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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들께
종친 여러분 안녕하시고 추석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김 송구입니다. 내가 난체, 아는체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게 아님을 여러분께 미리 양해구하면서 가문에 대해서 몇 말씀 드리려 합니다. 내용을 아시는 분은 아는대로 처음 듣는 분은 그런대로 유익한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의 명가 우리 안동 김씨에 대해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시간 관계로 일부는 말씀으로 전하고 나머지는 유인물로 준비하였으니 필요하신분은 나중에 가지고 가셔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창피하지만 저의 성장기엔 윗 어른이나 주위로부터 안동김씨 양반이란 말 밖에 듣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왜 양반이고 구.신 안동김씨 관계도 철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양반이란 동반(문관)과 서반(무관)을 합하여 이르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덕수궁 등 고궁 인정전 앞에 가면 양편으로 정1품으로 시작해서 품계 별로 문관, 무관 나뉘어진 위치를 실감할 수도 있고 흥미로울수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벼슬살이를 하면서 혈연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조선의 명문가를 형성 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가문은 신 안동김씨로 고려 태조때 삼태사(三太師)의 한 사람인 고창 성주(후에 안동)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한 신 안동 김씨이고 구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金淑承)을 시조로 한 이 두 성씨는 비록 본관과 성씨를 안동 김씨로 같이하고 있으나 완전이 별개의 성씨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관 앞에 구.신자가 붙은 이유도 두 성씨를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남의 가문 이야기 말씀드리고 다시 계속 하겠습니다. 얼마전 신문에서 보니 율곡(이이) 가문의 15대 종부 서경옥씨는 후손들에게 대한민국의 돈은 덕수 이씨 가문이 모두 접수했다고 가문의 영광을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다고 했다. 백원의 주화엔 이순신장군 5천원권엔 이율곡(이이), 5만원권에는 신 사임당이 있어서라고 한다. 각설하고 우리 가문은 안동 성주 김선평을 시조로 하고 15명의 정승, 35명의 판서, 6명의 대재학 3명의 왕비를 배출하고 또한 조선 왕조 5백년 동안 금관자가 3말일 정도로 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한 화려한 명문가이기도 합니다.
인물은 길러지고 명문가는 만들어 가는것 이기에 이만하면 우리 안동김씨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며 꿈을 키워주는데 필요한 레파토리(Repertory)라고 생각하고 참고하셨으면 하는 바램이고 특히 조선 500년 역사 속에서 급부상한 우리 가문의 안동 김씨 황금기는 조선 후기 정조대왕 때부터 시작 정조가 세상을 뜨고 흥선 대원군(이하응)이 등장할 때까지가 그 전성기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김상용(우상), 김상헌(좌상)형제가 그 초석을 깔았고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흔히 역사 속에서는 안동김씨 3수 형제로 칭함)에서 김창집에 이르기까지 전성기 시발점을 구축하고 다졌으며, 김조순(23대 순조비인 순원 왕후의 아버지, 영안 부원군)이후 순(淳), 근(根), 병(炳)자 행렬(行列)로 내려오며 영,좌,우의정의 정승을 한 집안에서 가장 많이 배출하며 안동김씨 영광의 황금기를 굳건히 쌓아 왔다고 생각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23대 순조비인 순원 왕후, 24대 헌종비 효현왕후, 25대 철종비 철인 왕후 등 3명의왕비가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보통 명사 “안동김씨”의 60년 세도 정치를 통해 김조순 이후로 조정의 크고 작은 버슬과 지방관리들은 안동김씨 일문과 그 추종 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명문가 아닌가요? 흔히들 안동 김씨가 조선 후기 60년간 세도 정치로 나라를 어지럽힌 집안이라 알고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안동김씨 가문이 우리 역사에 마냥 해악만 끼쳤던 가문은 아닌것 입니다.
우리 가문은 역사에 어두운 면도 있었지만 동시에 빛이였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 사상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의 하나이며 나라에 위기가 닥칠때마다 아끼지 않고 목숨을 바쳤던 충절과 절의의 명문가 또한 안동 김씨 가문이었다. 병자호란 때의 충절 공신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가, 김좌진, 김가진, 김종진 형제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요 자랑스러운 우리의 조상들인 것입니다. 이만하면 든든한 뿌리를 갖인 명문가의 후손으로 긍지를 가질만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후손들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꿈을 심어주기 바랍니다.
유익한 시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익했다면 박수한번 있어야 되는것 아닙니까?
관자란 : 갓 끈에 꿰어 고정시키는 도구로 성인남자가 사용하는것인데 벼슬 높이에 따라 쓸 수 있는 재료가 금.옥.대나무, 산호등등 다르다.
금으로 하는 관자라 함은 높은 벼슬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게 한 두개가 아니고 3말씩이나 되었다니 높고 큰 벼슬을 한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선원(호)김상용(우상)은 선조 23년(1590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라 광해군때는 폐모론에 반대를 고수하기도 했고 인조 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중용되어 병조, 예조, 이조 판서를 거처 정승에 이르렀다. 동생 김상헌에 비하면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형 김상용도 동생 못지않게 강직하고 고고한 인물이었다.
병지호란때 김상용은 조정의 명에 따라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 강씨와 원손, 즉 훗날의 소현세자의 아들과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모시고 급히 강화도로 피난했다.
김상용은 임진왜란때 강화도로 피난간적이 있어 그곳 물정에 밝았다. 이때의 직위는 원로대신이요 유도재신(留都宰臣) 자리에 있었습니다. 강화도가 함락직전 남문에 있는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강화충렬사-강화성이 폭파된 뒤 김상용의 신발이 발견된 강화도 선원면 선행리에 세워진 충렬사 함께 순절했던 이들의 넋을 기리는 제향 행사가 매년 10월 열리며 강화 중심가에 김상용을 기리기 위한 순의비가 세워져 있는데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때 비석이 땀을 흘린다는 설명을 들은바 있습니다. 강화에 가면 한번 찾아가보기 바랍니다.
김상헌 : 김상헌의 나이가 형보다 9살 아래인 친 아우로서 큰집에 양자가서 계보상으론 사촌간으로 1596년(선조 29년)문과에 급제 관계입문 역시 병자호란 시에 남한산성으로 인조의 어가가 몽진하여 있을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청나라에 대한 척화론과 화의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중 마침내 적에게 투항 한다는 국서가 작성되는데 이때 예조 판서였던 김상헌은 목숨을 걸고 주전론을 고수하기도한 배청주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하다. 그는 이 국서를 찢고 통곡한 끝에 6일간 단식하며 죽기로 항거하였다. 그 후 인조가 남한산성을 출성하여 청나라에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상의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여 근신했다고 합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갈등했으나 심양감옥에서 서로의 뜻을 이해하고 화해 했다고 전한다.
그럼 김상헌과 최명길은 왜 청나라의 심양으로 끌려갔을까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2년 후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 징벌에 필요한 군사를 요청하자 김상헌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 심양으로 압송되어 6년동안 강금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돌아올 날을 기약하지 못한체 이를 시로 남겼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노라
최명길은 조선이 항복한 뒤 우의정에 봉해졌고 김상현이 청나라로 끌려가기 1년전인 1638년 아직 잔존해 있던 명나라에 밀서를 보내 청나라에 항복한 어쩔수 없었던 사연이 3-4차례의 밀서로 오갔다. 작성은 최명길 발송자는 임경업이었다. 그런데 5년 뒤 이 사실이 청나라에 발각되어 청나라 심양의 감옥 북관 김상헌의 옆방 감옥에 투옥된다.
김조순 : 김상용, 김상헌 형제가 우리 가문의 기초를 놓았다면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이 전성기를 구축하였으며 김조순은 가문의 영광에 시발점의 굳건한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볼수 있다.
정조는 자신이 아끼던 신하들 중 한 사람을 골라 사돈으로 선정하고져 했는데 그가 바로 안동김씨 김조순이다(정조의 예비 사돈) 정조는 규장각과 왕의 군대인 장용영을 설립하여 김조순에게 책임을 겸임케 했다.
이처럼 정조 임금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원래 이름이 ‘낙순’을 ‘조순’으로 바꾸어 내리고 ‘풍고’라는 호까지 하사 하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김상용, 김상헌의 후손이며 당파 싸움 와중에 죽엄을 당했던 김수항, 김창집은 그들의 후손이기도 했다.
“다섯 세대 동안 여섯 번 사신 갔으니
충성스럽고 근면하기 다른 누가 비길오
후손이 또 그 아름다움을 이어 받아
금년에 이 사명 수행을 맡았구나
눈 쌓여 일찍이 고초를 겪었고
걱정되어 그 옛날에 얼음을 마셨지
가거든 그 나라 정세를 잘 정탐하여
사신의 명성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조선 22대 왕 정조가 손수 쓴 글을 모아둔 문집 「홍재전서」제6권에 실려 있는 글이다.
중국으로 떠나는 한 사신을 위해 정조가 직접 지은 시 였다. 학식이 뛰어났던 그 답게 중국의 고사와 비유들을 인용해서 써낸 시구다. 이 시를 받는 이의 훌륭한 집안 내력을 이야기하며 칭찬하고 이후로 사신의 어려움을 말하면서도 맡은바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조는 이처럼 시를 지어 그를 위무하고져 하엿다. 이는 정조가 그 신하를 아끼고 소중히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시를 받은이는 훗날 정조가 사돈으로 삼고자 했던 연경 사신으로 다녀온 김조순이다.
또한 순조의 장인 영안부원군이 되어 안동김씨 시대를 연 김조순은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었다고 한다.
온화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로는 이런게 있다.
어느날엔가 김조순의 집 앞에 웬 주정뱅이가 찾아와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주인에게 온갖 상욕을 퍼붓는데 분개한 하인들은 당장 주정뱅이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려 했지만 김조순은 하인들을 만류하고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고 하며 그 주정뱅이를 자신의 집안으로 들이게 했다. 그런데 그 주정뱅이가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숨은 사연은 이러했다. 김조순을 몰아내려는 반대파는 병이들어 곧 죽을 사람을 매수하여 술을 마시고 욕을 퍼붓게 했다. 이후 김조순이 화를 내며 때린다면 기필코 죽을 것이니 죄없는 사람을 해쳤다는 죄목을 씌워 공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김조순이 반대파의 음모를 미리 간파 주정뱅이를 벌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조순의 인품이 본래 온화하고 현명한 성격의 소유자로 비록 자신을 모독한다고 해도 다그치지 않고 사연을 물어보고 들으려 햇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요 현명한 성격의소유자이었기에 정조 임금이 그토록 아끼고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았었나 생각할 수 있는 점 이기도 하다.
김삿갓
김병연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김삿갓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1811년(순조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다. 우발적이 아닌 10년을 준비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때 김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선천 부사겸 방어사의 위치에 있었다.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일문에서는 세력 기반을 넓히기 위해 친척들을 지방 관리로 내려 보내는 일이 허다했으리라 순자 행렬인 것을 보면 김익순도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벼슬자리 하나 얻게된 것으로 추측하지만 반란군이 들이닥치자 저항이나 반격을 하는 대신 항복해 버렸다고 전한다. 또한 그 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한다. 한편 가산 군수 정시는 문관이면서도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반면 김익순은 손한번 써보지 못하고 붙잡힌다. 가족과 짐을 꾸려 달아나던 김익순이 홍경래 군사들에게 생포당한 것이다. 이후 반란군의 좌영장이란 감투까지 쓴 것으로 보아 홍경래 반란군 진영에서 죽기 살기로 버티거나 저항한 것도 아닌것 같다. 오래지 않아 홍경래 난은 내부의 자중지란으로 쉽사리 진압되었고 김익순은 나라의 관리이면서도 반란군에 협력한 대역죄인이 되어버렸다. 처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번에는 홍경래의 군사였던 김창시의 목을 바치고 자신의 죄를 없던 것으로 하려했다. 본시 김창시의 목을 밴 사람은 농부인 조문형이였다. 그런데 김익순은 그에게 1천냥을 주고 수급을 사기로 하고 정작 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조문형은 김익순을 관청에 고발하게 되었다. 마무리가 서툴렀던 김익순은 반란군에 항복하여 협력한 것도 모자라 죄를 숨기기 위한 조작까지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조정에서 김익순은 대역죄로 참형에 처하고 그 일족을 폐족시켰다. 모반은 3족을 멸했다. 명문 집안에서 하루아침에 폐족당한 김병연의 아버지 김안근은 집안의 노복인 김성수를 시켜 아직 어린 병하, 병연 형제를 데리고 도망하게 했다. 그들은 황해도 곡산 땅에 숨어들어 살았다. 한동안 신분을 속이고 살았던 형제는 조부의 죄가 자식과 손자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나라의 사면령 덕분에 다시 부모 곁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김안근은 감옥에서의 후유증과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김병연 집안은 세상의 멸시와 학대를 피해 인적이 드문 강원도 영월땅에 정착하게 된다. 어머니 이씨는 집안이 폐족된 사연을 자식들에게 숨기고 살았다. 머리가 영특하고 시제가 뛰어났던 김병연은 고금의 시서를 섭렵하여 모르는 글이 없었다고 한다. 20세가 되던해 김병연은 영월 관아에서 벌어진 백일장에 참가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시제가 홍경래난 당시 반군과 싸우다 죽은 가산 군수 정시의 공을 칭찬하고 항복한 선천부사 겸 방어사 김익순을 통박하라는 것이었다. 김병연은 김익순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내용을 옮기면
“선천부사 김익순이 반란군에 굴복했다는 소식이 있었으니 참으로 어이 없는 일이로구나 너의 가문은 이름 높은 안동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 떨치는 순자 행렬이고 보면 성은도 남달리 두터워 백만대군이 쳐온다해도 어찌 그 이를 저버릴수 있었으랴, 하물며 청천강물에 고이 씻은 병마와 철옹성 같은 활과 칼을 지니고도 임금님 앞에서나 꿇던 무릎을 흉적 홍경래 앞에서 꿇었다니 네 혼은 죽어서 황천에도 못가리니 거기엔 우리 선대왕의 영혼이 계신 까닭이다. 임금을 저버린 동시에 조상마저 잊어버린 너는 한번도 고사하고 일만번 죽어 마땅하다 도대체 역사의 준엄한 기록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튼 이 치욕적인 일은 이 나라 역사에 길이길이 전해지리라”
이렇게 쓴 김병연이 글은 장원에 뽑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자랑했을때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집안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할아버지를 욕하게된 김병연은 조상을 욕한 자신의 잘못을 한탄하며 하늘이 부끄럽다하여 삿갓을 쓴체 유랑길에 나서게 되었으며 김병연에게 유랑은 속죄의 방랑길이었다.
전라도 화순 동복의 남의집 마루에서 57세로 죽을때까지 30여년간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떠돌며 방랑 생활을 하다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다.
안동김씨 선조에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문곡 김수항, 몽아 김창집 등은 덕망과 공훈으로 온 나라의 선망을 받았고 김 조순도 문장과 국사에 숙련된 솜씨를 발휘하여 덕망 높은 분으로 칭송을 받았다.
김좌진은 김형규의 둘째아들로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바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11대 손이며 그는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낫지만 밝게 깨인 시대 정신을 갖고 있었다.
김좌진과 김종진(만주 독립군의맹장들)
한때 유행했던 소설과 영화 장군의아들 영화에서 장군이 바로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을 말하는 것이다. 일화 16세 되던해 김좌진은 집안의 노비 50여명을 모아 놓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이들을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2천석이나 되는 집안의 전,답을 분배하여 먹고 살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신분제도가 사라지던 시기라고는 하지만 이처럼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 예는 드물었으며 16세 소년의 행동으로선 파격적이었다 할수 있다.
또한 김상용의 11대 후손으로 김좌진과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종진(김좌진의 집안 동생, 역시 홍성에서 태어남)이 있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무엇하나 남부러울게 없었던 김좌진과 김종진은 자신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 때문에 고단한 삶을 살다 이국땅에서 외로운 영혼이 되었지만 이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이 나라가 독립을 맞은지도 벌써 반세기가(50년)넘었다. 아직까지 친일 청산과 관련하여 말이 많지만 자기 희생을 하며 삶을 불살랐던 희생이 있었기에 단군이래 최대의 국가번영을 누리면서 세계와 어깨를 겨루며 발전해 가는 국가가 될수 있었지 않나 하는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긍지를 가져본다.
* 후손 작명 하실 때 참고 행렬
求(구.32대) 模(모.33대) 然(연.34대) 培(배.35대) 銑(선.36대)
源(원.37대) 榮(영.38대) 思(사.39대) 俊(준.40대) 善(선.41대)
澤(택.42대) 植(식.43대) 煥(환.44대) 喆(철.45대)
*후손들의 외국 유학에 관심 있다면
홍콩 장학위원회(UGC)가 제시하는 장학금 조건이 좋다.
“UGC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앞으로 3년동안 매년 24만 홍콩달러(한화 3,840만원)의 장학금과 1만 홍콩달러의 여행경비를 지원 받는다고 한다. 또한 UGC는 연간 35만7,000홍콩달러(한화 약 5,700만원)씩 지원할 계획”이라고 하니 관심 가져 볼만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가문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말씀 드리기도 하고 여기서 줄입니다.
종친들게 유익한 글 되었으면 합니다.
2009년 10월 4일
종친 김 송 구
김상용- 1590년(선조23년) 문과에 급제 광해군때 폐모론에 반대를 고수하기도 했고 인조 반정 후 중용,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직전 화약고를 불태우고 순절한 순절공신입니다.
김상헌은 1596년(선조29년) 문과에 급제 관계 입문 혈족상으로 김상용이 친 아우로 형과 9살 차이로 큰 집으로 양자를 가서 계보상으론 사촌간으로써 역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인조의 어가가 몽진중에 있을 때 강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청나라에 대한 척화론과 화의론에 대하 논의가 진행되었을때 마침내 적에게 투항한다는 국서가 작성되는데 이때 예조판서인 김상헌은 목숨을 걸고 주전론을 고수하다 그는 이 국서를 찢고 통곡한 끝에 6일간 단식 죽기로 항거하였다. 그 후 인조가 남한산성을 출성하여 청나라에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상의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여 근신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2년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요청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로 심양으로 압송되어 6년동안 강금 생활을 했다. 그때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돌아올 날을 기약 못한체 이를 시로 남겼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돌말동하노라” 는 시가 바로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 김상헌이 남긴 시인 것이다.
첫댓글 김송구 자문위원님께서 우리 종친님회 발전을 위해 너무나 훌륭한 정보의 자료를 우리 가문에 없어서는 안될 최고의 자료를 올려 주셨음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앞으로 우리 종친님들께 누구나 읽어보시고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도록 홍보하겠습니다. 우리 종친역사에 없어서는 안될 훌륭한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종친회장 김수 올림.
송구형님 안녕하십니까?!~제목글자가 넘 커서 9pt로 축소조정했음을 양지 바랍니다.글자가 넘 크면 2칸을 차지하기때문에 불가피 운영자의 임의로 조정하였습니다.건강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