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의식수준의 향상"이다.
의식혁명 24. 결론
이 책에서 제시된 자료를 철저히 흡수하면
사람의 의식수준이 평균 35점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구상의 평균적 인간생애에서의 의식진보는
5점에 불과하므로 개인적 앎의 그런 증가는
그 자체로 막대한 이득이다.
그리고
고등물리학과 비선형 동역학이 보여준 것처럼
일체의 개인적 상승 역시
세상 모든 사람의 의식을
어느정도 끌어올린다.
보다 의식적으로 되는 것,
이것은 사람이 세상에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게다가
그 선물은
잔물결 효과를 통해
그것이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전체로서 인류의 의식수준은
여러세기 동안 위태로운 190에 머물렀지만
1980년대 중반 그것은 갑자기 희망적 수준
207로 뛰어올랐다.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은
이제 그곳에서 상승행진을 계속해 나갈
든든한 터전을 딛고 서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약속은
결코 이르지 않게 온다.
오늘날 우리가 토론한 주제들 중에서 많은 것이 뉴스매체에 폭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정치적 야만행위의 극단까지 가능 종교의 왜곡, 도를 더해가는 범죄의 악행, 아이들이 폭력에 휩쓸리는 것, 정치의 도덕적 혼란, 사교의 엽기적 폭력, 이 모든 주제는 사회적 경향으로서의 거짓말의 만연과 동료인간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책임에 관한 합의 결핍으로 물들어 있는 어떤 배경막위에 나타난다. 이 사회적 혼돈과 마비는 판단 근거를 이루는 지침이 부족한데서 비롯된다.
사실상
도의의 과학에 대한 소론에 해당하는 이 책이
그러한 공백을 메우는 한걸음을 떼었기 바란다.
우리가 도의라는 말로써 언급하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협소한 도덕주의적 심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최상의 행동과 관련된 판단과 평가가 나오는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인 근거다.
어떤 사회적 틀안에서
우리는 200수준이하로 떨어지는
일체의 정치제도에 대한
수동적 복종을 거부하기를
확실히 선택할 수 있다.
대신 우리는
새롭게 발달한 우리의 검토 및
교정능력을 그것에 적용해야 한다.
예를들면
이제는 공직자를 선정하는
명확한 기준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공직은 효율적이기 위해
일정한 최소한의 앎의 수준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200이하의 정부관리라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만들것이다.
더욱 큰 사회문제는 인류 행동의 어두운 면에 비추어 사람이 어떻게 연민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이곳은 상대적 세계다.
만인은
자신의 진실수준에서 행위하며
따라서
자신의 행위와 판단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광신자들을 그토록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정당성이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진짜 위험은
백인우월주의(150으로 측정)같은
노골적 맹신에서 오지 않는다.
그런 손상은
적어도 감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회에 대한 정말 중대한 위험은
슬그머니 심령을 정복하는
소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동승안에 놓여있다.
그 과정에서
부정적 끌개장은
수사와 상징조직을 통해 은폐된다.
게다가
의식을 무너뜨리는 것은
명백한 부정적 입력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에 동반되는 에너지 장이다.
예를들면,
사이비 철학의 숱한 유행서적들의 극단적 부정성은
그 책들을 테스트해보면 분명하다.
그러나
사전 경고를 받는 것조차
그런 책을 읽을 때 활성화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에 대한
무의식적으로 동승으로부터
우릴 지켜주지 못한다.
사람은
책에 지적으로 논박함으로써
심령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그 자료를 지적으로 거부한 뒤까지 지속되는
심원한 부정적 효과가 발휘된다.
그러한 부정적 영향력 안에는
눈에 띄지 않게
우리의 심령에 침입하는
숨은 바이러스가 있는 듯 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적 통찰이나
종교의 속성을 띠고 있는 자료와 접할 경우에는
흔히 경계를 늦춘다.
우리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가증스러운 범죄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을 잊는다.
폭력적 사교는
명백히 혐오스러울 수 있지만
독실함으로 가장한 신념체계는
훨씬 더 교활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끌개장의 소리없는 동승을 통해
하락시키기 때문이다.
그때 최선은
악을 두려워하거나
악과 맞서 싸우지 말고
그저 피하라고 우리에게 이르는 전통적 지혜에 유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악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면 청년들은 낮은 에너지 끌개장으로 인해 타락한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분별을 가르치려 한 것 때문에 처형당했지만 그의 호소는 남아있다.
모호함은
어둠을 공격함으로써가 아니라
분별의 빛을 강하게 함으로써 흩어 놓을 수 있다.
최후의 쟁점은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도덕적 분별의 힘을 가장 잘 배양하고
보존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우리의 탐구여정은 마침내
우리를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각성으로 이끌었다.
인류는
진실과 거짓의 차이를 알아볼 능력을
겸하고 있다.
사람은
이 앎에 겸허히 내맡김으로써
사전에 대비할 수 있다.
자신이 속기 쉽고 감각의 유혹에 넘어가며
매혹적인 것에 쉽게 현혹된다는 점을 인정할 때
우린 적어도 식별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이원성의 세계에서 사람은
적대적 자극이 있을 때
몸의 현저한 약화를 통해
파괴적인 것을 즉각 탐지해낼 수있는
그리고 그렇지 않았으면
무지했을 마음에
그것을 신호해줄 수 있는
어떤 의식을 부여받았다.
궁극적으로
지혜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는
단순한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 기법을
자주 실행할 때
진실과 거짓에 대한 영적 맹목은
자라나는 직관적 통찰력으로
점차 대체될 수 있다.
일부 운좋은 극소수는
천부적 명민함을
타고 태어나는 듯 하다.
그들의 삶은
계속 명료하며
부정적 동승으로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에게 삶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최면술처럼 작용하는
파괴적 끌개장이 가한
손상을 복구하는 데 소모해왔다.
단 하나의 중독에서 회복되는 데
생애의 태반이 지나갈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이며
소리없이 치명적인 중독은 부정(denial)에 빠지는 것인데,
그것은 지적허영을 통해 우릴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지성은
그 과대망상과는 달리
거짓을 알아볼 능력이 모자랄 뿐 아니라
식별력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필요한 힘이
현격히 모자란다.
지적 공론을 담은 방대한 소장서적들에 비추어볼 때
사람이 자랑하는 이성의 능력에
결정적 식별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손한가?
철학의 전분야는
인간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에 대한
가장 단순한 인지에 이르기 위해
수천년간 벌여 온 투쟁과 실패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다면
토론은 오래전에
어떤 합의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성이 이러한 기본적 결론을
믿을만하게 도달할 수 있다고 해도
부정적 장들의 효과를 중단시킬 힘은
여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일반적 인간행동에서 볼때
분명하다.
지성이
동일한 위력에 최면이 걸린 채
갖가지 그럴듯한 구실을 몽상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을
여전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자멸적이라는 것을 지적으로 인식하고 있을때조차도
그 지식은 어떠한 것이든
필요한 억지효과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중독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그런 중독을 통제할 힘을 가져다 준 적은
결코 없었다.
성경에는 보이지 않는 위력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얘기가 있다. 금세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광선이 무해해 보이는 물체를 통해 소리없이 방출된다는 것을 배웠다. 라듐의 발견자들은 그러한 각성에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바쳤다. 뢴트겐의 엑스선은 치명적이다.
방사능 방사와 라돈은
소리없이 죽인다.
우리를 파괴하는
끌개 에너지 장들은 똑같이 보이지 않고
그 못지않게 강하지만
훨씬 더 미묘하다.
사람이 뭐에 씌였다고 할때
그것이 뜻하는 바는
그의 의식이 부정적 끌개장에 지배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같은 정의를 통해 우리는 사회의 전 부문이 그토록 철저하게 "뭔가에 씌여"서 자신의 동기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천국이나 지옥을 숭배하며
그러다 결국에는 어느 한쪽이 종이 된다'는 금언이 있다.
지옥은
심판하는 신이 지워준 조건이라기 보다는
사람 자신이 내린 결정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말하자면
지옥은
부정적인 것을 끊임없이 선택하여
스스로를 사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행동의 최종적 결과다.
깨달은 존재들은
항상 일반대중을
꿈속에 있는 존재로 묘사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위력에 휘둘리며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의 삶의 긴 시간을
그런 사실에 대한 절망속에서 보낸다.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의 짐을 덜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고해를 통해 위안을 구한다.
삶이라는 천은
자책으로 직조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런 파괴적 영향력에 걸려들게 된 이들에게
구원은 가능할까?
사실 단순히 과학적 관점에서 볼때도
구원은 정말로 가능하다.
그것은
진실로 사랑하는 생각의 에너지는
부정적 생각이 갖는 에너지보다
엄청나게 강하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보증된다.
따라서
사랑과 기도라는 전통적 해결책은
훌륭한 과학적 근거를 갖는다.
사람은
자신의 본질안에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존재는
우리가 온통 짊어지고 있는
어떤 괴로움이다.
우리에게는
태어나게 해달라고 청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 뒤이어
우리는 그토록 한계가 커서
삶을 고양시키는 것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을
거의 구별하지 못하는
어떤 마음을 상속받았다.
삶의 투쟁전체는
이 근시안을 초월하는데 있다.
우리는 의식이 이원성을 극복하고
더이상 지상에 매이지 않는 지점까지 발전하기 전까지는
존재의 높은 수준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를 무지의 어둠 바깥으로 인도하는
타고난 나침반을 마침내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것은
초월하려는 우리의 집단적 의지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동안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한
교활한 지성의 덫을 우회해 갈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어떤 것이 필요했다.
그 나침반(근육테스트)은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뿐이다.
그것은
우릴 강해지게 하는
하늘나라와 정렬된 것이 무엇이고,
우릴 약해지게 하는 지옥과 정렬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 에고는
실제로 내가 전혀 아니다.
인간 에고는 그것일 뿐이다.
이 환상을 꿰뚫어 볼 때
어떤 끝없는 우주적 농담이 드러나는데,
그 농담에서는
인간 비극 자체가 코미디의 일부다.
인간 경험의 아이러니는
분리된 개별적 나의 환상을 보존하기 위해
에고가 얼마나 지독하게 싸우는가에 있다.
하지만
분리된 개별적 나는
형이상학적 불가능일 뿐아니라
모든 괴로움의 원천이다.
인간 이성은
끊임없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설명자체는 고급 코미디이며
사람이 자신의 뒤통수를 보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그러나
에고의 허영에는 한계가 없으며
에고는 의미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바로 그 시도에 의해
한층 더 부풀게 된다.
에고와 동일시하는 마음은
정의상으로
실상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마음이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마음은 자신의 환상적 본성을 인지한 순간
곧장 저절로 녹아버릴 것이다.
마음이
에고를 초월한다는 역설을 넘어서야 있는 것은
그것의 무한한 절대성안에서
우뚝하고 자명하고 찬란하다.
그 다음에는 모든 말이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아마도 서로의 맹목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그 다음에 평화는
우리의 확실한 미래일 수 있다.
우리의 지상에서의 목적은
여전히 모호할 수 있지만
앞에 놓인 길은 분명하다.
인류의 의식수준이
마침내 200을 넘은 상태에서
우리는 인간문명 전체에 큰 변형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지식에 대해
그리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점점 더 책임지게 되기 때문이다.
좋든 실든 우리는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집단적 앎의 진화에서 우리는
우리가 의식자체의
청지기역을 맡을 수조차 있는 지점에 와있다.
인류는
더 이상 무지의 대가를
수동적으로 치르는 것을 감수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공유의식은
새로운 수준(207)으로 상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부터
사람은 더이상 어둠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다.
그때
그의 운명은
확실할 수 있다.
첫댓글 이 시대부터 사람은 더이상 어둠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다. 그때 그의 운명은 확실할 수 있다.
고맙습니다
지혜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는 단순한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인류의 의식수준이 마침내 200을 넘은 상태에서 우리는 인간문명 전체에 큰 변형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지식에 대해 그리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점점 더 책임지게 되기 때문이다. 좋든 실든 우리는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집단적 앎의 진화에서 우리는 우리가 의식자체의 청지기역을 맡을 수조차 있는 지점에 와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