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윤심덕 '死의 찬미' 남기고 투신
1920년이 되면서 이 땅에서도 서양 음악회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최초의 전문 성악가로 꼽힌다.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와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성여고보 부설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음악에 재질 있는 사람들을 선발해서
일본 도쿄의 우에노 음악 학교에 유학을 보냈는데, 윤심덕은 여기에 선발됐다.
우에노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윤심덕은
오페라 아리아와 슈베르트 가곡을 부르며 장안의 화제가 됐다.
당시 신문 기사처럼 눈이 크고, 입이 크고, 명랑한 성격 그대로
자신을 호탕하게 내던져 버리는 윤심덕은 무대에 서기만 하면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화제의 초점이 됐다.
1926년 윤심덕은 연극단체 '토월회'의 '동도'(東道)라는 연극에서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다.
1926년 7월 일본 오사카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메기의 추억'
'망향가'와 함께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사(死)의 찬미'를 녹음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루마니아 작곡가 이온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의 선율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는 염세적 정서로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정작 윤심덕은 그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레코드 취입 직후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에 올랐던
1926년 8월 4일 새벽, 바닷물에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은 "부산으로 향하던 배가 대마도를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전했다.
'현해탄의 정사(情死)'로 보도된 당시 사건의 여주인공이 윤심덕이었다.
함께 투신한 남성은 연극동우회를 조직하고 한국 근대 연극을 이끌었던
김우진(1897~1926)이었다. 이들의 죽음이 알려지자
음반사들은 광고를 내고 "눈물에 싸인 윤심덕의 마지막 노래
'사의 찬미' 불원간 발매 개시"라고 선전했다.
당시의 신문기사
사의 찬미(1926년)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건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1호는 1925년도에 취입된 채규엽이 부른 '희망가' 이다.
2호가 바로 '사의 찬미' 이고 그 다음은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1929년) 이다.
위의 1.2호는 외국곡에다 가사를 붙힌것이고 3호인 황성옛터 는 한국인의 작곡이다.
아래의 동영상에서는 가수 최진희의 노래로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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