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나한 밥상
한미희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믹스 커피 두 잔을 거푸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달달한 커피를 마신 탓에 식구들이 아침밥을 먹을 때는 전혀 생각이 없다가 다 나가고도 한참 지난 다음에야 한술 뜨곤 한다. 아침밥이란 것도 애들이 남긴 국건더기에 국물을 더 넣고 밥에 말거나, 시리얼만 건져 먹고 남은 우유에 더 부어 먹는 게 고작이다. 아니면 냉동실에 넣어 둔 떡이나 버터에 구운 바게트 정도이다.
6월 어느 날 아침, 식구들이 다 나가자마자 나도 한번은 제대로 된 밥상을 받아 보자는 생각이 생뚱맞게 들었다. 우선 닷새 전에 담근 간장 게장이 떠올랐다. 몸통은 애들과 남편에게 먹이고 나는 괜찮다면서 다리만 줄줄 빨며 아껴두었던 것이다. 게장 한 마리를 과감하게 식탁에 올리고 나물 네 가지, 얼갈이김치로 아침상을 차렸다.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내가 차린 두둑한 아침상을 대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늦은 저녁 무렵 그 날이 바로 주민등록상의 내 생일날이란 사실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사오 년 전, 남편은 내가 기억하는 음력 생일이 주민등록상의 양력 생일과 일치하지 않다면서 의문을 제기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아 음력은 맞았으니 아버지가 다음 해 출생신고를 하면서 그 해 양력으로 변환하여 잘못 기재한 모양이었다. 음력 생일은 좀처럼 써 오지 않았기에 근 오십 년 동안 제 생일날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우리 집에서는 내 생일날이 열흘 남짓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한번 입력된 것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게 사람의 성정인지라 생년월일 적는 난이 있으면 아직도 엉터리 날짜가 습관적으로 나오곤 한다. 요사이 들어서는 예전과 달리 내 생일날에 은행이나 백화점에서 축하 문자가 오지 않는데다 애들에게서 당연히 일언반구도 없어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날짜를 모르고 지나치는 날이 허다하지 않은가.
나에게는 더 익숙한 가짜 생일날에 내 손으로 근사한 밥상을 차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했다. 난 내가 기념일을 챙기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접대 받고 접대하는 것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애들에게 나중에 분가해 나가 살 때 자주 찾아오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아, 기념일에 내 선물은 안 줘도 돼 라고 평소 입에 달고 다녔던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니면 남이 챙겨주지 않으니 나라도 내 대접을 하겠다는 자기애의 무의식적 발로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라는 인간 역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접대 받기를 바라는 그저그런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속마음이 들어났다는 사실에 섬뜩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내 속에 깊숙이 꽈리를 틀고 있던 고약한 마음이 언제 어디서고간에 불쑥 튀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날 일은 남세스러울 뿐 문제가 될 소지가 없는 것이지만 내가 감당하지 못할 큰일이 일어날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내 안에 어떤 괴물이 틀어 박혀 있는지 사뭇 궁금하기도 하다.
열흘 뒤 진짜 생일날
첫댓글 14부 인쇄하여 가져 가겠습니다.
ㅋㅋ 진짜 생일의 케잌보다 가짜생일의 게장 등의 스스로 차린 식단이 월씬 멋져 보이네요...
물론 혼자여서 쓸쓸함은 묻어있지만...
케잌 촛불에 비친 미소가 아름답군요. 생일은 무슨.....하면서 심드렁하게 지나쳐 버리기가 일쑤지만
누가 마음으로 축하해 주고 챙겨주면 그 또한 흐믓하고 좋아지는 우리 마음속의 한 귀퉁이!
내 속에 틀고 있는 그 또아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의 주시 할 일입니다.
"넌 괜찮은 사람이야!!"......
제 친구는 포트 매리언 그릇 수집이 취미인데 그 그릇에다가 이쁘게 음식을 담아 혼자
자기 스스로에게 대접을 하면서 그렇게 말해준다네요....그러고나면 뿌듯하데요~~~
이쁜 로얄 알버트 그릇에 근사한 밥상를 받으신~~~"요안나님 괜찮으시구요~~멋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