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가 말하였다.“보십시오,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루카1,38).
(한국 순교자 대축일/서소문 성지 09/17)
“오소서, 성령님”
2670“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할 수 없습니다”(1코린12,3).우리가 예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할 때마다,성령께서는 미리 은총을 베푸시어,우리를 기도의 길로 이끄신다.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니,우리가 어떻게 그 성령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러므로 교회는 우리에게 날마다,특별히 모든 중요한 활동을 시작하고 마칠 때 성령께 간청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2672기름부음으로 우리의 전 존재에 깊이 파고드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기도의 내적 스승이시다.성령께서는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을 만드시는 분이다.기도로 나아가는 길이 기도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그러나 모든 사람 안에서,모든 사람과 함께 행동하시는 분께서는 같은 성령이시다.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령과 일치할 때 교회의 기도가 된다.
천주의 성모님과 일치하여
2673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는,영광스럽게 되신 외아들의 인성 안에서 우리를 그분의 위격과 결합시키신다.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여,예수님의 인성 안에서,우리가 자녀로서 드리는 기도는 교회 안에서 우리를 예수님의 어머니와 일치하게 한다.
2674“마리아의 모성은 주님 탄생 예고에 믿음으로 동의하시고 십자가 밑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간직하셨던 그 동의에서부터 모든 뽑힌 이들의 영원한 완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된다.”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길이시다.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온전히 투명한 분으로서,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주신다.마리아께서는 ‘길잡이(Hodegetria)이시며,동방과 서방의 전통적인 성화에 다르면, 그 길의 ’이정표‘이시다.
2675마리아께서 성령께 탁월하게 협력하신 사실을 토대로,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에서 드러난 그분의 위격에 초점을 맞추어,천주의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를 발전시켜 왔다. 이 기도를 표현하는 수많은 찬미가와 후렴 안에서 흔히 두 가지 움직임이 번갈아 나타난다.하나는 주님께서 당신의 비천한 여종에게,그리고 이 여종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해 주신“큰일”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는”(magnificat)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어머니께 하느님의 자녀들의 애원과 찬미를 맡겨드리는 것인데,이는 마리아께서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안에서 마치 신부 新婦처럼 취하신 그 인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2676마리아께 드리는 기도의 이 두 가지 움직임은 ’성모송‘에 탁월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리아님 기뻐하소서”(Ave,Maria):
가브리엘 천사의 이 인사말로 성모송은 시작된다.천사를 통해서,하느님께서 친히 마리아께 인사를 건네신다.하느님께서 당신의 비천한 여종을 바라보셨던 그 시선으로,우리는 감히 마리아께 다시 인사를 드리며,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얻으신 그 기쁨을 우리도 누리는 것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천사가 드린 이 두 마디의 인사말은 서로에 의해 그 뜻이 명확해진다.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마리아께서는 은총이 가득하다.마리아께 가득한 은총은 모든 은총의 근원이신 분의 현존이다.“환성을 올려라. ...딸 예루살렘아.... 주 너의 하느님....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스바3,14.17).마리아 안에 주님께서 친히 와 계시니,마리아께서는 바로 시온의 딸이요,계약 궤이며,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다.마리아께서는“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거처”(묵시21,3).“은총이 가득하신”마리아께서는 자신 안에 머무르러 오시는 분,자신이 세상에 낳아 줄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사의 인사말 다음에,우리는 엘리사벳의 이 인사를 우리의 인사로 삼는다.“성령으로 가득 찬”(루카1,41)엘리사벳은,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수 많은 사람들 중 첫 번째 사람이다.“행복하십니다.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에,”“모든 여자 가운데 가장 복되시다.”“아브라함은 믿음을 통해서,”“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복을 받도록”(창세12,3)해주는 사람이 되었다.마리아께서는 믿음을 통해서,믿는 이들의 어머니가 되셨고,세상의 모든 민족은,마리아 덕분에,하느님의 복 그 자체이신 분을 받아 모신다.“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남산 국립극장 09/16)
2677“천주의 성모 마리아님.....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1,43)하고 외친 엘리사벳처럼,우리도 경탄한다.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기에,천주의 성모이시며 우리 어머니이시다.우리는 우리의 모든 근심과 청원을 그분께 맡길 수 있다.마리아께서는 자신을 위해“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고 기도하셨듯이,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신다.마리아의 기도에 우리를 맡겨 드림으로써,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 맡기게 된다.“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청함으로써,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죄인임을 깨달으며,또한 온전히 거룩하신 분,“자비의 어머니”께 호소한다.우리가 살아가는 바로’지금‘,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리아께 맡겨 드린다.당신 아들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처럼,마리아께서는 우리가 죽을 때도 함께 계셔 주실 것이며,우리가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시간에 우리의 어머니로서 우리를 맞아들여,천국에 계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2678중세 서방 교회의 신심은,대중이 성무일도 대신에 드리는 기도로서‘묵주 기도’를 발전시켰다.동방의 경우,비잔틴 교회에는 성모 찬미가와 성모께 위로를 구하는 성모 청원 기도라고 하는 연도 連禱형태가 노래 성무일도로 남아 있다.
2679마리아께서는 완벽한 기도자,교회의 표상이시다.우리가 마리아께 기도하는 것은,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아들을 보내신 성부의 계획에 마리아와 함께 동의하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가 그랬듯이,우리도 살아 있는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분,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어,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고,나아가서 마리아께 기도할 수도 있다.마리아의 기도는 기도를 떠받쳐 주는 것이며,교회의 기도는 희망 안에서 마리아의 기도와 일치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맨발 걷기/인왕산 09/18)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끗끗해져라.
주님께 바라라
(시편27,14).
마지막으로 시인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하여,청중이 용기를 내고 그와 비숫한 상황에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도록 격려한다.그는 주님께 바라라고 두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분명하게 강조한다.“주님께 바라라”는 ‘주님의 응답을 바라라’는 말이다(40,2).‘바라라’를 ‘기다리라’로 번역하기도 한다.기다리는 일은 어렵다.인내심이 부족한 인간들은 하느님이 즉각 행동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기다리기 위해서는 신뢰와 용기가 필요하다.“굳세고 끗끗해져라”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훈계를 줄 때(신명31,6.7.23,참조:3,28)그리고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훈계에 사용된 말이다(여호1.6.7.9.18;10,25).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힘과 용기가 필요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이다.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의 마지막 권고에서 “용기를 내십시오.힘을 내십시오”(1코린16,13)하고 말했다.시인은 청중에게 권고함으로써 자신의 신뢰와 확신을 드러낸다.
시편27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27편의 시인은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그는 원수들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으며,게다가 부모마저도 그를 버릴지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 가운데 있다.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큰 힘이신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이시인은 많은 위험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자신의 현실과 직면하도록 해주시는 하느님께 두려움 없는 신뢰를 표현한다.그는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어둠 속에서 주님이 그의 빛이요 구원이요 요새이심을 고백한다.그리고 하느님과 영속적인 친교 안에 살면서 그분의 보호하심을 누리려는 열망을 표현한다.원수들이 위협하는 큰 시련 속에서 시인의 유일한 소원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다.소원이 있기에 주님을 의지하여 삶의 온갖 두려움을 몰아내듯이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고자 하는 그의 소원은 신앙생활의 큰 힘이 된다.구원을 체험한 그는 다른 사람들도 주님을 신뢰하여 살아가도록 ‘굳세고 끗끗해지라’고 격려한다.이 시편을 통해 우리의 유일한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그분은 우리의 빛이요 구원이며 요새이심을 확인하게 된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전봉순 著/바오로딸)
가톨릭 신자들은 정치에 참여하여 세상 곳곳에 복음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정치 문제에 대하여,혹은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볼 때,복음 정신과 자기 양심에 따라 생활하고 행동해야 하며,정치 활동을 통하여 더욱 정의롭고 인간 존엄과 더욱 일치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이바지해야 한다.그러한 참여는 정치 토론과 입안, 의정 활동에 이바지하고 바르고 타당한 압력과 비판을 함으로써 사회 생활,정치 생활에 절대로 필요한 도덕가치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이 소중한 도덕 가치에 폐해가 생겼고 우리의 정치와 사회는 인간을 거스리고 침해하였다.이렇게 해서 “죄의 구조”가 더 견고해졌음을 상기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사회 교리를 통하여 가톨릭 평신도들이 자기 양심 안에서 도덕적으로 일관성을 지녀야 할 의무를 늘 상기시킨다.교회는 교회의 고유한 임무로서,신자들 특히 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양심을 가르치고 밝혀주어 그들의 활동이 언제나 인간의 완전한 발전과 공동선에 이바지하도록 한다.그리고 교회는 도덕적 힘을 사용하여 촉매와 예언자 세력으로서 행동한다.
정의,자유,생명,존중,타인의 권리 존중 같이 사회생활과 관련된 도덕적 진리를 증진하고 수호하기 위한 진지한 탐구와 실천 노력은 시민 사회와 정치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가톨릭 신자들은 이러한 탐구와 노력을 함께 하면서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가야 한다.
(가톨릭 사회 교리 주제편 138-139쪽 발췌/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기도/나태주)
행복한 날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