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의 서울시 상수도 기본계획보고서
서울시 최초의 상수도확장사업 기본계획
수도정비기본계획 제정 23년 전에 계획수립
김해림,정명식,손태영,김병렬등 핵심인물 참여
1965년에 작성한 ‘서울시상수도 확장사업 기본계획 보고서’는 주식회사 도화종합설계공사(창립명:도화설계사무소,대표 김해림(사진),현 도화종합기술공사,현 대표 곽영필 )가 서울시수도국에 제출한 연구용역이다.
현재의 수도정비기본계획(1998년 제정)이 제정되기 23년전에 수도정비기본계획이 함축된 서울시 상수도의 10년간(1965년-1974년)의 계획을 우리나라 전문설계사가 최초로 작성한 기본계획보고서이다.
1998년 수도정비기본계획이 제정된 이후 도화가 설계한 최초의 기본계획서는 횡성군 수도정비기본계획, 천안시 수도정비기본계획(책임 안병호 부사장)이다.
도화의 당시 상하수도와 항만과 관련된 주요 인사로는 김해림(대표),최광필(부사장),정명식(포항제철사장역임),이삼형,최석주(부사장역임,항만),손태영(삼성사장역임),김병렬(현 오세항사장의 대학선배며 기술사수,아들 김주현씨가 감리분야에서 현재 활동),김근식(김해림의 조카인 김홍식의 사촌형으로 친동생은 서울시 상하수국장을 역임했던 김인식),이용재,최한득,최종한(곽영필회장의 동창,오세항의 선배),이만금등이다.
과업의 목적은 ‘ 서울시 시정 10개년 계획사업의 실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계획목표년도 1974년까지의 상수도 시설확장 기본계획을 수립하는데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급수증산계획에 따르는 수원지 시설확장사업,송배수관시설확장사업에 대한 기본계획의 수립과 상수도원수 수원으로서 가장 신뢰성이 있는 한강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목표 년도까지의 원수수리권에 대한 방안을 수립하는데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수원지확장계획에서는 잠실,구의,노량진,보광동 수원지별로 확장가능성 여부를 검토하고 기술적,경제적 타당성조사와 10개년계획을 작성,취수시설,정수시설 및 송수방식등의 결정, 구의수원지계통의 수원선정 및 취수장위치 결정,건설계획중인 팔당 저수지의 이용방안 비교검토,뚝도수원지 확장가능성여부 검토를 통해 긴급비상용 간이정수장시설에 대한 실시계획등이 담겼다.
한강원수의 수리권취득방안 수립에서는 시정 10년계획에 따르는 수원지의 한강원수에 대한 취수량 검토,상수도용수와 충돌되는 기타용수 및 관계부처간에 유기적인 협의와 행정부처간 반영할 수 있는 기초확립과 배수시설 확장실시계획을 수립하는 내용이다.
보고서에 담긴 1960년에서 1964년간의 배수량 변화에서는 1일 평균배수량은 1960년 238,861㎥,61년 290,493㎥,62년 292,102㎥,63년 295,014㎥,64년 330,929㎥로 조사되었다.
계획급수인구변화에서는 1965년 353만(보급율 65%)에서 70년 424만명(70%),74년 482만명(보급율 74%)로 설계하였다.(전국의 상수도보급률은 1961년 17.4%,1966년 22%)
연구보고서에 제시한 구의 제3정수장 공사비는 내자 5천7백7십만원,외자 496,200불이었다. 취수펌프장기기는 내자 540만원,외자 336,200불,전기설비는 내자 330만원,외자160,000불이었다.도수관설비비는 1억2천300만원이 책정되었다.
설계도면을 포함하여 140페이지로 작성되었으나 기본계획보고서를 작성한 참여인력에 대한 이름은 표기되지 않았다.
도화설계사무소는 1957년(단기 4290년,8월) 종로구 관철동에 故(고)김해림씨가 설립하였다. 김해림설립자는 1907년 종로구 적선동 출생으로 경기고의 전신인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당시 강장 경쟁률이 높은 토목공학과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조선인은 전 학년 합쳐 48명이었다. 고등학교 동기생으로는 소설 ‘김강사와 T교수’의 작가인 현민 유진오가 동기이며 경성공업학교의 동기로는 실험시를 써서 화재를 모았으며 ‘날개’‘오감도’ ‘조선과 건축’‘이상한 가역반응’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상( 본명 김해경,1910-1937년)과 동창이다.
수석으로 졸업한 김해림선생은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토목과에 취직하여 하천개수 조사 보조 임무를 맡았으나 조선인에게는 업무를 주지 않아 사직서를 던졌다. 그러나 일본인 상관이 그의 재능을 감지하고 하천개수공사를 맡기면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하천개수공사는 총독부의 직영공사로서 현장사무소를 공장으로 칭했으며 김해림은 공장주임을 맡았다, 총독부 기수를 거쳐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1940년 기사로 승진(당시 기술직 공무원 직급은 고원,기수(판임관),기사(고등관))인데 총독부 경성출장소 도기사와 영산강 개수공사 현장소장에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후 미군정청 교통부 해운국 항만과장을 역임하고 천재적인 전략으로 중장비가 없이도 부력차이를 통해 인천 제1선거문비의 마이터 게이트 수리를 성공시켰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는 내무부 건설국에서 근무하다가 전쟁시에는 부산지방건설국장을 역임했다. 휴전협정 이후 내무부 토목국장을 역임하던 중 한강제1 인도교(한강대교) 복구공사에 국내 건설사가 ‘단돈 1원’으로 입찰하자 부실시공을 염려하여 이를 거부한 사건이 발생하고 마침내 정부와 충돌 1957년 퇴임하여 도화설계사무소를 설립하고 대표로 취임한다. 기술사지를 창간했으며(1968년)1964년 기술사법에 따라 실시된 제1회 기술사시험에 응시 1기 기술사가 되기도 했다.
김해림대표가 당시 맡았던 자문위원은 서울시 수도자문위원,내무부 상수도법 기초위원,서울시 시정자문위원,국토건설처 도시계획위원,상공부 공업표준심의위원,건설부 수자원종합개발심의위원,대통령 과학기술진흥연구위원,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부회장,건설부간척사업심의위원장등을 역임했다.
60년대 도화는 미국,독일,일본,프랑스등 외국업체와 제휴를 하기도 했는데 용역사업을 통한 해외수출로는 국내 최초로 63년부터 68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이후 국내 엔지니어링사들의 해외진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고 있다. (당시 최대 해외 수출 계약은 일본 JGC와의 4억 4천 달러였다.)
도화는 전주시 상수도 확장사업설계(1957년), 제주시 간이급수시설 계획설계(1959년), 포항시 상수도 확장공사 실시설계(1960년), 부산시 낙동강 상수도 확장계획설계(1961년),서울시 외곽지역 간이상수도 계획(1960년, 정명식,김병렬,손태영등 참여),보광동 취수,정수,송수설비계획(1960년),노량진,뚝섬상수도 설계(1961년),보광동수원지 신설사업 계획수립 및 실시설계(1967년),울산 대암제 계통 공업용수도 실시설계 및 낙동강 계통 기본계획(1968년)등을 수행했다.
(환경경영신문,자료분석 환경국제전략연구소 김동환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