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흘(趙云仡)은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豊壤縣)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고 여러 번 옮겨 합문사인(閤門舍人)이 되었다. 〈공민왕〉 10년(1361)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임명되었다가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하였으므로 공로를 기려 2등 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직강(國子直講)으로 옮겼고 전라도(全羅道)·서해도(西海道)·양광도(楊廣道) 3도(道)의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였다.
그가 전라도에 있을 때 평리(評理) 염지범(廉之范)의 처형(妻兄)이 그 무리들과 함께 태산인(太山人) 김언룡(金彦龍)의 말을 훔쳤다. 조운흘이 죄상을 조사하자 모두 자복하였기 때문에 포(布)를 징수하고 우두머리를 처형하였다. 이후 김윤관(金允琯)이 조운흘을 대신하여 부임하였는데, 염지범 무리들의 말만 듣고 도리어 김언룡에게서 포 500필을 징수하여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서리를 시켜 판결문을 가지고 김언룡과 도둑을 압송하여 법사(法司)에 나아가 분별하게 하였더니, 도적이 도중에 판결문을 훔쳐 염지범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김언룡이 쫓아가 잡아서 헌사(憲司)에 고발하니 헌사에서는 염지범이 재상으로써 도적을 비호한다고 탄핵하여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염지범이 도망치니 김윤관을 장형에 처하고 제명하였다. 〈공민왕〉 23년(1374)에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써 사직하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아래에 살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호를 짓고 거짓으로 미친척하면서 은둔하였다. 〈집에서〉 출입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탔으며 「기우도찬(騎牛圖贊)」과 「석간가(石磵歌)」를 지어 자신의 속뜻을 드러냈다. 자은사(慈恩寺) 승려 종림(宗林)과 함께 속세를 벗어나 사귀면서 초연히 세상 밖의 생각을 하였다.
〈조운흘은〉 신우(辛禑) 3년(1377)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기용되자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공부하지 않고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요점은 다름이 아니라 글을 읽어 이치를 깊이 탐구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할뿐입니다. 이로써 예전의 성군들께서는 강관(講官)과 시학(侍學)을 설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학(道學)을 강론하고 밝히게 하면서 바른 마음을 수양하셨으니 그 생각이 깊습니다. 근래에 서연(書筵)의 강학(講學)을 어떤 때는 하고 어떤 때는 그만두시니 신(臣) 등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원컨대 선대의 유훈(遺訓)를 받들어 다시 서연을 여시고 바르고 곧은 선비를 항상 측근에 두셔서 정사를 보시는 여가에 경사(經史)를 강습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도리를 즐겨 들으시고 덕성(德性)을 함양하여 지극한 도리에 이르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후 재차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전임되었다. 〈신우〉 6년(1380)에 퇴직을 청하여 광주(廣州)의 고원강촌(古垣江村)에 살면서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 두 원(院)을 중건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하였다. 누더기 옷과 짚신 차림으로 일꾼들과 함께 일을 같이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가 높은 벼슬을 지낸 줄 알지 못하였다.
〈신우〉 14년(1388)에 다시 전리판서(典理判書)에 기용되었다가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옮겼다. 당시 여론이 안렴사(按廉使)의 품계가 낮아 직무를 거행할 수 없다고 하자 양부(兩府)에서 위엄과 명망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鈇鉞)을 주어 보내게 되었는데, 조운흘(趙云仡)을 서해도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로 삼았다. 부임하면서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좋은 미끼를 던지면 반드시 큰 고기가 잡히고, 큰 상을 내걸면 반드시 좋은 장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소용없는 은혜를 행하여도 참된 복을 받는다는 말도 있는데, 이는 옳은 말입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안팎으로 근심이 없을 때에도 오히려 또한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바다로는 왜도(倭島)와 가깝고 육지로는 오랑캐 땅과 이어져있으니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의 경계는 서해도(西海道)로부터 양광도(楊廣道)와 전라도(全羅道)를 지나 경상도(慶尙道)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이 거의 2,000여 리이고 바다에는 사람이 살만한 섬이 있는데, 대청도(大靑島)·소청도(小靑島)·교동도(喬桐島)·강화도(江華島)·진도(珍島)·절영도(絶影島)·남해도(南海島)·거제도(巨濟島) 등 큰 섬이 20개이고 작은 섬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토지가 모두 비옥하고 생선과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는데도 지금은 버려두고 쓰지 않으니 탄식만 할 뿐입니다. 마땅히 5군(軍)의 장수들과 8도(道)의 군관(軍官)들에게 각각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주고 천호(千戶)와 백호(百戶)들에게는 패면(牌面)을 주어, 크고 작은 바다 섬을 그들의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면 장수들의 일신(一身)이 부유해질 뿐만 아니라 자손만대에까지 의식(衣食)의 여유가 있을 것이니 사람들마다 어느 누가 스스로 적들과 싸우지 않겠습니까? 사람들마다 각자 스스로 싸우려고 하면 전함(戰艦)을 스스로 갖추고 군량도 스스로 가져와서 유격부대가 되니, 이들을 내보내서 불의에 습격한다면 적들도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며, 민(民)은 부유해져서 〈인구가 늘어나〉 밥 짓는 연기가 서로 이어지고 개와 닭의 짓는 소리도 서로 들릴 것입니다. 민은 생선과 소금의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나라에서는 군량을 실어 나르는 걱정이 없어지니 조상들의 토지는 다시 오늘날에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신우가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려주었다. 조운흘이 주군(州郡)을 관찰하여 기강을 진작시키고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주었으며, 법을 어긴 자가 있으면 추호도 용서하지 않으니 관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신창(辛昌) 원년(1389)에 다시 불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임명하였고 곧이어 동지(同知)로 승진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어 나갔다가 본조(本朝)에 들어와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에 임명되었으나 곧 병으로 사직하고 광주(廣州)의 별서(別墅)로 돌아갔다. 또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는데, 검교는 전례상 녹봉을 받았으나 조운흘(趙云仡)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사람됨이 기이하고 예스러운 뜻을 세웠으며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곧이 곧대로 행하면서 시세에 따라 굽히거나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임종 때에 스스로 묘지명(墓誌銘)을 짓기를, “조운흘은 본래 풍양(豊壤) 사람이고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신하였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자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역임하였으며, 5주(州)의 수령이 되었고 4도(道)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비록 큰 명성과 공적은 없었으나 또한 비루하지 않았다.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의 고원성(高垣城)에서 죽었고 후사는 없다. 해와 달을 구슬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제물(祭物)로 삼아 옛 양주(楊州)의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지냈다. 공자(孔子)는 행단(杏壇) 위에 있고 석가(釋迦)는 쌍수(雙樹) 아래에 있으니, 고금(古今)의 성현이 어찌 홀로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아아! 인생의 일을 마쳤도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