 하십니다
신앙의 안경 /김선오 신부님
수학여행를 가서 많이 하는 장난이 있습니다. 안경을 쓴 친구들의 안경에
붉은색 잉크를 칠해 놓고 그 친구를 깨우면서 ‘불이야’라고 외치면 잠에서
깬 친구는 순간적으로 붉은 세상을 보고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서 같은 사람과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밝고, 맑고, 희망적인 것, 투명한 것을 즐겨 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온몸이 밝아져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늘 어둡고 탁하고 현실적인 것, 속임수가 가득한 것만 바라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의 몸이 점점 더 어두워져갑니다. 그렇다면
‘세상’이라는 안경을 쓴 사람과 ‘하늘’이라는 안경을 쓴 사람의 태도는
어떨까요? 역시 매우 다릅니다. 우리가 ‘하늘’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볼 때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방향이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안경을 쓰고서
세상과 하늘을 바라볼 때에는 ‘허무함과 무의미함’을 느끼기 쉽습니다.
우리는 매일 나의 안경에 ‘하늘’이라는 단어를 새겨 넣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반성이며 성찰입니다. 그것만이 나를 맑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박갑조 신부님
‘마음이 환하다’ 혹은 ‘밝다’라는 것은 마음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상(想)에 하늘의 선물인 보물이 빛을 발산하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 선물은 무엇인가? 하면 하늘이 땅, 즉
마음에 내려앉음이요 땅이 하늘에 들어 올리려는,
곧 쌓는 행위가 바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선물은 하늘을 구성하는 속성들로서 하느님의 사랑이요 자비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하느님의 하나의 속성은 모든 속성과 연결된다’ 라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생애 가운데 어느 한 켠의 어두운(마태 6, 23)곳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산하는 빛을 발견하는 행위가,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마태 6,20)봉헌이며 기도인 것 입니다. 이러한 능동적 행위가 가능한 것은
먼저 하늘에서 주어진 선물 때문에 가능한 것 입니다. 이 선물을 발견하면 할수록
그의 눈은 이전 보다 더 건강하게 되고(마태 6,23)나아가 혜안(慧眼)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보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지혜의 능력으로서
그의 몸과 가족과 이웃을 밝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 6,20).
이 지혜로써 땅에 쌓는 것은 무슨 의미고 (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는
의욕이 무슨 까닭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 6,20), 하여
이 보물은 더욱 더 풍요로워져 마침내 땅을 이루는 즉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인격 형성의 요소들의 실체를 알아 좀과 녹은 바로 나의 습성을 악용하고 남용하여
부추기는 도둑의 행위임을 아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또한
하늘에서 주어진 보물임을 아는 깨달음 자체가 되고 환희와 기쁨인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기쁨이 그 영혼의 상태에 따라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의
섭리를 더 밝게 비추는 등불(마태 6,22)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등불로서 좀이 쓸어있는 곳을 밝혀내고 씻어 내어 녹을 닦아내는
의지적 사랑의 실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성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마태6,20).
그러나 만약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잘 보여 보이는 자체가 진리요 근본이며 본질이라면,
그의 눈의 상태는 온전한 것이고 맑으며 환한 것입니다(마태 6,22). 그러나
만약 또다시 허약함에 빠지고 실수의 연속이라면 지금 아는바에 집착되지 않음이
주어진 보물에 초점을 맞추려는 수행인 것입니다. 해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밝고 맑게 살고자 하는 원의가 곧 등잔이 입니다.
이 등에 끊임없이 불을 붙여 주시는 분께 다가 갈려는, 청하려는 성실함이
등불이 꺼지지 않고 전 존재의 구석 구석을 밝혀 하느님의 보물이 아닌 다른 것을
거두어 내고 정갈하게 되어 자신의 세포 하나 하나에 보물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성심성월에 걸맞은 예수님의 마음화(化)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땅을 딛고 살며 땅의 생태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이라는 세상의 원래 창조의미를 알게 된다면,
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신 그 분의 의도에 따라
땅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자신의 땅을 갈무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화의 방식이 바로 나의 상태인 마음을 밝혀 주는 선물이며,
또한 이것이 선물임을 깨닫는 인식이
보물임(마태 6,20.21)을 깨닫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이 복된 눈이 머무는 ‘하늘’ 인 것입니다(마태 6,20).
이 하늘은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초발심인데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하늘의 선물로서 시작한다면 그곳에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훔쳐갈 수도 없는 곳입니다(마태 6,20). 하여 하늘은 바로
나의 어두운 마음자리에 이미 선물로 와 계신 것입니다.
欲을 許하지 말지니 /김찬선신부님
작년 마라톤 후유증 때문인지 빛이 눈을 힘들게 해
어떤 때는 방안에서도 색안경을 끼면 조금 눈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습관이 안 되어서인지 모르지만
색안경이 그렇게 마음을 어둡게 하고 우울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안경 하나가 이렇게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니
아예 눈이 멀면 전 존재가 어두워지고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말에 돈에 눈이 먼다고 얘기가 있고
욕심에, 사랑에 눈이 먼다고도 합니다.
다 그 欲의 작용인데
欲하는 것이 무엇이든
欲하는 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일단 그것을 欲하게 되면
그것이 나의 전부를 차지하고
다른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欲하는 거기에 마음이 전부 가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慾心이라 할 수 있지요.
돈에 대한 欲이 생기고
그래서 돈에 慾心을 내면
돈이 하느님과 하늘나라도 가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얘기할 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라고 얘기하는데
사실 작은 손바닥으로도 충분히 나의 눈을 가리고
그래서 작은 손바닥으로 삼라만상을 볼 수 없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아예 欲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欲을 許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주어진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한다면 /기정만신부님
1999년에 신학생인 내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견문을 넓힐 기회가 주워졌습니다.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갈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첫 1년을 보내고, 저는
역량 부족으로 2과목 시험을 방학 후에 치러야 했습니다. 유럽은 대개 10월에
학기가 시작되어 6월에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7월부터 9월까지 방학입니다.
9월 말부터 저는 2과목 시험 준비를 위하여 로마 근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라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교황님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옆으로는 호수가 있고 저 멀리로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1주일. 아침이 되어 전날
무엇을 공부했나 되돌아보면 기억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내용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므로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순간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시절에, 이 아름다운 곳에서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하고 있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갈팡질팡하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가
성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20여 분쯤 지났을까, 제 마음에 평화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이렇게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분께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최선을 다하는 이 모습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저는 방으로 돌아와 먼저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가 하는 이 일이 보잘것없는 공부이지만 당신께 드리니 받아주세요.’
그 이후 걱정하며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점수가 아주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나 점수에 얽매이지 않고 기쁘게 그리고 당당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주어진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한다면 주님께선 그 일을 하는 사람 마음에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걱정과 근심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우리는 해나갑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와 순간순간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물로
여긴다면 그때부터 우리 마음은 주님의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보물 /류해욱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말씀일까요?
우선 저 자신에게 보물이 무엇인지를 묻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보물이 무엇입니까?
원로시인 성찬경 선생님이 재미있는 제목의 책을 내셨습니다.
[먹을 수 있는 보석]입니다. 성 선생님은 쌀알 몇 톨을 들여다보다가
시인이 감성이 사색의 여정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볼수록 신비한 생김새와 빛깔에 넋을 잃는다.
반투병의 쌀알의 깊이를 헤아리다가 그만 상념의 시공에서 길을 잃는다.
세상에 이런 보석이 있는가. 이 보석은 먹을 수 있는 보석이다.”
나아가 그 쌀알이 생명이라는 사실, 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라는 사실에
새삼 머물며 이 보석은 살아있는 보석이며, 생명의 진기가
득실 고여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고 찬탄합니다.
시인에게는 언어가 보물이겠지요. 성찬경 시인은 좋은 시구
한 구절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겠다고 하는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시인에게 좋은 시구가 보물이겠지요.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좋은 언어’를 보물로 생각하며 때로 찾고 싶은 욕심을
지닐 때는 있습니다. ‘좋은 언어’라는 말을 하니, 너무나 가슴 아프게
일찍 세상을 떴던 민중 시인 신동엽의 ‘좋은 언어’가 생각납니다.
사실 저는 이 시를 읽으며 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좋은 언어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굽어돌아 적셔 보세요.
하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言語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하지만
그때까진
좋은 言語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외치시지는 않고
조용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사람들 자신들도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했겠지요. 조용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왔겠지요.
보물 이야기하다가 조금 샛길로 빠졌는데,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
바로 보물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하늘은 저에게 마음과 통하는 이미지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은 또한 우리 마음 깊은 곳,
내면 안에 쌓으라는 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소리를 심어 놓으셨지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아야 하지요.
‘마음 깊은 곳’이라는 말을 하니, 2003년 작고하신 또 다른 원로 시인이었던
조병화 선생님의 ‘외로운 영혼의 섬’이라는 시도 떠오릅니다.
외로운 영혼의 섬
- 조병화
내 마음 깊은 곳엔
나만이 찾아갈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쓸쓸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내 마음 가려진 곳엔
나만이 소리 없이 울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고독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아, 이렇게 내 마음 숨은 곳엔
나만이 마음을 둘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만사가 싫어질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내 마음 보이지 않는
나만이 숨을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쓸쓸하고 쓸쓸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우리가 찾아가서 머물고 쉬며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내밀한 장소가 있고,
그것을 시인은 외로운 섬이 하나 있다고 표현합니다.
외로움, 절대 고독 안에서 우리는 절대자,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이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그분께 의탁 드리며
우리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게 되지요. 우리에게 진정한 보물은 바로 그분뿐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지요. 우리가 보물로 간직하는 다른 모든 것도
그분이 주신 은총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성찬경 선생님의 글로 시작했으니, 그분의 시로 마칩니다.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성찬경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야속하다 싶을 만큼 묘하게
표 안나게 내려 주시는구나
슬쩍 떠보시고 얼마 있다가
이슬을 주실 때도 있고
만나를 주실 때도 있고
밤중에
한 밤중에
잠 못 이루게 한 다음
귀한 귀절 하나를 한 가닥 빛처럼
내려 주실 때도 있다.
무조건 무조건 애걸했더니
그 불쌍한 꼴이 눈에 띄신 모양이다.
얻어 맞아도 얻어 맞아도
그저 고맙다는 시늉만을 했더니 말이다.
시늉이건 참이건
느긋하게건 절대절명에서건
즉시 속속들이 다 아신다. 다 아신다.
그러니 오히려 안심이다.
벌거벗고 빌면 그만이다.
은총을 내려주시는구나.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만족 /양승국 신부님
재물과 관련된 말씀을 하실 때마다 예수님께서
상당히 강한 어조로 권고하신다는 것을
복음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로
그 정도가 지나쳐서 예수님께서 부자들에 대해 지나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 정당한 방법으로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모은 사람들,
그리고 그 재산의 많은 부분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는 선한 부자들도
많은데, 이런 부자들이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신랄하게 부자들에게 겁을 주십니다.
그런데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
(예를 들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에서
지칭하는 부자)는 성실히 벌어서
아낌없이 나누는 선한 부자와 뚜렷이 구별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부자는 재물의 힘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는 부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물의 힘만 믿는 사람입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여기고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재물을 가장 높은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재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주 물질적인 결핍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허해하고 목말라하고 또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갖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쉽게 불의와 타협하고 비리와 손을 잡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재물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통 그쪽으로 쏠리게 하는 달콤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재물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재물보다 훨씬 귀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건전한 가치관,
인간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일깨우는 영성,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관대한 마음, 인간이 지닌 무한한 정신적 능력,
하느님, 이런 요소들이 사실 재물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기억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재물이 최고라고 여기고
재물에 집착할 때에도 우리만은 재물 그 위에
하느님이 계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없이 살아간다 하더라도
충분히 당당하고, 충분히 만족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구원에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2011.6.17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2코린11,18.21ㄷ-30 마태6,19-23
행복하여라, 주님을 자랑하는 사람들! /이수철 신부님
오늘은 ‘자랑’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자랑하는 사람들’ 사람에 대한 정의 중 하나라해도 무방합니다.
자기자랑, 자식자랑, 아내자랑,
재주자랑, 힘자랑, 노래자랑,
집자랑, 돈 자랑, 학교자랑, 선배자랑,
가문자랑, 고향자랑…끝이 없습니다.
사실 자랑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무슨 힘으로 살아가겠으며
자랑 빼면 무엇이 남겠는지요.
자랑할 것 없는 인생이라면 참 고달프고 힘들 것입니다. 하여
‘팔불출’이란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팔불출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지요.
팔불출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몹시 어리석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 하는데
자랑하는 이들에게 어김없이 따라 붙는 어리석음 같습니다.
자랑도 자랑 나름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자랑의 사람'인데
자랑의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자랑으로 시작하여 자랑으로 끝납니다.
“많은 사람이 속된 기준으로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로 시작하여,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자랑하렵니다.”로 끝납니다.
사도 바오로의 자랑은 두말 할 것 없이
그리스도께 대한 자랑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자부심 가득한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께 대한 자랑으로
충만해 있었던 바오로였기에 온갖 시련과
교회에 대한 염려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의
고통의 카탈로그(목록)를 보십시오.
이런 고통에다 교회에 대한 염려까지 가중되니
첩첩산중의 짐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바오로가 이런 모든 짐을 질 수 있었던 초인적 힘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자랑으로 충
만한 마음에서 솟아났음을 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사랑하면
저절로 자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께 대한 자랑은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을 반영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자랑할 때 저절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하여
세례 받아 믿음의 생활을 하는 이들의
어둔 얼굴이 밝은 얼굴로
바뀌어가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자랑하는 사람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하느님을, 주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자랑하는 것은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놓은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란 보물을
하늘에, 하느님께 둘 때 저절로
이탈과 초연의 정신이요 깨끗한 마음입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공동전례의 미사와 성무일도를 통해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을 자랑하는 우리들은
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우리들이 밖에서는 가난해 보여도
내적으로는 부자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부단한 찬미와 감사의 하느님 자랑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둘 때 마음 깨끗해져
하느님을 볼 것이란 말씀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심안에 이어
육안도 육신도 맑고 밝아집니다.
저절로 정화와 성화로 영육도 치유 구원됩니다.
만병통치약 같은 찬미와 감사의
하느님 자랑이 우리 운명도 바꿉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도 어두울 것이다.”
마음이 맑고 밝아야 눈도 몸도
맑고 밝아짐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찬미와 감사로 당신을 자랑하는 우리들 모두의
마음과 눈과 몸을 맑고 밝게 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자랑하는 사람들!” 아멘.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강영구신부님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그대에게
오늘은 돈과 재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와 소나무와 장미꽃은
돈이 없어도 푸르고 늠름하고 여유 있고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하늘에 나는 새도, 갖가지 짐승들도 돈과 재물이 없어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보살펴주시고, 그것들은
자신들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맡기기 때문입니다.
유독 사람들만 돈에 집착하고
돈과 재물에서 행복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손길과 은총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로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돈과 재물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저 느티나무와 장미꽃처럼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손길에 내어맡기는 곳에 있습니다.
무소유의 자유인이 되어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꽃을 피우는 수도자들은
느티나무처럼 푸르고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자신을 죽이고 이웃과 형제들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손에 있는 돈은
자신의 목과 이웃과 형제들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됩니다.
돈과 재물을 쥐고 있는 손이 썩어문드러진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가슴마저 거름더미처럼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깁니다.
돈과 재물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몰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이 됩니다.
그들의 손에서 나온 돈과 재물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약이 되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이 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는 옷이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펴보십시오.(一明)
♪ Monteverdi, Selva morale e spirituale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