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오십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콘디아코시온'은 직역하면 '이백 규빗'이라는 뜻이다. 1규빗이 약 45cm에 해당된다고 볼 때 뭍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약 90m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배...끌고 와서 - 베드로외에 물로 뛰어내린 제자는 없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운반해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앞절에서 밝힌 바대로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물을 들어올릭 수 없어 뭍에까지 끌고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작은 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로이아리온'은 '플로이온'에 비해 작은 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큰 배는 뭍에 밑창이 닿기 때문에 작은 배로 고기 그물을 예인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이 앞의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여기서도 3절의 '배'와 동일한 배를 가리킨다고 본다.
[요 21: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에게로 왔을 때 거기에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를 하느라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한 배려를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생선과 떡을 구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며 그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나눈 이 아침의 공동 식사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친밀한 교체의 시간이며, 소명을 부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요 21:10]"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명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예수께서 미리 준비해둔 생선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물에 걸린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다. (2)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 전에 고기 잡은 것을 처리하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본다.
전자의 해석은, 그것이 예수께서 마련한 식사의 불충분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바, 예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생선으로도 충분히 제자들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해석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은 시급하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3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주의깊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요 21: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시몬 베드로가...큰 고기가 일백 쉰세 마리 - 그물에 든 고기를, 끌아올려 셈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제사는 역시 베드로였. 본문에는 베드로 혼자 그 일을 다 한것으로 볼 수도 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6절과 관련지어 볼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잎뒤스'는, 묘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하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물고기 그림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편 요한은 여기에서 잡힌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이 15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많은 해석을 야기시켜 왔다. (1)어거스틴은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엿붙여서 이 153이라는 숫자는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수를 가리킨다고 했다. (2)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100을 이방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3)고대의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했는데 본문의 이 숫자는 인류 전체의 인종을 상징 한다고 본다. (4)사도들에 '낚인' 즉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5)단지 많은 수의 고기가 잡혀다는 것 그리고 153이라는 숫자는 다만 사실의 보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위에 열거한 학자들의 제 견해들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기가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졌어야 마땅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이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편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고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통일성을 말해준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전되어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 21:12]"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조반을...묻는 자가 없더라 - '조반'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리스테사테'는 하루 중 첫 식사를 뜻하는데 후대에는 눅 11:37에서처럼 '만찬'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어떤 학자에 의하면 1세기의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끼의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아리스톤'이 바로 그 첫번째 식사로 대개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먹었지만 때로는 이른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먹는 두번째 식사는 '데이프논'으로 저녁 식사에 해당한다.
식사를 위해 제자들이 와서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이미 제자들은 자기들을 식사에 초대하신 이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자기들에게 두번이나 나타난 바 있던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53마리의 생선이 분명한 현실이듯 지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려 하신 주님의 현존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감히 예수께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한 듯이 보인다.
[요 21: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생선도 - 본절에서 '예수께서 가셔서'라는 표현 가운데 '가셔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분의 떡과 생선을 가져오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갔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셨다'는 의미가 특수한 어법인지 분명치 않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다. 어떠한 축복의 말씀도 없고 함께 식사를 했다는 언급도 없다.
따라서 이 식사를 굳이 성만찬과 관련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편 혹자릉 이 식탁에서 오병이어의 이적과 같은 형태의 이적이 또 한번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본절의 '생선'에 해당하는 말은 9절의 '와사리온'과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11절의 '큰 고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생선을 가져오라 명하신 목적이,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잡은 것을 더 가져오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요 21: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세번째로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서 뺀 것은 그녀가 제자가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세번의 현현은 다른 신약성경들과 관련시켜 볼 때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요한은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서에서의 순서만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