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를 잘못 잡은 참외넝쿨
임병식
은행에 볼일이 있어 가다가 길가의 참외넝쿨을 만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앞에 섰다. 가로수 밑에서 한 자 남짓 줄기를 뻗고 노란 꽃까지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로수 밑은 보도블록으로 빽빽하게 덮여 있었다. 뿌리내릴 흙도 넉넉지 않았다. 그런데도 참외넝쿨은 그 틈을 비집고 나와 줄기를 뻗고 있었다.
누군가 참외를 먹다 씨앗 하나를 무심코 뱉어놓았을 것이다. 그 씨앗이 하필 이곳에 떨어져 싹을 틔운 모양이다.
생각할수록 기구한 운명이다. 넉넉한 흙에 떨어졌더라면 마음껏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었을 텐데, 하필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의 가로수 밑이다.
그런데도 꽃을 피웠다.
아직 관리자의 눈에 띄지 않은 모양이다. 발견되는 순간 뽑혀 나갈지도 모른다. 꽃을 피운 것이 오히려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전에 무등산 중턱에서 홀로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본 적이 있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에는 솔방울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주변에 다른 나무 하나 없는 곳에서 소나무는 묵묵히 다음 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참외넝쿨도 그러할 것이다.
뽑히지만 않는다면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힐 것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우연히 떨어진 자리에서 다시 씨앗을 만들려 할 것이다.
생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가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땅이 아니라고 싹을 틔우지 않는 것도 아니고, 척박하다고 꽃을 피우지 않는 것도 아니다.
참외넝쿨을 바라보다가 사람들의 삶을 생각했다.
사람도 저마다 다른 터에서 살아간다.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터가 주어지고, 그 자리에서 저마다의 삶을 이어간다.
어쩌면 사람도 저 작은 넝쿨처럼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한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가로수 밑의 작은 참외넝쿨이 자꾸만 사람처럼 보였다.
(2026)
첫댓글 일상의 작은 관찰에서 삶의 본질적인 성찰로 매끄럽게 확장되는 단단하고 따뜻한 글입니다.
길가의 척박한 보도블록 틈에서 피어난 '참외넝쿨'이라는 구체적인 소재가 글 전체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습니다.
길가의 참외넝쿨(현재) → 무등산의 소나무(기억) → 사람의 삶(성찰)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억지스럽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비좁은 보도블록과 샛노란 꽃, 언제 뽑힐지 모르는 위태로움과 열매를 맺으려는 생명력의 대비가 깊은 여운을 줍니다.
과장된 수식어 없이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해, 후반부의 인간 삶에 대한 비유가 설교처럼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으로 다가옵니다.
"생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는 통찰과 "자꾸만 사람처럼 보였다"는 마지막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그 많은 곳을 두고 하필 가로수밑에 터를 잡아 자라는 참외넝쿨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언제 뽑혀나갈지 모르는 생명, 그런데도 자기의 본연의 일은 하겠다는듯이 꽃을 치우고 있어
'저런 생명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주변에도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음을
보게됩니다. 그래서인지 그것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터를 탓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노란 꽃을 피워낸 참외넝쿨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경이롭고 숭고한지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됩니다. 무등산 소나무와 가로수 밑 참외넝쿨을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따뜻한 눈길과 깊은 사유가 독자의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주는 듯합니다.늘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삶의 깊은 진리를 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강건하시고 은혜로운 날들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따뜻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입지조건은 각양각색이지만
그래도 아름답게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을 보면
흐믓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