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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주이씨 백사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우산이상길
東國十八賢의 陞奉從享과 成均館 繹史
해방 후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승봉종향(陞奉從享)과 중국 유현(儒賢)의 위패 매안 문제는 김창숙 등의 주도로 마침내 1949년 6월 전국유림대표자대회의 결의로 통과되었다. 이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민족적 자주의식과도 관련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유림이 이를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반대가 있었다. 특히 간재 전우 계열에서 반발이 심하여 그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전주향교 및 강릉향교 등에서는 이 결의에 따르지 않았고, 주도자인 김창숙을 성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전국 대다수의 향교에서 이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결의에서는 종래 음력 2 · 8월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해 오던 연 2회의 석전을 1회로 줄여 공부자탄강일(孔夫子誕降日)인 음력 8월 27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는 재정상의 문제가 주된 이유였다.
성균관(成均館)의 역사
고려와 조선 때 나라에서 세운 최고의 학부,
①고려 때 918년부터 943년 사이의 태조 연간에 경학(京學)을 설치하였고, 992년(성종 11년 국자감(國子監)이라 개칭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국학(國學)이라 하였으며, 1298년(충렬왕 24)에 성균감(成均監)이라 하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성균관으로 개칭.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성균관으로 개칭하였다.
②조선 때 1392년(태조 1)에 숭교방(崇敎坊) 즉 지금의 명륜동(明倫洞)에 성균관 건물을 짓고, 유학을 강의 하는 명륜당(明倫堂)과, 공자(孔子) 이하 유성(儒聖)들을 모신 문묘(文廟)와, 유생(儒生)들이 거쳐하는 재(齋)를 두었다. 태종은 성균관을 운영하기 위한 기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학전(學田)이라고 하는 땅과 경기도 연안의 섬 및 전라도 연안의 어장 등을 하사 하였으며, 많은 노비를 지급하였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전경각(奠經閣=도서고, 圖書庫)를 증설하여 성균관의 규모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종 때 과거를 보던 비천당(丕闡堂)이 세워졌으며, 계성당(啓聖堂)은 숙종 때 세워졌다.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은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에 한했으며, 그 수가 부족하면 4학(四學)의 생도 중에서 보충하였다. 입학 인원은 2백 명이었으나 영조 때에는 120명이었으며, 조선말에는 백 명으로 줄었다. 1887년(고종 24)에 성균관을 경학원(經學院)이라 개칭했으나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다시 성균관으로 환원하였다. 일정(日政) 때에는 경학원으로 부르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설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로 개칭하였다.
관원으로는 총책임자로 지관사(知館事 : 홍문관 대제학이 겸임)를 두고 그 밑에 동지관사(同知館事 : 겸직) 1명, 전임관원으로 대사성(大司成 : 정3품) 1명, 좨주(祭酒 : 정3품) 2명, 사성(司成 : 종3품) 1명, 사예(司藝 : 정4품) 2명, 사업(司業 : 정4품) 1명, 직강(直講 : 정5품) 4명, 전적(田籍 : 정6품) 13명, 박사(博士 : 정7품) 3명, 학정(學正 : 정8품) 3명, 학록(學錄 : 정9품) 3명, 학유(學諭 : 종9품) 3명이 있었다. 이 중 박사 이하는 정원 외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과 사학(四學)의 훈도(訓導)가 겸직한 것이 있었다. 입학 유생의 정원은 200명으로 생원이나 진사의 자격이 있는 자라야 했으나 부족할 경우에는 사학의 생도 중에서 보충하였다. 뒤에 경비 부족으로 영조 때는 정원을 120명, 조선 말기에는 100명으로 한 일이 있다.
儒道會와 成均館大學
1945年 祖國이 光復되자 뜻이 있는 사람들은 祖國의 再建運動에 精力을 集中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일제의 압제에 억눌려 살아오다가 하루아침에 자유를 누리게 되자 사방에서 지사(志士)를 자처하는 이들이 저마다 일어나 각자 사상·주장에 따라 정당 및 사회단체를 만들어 채 1년도 되기 전에 그 수를 바로 파악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우후죽순과도 같은 단체의 난립현상은 정계뿐 아니라 유림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유교 이념을 내세운 수많은 유림 단체가 생겨났다. 더욱이 美軍政廳에서 ”경학원(經學院)은 유교의 自治機關이니만큼 군정이 상관할 바 아니다” 라며 완전한 자치를 인정하여 이러한 상태가 확대되었다. 심지어 일제 때부터 경학원에 뿌리를 내려온 친일 유림마저 경학원을 자기들의 소굴로 만들어 날뛰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에 출현했던 대표적인 유림 단체를 소개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① 과거 명륜전문학교를 졸업한 청년 유림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동회(독립운동가 김성규를 위원장으로, 유용상·윤혁동 등이 중심이 되어 유세·강연을 개최하였으며, 폐교된 명륜전문학교의 복원을 기치로 내걸었다)
② 상경한 영남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유림회(이기원[이승희의 아들]을 위원장으로 이기인·송우용·권중철 등이 중심이 되어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③ 재경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유림회(이재의를 위원장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④ 황해·평안도 일부의 유림이 조직한 공맹학회가 있다.
⑤ 경학원 시절의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대성회(조국현을 위원장으로 정봉채 등 경학원 당시에 활동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고, 나중에 정당 조직으로 발전하여 1948년 5·10 총선거에 참여, 위원장 조국현이 제헌국회의원(전남 화순)에 당선되었다)
이밖에도 유교회·유도회·연정회 등이 있었고, 친일파가 중심이 된 단체까지 합하여 모두 16개에 달하는 단체가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이와 같이 유림 사회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서로 다퉈 유림의 장래가 여전히 암담하게 되자, 이를 자각한 각 단체에서는 유림의 대동단결을 위해 하나의 단체로 통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청년 유림 측인 대동회의 주동으로 통합운동이 무르익기에 이르렀다. 이에 1945년 11월 20일부터 6일간 성균관 명륜당에서 남북에서 온 유림 천여 명이 모여 김성규의 사회로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12월 1일에는 다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유도 교도의 혁신 향상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설립재단 완성 등을 촉진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때 위원장으로는 김창숙을 추대키로 합의했다. 임원으로서 부위원장에는 김성규·이기원, 총무위원에는 권중철·이우세·서성달, 책임상임비서에는 윤찬이 선임되었다.
1946년 3월 말에는 조선유도회총본부에서 중앙위원 및 여러 부서와 지방 간부를 선임하였다. 이때에도 역시 위원장에 김창숙이 선임되었으며, 부위원장에는 안만수·이기원·김성규·이재억·정인보가 선임되었다. 이밖에 총무·의례·교화·경리·외교·기획·선전·후생·심사·도서 및 지방 간부를 두었고, 중앙위원은 180명이었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6월에는 남북의 유림대표자 2,500여 명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여 통합을 위한 전국유림대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이 대회에서는 먼저 친일 황도유림을 숙청하기 위해 과거 일제에 의해 경학원으로 격하되었던 성균관의 명칭을 정식으로 환원시키고, 유자들의 총림이라 할 통합 유림 단체의 명칭을‘유도회’로 결정하였다.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에 김창숙, 부위원장에 김성규·이기원·이재억·정인보를 선출하였으며, 중앙위원과 전형위원 선임은 위원장단에 일임하였다.
이상과 같이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환원되고, 또 성균관의 교화사업 추진 기구인 유도회가 결성되어 중앙에는 총본부, 지방에는 향교 조직을 기반으로 한 지부 · 지회를 결성하여 과거 여러 단체로 분열되었던 유림 단체는 하나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대회 3일 뒤에 개최된 중앙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의되었다.
① 유학정신을 건학이념으로 하는 성균관대학을 설립할 것
②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성균관장 및 부관장을 겸임하고, 성균관의 직제 개정은 관장단에 일임키로 할 것
③ 전국 각 시도로부터 향교재산을 접수하여 유림의 자율적인 재단을 수립할 것
④ 동서 양무에 종사된 중국 유현(94위)의 위패를 매안하고, 우리나라 십팔현을 승봉종향(陞奉從享)하여, 공자·사성·송조이현(주명도·주회암)과 함께 대성전에 모실 것
①의 문제는 1945년 9월 대동회의 청년 유림을 중심으로 명륜전문학교(교장 김현준)를 부활시킨 것과 맞물려 들어간다. 이때 명륜전문에서는 학생을 모집하여 100여 명으로 학교 문을 열었다. 명륜전문이 과거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차 이를 민족대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와 같은 형식상의 절차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명륜전문은 재원 부족으로 곧 운영난에 부딪쳤고, 청년 유림들은 이를 신생 유도회에 호소하였다.
이에 儒道會에서는 전국 유림의 총의를 모아 빠른 시일 안에 성균관대학을 설립키로 하고 김창숙·정인보·변영만 등 사계의 명망가 22명으로 성균관대학설립기성회를 발기했다. 이 단체는 전국적으로 유지자들의 찬조를 구하였으며 일차적으로 재단의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 동덕여고의 교주인 학봉 이석구(李錫九)의 육영재단인 재단법인 학린사(學隣社)가 희사에 나서 전국 향교재산을 모태로 하는 명륜연성소 재단과 통합,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의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946년 9월 25일 정규 단과대학으로 철정과(哲政科)·경사과(經史科) 2개 과를 둔 성균관대학이 인가가 나자 명륜전문은 발전적으로 해체되었고, 성균관대학(초대 학장 김창숙)은 실질적으로 유도회(위원장 김창숙)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이제 成均館大學은 朝鮮朝 以來 日帝時期까지 繼續되었던 國家機關이 아닌 儒林에 依해 運營되는 私立敎育機關의 하나일 뿐이었다. 國家의 理念 乃至 政策樹立에 對해 儒敎思想이 下等의 關係도 갖지 못하는 狀況을 맞이하였다.
이로써 悠久한 傳統을 가진 正統 國立大學으로서 命脈이 完全히 斷切되고, 過去 植民地時期 大學으로 民族正統性과는 거리가 먼 京城大學(國立 서울大學校)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이는 대개 한국의 교육 및 문화 정책을 자기들의 체제로 이식시켜 부용화(附庸化)하려는 미국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국대안(國大案,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해 지식층과 양심 세력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미군정은 이를 강행 실현시켰다.
유림은 육영사업에 열의를 가지고 성균관대학 및 일부 대학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다. 6·25전쟁의 와중인 1952년 12월 재단법인 성균관대학 이사회에서는 재단을 확충하여 이를 기반으로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듬해 2월 문교부로부터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 대학의 기구를 크게 증설함과 동시에 세 개 단과대학으로 개편하고 대학원을 설치하여 종합대학으로 교세를 확장시켰다.
이어 1953년 6월 부산에서 전국유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각 시도 鄕校財團의 基本資産 총액 가운데 3할을 財團法人 成均館에 지원함과 동시에, 美軍政法令 第194號에 의거해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재단법인 성균관에 병합시켜 재단을 확충할 것을 결의하여 마침내 명실 공히 유림이 성균관대학을 운영하게 되었다.
한편 중앙의 성균관대학 설립과 함께 지방에서도 유림 사업의 하나로 몇 개의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전남의 대성대학(전남대학교에 병합), 전북의 전주명륜대학(전북대학교에 병합), 경북의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의 하나) 등이 육영사업의 행렬을 가다듬게 되었다.
②의 과거 경학원은 당시 대제학·제학·부제학·사성(司成)·좨주(祭酒) 및 강사·직원 등으로 구성되었던 직제를 재정비하여, 관장·부관장·전의(典儀)·전학(典學)ㆍ사의(司儀) 등으로 정하였다. 지방 향교에는 전교(典校)·장의(掌儀)를 두기로 하였다.
③은 종래 일제가 유림 탄압 정책의 일환으로‘향교재산관리법’을 만들어, 부윤·군수 등이 관장토록 하였던 향교 재산을 환원하기 위한 것으로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 김창숙이 미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과 수차례 회동하여 향교 재산을 환수하기 위해 각 도에 향교재단을 설립하여 마침내 각 시도에서 관장하던 재산을 환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에 입법되고 이듬해에 단행된 농지개혁으로 향교에 소속된 많은 토지가 개인 소유로 넘어가게 되어 유교인의 재산권 행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④의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승봉종향(陞奉從享)과 중국 유현(儒賢)의 위패 매안 문제는 김창숙 등의 주도로 마침내 1949년 6월 전국유림대표자대회의 결의로 통과되었다. 이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민족적 자주의식과도 관련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유림이 이를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반대가 있었다. 특히 간재 전우 계열에서 반발이 심하여 그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전주향교 및 강릉향교 등에서는 이 결의에 따르지 않았고, 주도자인 김창숙을 성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전국 대다수의 향교에서 이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결의에서는 종래 음력 2·8월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해 오던 연 2회의 석전을 1회로 줄여 공부자탄강일(孔夫子誕降日)인 음력 8월 27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는 재정상의 문제가 주된 이유였다.
이상과 같이 성균관과 유도회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유교계의 재편이 일단락된 뒤, 성균관·유도회에서는 대외적으로 유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20여 차례에 걸쳐 유림 연습생을 선발·연수를 하기도 하였으며, 장차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으로 유림 운동은 큰 좌절을 맞았다. 이어 1952년 김창숙 위원장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하야권고 성명을 발표한 뒤 성균관과 유도회는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점차 분규에 휩싸이게 되었다. 휴전 후 1955년부터는 유도회와 성균관에 정치 세력이 개입하여 전국 유림은 갈피를 못잡았으며, 수년에 걸쳐 유림의 고질적인 분열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김창숙의 유림계 재편과 성균관대학의 설립은 마지막까지 그 성과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유도회를 설립하고 성균관을 정비하는 한편, 유학 교육의 중심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것은 그가 유림계 내에서 항일운동의 중심으로서 백절불굴의 투쟁을 전개한 소산이었다.
1962년 3 · 1절에 김창숙은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해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수여받았다. 해방 후 생존 인사가 받은 유일한 건국공로훈장이었다. 그는 얼마 뒤인 5월 10일에 입원 중이던 중앙의료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5월 18일 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 후 서울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묻혔다.
김창숙은 죽기 전 ‘나의 뼈를 어디에’ 라는 유시를 한편 남겼다.
나의 병은 어찌 그리 고질인가
나의 목숨은 어찌 그리 끈질긴가.
살자 하니, 뗏목을 타고 떠나갈 바다도 없구나.
죽자 하니, 묻혀 질 산도 하나 없구나.
내 죽거든 나의 뼈를 티끌 세상에 두지 말고
한 횃불로 태워 모진 바람에 날려 푸른 물에 부치라
내 살아서 부처와 아무 관계없었거니
내 죽어 어찌 왜놈의 풍속 좇으랴만
보재(寶齋)와 일송(一松)을 따라
표연히 두 세계 사이에 노닐고 싶어서일세.
追而
1. 乙巳條約이 그 當時부터 無效라고 韓國政府에서 主張하여, 프랑스 국제법학자 프란시스 레이교수도 乙巳條約이 無效라고 國際法的으로 밝혔지요. 그 이론이 나중에 UN 國際法委員會에도 이어져 乙巳條約은 無效라고 UN總會에 報告되었습니다. 1910年 韓日倂合 後 韓國 最古大學인 成均館의 敎育機能을 閉止시켜 지금의 成均館에 文廟祭祀機能(釋奠大祭)만 남겨 놓았지만, 乙巳條約이 無效라 成均館의 敎育機能을 廢止시켰어도, 그 空白에도 불구하고 現在의 成均館大學이 600年 傳統을 이어가는 것으로 政府側 百科辭典과, 市中의 百科辭典, 여러 辭典, 成均館大 學校當局은 共通된 學術的 立場을 보이고 있습니다. 解放以後 臨時政府 要人들이 大擧 歸國하면서 全國 儒林大會를 開催하여 獨立運動家인 李承晩 前 大統領. 臨時政府 現職 主席인 金九主席을 儒林大會 顧問으로 하고, 獨立運動家인 金昌淑 先生을 委員長으로 推戴하였었지요. 아무래도 獨立運動家라야 認定받는 解放當時 狀況이라 그렇습니다. 여하튼 國史에 나오는 朝鮮 最古大學 成均館에서 이어진 大學은 成均館大學校입니다.
2. 臨時政府 要人들이 成均館大를 還元設立(復校)하는 것을 보고, 占領對象(日本에 있는 日本 國立大나, 强占期에 韓國에 세워진 京城帝大. 日本 官立專門學校는 美軍政 占領對象) 日本 總督府에서 下級實務를 맡아보던 親日附倭輩들이 京城帝大. 官立專門學校 後身을 假稱 國立(占領對象일뿐이며, 過渡期의 日本 殘在 國立大인데, 韓國學校는 아닙니다)대로 推進하여 全國的인 反對가 있었습니다. 解放 韓國人의 朝鮮王室. 成均館大. 臨時政府. 韓國 儒敎, 韓國人等과 解放民族 資格과 달리 全國的으로 設立反對를 當한(韓國人의 自主政府가 出現하기 前이라, 國立大로 하는게 時機尙早라 反對) 京城帝大 後身 서울大는 美軍政 占領對象이란 差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占領對象 日本 總督府나 日本 統治機構 殘在로, 敗戰國 日本으로 逐出해야 될 占領對象 日本 殘在입니다. 韓日倂合 以後에 세워진 京城帝大. 官立專門學校들은 韓國人의 학교는 아니며 敗戰國 日本 國立大와 같은, 占領對象 (韓國에 强制로 設立된)敗戰國 日本 殘在일 뿐입니다. 京城帝大. 日本 官立專門學校 後身 서울大를 假稱 國立大로 세우려 할 때, 국대안 反對運動이라 하여 全國的인 反對를 한 것은 아주 有名한 事件으로 成均館大 先輩들이 把握하였는데, 思想論爭 이런 것 말고, 韓國人의 自主政府가 出現하기 前이라 時機尙早라고 5年制 中學生. 大學生. 一般人들도 大大的 設立反對를 當한 大學이 京城帝大 後身 서울大로 여러 資料에 나옵니다.
<副館長 友山 李相吉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