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통선지역 신탄리역,철원(도피안사,포충사) 지역 나들이 후기-----
2002년 10월 27일 15시 ~ 2002년 10월 27일 21시까지
☞
이번에 가본곳 (* 밑줄 친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장소로 바로 이동합니다.)
1. 서울 도봉동
2. 양주군 덕정리(회천읍)
3. 경원선의 종점 신탄리역
4. 정적이 감도는 백마고지,노동당사
5. 민통선에 있는 신라시대 사찰 도피안사
6. 금개구리가 산다는
도피안사 3층석탑
7. 철원읍 화지리
8. 포충사와
김응하장군 묘정비
9. 신탄리역
10. 의정부역
1.
10월 27일 일요일...
그날따라 날씨가 엄청 추웠다. 거기에다가 엄청난 바람까지..
오후 2시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이번 나들이는 최근 화재가 되고 있는
도피안사(到彼岸寺) 3층석탑내에 살고 있는 금개구리를 볼겸 해서
평소에 가고 싶었던 도피안사를 관람하고 간만에 북쪽 민통선지역도 살펴볼겸 해서 가게 되었다.
중랑천(中浪川)위에 걸린 노원교(蘆原橋)를 건너서 도봉동(성황당)정류장까지 걸어갔다.
거리는 약 1.2km정도 된다.
도봉동(성황당)정류장에서
덕정리로
가는
대원여객 소속 서울시내버스 13-3번(양주군
덕정리↔고암리↔독바위↔
마라니↔덕고개[고주내]↔마전리↔양주군청↔의정부시장↔장수원↔도봉동↔수유리↔돈암동↔혜화동↔종로5가)을
타고 도봉산역을 지나니 의정부시(議政府市)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고..
장수원,회룡역,병무청,의정부시장,하동촌을 지나니 이제부터는 양주군(楊州郡)땅이다.
주내역,양주군청을 지나 오른쪽 포천방면 도로로 진입..
마전리부터 평범한 2차선도로가 펼쳐진다.
가을풍경을 바라보며 웅달말,광사리,덕고개,만송교를 지나서 왼쪽 덕정리 방면으로 진입..
마라니,독바위,고읍리,덕정주공단지를 지나 3시에 덕정역(德亭驛)에서 내렸다.
덕정역이 있는 덕정리(德亭里)는 양주군 회천읍(楊州郡 檜泉邑)에 중심지이다.
(서울시내버스 13-1,13-2,13-3번을 타고 서울에서 덕정리까지 갈 경우 운임은
1000원이다.
나는 그냥 카드한번
찍고 왔음)
덕정역에 둘어가서 15:35분에 있는 경원선 신탄리행 통일호 승차권을 구입...
신탄리까지는 1200원이다.
2. 덕정역사(驛舍)내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 10여명 정도가 맞이방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로 시간을 때우다가 15:30분에 개표구 문을 열고 열차 타는 곳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은 졀라 춥군...
15:34분이 되자 동두천,신탄리 방면 승객들이 슬슬 승강장으로 나오고..
15:35분에
의정부를 출발하여 신탄리역으로 가는 cdc 통근형 통일호 열차가
역내로 들어온다.
열차내에는 승객들이 졀라 많았다. 할 수 없이 입석으로 가야 되는군..
15:36분 열차는 출입문을 닫고 덕정역을 출발...
동두천역,소요산역,초성리역을 지나 그 유명한
한탄강(漢灘江)을
건넌다.
한탄강에 유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옛날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남북분단 이후 북으로 끌려가던 인사들이 여기서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한탄강이라고도 하는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한탄강역을 지나 전곡읍에 중심인 전곡역에 이르자 사람들이 많이 내린다.
여기서 자리 하나 차지해서 앉고..
전곡역을 출발하여 통현리를 지나 연천역(漣川驛)에 도착..
연천역을 지나서부터는 민통선과 가까워서 그런지 썰렁한 벌판이 펼쳐진다.
인가도 드문드문 있고. 대부분 썰렁한 논,밭,산들과 군사시설등이 보일 뿐이다.
신망리,대광리역을 지나니 이건 완전 썰렁 그자체이다.
경원선 옆으로 3번국도가 펼쳐져 있지만 지나가는 차량은
별로 없다.
16:35분경에 남한쪽 경원선(京元線)에 북쪽 종점인
신탄리역(新炭里驛)에
도착했다.
(-> 처음 화면으로 가기)
3-1. 신탄리역은 그냥 평범한 시골역이다.
몇년전만 해도 그냥 조용하던 시골역이었으나, 2000년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와
'신탄리역↔철원,동송읍'을
운행하는
버스노선이 생김으로써 이용객들이 증가, 그리고
연천군청에서 신탄리역부근 고대산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많은
등산객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민통선과도 아주 가까워서 가까이서 북한땅을 보려는 사람들(실향민
포함)과
백마고지,노동당사를 관람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신탄리역은 일약 관광지가
되어버렸다.
보통 신탄리역에 좀 머물다가 바로 의정부로 가는 관광객들도 있으며, 철원,대마리로
가려는 지역 주민들과고대산을 찾는 등산객들, 백마고지,민통선지역을 둘러보려는 실향민,
관광객들까지..
일약 유명해진 이 신탄리역은 관광객들과 열차 이용객들을 위해서 역사내에 소규모 동물사육장, 옛날식
정원, 온갖 분재, 여러가지 장식품들을 만들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신탄리역의 역사는 경원선(서울↔원산)이 개통되면서 시작된다.
1913년 7월 10일 신호장으로 영업을 시작했으며 1945년 8.15해방과
동시에 북한땅에
속했다가 1951년 9월 28일에 서울수복으로 이지역도
탈환하게 되고 1954년 7월 1일
보통역으로 승격되었다. 지금의
역사는 1961년 12월 30일에 완공되었으며 1971년
11월 3일에
철도 중단점 표지판을 설치하여 경원선 최북단역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휴전선으로부터 약 4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 신탄리역 모습
(뒤에 보이는 산이 고대산)
3-2.
신탄리역 접근 방법..
①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
1. 서울에서 3번국도로 계속 직진(의정부,덕계리,동두천,초성리,전곡,연천,대광리)하면
신탄리역이 나온다.
②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 (2002년 11월 현재)
의정부역에서 신탄리행 통일호 열차가 매시 20분에 출발한다.
소요시간은 1:15분정도, 운임은 1400원이다.
의정부발 신탄리행 통일호 열차의 주요 정차역은 주내역,덕정역,동두천역,동안역,소요산역,초성리역,한탄강역,전곡역,
연천역,신망리역,대광리역이다.
3-3.
신탄리역주변 볼만한 곳..
신탄리역 뒤에 자리잡은
고대산
(해발 832m)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는
백마고지(白馬高地)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노동당사(勞動黨舍)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피안사(到彼岸寺)
* 신탄리역에서 1일 1회 정도 안보관광지(백마고지,월정리역,제2땅굴,노동당사)를
운행하는 관광버스가 운행함.
자세한 내용은 ->
문의전화 : 031-834-8951
4. 신탄리역에서는 필자이외에도 수십명의 승객들이 내렸다.
동시에 고대산 등산객들과 지역주민등 수십명이 열차를 타기위해 타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개표구를 지나서 역전광장으로 나왔다. 뭐 광장이라고 할것까지는 없지만..
역전 광장주변에는 가게와 식당 몇곳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 집들은 모두 1층 아니면 2층이다.
역전주변만 좀 활기가 있을 뿐 마을 외곽지역은 썰렁했다.
역전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철원,동송으로 가는 군내버스 시간표를 확인하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16:40분에 철원읍으로 가는
재일교통 소속 철원군내버스
'신탄리↔대마리↔화지리↔동송읍,이평리'가 온다.
버스는 역전 광장으로 들어와서 승객들을 하차시킨 다음 승객들을 태웠는데 꽤 많이 타는군..
필자는 이 노선을 3번째
타본다. 신탄리역도 5번째 와보고..
올해 정월 초하루에 친구넘과 같이 눈덮힌 백마고지에 갔었을 때도 이 쪽으로 왔었다.
벌써 옛날일이군.. 쩝..
차에 오르면서 도피안사까지 얼마냐고 물어보니
1000원이라고
그런다.. 허걱~
이 차는 16:50분에 신탄리역을 출발하는데 이곳에서 매시 50분마다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운행지역은 철원,동송읍(이평리)과 지포리(신철원)이다.
16:46분이 되자 버스는 지정시간을 어기고 신탄리역을 출발..
신탄리 마을을 벗어나서 다리를 하나 건너니 이제부터는 황량한 산과 벌판이 나를 맞이한다.
말그대로 황량 그자체이다.
☞
그런데 여기서부터 민간인통제지역(民間人統制地域) 즉 민통선지역이다.
보이는 것은 그저 철조망과 군부대, 군대시설뿐.. 사람들의 인적은 아예 없다 싶이 했다.
그리고 이 국도(3번국도)로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어 썰렁하다.
신탄리를 지나 3km정도 가니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제부터는 강원도 철원땅..
철원땅으로 진입했지만, 도로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계속 썰렁한 산야가 계속 될 뿐이다.
철원경계로 진입하고 2km정도 가다가
도로 왼쪽 조그만 농로로 진입한다.
그 길로 들어선 이유는 대마리를 경유하기 위해서이다.
어느덧 대마리 마을경내로 진입..
승객 서너명 태우고,내리고 하면서 대마리를 빠져나온다.
대마리는 민통선내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5. 대마리를 벗어나니 가까이에
백마고지(白馬高地)가
보인다. (-> 처음 화면으로 가기)
백마고지는 6.25전쟁때인 1951년 10월에 한국군과 중공군이 아주 치열하게 맞짱을 뜨던 역사적인 곳이다.
이 고지를 둘러싸고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이곳의 주인이 24번이나 바꿨다고 한다.
오늘은
한국군이 차지하고 다음날은 중공군이.. 다시 다음날은 한국군이.. 이렇게 계속 바뀐것이다.
이 전쟁에서 중공군은 약 14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전투이후 이곳에 쌓인 한국군,중공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어 멀리서 보면 마치 백마(白馬)의 형태처럼 보이므로
이 고지의 이름을 백마고지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실재의 백마고지는 군사분계선내에 있는 관계로(백마고지
위령탑이 있는 언덕에서 보임) 위령탑과 기념관은
남한쪽 민통선지역인 이곳에 세웠다.
← 백마고지 위령탑
←
백마고지 위령탑
← 1951년 10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백마고지
백마고지를 뒤로 하고 버스는 오른쪽 길로 진입..
좀 들어가니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북쪽)으로 가는 길에는 검문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그냥 서울주변 주내검문소(의정부-동두천 3번국도 상에 있음)나
장곡검문소(서울-파주 1번국도변에 있음)
같은 모습이 아닌 완전 하나의 요새 비슷한 형태.. (요새는 좀 그렇고 그냥 표현하기가..)
들어가는길에는 진입차단장치가 있으며, 군인들이 삼엄하게 검문을 하고 있다.
버스는 4거리에서 계속 직진... (-> 처음 화면으로 가기)
도로 왼쪽 벌판을 바라보니 졀라 황량하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과 갈대, 풀등만 황량하게 자라고 있다.
황량한 벌판을 계속 달리니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니 길 왼편에 그 유명한
노동당사가
나를 맞이한다.
이 건물은
1946년에 북한측에서 만든 건물로 6.25전쟁 이전까지 사용한 철원군 당사(黨舍)이다.
이 건물은 철원,김화,평강,포천 지역을 관장하면서 애국인사를 체포,구금,고문,학살하던 악명 높은 곳으로
뒤쪽 방공호에는 당시의 고문흔적을 보여주는 인골(人骨), 실탄, 낫, 철사 등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 이 건물은 속은 비고 겉모습만 남은 완전 속빈강정의 형태로 남아있다.
이 건물은 현재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 22호로 지정하였다.
등록문화재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단계를 말한다.
조만간 지방문화재 또는 사적으로 지정된다고 한다.
* 노동당사(勞動黨舍)
6. 노동당사를 지나니 이제부터 민가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썰렁한 도로를 계속 달리니 저쪽에 도피안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고..,
도피안사입구 3거리에서 하차했다. (17:10분)
입구3거리에서 도피안사까지는 2차선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서 좀 가니 도피안사 주차장이 나온다.
그런데 한쪽구석에는 건물신축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다. (-> 처음 화면으로 가기)
주차장을 지나 언덕길을 좀 오르니 도피안사 안내문이 나오고, 절경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내문과 절경내 안내도를 대충 읽어본 다음 도피안사 경내로 들어간다.
7.
도피안사(到彼岸寺)는 동송읍 관우리 민통선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 고찰이다.
이 절은 865년(신라 경문왕 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할 철조비로사나불상을 운반하던 도중 밤중에 불상을
잃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불상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불상을 잃은 승려들은 당황하여 사방으로 불상을 찾아 나섰는데, 지금의 도피안사 자리에서 안좌(安坐)한 불상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선국사는 불상을 안양사에 봉안하려던 당초의 생각을 바꾸어 불상이 안좌한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사명(寺名)을
도피안사(到彼岸寺)라고 했다는 것이다.
불상이
'피안(彼岸)에 이르렀다(到)'하여 도피안사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의 설화는 말그대로 설화(說話)일 뿐이다.
창건된 이후 그런데로 유지해
오다가 1898년에 화재를 당해 다시 복구했으나 6.25전쟁 때 다시 전화(戰禍)를
입어 터만 남아있다가 1959년에 인근 군부대의 지원으로 다시 복구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사찰내의 최고 보물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3층석탑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민통선내에 위치한 관계로 예전에는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으나 현재는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
(그래도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할것)
그러나 이절은 대중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찾는이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얼마전 뉴스와 방송에서
금개구리때문에 일약 유명해진 사찰이다.
서울방송에 모 방송에도 나왔었고, 신문에도 대문짝하게 나왔던 곳..
그 금개구리는 절경내에 있는 3층석탑에 사는 신비의 개구리인데 이 개구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현재 이 절은 건물이 약 5~6동 정도 있으며 최근 정부(政府)에 지원을 받아서 사세를 크게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철원군의 대표적인 관광지중에 한 곳이기도 하다.
* 도피안사 경내
* 도피안사 경내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것은 3층석탑)
7-2.
도피안사 접근 방법..
①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
1. 서울에서 3번국도로 계속 직진(의정부,덕계리,동두천,초성리,전곡,연천,대광리,신탄리)하면
대마리가 나온다.
대마리에서 쭉 직진하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노동당사를 지나 10분정도 가면 도피안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②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 (2002년 11월 현재)
의정부역에서 신탄리행 통일호 열차가 매시 20분에 출발한다.
신탄리역까지
소요시간은 1:15분정도, 운임은 1400원이다.
종점인 신탄리역에서 하차, 역전정류장에서 매시 50분마다 철원,동송읍(이평리)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운행한다.
운행시간은 5:50~23:50분까지, 1일 19회 운행, 도피안사까지 약 20분 소요, 운임은 1000원 정도..
도피안사입구에서 내려서 도보 5분.
이 방법외에도 동서울터미널,서울수유역,노원역,의정부터미널,춘천에서 철원(동송)까지 직행버스를 이용하여
동송(이평리)에서 다시
신탄리행 군내버스(1시간 간격으로 운행)를 타는 방법도 있으나 운임이 좀 비싸다.
8.
안내문을 읽고 절경내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안에는 인상을 더럽게 쓰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위엄있게 서 있다.
천왕문을 지나니 연못이 나오고 위쪽에는 2층 누각이 있는데 공사중이군..
그래서 오른쪽 길로 약간 돌아가야 된다.
오른쪽 길로
해서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을 지나니 도피안사의 중심건물인 대적광전과 그 앞뜰에 서 있는 3층석탑이
나를 맞이한다. (-> 처음 화면으로)
대적광전에는 신도 서너명이 있었고, 아줌마 1명은 3층석탑 주위를 계속 돌고 있었다. 보니까 불경을 외우면서
탑돌이를 하고 있군..
이 3층석탑 안에 그 유명한 금개구리가 주무시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때나 볼 수는 없다고 한다. 그것도 나오는 시간이 있다고 그러는군..
최근에는 이 개구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어떤 이는 석탑 사이에 난 구멍을 통해서 이 개구리를
볼려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개구리들이 귀찮은 나머지 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다.
이 개구리는 지난 96년에 발견된 이후 현재 약 16마리가 사는 것으로 관찰됐으며 겨울잠에 들어가는 요즘에도
3마리 정도 목격되고 있다고 한다.
또 이들 개구리는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안치된 대적광전을 향하고 있어 불심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다.
몸길이 1∼2㎝의 이들 개구리들은 금빛과 비슷한 색깔이 난다고 해서 `금개구리'로 불리고 있으며 도피안사에서는
이들 개구리가 발견된 이후 종각과 불법전 등의 건물이 새로 들어서는 등 불사가 번창하고 있어 `금와보살'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다.
승려들과 동물관련 전문가들은 이 개구리가 왜 서식조건도 안좋은 3층석탑 내에서 사는지에 대해서 모두 신기해 할
뿐이다.
도피안사 장원스님은 "6년전 석탑에 연꽃이 피어나는 꿈을 꾼 뒤 찾아가 보니 금빛 개구리들이 살고
있었다"면서
"개구리가 발견된 뒤 절이 날로 번창해 가고 불사가 원만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신비의 개구리가 살고 있는 이 3층석탑은
높이 4.1m의 석탑인데,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방형(方形)의 지대석(地臺石)위에 8각의 기단(基壇)이 마련되어 있는데, 하대(下臺)는 8각의 각면에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고 윗면에는 다조로운 복판연화(複瓣蓮花)가 있다. 그리고 2단 위의 받침 위에 8각의 중대석(中臺石)이
매우 높으며, 상대석(上臺石)에도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단의 형식은 석탑의 기단 양식보다는 불상의 기단양식에서 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탑의 탑신부는
일반석탑과 비슷한 양식이다.
그리고 옥개석의 받침이 각형(角形)이 아닌 반원현으로 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이 탑의 조성연대는 대적광전안에 있는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같은 때인 865년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보물 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늘도 이 석탑 안에 개구리들은 겨울잠을 주무시고 있을 것이다.
혹시나 개구리가 보일까 해서 이리저리 살펴봤으나 결국 못봤다.
* 도피안사 3층석탑
9.
3층석탑을 둘러보고 앞에 있는 대적광전으로 갔다.
이 건물 안에는 도피안사 최고의 보물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座像)이
대좌(臺座)위에 앉아있다.
이 불상은 앞에서 언급했던 도피안사 창건설화와 관련된 불상으로 865년에 만들어진 후기신라시대 불상이다.
불상뒷면에 명문이 남아있는데 이 명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신라 경문왕 5년(865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정확한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불상중 하나이다.
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
(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불상의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이 불상은 국보 63호..
6.25전쟁 당시 이지역이 치열한 격전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온전하게 남아있었다는 것은 진짜 다행이 아닐 수
없겠다.
철불 뒤에는 탱화가 걸려 있다.
* 도피안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
철불좌상앞에 몇몇 신도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불상은 철로 만들었지만 겉에는 도금을 씌워서 불당(대적광전)전체가 환하게 보였다.
철불좌상은 정면으로 3층석탑을 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동년배들..
석탑 안에서 주무시고 있는 금개구리도 이 불상을 항상 쳐다본다고 하니.. 쩝..
10.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적광전 왼편에는 삼성각(三星閣)이 있는데, 1959년 이후에 만든 건물이라 별로 언급할 내용은 없다.
대적광전 뒤에는 나무들이 우거진 언덕이 있다.
그러나 나무들은 그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 놓고 있었다.
이 지역이 북쪽 변방이라 그런지 날씨도 춥고, 겨울이 빨리 다가와서 그렇다.
그날도 날씨도 제법 추웠다.
삼성각을 둘러보고 다시 3층석탑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나 석탑내부는 조용했다.
결국 금개구리는 보지도 못하고 도피안사를 나왔다. (17:30분)
그곳을 나오면서 신탄리역, 철원읍 방면 군내버스 시간을 대충 계산해보니 지금쯤 내려가면 신탄리역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피안사 일주문을 지나서 주차장에 이를 무렵, 멀리서 신탄리역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획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닌가? 허걱.. 가서 잡을려고 했으나 이미 멀리 사라져 버렸다.
5분만 빨리 나왔으면 잡아 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참 어정쩡하게 되었다.
신탄리역 가는 버스는 1시간을 더 기다려야 되고, 철원읍으로 가는 버스는 대략 18:10~20분 사이에 지나갈 것이고..
게다가 날씨도 졀라 추우니..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동송읍(이평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도피안사에서 철원읍내가 멀리서 보이기 때문에.. (17:35분)
* 참고로 철원읍(화지리)과 동송읍(이평리)은 서로 붙어 있다.
그러나 이평리까지는 약 4~5km정도 되는 거리이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30분이상 걸리는데..
11. 도피안사 주차장을 지나 도피안교(다리이름이
맞나 모르겠음)를 건너서 도피안사입구 정류장으로 가지 않고
하천 둑방길로 갔다. (하천이름이 대교천으로 알고
있음)
둑길로 가면 좀 빠를 것 같아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이 둑길은 그냥 평범한 시골길이다.
둑 왼쪽에는 대교천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다.
그때쯤 날은 거의 어두워진 상태..
인적이 없는 둑길을 계속 걸어가니 오른쪽에 넓은 갈대밭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그런지 갈대들의 키가 제법 컸다.
그런데 갈대밭 주위로 철조망이 쳐져 있고, 철조망에 조그만 흰색판이 걸려 있는데 거기에는
'지뢰조심'이라는
글이 써져 있다.
이 갈대밭은 바로 지뢰밭이었다.
그래서 갈대들이 저렇게 자랄 수 있었구나..
물론 갈대밭 전체가 지뢰밭은 아니지만 그 곳 어딘가에 지뢰가 숨어 있는 것이다.
잘못 들어가면 큰일난다.
지뢰밭을 지나니 다시 밭이 펼쳐진다.
한 10분쯤 갔을까. 철원읍을 향해 거의 직선으로 펼쳐진 둑길이 갑자기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둑길 앞에는 호가 파져 있고 건너편에는 토성(土城)처럼 생긴 방어시설이 있다.
그 쪽은 군작전시설이라 가지 못하고, 하천쪽도 방어시설때문에 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오히려 빨리 가려다가 더 돌아간 기분 같다.
5분정도 걸어가니 '철원-대마리' 2차선 지방도가 나온다.
지방도를 따라 철원,동송방면으로 계속 걸어갔다.
이때쯤 날은 완전히 저물고, 바람도 졀라 차갑게 분다.
추운 바람을 이겨가면서 약 10분 정도 걸어가니 화지리가 나온다.
화지리는 철원읍의 중심지역으로 농가들이 제법 많다.
그러나 철원읍은 그냥 큰 시골마을 정도에 불과하고 바로 옆동네인 동송읍 이평리가 철원군의 거의 중심지역으로
크게 번화해 있다. (철원군청이 있는 갈말읍 지포리도 큰 읍내이다)
화지리 마을을 지나고 있는데 길가에 '포충사, 요동백 김응하장군묘정비(褒忠祠,
遼東伯
金應河將軍廟庭碑)'
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그래서 보고 갈까 그냥 갈까 망설이다가 기왕 온 거 가보기로 했다. 아직 시간적인 여유도 있으므로,
이정표에서 포충사까지는 400m거리라고 쓰여있다.
차 1대 지나갈
정도의 조그만 농로를 따라서 산 쪽으로 6분 정도 가니 공원이 하나 나오고 뒤쪽에 넓은 공터가
있으며, 그 뒤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안에 제법 큰 비석이 어렴풋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묘정비이다.
다행히 늦은 시간인데고 포충사로 들어가는 삼문(三門)중 왼쪽 문이 열려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묘정비가
나를 맞이한다. (-> 처음 화면)
12. 이 포충사(褒忠祠)는
요동백 김응하 장군(金應河 將軍)을
모시는 사당이다.
김응하 장군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선중기 때 인물로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
김응하 장군(1580~1619년)은 철원 출신으로 1580년에 태어났다.
고려시대 명장 김방경(金方慶
1212~1300년)장군의 후예로 25살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경원판관(慶源判官),
삼수군수(三水郡守), 북우후(北虞侯)를 지내면서 북쪽 변방지역을 지켰다.
1618년(광해군 1년)에 남만주지역에 살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소란을 피우자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런데 광해군은 최근 막강해진 건주여진과 맞짱뜨면 크게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 그러나 명나라의 부탁도
무시할 수 없어서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불러서 대충 맞짱뜨는 시늉만 하다가
건주여진에게 투항하라고 지시.
강홍립과 군사 1만명을 남만주로 보냈다. 이 때 김응하는 강홍립의 부장으로 종군했다.
1619년에 3천의 군사로 건주여진 6만명과 맞짱을 떠서 크게 이겼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명나라 왕(광종으로 생각됨)은 김응하 장군에게 요동백(遼東伯)이란 관작을 주고 그의
가족들에게 백금(白金)
을 주었으며, 조선정부에서도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增)하고 시호를 충무(忠武)라고 하였다.
광해군이 후금(1616년, 여진족 두목인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쪽을 더
선호하는 외교정책으로 대다수의 신하,유생들과
명나라 정부에서 항의가 잇따르자 광해군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원에 그의 사당을 만들었으며,
1666년(현종7년)에 철원부(鐵原府) 서쪽에 사당을 새로 만들어서 그
이듬해인 1667년에 포충사(褒忠祠)라 사액(賜額)
했으며, 1683년에 묘정비를 세웠다.
이 묘정비는 당시 송자(宋子)라고 추앙받던 우암 송씨열이 비문을 지었다.
비석의 높이는 약 2.5m, 폭 98cm, 두께 33cm의 사면비석이다.
당초에는 화지리 향교골 포충사에 함께 있었으나 6.25의 전화로 인하여 포충사우는 소실되고 비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 고장 출신으로
육군 제3군사령관이었던 이세호 장군이 1974년 2월 사령부 연병장으로 이전보호중
1984년 4월 3일 철원의 유생 및 철원군수의 노력으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곡암산 기슭인 철원읍
화지리 산 1 -1번지에 봉안하였다
이 김응하장군 묘정비는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05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시대
평범한 비석으로 귀부,비신등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귀부(龜趺)부분인 거북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김응하 장군
묘정비
12-2. 포충사 접근 방법..
①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
1. 서울에서 3번국도로 계속 직진(의정부,덕계리,동두천,초성리,전곡,연천,대광리,신탄리)하면
대마리가 나온다.
대마리에서 쭉 직진하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노동당사를 지나 철원,동송방면으로
15분정도 가면 도로 오른쪽에 '포충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것을 따라서 400m정도 들어가면 된다.
포충사앞 공터에 주차가능..
②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 (2002년 11월 현재)
의정부역에서 신탄리행 통일호 열차가 매시 20분에 출발한다.
신탄리역까지
소요시간은 1:15분정도, 운임은 1400원이다.
종점인 신탄리역에서 하차, 역전정류장에서 매시 50분마다 철원,동송읍(이평리)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운행한다.
운행시간은 5:50~23:50분까지, 1일 19회 운행, 화지리까지 약 25분 소요, 운임은 1150원 정도..
화지리,포충사입구에서 내려서 도보 5분 정도.
이 방법외에도 동서울터미널,서울수유역,노원역,의정부터미널,춘천에서 철원(동송)까지 직행버스를 이용하여
동송(이평리)에서 다시
신탄리행 군내버스(1시간 간격으로 운행)를 타는 방법도 있으나 운임이 좀 비싸다.
13. 묘정비 뒤쪽으로 포충사의 본전(本殿)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굳게 잠겨져
있었다.
그래서 비석만 구경하고 썰렁한 포충사를 나왔다. (6시)
그래서 아까전 포충사입구 화지리로 나왔는데 동송읍까지 걸어갈까 하다가 시간을 보니 동송읍(이평리)방면
군내버스가 곧 올시간이다.
걸어가기도 춥고 해서 버스를 기다리니 18:15분에 동송읍으로 가는 연천교통 군내버스가 온다.
그래서 손을 흔들었으나 그냥 획 지나가버린다. 허걱~~ 이런..
여기는 따로 버스정류장이 설치되지도 않았고 그냥 손흔들거나 내려달라고 하면 세워주는데 그냥 도망을
간 것이다. 온갖 육두문자 다 나왔지만 그건 생략..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신탄리역으로 나가기로 하고 건너편으로 갔다.
신탄리가는 버스는 매시 20~25분 사이에 있다.
건너편 정류장으로 보이는 곳에 가니 어느 모녀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신탄리역 가는데 나한테 신탄리역 가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만 그들이 버스가 언제 오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곧 올꺼라고 하니. 껌을 하나 주는군..
껌을 씹으면서 버스를 기다리니 18:25분경에
신탄리역으로 가는
재일교통 소속 철원군내버스
'신탄리↔대마리↔
화지리↔동송읍,이평리'가 온다.
자세히 보니까 아까전 도피안사에 갔을 때 탔던 차량이다. 운전사도 같은 사람이고..
버스에 오르면서 신탄리역까지 얼마냐고 물어보니 1150원이라 하는군 허걱~
버스는 어둠으로 뒤덮힌 민통선지역을 유유히 통과..
도피안사입구, 노동당사, 대마리를 지나 인적이 없는 3번국도를 지나서 18:40분에 신탄리역에 도착했다.
신탄리역까지 타고 온 승객은 약 10여명..
정류장에는 이 버스를 타기 위해 약 30여명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군인들..
14. 신탄리역에서 의정부까지 통일호 열차표를 구입, 운임은
1400원. (2002년초까지는
2100원이었음)
신탄리역에서 의정부가는 cdc 통일호 열차는 6시부터 22시까지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표를 구입하고 타는 곳으로 나가니 열차는 이미 승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탔는데 내가 탄 칸에 앞쪽에는 단체로 보이는 40~50대 아줌마,아저씨들이 진을 치고
떠들고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는 술까지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완전 개판 5분전을 만들었다.
열차안은 바깥과는 달리 매우 따뜻했다. 잠자기는 아주 좋음..
열차는 19시에 신탄리역을 출발..
그러나 출발한지 얼마안되서 잠이 들고....... zzz
중간에 잠이 깨기는 했지만 다시 잠을 청하고..
그러는 사이
열차는 대광리,연천,전곡,한탄강,초성리,소요산,동두천,덕정,주내를 지나 20:15분경에 마지막역인
의정부역(議政府驛)에 도착했다.
(-> 처음 화면)
의정부역에서 지하철 1호선 인천행 열차를 타고
도봉산역에서 지하철 7호선으로 갈아타고
수락산역에서 하차하여
집에 오니 저녁 9시..
-> 이로써 민통선지역의 도피안사,철원 지역 나들이는 끝났다.......
15. 마무리
이번 나들이는 그냥 바람이나 쐴겸해서 갔다온 것으로 민통선내에 위치한 도피안사를 관람하였다.
도피안사는 요즘 금개구리때문에 유명해진 곳인데, 유감스럽게도 금개구리는 못봤다.
민통선지역을 갔다오면서 하루 빨리 한반도가 통일이 되어 민통선지역을 자유롭게 오갈수 있는 그날이,
인적이 없고 적막감만 감도는 이지역이 활기가 넘치는 곳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그렇다고 무분별한 난개발, 신도시 조성, 자연파괴를 하자는 것은 아님)
* 이 후기는 2002년 11월 12일에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