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가장 기쁠 때
2024년 6월 23일 요한3서 1:1-4, 9-12
1. 인생의 부침(浮沈)
(1) 중력과 부력
물체는 다른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력(引力)이라고도 하고 중력(重力, Gravity)이라고도 합니다. 이 힘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에 해당하기에 만유인력(萬有引力)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처음으로 정식화했지요. 당연히 지구도 인력,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물체들은 모두 지구가 잡아당기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땅에 붙어 살 수 있는 겁니다. 바다도 마찬가지로 중력이 있습니다. 쇠붙이를 바다 한 가운데 던지면 그 쇠붙이는 바다 속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쇠붙이에다가 스티로폼을 붙여서 던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 쇠붙이는 바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 둥둥 뜨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티로폼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티로폼의 뜨는 힘이 쇠붙이의 가라앉으려는 힘보다 세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뜨는 힘을 부력(浮力)이라 하지요. 그러므로 물체의 위치는 중력과 부력의 관계에서 정해집니다.
(2) 인생의 중력, 부력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도 중력과 부력이 있습니다. 인생은 바다 한 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늘 파도가 있고요. 그 파도는 우리를 삼키려 하지요. 우리는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힘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를 바다 밑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힘, 그것을 흔히 악한 영의 역사라고도 말하는데, 그 영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희망 없게 하고, 포기하게 하고, 죄악을 저지르게 합니다. 그리하여 바다의 저 깊은 곳으로 우리를 빨려 들어가게 합니다.
반면 우리의 영적인 삶에는 부력도 있습니다. 스티로폼도 있다는 말입니다. 쇠붙이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가라앉지 않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절망의 심연, 자포자기 상태로 빠지지 못하게 만드는 이 스티로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다른 말로는 주님의 도우심이고, 거룩한 영,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스티로폼 때문에 바다에 있지만 빠지지 않습니다. 검푸른 파도가 넘실대지만 그 가운데서도 둥실 둥실 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스티로폼 때문에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좌절 가운데서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스티로폼만 꽉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지난주일 설교시간에 사도바울의 고백을 배웠지요. 다시 한 번 기억해볼까요?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침몰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부침의 과정을 겪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에 있어서 부침의 과정을 겪습니다. 때로는 흥이 나서, 기쁨 가운데 열심히 목회하지만, 때로는 슬퍼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특별히 성도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런 부침의 과정을 겪습니다. 교우들을 보면서 때로는 흥이 나서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때 목회자는 기뻐하며, 혹은 어떤 때 실망하는가를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살펴봅니다.
2. 요한3서 1-4,9-12
(1) 축복
오늘 본문인 요한3서는 한 장으로 된 짧은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장로 요한이 가이오라는 한 성도에게 쓴 것입니다. 여기서 장로라는 호칭은 연장자의 의미로서 오늘날 교회의 직분으로서 장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의 형제, 사도 요한인데, 이 요한은 사실상 교회를 개척하고 감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로 요한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회자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 서두에 나오는 인사말이 매우 은혜롭습니다. 인사말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복을 빌어주는 기도, 축도(祝禱)입니다. 2절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개역한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정이 가득한 부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그 사람만 생각하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풍성해지는 그런 교우들이 있습니다. 함께 있을 때에도, 혹은 떨어져 있어도 그저 생각만 하면 마음이 훈훈해지는 그런 교우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훈훈한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성도에게 요한은 인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참된 복을 빌고 있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평안함,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비는 것입니다. 영혼과 범사와 육체가 복을 받는다는 소위 3박자 축복입니다. 사실 이 3가지는 우리가 모두 바라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사랑하는 성도 가이오가 이 같은 복을 받으면서 살아가길 빌고 있습니다.
(2) 매우 기뻤습니다.
3절 끝에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요한이 이와 같이 기뻐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4절입니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요한이 왜 그리 기뻐합니까? 가이오라는 사람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소식이 요한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기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회자에게 기쁨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목회자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까? 맛난 것 사 주시는 것, 좋은 옷 주시는 것 고맙습니다. 이 시간을 빌어 부족한 제게 많은 것을 주시는 교우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목회자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은 교우들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는,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우들이 자기 욕심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즉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될 때, 목회자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는 보람이 있잖아요!
(3) 디오드레베
반면에 목회자를 매우 힘들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9-10절에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요한에게 근심을 안겨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요한과 다른 신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악한 말로 사도들을 헐뜯고, 신도들을 훼방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목회자를 헐뜯고, 성도들과 싸우고, 멀쩡한 사람들을 내쫓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요한이 ‘내가 가면 그가 하는 일들을 들추어내겠습니다.’라고 벼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다가 이런 디오드레베 같은 인물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동료 목회자들 가운데 목회를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는데 대부분 이런 교우들로 인한 경우입니다. 교회에 꼭 그런 인물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이오와 같은 성도가 있는가 하면,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이오와 같은 성도가 될지언정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3. 목회자가 가장 기쁠 때
(1) 진리 안에서
신도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목회자가 매우 기쁘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를 바라보면서 살 때 목회자가 기쁜 게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진리 안에서 살아갈 때 목회자가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 바라보며 사는 게 아닙니다.
순복음이라는 게 웃긴 말입니다만,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도 어이가 없지요. 복음이 무슨 불순한 복음이 있고 순수한 복음이 있습니까? 교회가 주님의 교회지, 사람의 교회도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우리가 알지요. 커다란 교회들이 종종 목사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아무개 교회 하면 아무개 목사님, 아무개 교회 하면 아무개 목사님 하니까 무슨 교회가 그 창업자의 회사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기가 막힌 이름이 나오는 겁니다. 주님의 교회! 참 기가 막혀서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습니다. 아무튼 그런데 어떤 목사님의 은퇴설교를 들었습니다. 누구라고 하면 알만한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당부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000목사(본인 이름)는 잊으십시오.” 그야말로 교인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회자를 존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만, 그러나 목회자를 보고 사는 것 아닙니다. 아무개 목사님 교회 떠나니 자기도 교회 떠난다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그런 교우들은 아마도 아무개 목사님 바라보고 살았나 봅니다. 저도 언젠가는 은퇴를 하겠지요. 저는 별로 팬이 없어서 다행입니다만, 행여라도, 혹시 한 분이라도 그런 교우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건 진리 안에서 사는 모습이 아니지요. 김목사던 이목사던 박목사던 아무 관계없이 의연하게, 묵묵히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진리 안에서 사는 모습입니다.
(2) 목회자가 가장 기쁠 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목회자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입니까? 성도가 진리 안에서 살아갈 때입니다. 이 때 목회자는 가장 기쁩니다. 그러나 이게 어찌 목회자만의 기쁨이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핵심이지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부단히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