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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산&길’ 가이드에 그럴사한 산 하나가 올랐다.
무릇 명품산길이란 산길은 기본이고, 산자락 저변에 역사와 문화가 깔려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상주의 봉황산이 딱 그랬다.
전국에 봉황산이야 많고 많지만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또 지맥 한 자락을 갈아 타니 이쯤되면 산길은 나무랄 데가 없다.
(팔음지맥은 봉황산에서 시작하여 천택산과 팔음산, 천금산, 천관산을 지나 금강에서 맥을 다하는 57.7㎞의 산줄기.)
거기다 들머리에서 살아있는 현대사와 고려시대 유물을 접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게다.
날머리에서 만나는 태실은 또 어떤가?
역사와 문화의 콘텐츠, 그러니까 산행에 인문학이 덧입혀지면서 나무랄 데가 없는 황금코스가 된 셈.
상주의 봉황산(鳳凰山·740.6m)을 부산일보 취재기자는 백두대간의 숨은 진주라 했다.
전형적인 육산으로 주로 대간꾼들이 지나고, 북서쪽 가까이엔 웅장한 속리산과 구병산이 다가온다.
우리는 ‘산&길’에서 안내한 원점회귀 산행코스를 가이드로 삼기로 하였다.
다만 들머리만 조금 비틀어 ‘화령장지구전적비’와 '신봉리석조보살입상‘이 있는 곳에서 출발을 한다.
이 지점은 ‘산&길’ 들머리인 화서면사무소와 불과 200여 미터의 거리.
전적비는 한국전쟁(1950년 7월) 때 화령장 지역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을 격퇴, 첫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
보살입상은 고려시대 전기의 유물로 경북 문화재자료이다.
전적비 뒷쪽 데크계단으로 올라 지능을 따라 대간에 접속할 수 있지만 우리는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가야한다.
천연기념물 제293호로 지정된 ‘반송’으로 수령 500년이 넘은 제왕 소나무다.
날머리에서 만나는 태봉산(343m) 태실은 연산군의 아들 태실.
이러한 황금코스는 딱 준비단계 까지만이었다.
봉황산은 대간꾼들만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었다.
입산을 시작하자마자 거친 산길이 우리를 맞는다.
알바란 계획된 등로를 이탈하는 걸 의미하는 신조어다.
대간 접속구간은 안전시설은 고사하고, 이정표나 안내판이 전무하니 알바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대간구간을 제외하곤 산행내내 길찾는 데만 정신을 집중하다보니 산행재미는 반감되고 등로를 이탈한 회원들을 안내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GPX
너댓번 계획된 등로에서 벗어나 GPS에 의존했으니 약 200m(10여분)는 통계에서 빼야만 정확할 것.
고도표
부산일보 '산&길'의 개념도
화령장지구전적비가 있는 소공원
둥근 모양의 화장실 옥상에는 당시의 전투장면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데크계단을 오르면 '화령장지구전적비'가 있고, 381.8m봉을 거쳐 백두대간 접속로가 이어져 있다.
6월은 보훈의 달.
살아있는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이 자리에 새겨져 있다.
화령장지구 전투는 국군 17연대가 남하하는 북한군 제15사단을 격퇴해 낙동강 방어선 구축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우리 국군 단독 최초의
승리이며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값진 승리였다.
관심없는 회원들은 아래에서 서성대고 있어 갈 길을 가리켜주고, 나는 전적비 우측 '신봉리석조보살입상' 옆의 비석을 훑어본다.
'황을흠총경순직비' 이다. '겨레의 안녕을 위하여 몸 바치다.'1950년 10월 12일 상곡리에서 전사
그 옆으로 김용환경위님, 김삼만대위님의 숙직비와 순국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평산 서씨 송덕비' 우측으로 나무숲에 가린 '화령의 노래비'도 있다.
1> 우복동 어디메냐 경상도라 화령땅은
상주에서 칠십리요 하늘에서 칠십리라
어서가세 바삐가세 우리님이 기다린다.
태평가 노래하며 여기에서 살리랏다.
<2,3절은 생략>
각종 비석들이 나란히 도열한 옆으로 비각이 보인다.
비석들은 목사 아무개의 영세불망비 등이다
비각안에 돌덩이 하나.
'신봉리석조보살입상'이다.
상주 화서면 신봉리 석조보살입상(尙州 新鳳里 石造菩薩立像,경북 문화재자료 제126호)은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이다.
신봉리 국도변에 서 있는 높이 230㎝의 보살상으로, 넓적한 1매의 화강암에 돋을새김 하였다.
머리에는 3면보관을 쓰고 있으며, 관에는 작은 부처 3구와 관대(冠帶)장식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나 윤곽이 풍만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하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옷주름이 간결하고 두껍게 표현되어 있다.
불신의 뒷부분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형태의 머리광배와 배(舟)모양의 몸광배를 1줄의 굵은 선으로 구분했다.
간결하면서도 장식성이 적고 둔화된 표현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안내판을 일별, 이제 서둘지 않으면 안된다..
'명실상감한우 화서점'갈비집과...
화령제일교회 사이로 난길을 따라 일행들은 이미 꽁무니를 감췄다.
교회입구의 반송안내판.
신설된 왕복 2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오늘 우리가 걸을 백두대간 마루금이 선명하다.
아스팔트도로는 좌로 크게 휘어지고, 직진 저수지 방향으로 황토색 걷기길이 조성되어 있다.(반송 산책로)
돌아본 이정표 지점.
저수지 중앙으로 데크로드가 조성되어 있어 아름답다. 일행들은 벌써 저수지를 지나 우왕좌왕. 고함을 질러 빠꾸빠꾸~~
저수지 뚝길을 좌로 돌아...(중앙에 봉황산이 보인다)
정자에서도 좌로 튼다. 부산일보 가이드대로 화령초교 담벼랑을 따라 포장길을 곧장 올라오면 빠를 것.
마을안길의 노거수를 올려다 본다. 오래된 마을의 오래된 나무다.
포장도로에서 우측 반송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니 엄청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 곳에 귀품있는 소나무 한 그루.
상주 상현리 반송(尙州 上縣里 盤松, 천연기념물 제293호) 이다.
반송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소나무와 비슷하지만 밑동에서부터 여러갈래로 갈라져서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없고, 전체적으로 우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반송의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15.3m, 둘레는 5.17m∼2.23m정도이다.
밑동부터 크게 둘로 갈라져 있어서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서 한 그루 같기도 하고, 두 그루처럼 보이기도 하며 나무의 모양이 탑같이 보인다고 해서
탑송(塔松)이라고도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신성하게 여겨 나무를 다치게 하는 것은 물론 낙엽만 긁어 가도 천벌을 받는다고 믿었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며 이 나무를 소중히 보호하고 있다.
단체사진
다른 각도
안내판의 글자는 낡아 식별이 어렵고...
넓은 공원엔 돌탑들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과 화장실은 넓고 좋지만 대형차는 여기까지 올라 오기는 어려울 것.(마을 도로 협소)
불과 100여 미터의 작은 돌탑이 있는 삼거리 지점(봉황산 꿀벌농원 갈림길)을 지나치면서 첫번째 알바를 한다.
계속 길을 따라 가게되면 제법 반듯한 등산로가 있어 쉽게 대간능선에 붙을 수 있었을 것. <푯말 3지점>
하지만 부산일보의 가이드를 따르기로 했으니 금방 다시 돌아와...
산과 밭의 경계인 풀밭 비탈 산길로...
이슬을 바짓가랭이로 쓸며 일렬로 진입을 한다.
비탈길이 끊어지며 좌측 묘지를 거슬러 산자락으로 올라 붙는다.
'입산벌목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다.
거의 묵은 산길엔 시그널도, 선답자들의 흔적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가로 지르는 제법 반듯한 등로를 만나지만 무시하고 직등으로 바로 오른다. 오늘 산행은 부산일보 '산&길'의 가이드를 철저히 따르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가로 지르는 등로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면 우리가 오른 462봉 아래의 안부로 곧장 올라설 수 있었을 것. <푯말 2지점>
잡목을 헤치고 백두대간 이정목이 있는 대간 능선에 올라섰다. * 갈림길 또는 탈출로엔 이처럼 '백두대간' 이정목이 서 있다.
아까 산길을 오르면서 만났던 가로지르는 등로에서 좌측으로 진행하였다면 이곳으로 올라올 수 있었을 것.<푯말 2지점>
동그라미의 이정목
반송에서 임도를 따라 곧장 올라와서 산길로 들면 닿는 지점.<푯말 3지점>
낡은 이정목이 있는 곳에서 잠깐 숨고르기를 하고...
산불감시초소를 지난다. 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579.3봉은 '두고봉(404.8)' 갈림길이기도 하다.
나무숲 사이로 도드라진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봉황산 직전에서 북으로 뻗어내린 또 다른 능선의 투구봉(783.6)과 뒤로 두루봉(874)인 듯. 또 그 뒤 우측으론 작약지맥이 큼지막한 마루금을 그리고 있다.
작약지맥과 그 뒤로 대간길.
또다시 바라보는 산맥들.
봉황산에 섰다. 상주시의 특색있는 자연 정상석에 한자로 백두대간이 선명하다.
정상에서 한동안 머물며...
백두대간 안내판과 봉황산의 내력을 살펴본다.
오래전 봉황새가 날아들어 오랫동안 살았으며,봉황머리인 정상에서 양 날개를 펼친 모습이 봉황을 빼어 닮았다하여 봉황산이라 불린다고...
이제 팔음지맥으로 갈아타야 한다.
정상석 뒤론 백두대간이 올곧게 이어지고 우리는 좌측-정상석 좌측 옆뽈떼기-으로 내려서지만 길은 혼미하다.
어렴풋이 난 산길을 이리저리 길냄새를 맡으며 GPS와 나침판을 이용(정남향)하여...
그제사 정확한 하산길인 팔음지맥에 섰다. 안도하며 찍은 기념사진엔 일행들의 안도의 모습이 역력하다.
헬기장을 지나고...
폐헬기장을 지나면...
무덤 갈림길에선 우측으로 올라서야 무덤이 보인다. 우리는 곧장 직진으로 내려가버려 또 알바를 하고 만다.
되돌아 올라와 찍은 사진에서 우측으로 살짝 올라야...
보이는 무덤. '통덕랑 이공'무덤이다. 빠꾸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한참이나 내려간 일행들은 그 길로 곧장 하산을 하고 말았다.
봉분 낮은 무덤 몇 기를 지나며 종이 시그널을 깔아보지만 역부족.
끊어질 듯 끊기지 않고, 이어지다 끊겨버리는 비탈에서 급격한 내리막 절벽길도 만난다.
절벽이라지만 바위가 아닌 흙비탈로 낙엽과 함께 상당히 미끄러워 조심스럽다.
그 새 한참이나 알바한 일행들이 원대복귀하고, 무덤갈림길에서 곧장 내려간 일행들(알바꾼)따라 후미팀들도 그 길로 유도하였다.
이 길의 절벽지대가 길찾기도 쉽지않고 미끄럽고 난해하기 때문이고, 또 그 길이 상대적으로 좋기 때문이다.
내려갈 능선 끄트머리 봉우리에 갈색 산불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등로는 잡목이 엉켜 거칠기 짝이 없지만 GPS를 이용 능선을 고집하여 산불의 상흔이 아직 남아있는 바위전망대에 섰다.
산아래 놋점마을과 그 뒤...
우측으로 구병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위에 붙은 부처손. 부처손은 항암작용은 물론 어혈을 제거하고 혈액을 맑게 해주는 만병통치 약재라고 한다.
잘 가꿔진 묘지 아래로 전원주택이 보이면서...
무동저수지가 보이는 도로에 내려선다. 저수지 건너로 보이는 작은 동산이 태봉산이다.
돌아서니 필자가 내려온 산길(화살표)과, 우측으로 대부분의 회원들이 내려온 무동마을길.
태봉산을 향하여...
무동저수지 뚝길을 걸어서...
뒤돌아보니 멀리 봉황산이 보이고,우리가 내려온 하산길도 가늠된다.
저수지 아래의 태봉산 오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
정상으로 오르는 데크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태봉산 오르면서 뒤돌아본 모습엔 필자가 내려온 전원주택 하산로와 하산 능선이 일목요연하다.
흡사 눈사람을 닮은 듯,항아리를 닮은 듯, 태봉정 정자 옆에 바위 덩어리가 서있다.
태봉산 정상 '화서면 상현리 태실(胎室은 상현리 377-1번지에 있는 연산군 왕자의 태실이라고 한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이형렬(李亨烈) 전례이사는 연산군의 둘째 왕자로 주장한다.
1930년대 일본인이 태를 담았던 도자기는 꺼내 가고 태실은 나뒹굴고 있던 것을 상주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분원장 이일재 씨가 사비를 들여
1994년 다시 제자리에 세워 놓았다.
정남향의 9부 능선에 있는 금표비 뒷면에는 ‘왕자태실’이라고 새겨져 있다.
태실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부 둘레 300cm. 총 직경 95cm, 반원형 내부의 내부 직경 51cm×두께 22cm×높이 55cm, 하부의 둘레 345cm. 총 직경 104cm,
내부 직경 54cm×두께 25cm×높이 70cm로 총 높이는 125cm다.
하부의 밑부분에 직경 4cm의 구멍이 뚫려 있다. <화서면사무소>
요리조리 살펴보지만...
아무런 특색이 없다. 글자를 새겼음직한 면을 가까이 보지만...
확인 불가하고...
* 산행중에 여러번 접한 태실.(성주의 세종대왕과 여러 왕들의 태실을 비롯하여 팔공산 은혜사 인조태실,속리산 순조태실,전주 예종태실 등등)
다만 태봉정 정자 건립에 관한 비전문가의 설명만 짧게 들어 있다. 이 태실은 연산군의 태실이 아니고 그의 아들 태실이라고 하는데...
태봉정(胎封亭) 팔각정자
올라올 때와 반대편 데크계단을 따라 내려서니 금방 우리 버스가 보인다.
태봉산 계단 아래엔 웰마트가 있고...
계단 좌측 옆엔...
화령장 목욕탕이 있다. 때이른 더위에 씻을 만한 곳이 없어 웰마트에서 세수만으로 마감을 하였지만 한덤님은 화령장을 이용하였단다.
우리 버스는 폐 주유소인 '서상공인중계소'에 대있다. 이 주차공간은 산행을 마감하고 내려온 우리의 휴식공간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주유소의 시설물은 햇볕을 막아주는 충분한 구실을 하였고, 또 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간이 화장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산길에서 훌러덩 미끄러졌다.
얼떨결에 벌떡 일어났지만 다음날 보니 허벅지에서 부터 엉덩이까지 소덕석만하게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걸음도 어거정거려야 하고,또 앉을 때마다 조심스럽다.
-산 동안거에 들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낙엽자리인가
바스락 우두둑 골절된 가랑잎들
고요의 뼈를 들추는 경계를 지운 산
나를 불러들이고 허둥지둥 지나온 길
돌아가는 길 또한 오리무중,
누가 누구의 길을 동행하고
누가 누구의 삶을 대신할 수 있는가
네가 내게 마음이 없으면 오지 않을 터
내가 네게 길이 없으면 가지 못할,
눈을 뜨면 어느새 산 빛 풀빛 본연의 모습
전광석화 번쩍 오가는 시간의 화살도 잠시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네, 그렇게 낡아 사라지네
사람들아, 禪에 든 저 깊은 산 깨우지 마라
<송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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