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자치통감에 실려 있는 서기 1234년 정월 10일은 요(遼)를 멸망시키고 송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아 가고 송(宋)을 양자강 남쪽으로 구축하였던 금(金)왕조가 망한 날입니다. 이날 남송과 몽고의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망한 금왕조의 마지막 날 모습입니다. 이를 번역하면서 엄청난 경종(警鐘)으로 내게 들려 온 것은 내가 너무 예민해서 인가요? 세계 강대국으로 진입한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지금 국회에 들어 가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도 정말 나라 걱정하는 사람이 눈에 띱니까? 마치 금왕조 마지막 시기의 정치하는 사람들 같이 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입니까?
속자치통감의 한 단락을 소개 합니다.
남송의 장수 맹공(孟珙, 1195~1246)은 몽고병(蒙古兵)과 같이 금(金)의 애종(哀宗)이 도망가 있는 채주(蔡州, 湖北省, 棗陽縣)를 포위하고 모여서 술을 마시며 노래 부르는 소리가 이어졌는데 애종이 있는 성중(城中)에서는 주리고 군색하여 탄식할 뿐이었다.
이에 앞서서 신축일(2일)에 검은 기운은 성위에서 누르고 있고 해는 빛을 잃었는데 채주에서 나와서 남송군에게 항복한 사람이 말하였다.
“성 안에는 양식이 끊어진지 이미 석 달인데 말안장과 가죽신과 부서진 북은 모두 죽으로 끓여 먹었고, 또 노약(老弱)한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제군(諸軍)은 매일 사람과 가축의 뼈와 미나리 밭의 진흙을 먹습니다. 또 패배한 군대의 전원을 목을 베어 그 살점을 베어 먹으니 그러므로 항복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송의 장수 맹공은 마침내 제군(諸軍)에게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군사들에게 함매(銜枚)하게 하고, 나누어 성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구름사다리인 운제(雲梯)를 운반하여 성 아래에 포진하게 하였다.
금(金)은 포위된 이래로 장수(將帥) 가운데 전몰(戰歿)한 사람이 아주 많아서 무신일(9일)에 금(金)의 애종은 근시(近侍)를 나누어 사면으로 성을 지키게 하였다. 몽고병(蒙古兵)은 서성(西城) 밑을 파서 다섯 개의 문을 만들어 들어가서 독군(督軍)하여 오전(鏖戰, 激戰)하다가 저녁이 되어 물러나기에 이르자 큰 소리로 내일 다시 모인다고 말하였다. 이날 저녁에 금주(金主)는 백관(百官)을 모아놓고 동면(東面)원수인 완안승린(完顔承麟, 1202~1234)에게 황제의 자리를 전위(傳位)하였다. 완안승린은 세조(世祖)의 후손(後孫)인 완안배신(完顔拜甡)의 동생인데 절하며 눈물을 흘리며 감히 받지 않았다. 금주(金主)가 말하였다.
“짐(朕)이 경(卿)에게 황제의 자리를 붙이는 것이 어찌 내가 바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짐의 기체(肌體, 피부와 신체)는 살찌고 무거워서 말을 타고 달려 돌파하기에 불편하여서이다. 경(卿)은 평일(平日)에 몸과 손이 민첩하고 장수의 지략(智略)을 가지고 있으니 만일에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왕조의 이어짐은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짐의 뜻이다.”
완안승린이 마침내 일어나서 인새(印璽)를 받았다. 기유일(10일)에 즉위하였다.
당시에 송의 장수 맹공의 군사는 남문(南門)을 향하여 금자루(金字樓)에 이르러서 운제(雲梯)를 늘어놓고 제장(諸將)에게 북소리가 들리면 나아가게 하였다. 그의 부하 장수인 마의(馬義)가 먼저 올라가고 조영(趙榮)이 이를 이었으며 1만의 무리가 경쟁하여 들어가서 성위에서 대대적으로 전투하였다. 금(金)의 장수 오고리호(烏庫哩鎬)와 그 장수 2 백 명이 모두 항복하였다. 당시에 금(金)에서는 새로 황제에 오른 완안승린에게 백관이 축하하는 예를 마치고는 급하게 나와서 적(敵)을 막았지만, 남성(南城)에는 이미 송의 기치(旗幟)가 세워졌다. 잠간 사이에 사면(四面)에서 시끄럽게 하면서 협공하는데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남면(南面)에서 지키던 사람들은 문을 버리고 달아났다. 송의 장수 맹공은 몽고군인 강해(江海)와 탑제이(塔齊爾)의 군사를 불러들이고 들어갔는데 금(金)의 승상인 완안중덕(完顔仲德, ?~1234)이 정병(精兵) 1천명을 인솔하여 항전(巷戰, 市街戰)하였지만 지킬 수 없었다. 금주(金主)는 스스로 유란헌(幽蘭軒)에 목을 매었다. 완안중덕은 이 소식을 듣고 장사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군주가 이미 붕어(崩御)하였는데 싸워서 무엇 하겠는가! 나는 난병(亂兵)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나는 여수(汝水)에 뛰어들어 나의 군주를 따르겠으니 제군(諸君)들은 그러하니 잘 계획하라!”
말을 끝내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장사(將士)들이 모두 말하였다.
“상공(相公, 완안중덕)이 순국(殉國)하였는데 우리들이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참정(參政)인 부주리소락색(富珠哩小洛索, ?~1234)·오릉아호도(烏淩阿呼圖兒, ?~1234)·총수(總帥)인 원지(元志, ?~1234)·원수(元帥)인 유산이(裕珊爾, 玉山兒, ?~1234)·혁사리백수(赫舍哩, 紇石烈柏壽, ?~1234)·오고리화륵단(烏庫哩和勒端, 烏古論桓端, ?~1234)과 군사(軍士) 5백여 명이 모두 따라 죽었다.
완안중덕의 상모(狀貌)는 보통 사람을 넘지 않았고 평생동안 희노(喜怒)에서 아직 일찍이 망령되이 발산(發散)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듣게 되면 보호하며 이를 꺼리었고, 비록 군려(軍旅) 안에 있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집안은 원래 가난하여 해진 옷을 입고 현미를 먹으면서 그 종신토록 안여(晏如, 平靜)하였다. 빈객(賓客)을 아호(雅好)하였고 인재를 천거하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조그만 장점이 있다면, 반드시 극구 칭찬하는 말을 하였다. 그가 군무(軍務)를 장악하고서는 상을 주고 벌을 내리면서 신의(信義)를 분명히 하고, 호령(號令)은 엄정(嚴整)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르는 곳에서 군민(軍民)들은 모두 즐겨 쓰이려고 하고, 위급하여 사생(死生)가 걸린 시점에는 한 사람이라도 다른 뜻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남천(南遷)한 이후로 장상(將相)과 문무(文武)의 충량(忠亮)한 사람 가운데, 시종 흠이 없는 사람은 완안중덕 한 사람 뿐이었다.
완안승린은 물러나서 자성(子城)을 보존하고 있는데, 금주(金主)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신(群臣)을 인솔하고 들어가 통곡하고 이어서 무리에게 말하였다.
“선제께서는 재위(在位) 10年 동안 근검(勤儉)하고 관인(寬仁)하며, 구업(舊業)을 회복하려고 도모하였는데 뜻을 가졌지만 아직 이루지 못하였으니 슬퍼할 뿐이다! 의당 시호(諡號)를 애(哀)로 해야 할 것이다.”
전(奠, 祭祀)하는 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성은 격파되고 제장과 금병(金兵)은 함께 애종의 시체에 불을 들어서 이를 태우고 봉어(奉御)인 완안강산(完顔絳山)이 그 뼈를 수습하여 여수(汝水)의 위에 묻으려고 하였다. 강해(江海)가 입궁(入宮)하여 참정인 장천강(張天綱)을 붙잡아가지고 돌아가자, 맹공은 금주(金主)가 있는 곳을 묻자 장천강이 사실대로 알려서 말하였다.
“성이 위급할 때에 바로 보옥(寶玉)을 가져다가 소실(小室)에 두고, 풀로 둘러 싸놓고 호읍(號泣)하고 자경(自經)하며 말하기를, ‘죽으면 바로 나를 불사르라.’라고 하였습니다.”
연기와 불꽃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 맹공은 마침내 탑제이와 금주(金主)의 유골(遺骨)과 보옥(寶玉)·법물(法物)을 나누었다. 완안승린도 역시 난병(亂兵)에게 죽었으며 금은 멸망하였다.
이보다 먼저 금(金)에는 도제공(都提控)인 필자륜(畢資倫, ?~1234)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변장(邊將)에게 붙잡혀서 진강(鎭江)의 토옥(土獄)이 갇혔는데 수백 가지로 협박하고 유혹하였지만 끝내 항복하지 않았으며 이에 이르러 이미 14년이었다. 금주(金主)가 자경(自經)하였다는 소식을 듣기에 이르자 탄식하여 말하였다.
“나에게는 바라는 바가 없어졌으니 내가 나의 주군에게 제사(祭祀)한 번 지내고 이에 항복하는 것을 받아 주시오.”
주관하는 사람이 이를 믿고 우양(牛羊)을 도살하고 진강(鎭江)의 남안(南岸)에서 제사를 차렸다. 필자륜은 제사를 마치자 땅에 엎드려 크게 통곡하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첫댓글 권 교수님의 문제 제기는 대한민국의 지성인이 크게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란 배가 좌초하고 있다는 정보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습니다. 이를 어쩐 답니까!
금 왕조의 멸망은 조선왕조의 멸망과 같습니다..
아아! 어떻게 해야 한 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