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19-11-07 03:00
[김도연 칼럼]‘히든 챔피언’ 중소기업 키우기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젊은이들에게 과학과 기술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연구 활동이 가장 활발한 대학으로는 이미 100명에 가까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미국의 매사추세츠공대, 즉 MIT를 꼽을 수 있다. 학문적 성취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엄청난 사실은 MIT 졸업생들이 설립한 수많은 기업의 연간 매출액 합계가 2조 달러에 이른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로 따졌을 때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이며 대략 우리나라와 맞먹는 규모다.
1861년 개교와 더불어 만들었다는 이 대학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에는 책을 읽고 있는 학인(學人)과 망치를 들고 서 있는 장인(匠人)이 함께하고 있다. 대학의 교육목표가 두뇌로 지식 가치를 만드는 과학자와 손으로 경제 가치를 만드는 기술자 육성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Mens et Manus’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머리와 손’을 의미하는 라틴어다. MIT와 이웃하고 있는 하버드대의 문장에 새겨진 ‘Veritas’, 즉 ‘진리’와 비교할 때, MIT가 지향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지식을 만드는 과학자는 국격(國格)을 높이지만 상품을 만드는 기술자는 국부(國富)를 쌓는다.
그런데 언급한 MIT 문장에는 라틴어만이 아니라 ‘Science and Arts’라는 영어도 함께 있다. 실제로 쓸모 있는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과 대단히 유사하다. 기술인이나 예술인에게는 천부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성과는 오랜 시간 끊임없는 노력으로 해당 분야를 완전히 몸에 익혔을 때 꽃이 핀다. 특히 문명의 개화기부터 시작된 소재 산업에서는 기술자의 오랜 경험과 거기서 얻어지는 무형적 느낌 같은 것이 매우 큰 역할을 한다. 20세기 후반에 피어난 정보지식산업에서의 소프트웨어나 무형의 서비스 같은 상품과 크게 다른 점이다.
1000년 전 우리가 소재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 전무했어도 세계 최고 품질의 청자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대를 잇는 도공들의 경험 축적과 장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흙의 성분을 분석하고 전자현미경 등을 이용하는 과학적 연구를 통해 청자를 재현할 수 있지만, 연구실에서 손가락 크기의 시편을 만드는 일과 기업에서 아름다운 도자기를 다량으로 생산해 상품화하는 일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많은 산업분야에서 기술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러나 오랜 경험 축적이 필요한 소재 산업은 아쉽지만 일본에 비해 아직 충분한 경쟁력을 지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일본에서 지난해 550억 달러 정도의 상품을 수입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소재 부품이었다. 이는 전통을 지닌 소재 기업들이 일본에 많기 때문인데 모든 분야를 망라했을 때 일본은 100년 이상 된 장수 기업을 3만3000여 개나 갖고 있는 나라다.
어쨌건 중요 소재 부품을 한 나라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산업의 구조적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를 계기로 수입처 다변화와 국산화를 치밀하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100개 이상 핵심품목 연구개발(R&D)에 앞으로 3년간 5조 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해 국산화를 꾀한다고 발표했다.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가능한 한 많은 기초 소재에서 우리 기업들이 품질 및 가격 우위를 확보하면 좋겠다. 그러나 소재 개발은 단기간의 R&D보다 많은 경우 장기적인 기업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분야임을 되새겨야 한다.
대부분이 중소, 중견인 소재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이들이 대를 물려가면서 맥을 잇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의 기업 상속제도는 심각한 문제다. 최고 65%까지 이르러 징벌적 수준이라고도 이야기되는 상속세율은 기업가 정신을 꺾으며 심지어는 ‘상속폐업’을 초래하고 있다. 연간 매출액 50억 달러 이하이면서 생산 제품의 시장 점유율이 세계 1∼3위를 차지하는 이른바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 중소기업은 세계에 3000여 개인데 그중 3분의 2는 가족기업이다. 소재 분야만 따지면 그 비율은 더 높을 것으로 믿어진다. 국가 경제를 위해 소재 분야의 중소기업 상속은 우리 사회가 오히려 적극 지원해야 할 일이다.
* 오늘의 묵상 (221002)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종과 주인에 관한 비유를 조금 각색해 보면 이렇습니다. 종은 아침 일찍부터 주인의 밭으로 나가 일하거나, 들로 가서 주인이 아끼는 양들을 치며 온종일 그의 재산을 돌보고 관리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집에 와서도 쉴 틈이 없습니다. 서둘러 음식을 마련하여 주인을 식탁으로 모신 뒤 허리에 띠를 매고 주인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고 나서야 하루의 긴 일과가 마무리됩니다. 종은 그제야 비로소 편히 먹고 쉴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절대 착각하지 말아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또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계약을 맺은 일꾼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속한 종으로서 그 일들을 수행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고 시중드는 일을 한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거나 마치 큰 빚을 진 것처럼 종을 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껏 해 온 일에 대해서 거들먹거리며 그에 걸맞은 대우와 보상을 요구한다면, 이는 우리의 처지를 망각한 것이 되고 맙니다. 임무를 마친 종이 주인에게 할 수 있는 바른 대답은 이러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맞는 말씀이기는 해도, 조금 서운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을 함부로 부리는 주인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종과 주인의 관계를 잊지 말라는 경각심 차원의 말씀일 뿐, 예수님께서는 그 주인이 사실은 매우 관대하게 자기 종들을 대하는 분이심을 함께 가르쳐 주십니다. 혼인 잔치에 간 주인이 자신을 기다리던 종들을 보고서 어떻게 그들을 대하는지를 전하는 루카 복음의 또 다른 비유도 함께 기억합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12,37).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인천가톨릭대신학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