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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유일한 길 (2)
2021. 7. 4. 이현래 목사
오늘은 <유일한 길> 두 번째다. 전에 <유일한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잊어버리고 이번에 처음 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전에 한 말씀 드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다르게 이야기 하려고 한다.
오늘은 상속자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 한다. 상속자는 잘 알 것이다. 부모의 모든 것을 다 이어 받는 그것이 상속자다.
하나님을 믿는데 그냥 믿기만 하고 의존하면 다 좋지만 한계가 있다. 우리가 혜택을 받고 원조를 받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밥을 먹고 나면 잊어버리듯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입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냥 흐리멍덩해져 버린다. 아침 밥 배부르게 먹었다고 점심 때 배가 고프지 않다는 법은 없다. 인생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광야를 지나가는 인생들이 그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가 받았는가? 그런데도 가다가 물이 없으면 원망하게 되고, 고기 없다고 원망하게 되고, 마늘이 없다고 원망하게 되고, 참외 못 먹는다고 원망한다. 그게 출애굽기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아주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극한적인 상황에 가면 본성이 다 드러난다. 배고픈 데 어떻게 하겠는가? 목마른 데 어떻게 하겠는가?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이 그렇게 생겼는데 어찌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이 허망하고, 구제불능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아주 좋은 게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 하고 살아야 된다. 그것을 보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것을 상속해 준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지 않은가! 세상에서는 갑질도 있고 을질도 있고 그것도 욕을 얻어먹는다. 하나님이 상속해 준 것은 누가 욕할 것도 없다. 욕해 봤자 소용도 없다. 이것이 완전한 상속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라고 말한다.
이*용씨는 가만히 있는데 금수저로 태어나서 너무 부자가 되었다가 감옥에 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감옥에 갈 일이 없다. 걱정하지 않고 받아도 된다. 아무도 가져갈 사람이 없다. 이 상속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동산을 떠난 사람을 떠났으면 놓아두지 왜 자꾸 부르시는가? 그리고 왜 예수께로 부르시는가? 예수 안으로 불러서 무엇을 주시려고 하는가? 이유는 함께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도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 팔자니까 어쩌겠는가.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만났다는 게 복이다. 안 주고는 안 되는 분을 만났으니까, 안 부르시고는 안 되는 분을 만났으니까, 그게 복이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그것이 복이다. 안 주면 못 견디는 분을 만났다.
부모가 비슷하다. 부모는 자식이 어떻든지 간에 그나마 막 줘야 되는 것이다. 자식에게 뭔가를 막 줘야 되는 것이다. 그게 부모다. 자식의 것을 빼앗아 먹는 부모는 없다. 어떻게 못 주어서 안달이다. 저런 놈에게 왜 주느냐고 다른 사람은 욕을 한다. 부모는 그게 아니다. 있기만 있으면 자식에게 주고 싶다. 그게 하나님 마음 같다. 그래서 부모가 좋다는 것이다. 부모가 달리 좋은가? 형제간도 그게 잘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형제끼리도 돈 때문에 서로 싸운다. 그런데 부모는 자기가 망해도 자식에게는 다 주고 싶은 것이다. 그게 부모 마음이다.
이런 부모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말이 굉장히 좋은 말이다. 하나님을 보고 아버지라고 하는 말은 굉장히 좋은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도 그 말을 못했다. 이게 그냥 한 말이 아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잠깐 언급했을 뿐이지 현실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 없다. 감히 부를 수가 없었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이 부르기 시작해서 우리도 지금 건성이든지 뭐든지 하여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부르는 것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로 복이다.
아담이 동산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찾아갔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 말은 찾아갔다는 말이다. 괘씸해서 찾아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찾아갔다. 그런데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하고 나무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찾아갔는데 나오지 않았다.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라는 말에 쨍쨍 햇빛이 나는데도 말 그대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덟 식구와 가족들을 살려냈다. 그래서 구원자가 되었다.
강 저편 바벨에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냈다. 바벨론은 유프라데스 강 저편이다. 바벨론이 지금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그쪽이라고 한다. 얼마나 맞는지 모르겠지만 성을 쌓던 흔적도 있다고 한다. 거기에 있던 사람이다. 지금 세계로 말하자면 뉴욕 같은 곳이다. 갈대아 우르는 그 근방이다. 뉴욕 근방, 그런 곳이다. 그 좋은 곳에서 왜 나왔는지 모른다. 자기 아버지 데라가 먼저 나왔다. 강 상류로 가서 하란이라는 곳에 머물다가 죽었다.
그 좋은 땅, 강이란 하류가 제일 좋은 곳인데 상류까지 갔다. 좋지 않은 사연이 있지 않겠는가. 아브라함은 거기서 부름 받았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 받았다고 한다. 같은 의미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강을 건너서 나왔기 때문에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넌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너는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말했다. 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은 육신적으로 이런 게 있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있던 자리,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자리, 내가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리가 본토고 친척이다. 사람이 거기에 눌러 붙어서 안 떠나니까 그런 곳을 떠나라는 말이다. 차라리 하나님의 동산에 눌러 붙어 있으면 좋은데 거기서 나와서 바벨론에 가서 눌러 붙어서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서울이 좋긴 좋다. 나도 섬, 저기 맨 끝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서울에 가서 10년 살고 나니까 서울을 떠나기가 싫었다. 참 이상했다. 서울 사람들은 서울 이외의 다른 곳은 다 시골이고, 다 시골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할 만하다. 서울에 가 보면 좋은 게 많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볼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고, 세상이 넓고 아주 좋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거기를 떠나오려니까 너무 아쉬웠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그것뿐이겠는가? 부자는 돈이 본토고, 권력이 있는 자는 권력이 본토고, 또 학문에 있는 사람은 학문이 본토다. 사람은 눌러 붙고 싶은 곳이 있다. 내가 여기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이런 데가 있다. 그것을 떠나라는 말이다.
“내가 네게 보여줄(지시할) 땅으로 가라.” 네게 지시할 곳이 어딘지는 말이 없다. 내가 네게 지시할 곳이라는 게 막연하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름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아담은 지음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는데, 아브라함은 부름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서 유명해진 것이다.
양을 치던 모세는 신세가 정말 난감하게 된 사람이다. 바로의 궁전에서 아들 같은 대우를 받고 자랐는데, 장인의 집에 와서 양이나 치고 사는 그런 신세가 되었다. 이 사람에게 애굽에 억류된 네 백성을 인도하라고 말했다. 여러분이 성경을 봐서도 알 수 있듯이 망설였다. 내가 어떻게 바로에게 가겠는가? 바로가 내 말을 들어 주겠는가? 별 소리를 다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무가내로 가라해서 지팡이 하나 받아서 가게 되었다. 그대로 해서 백성의 구원자가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망한 법이 없다. 그런 사람은 불러서 그렇게 되었는데, 우리 모든 사람은 불러서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나는 모세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나를 뭘 하려고 불렀는가?
나는 어디로 갈지 모르고 갈 곳이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불러낸 것이 나에게는 복음이었다. 일단 살던 곳을 떠날 수 있게 한 것이 나에게는 복음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곳이었다. 좋아서 못 떠난 게 아니고 떠날 곳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좋아서 못 떠나는 것이지만 나는 좋아서 못 떠나는 게 아니었다. 어디로 피하고 싶은 데 피할 데가 없었다. 그런데 나오라고 하니까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나오라는 것 자체가 좋았다. 나갈 수 있는 길만 있다면 나가고 싶었다. 내 힘으로는 못 나오고 부르신 분의 힘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앞을 모르니까 ‘어디로 가라고 부르는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갈 데가 없으니까 앞을 모르고 그냥 왔다.
이제 알고 보니까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냥 천상에 있는 특별한 신이 아니고, 사람과 함께 살아야 되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이다. 이제 알고 보니까 이분은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분이시구나, 그렇게 알아진다. 그냥 무섭기만 한 분이 아니고,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분이다.
동산을 창조했다. 우리는 에덴동산이라고 부른다.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창2:7)라고 했다. 뭘 하시려고 동산을 창설했는가? 사람들과 함께 살려고 창설했다. 그래서 만든 동산이 에덴동산이다. 이 동산은 무엇인가? 어떤 지역인가? 이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고고학적으로 연구해 보려고 어디가 동산이었을까? 이 동산은 어느 지역이라고 할 수가 없고, 이것은 ‘인격’이다. 어떤 인격을 주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이 인격 안에서 자신을 상속하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내가 정말 부자라면 상속 받을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부자라도 물려받을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자일수록 아들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자니까 그것을 물려주어야 하는데 누구에게 공짜로 줄 수도 없다.
돈이 많아도 쓸데가 없으면 곤란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길바닥에 뿌릴 수도 없고, 아무에게나 줄 수도 없고, 돈이 많아도 그렇다고 한다. 자식들이 몇 명 있는 데 다 나눠주어도 돈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또 자식들에게만 다 주면 세상이 욕한다. 저건 부자라더니 자식들에게만 다 주고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욕한다.
쓸 곳이 없는 돈도 참 어렵다. 우리 생각에는 가난하면 어려운 것 같지만 돈이 많아도 어렵다. 돈이라는 게 이상하다. 줄 데가 꼭 있어야 되는 데 줄 데가 없으면 아주 곤란하다.
대통령 중 한 사람은 마지막에 돈 때문에 걸렸다. 정치자금 받아 놓은 것인데 엄청나게 많은 돈이다. 6천억이나 되는 돈인데 지하 창고에 넣어 두었는데 쓰지도 못하고 걸렸다. 알고 보면 자기가 혼자 먹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하는데 쓰라고 준 돈이니까 정치에 써야 되는데 이 양반이 소심해서 미처 그것을 다 못 썼는데 이사하려고 하니까 그 돈이 나와서 돈 때문에 징역살이를 했고 벌금도 냈다. 돈도 어지간히 가지면 좋은데 너무 많이 가지면 그것도 어려운 것 같다.
하나님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분이다. 그러니까 상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다. 꼭 마음에 드는데 상속을 해야 되는데 말에게 하겠는가? 개에게 하겠는가? 호랑이에게 하겠는가? 그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고 사람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뭘 못 줘서 한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을 믿어도 허당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들 이삭에게 상속했다. 만일 이삭이 없었더라면 아브라함이 받은 것을 상속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상속자가 못 되었다. 왜냐하면 섞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쿵짝쿵짝 한 것이 섞여 있다. 둘이서 아주 지혜로운 모의를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될 줄로 알았다.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저 아들은 내 아들과 함께 상속을 받지 못한다고 사라가 그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 말에 옳다고 너는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했다. 이것도 우리 인간적인 이치로 생각하면 참 맞지 않는 말이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하갈을 데려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막상 아들을 낳고 나니까 상속자가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상속을 하되 할 사람에게 하지 아무에게나 하지 않는다.
이삭은 야곱에게 모든 것을 상속했다. 아들로 에서와 야곱이 있었다. 그런데도 에서에게 상속하지 못하고 야곱에게 상속하고 말았다. 자기는 에서에게 상속하려 했는데 눈이 어두워서 야곱에게 속았다. 그렇게 상속을 한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그의 동산에 두시고, 아들에게 그것을 관리하라고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였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상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다. 우리와 비슷하고 가까우니까 알기가 쉽지 않은가? 너무 떨어져 있는 하나님은 알기가 어렵다. 너무 떨어져 있으면 알기가 어렵다. 사람과 비슷하다. 자기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그 아들에게 상속하려고 상속자를 찾고 있다. 상속자로서 사람을 지었고, 상속자로서 사람을 찾으신 것이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지금 굉장한 것을 주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여러분이 이렇게 왔든 저렇게 왔든지 교회로 왔다. 들어오는 길은 여러 가지다. 새 예루살렘의 문이 열 두 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어떻게 왔는지 좌우간 왔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어 있다. 오지 않았으면 못 듣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목적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지 그냥 부르신 게 아니다.
내가 신학교에 갔을 때 나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늦게 갔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들으니까 중학교 때부터 기도하고 왔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신기하네, 나는 한 번도 기도해 본 적이 없고 부르신 이가 불러서 왔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어린 나이에 저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 학기 공부해 보더니만 학교도 작고 시시하고, 교단도 작고 시시하고, 갈 데도 없으니까 다 고민하고 앉았다. 군데군데 앉아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공부하면 어디로 가냐고 했다. 다들 목사가 되고 싶어서 왔던 모양이었다. 앞길이 막막하니까 모두들 그러고 있었다.
속으로 이상하다. 3년씩이나 기도하고 왔다는 사람들이 왜 저런 생각을 할까? 나는 부르신 이가 있으면 무슨 일이 있으니까 부르시지 일 없이 부르시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갈 데가 없으니까 그랬기도 했지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제쳐 놓고 제일 먼저 나에게 시내 교회가 비었는데 자네가 가보겠느냐는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갈 데가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은데, 조건도 나보다 좋았는데, 나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큰 백이 있는 것으로 크게 오해를 했다. 백이 있어도 하나님 백이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하나님이 그런 것이지 내가 그런 사람을 만들었겠는가?
상속자가 되는 것은 참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상속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불렀다는 말이 더욱 중요한 말이다. 그냥 우리 인간이 힘이 없고 연약하니까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잘난 척하고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줄 것이 많은데 줄 사람을 찾고 있다. 상속할 사람을 찾고 있다.
이런 하나님이 있겠는가? 세상에는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지만 많이 있다. 인종마다 다 하나님이 있고, 자기들이 믿는 신이 다 있다. 그런데 이런 신은 없다. 자기를 상속하려고 사람을 부르는 신이 없다. 내가 다 잘 모르는 수도 있으니까 연구를 해 보라. 연구해 보고 이보다 더 좋은 하나님이 있거든 그 하나님을 따라가라. 내가 알기로는 이 하나님 보다 더 좋은 하나님은 없다.
성경을 하나님이 썼는가? 사람이 썼는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나같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상속을 하겠다고 하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리고 아까 말한 대로 사람들이 상속을 받았다. 은혜를 받았다. 증거가 있다.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것이다. 누가 하나님 아들이냐? 이것을 지금도 하늘로부터 왔으니까 하나님 아들이다. 성령으로 잉태했으니까 하나님 아들이다. 능력을 일으키니까 하나님 아들이다. 쉬운 말이 아니고 아주 분분한 말이다.
동양 중국에서는 하늘이 내린 사람을 천자라고 한다. 하늘이 내린 사람은 황제다. 조선에서도 성리학에 따라서 임금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누구도 임금을 손대면 안 된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런 사상이었다.
다른 나라는 또 다르다. 희랍에서는 유명한 사람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비범한 사람, 보통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씨저 같은 사람을 하나님 아들이라 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런 유명한 사람들을 신의 아들이라 하였다. 제우스의 아들이다.
그런가 하면 인도에 가면 불교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한다. 거기는 신이 없다. 불교에는 신이 없다. 힌두교에는 수 없는 신이 있는데 그것을 박차고 나온 것이 불교다. 신이 없는데 유아독존이다. 사람이 전부고 최고라는 것이다.
뭐라고 하든지 간에 나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상속을 주겠다는 하나님이 제일 좋다. 여러분이 유아독존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보고, 황제가 되고 싶으면 해 보고, 세상에서 별난 사람이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보라. 나는 그렇게 못 하니까 상속을 주겠다는 하나님이 제일 좋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다. 상속을 해 주겠다는 하나님이 제일 좋지 않은가? 그러면 아멘하면 된다.
누가 아들인가? 상속자가 아들이다. 같은 아들이라도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는데 이삭이 상속을 받으니까 이삭만 아들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하늘이 준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받은 사람이 축복이지 낳은 사람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렇게 묘하게 되었다.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다 그렇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에서도 유다가 맏아들 상속자가 된다. 이것은 촌수가 없고 혈통과 관계가 없이 하늘의 축복은 받을 사람이 따로 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계열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아들의 계열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세계)라.”(마1:1)고 할 때 보면 맏아들이 다 되는 게 아니다. 맏아들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둘째 사람이 많고 또 아니면 이방 여자가 낳은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상속의 계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상속한 계보이기 때문에 큰 아들이라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세계에 왔다는 것도 참 감사하다. 우리가 만약 순서대로 된다면 우리는 불합격이다. 안 된다. 그런데 순서가 없는데 이상하게 상속이 온다. 그러니까 기대가 있다. 누구든지 가능성이 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지만 이삭만이 상속자다.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 있었지만 야곱만 상속을 받았고 야곱만 상속자가 되었다. 족보에서 보면 이 사람은 빠져 버린다. 상속에서 빠져 버린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낳고, 이런 게 없다.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낳고, 이런 것은 없다. 야곱 다음에 상속자가 바로 나온다. 마태복음 1장은 아주 신기하게 쓰인 책이다. 아주 귀중한 족보인데 인간의 상식으로는 안 맞는 족보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는 상속자가 될 만한 사람이 둘인데, 하나는 천사고 하나는 사람이다. 창세기 6장까지만 해도 천사들을 하나님 아들들이라 했다. 제일 오래된 욥기에 보면 거기도 역시 천사들이 나온다. 이 우주 안에서 천사가 제일 높은 그런 위치에 있다. 천사들은 당연히 자기들이 상속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장자니까 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이스마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바꿔졌다.
상속자는 천사가 아니고 인간이다. 히브리서 1장은 묘한 책이다. 내가 언제 천사를 가리켜 내 아들이라고 하였느냐? 나는 천사를 내 아들이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보고 아들이라고 했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시원찮은 사람을 보고 아들이라고 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보고 아들이라고 했다. 세상에서는 버려진 사람이 아닌가? 누가 그런 사람을 보고 상속자라고 생각하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하다 못해 저런 사람에게 상속을 하겠느냐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사람을 상속자로 부르신 것이다. 예수는 사람이다. 아들이란 말이 그런 말이다. 상속자란 말이 아들이라는 말이다. 한 배에서 났어도 상속을 받은 사람만 아들이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똑 같이 말씀을 들어도 많이 들리는 사람이 있고 적게 들리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아주 공평한 것이다. 시간적으로 먼저 나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이유가 또 재미있다.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대단히 혼란스러워 한다.
천사냐? 인간이냐?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그렇다. 천사같이 되어야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사람 속에 들어있는 아주 깊은 기본적인 관념이다. 천사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람과 비교가 안 된다. 첫째로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데 그만한 복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과 방불하다고 했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상속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비슷한 사람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비슷하게 된 사람이 제일 복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 주변을 봐라. 세상을 봐라.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은 그 사람이 상속자가 되겠는가? 이것이 참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능력이 탁월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원한다. 능력이 탁월한 그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능력이 탁월해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능력이 탁월하면 가질 것이 많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준 상속이 아니다. 하나님의 상속은 다른 것이다. 상속 자체가 다른 상속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의 어떤 것을 상속할 체질이 안 된다. 능력은 탁월한데 체질이 안 된다. 원숭이가 사람보다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체질이 원숭이니까 사람의 것을 상속할 수 없다. 원숭이한테 상속할 수가 없다. 나무 잘 탄다고 사람을 상속하면 되겠는가? 원숭이는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사람의 것을 상속받지 못한다.
예수는 왜 상속자가 될 수 있는가? 천사에 비해서 능력은 형편없다. 천사가 낳은 사람들은 네피림이다.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유명한) 사람들이었더라.”(창6:4) 장부요 용사요 유명한 자였더라. 천사와 사람이 결합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네피림이다. 그 말은 장부요 용사요 유명한 자였더라. 세상에서는 그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 있는 이 말이 그 말이다. 천사냐? 인간이냐? 이 문제이다.
이 우주 안에는 중요한 문제가 천사냐? 인간이냐? 이 문제이다. 우리가 지금 천사냐? 인간이냐? 여기서 갈라지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따르지 못 한다. 이것이 갈라져야 한다. 완전히 갈라져야 한다. 잘못하면 천사를 따라가 버린다. 그러면 천사를 따라가면 종밖에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사와 체질이 다르다. 아무리 해도 천사를 상속 받을 수 없다. 아무리 해도 천사의 것을 내가 가질 수 없다. 따라가기는 열심히 따라가는데 가질 수 없다.
세상에서 사람이 가지는 능력은 끝이 없다. 더 갖고 싶고, 더 갖고 싶고, 더 가지고 싶다. 대통령과 왕을 하고 싶다. 그래야 능력이 많고 분배가 되니까 그렇다.
사람은 천사에 비해서 능력이 없다. 그런데 뭐가 있냐? 만유를 포함할 저런 체질이다. 체질 자체가 만유를 포함할 체질이다. 천사는 너무 탁월해서 만유를 포함할 수 없다.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가서 살 수 없다. 거기서 인정받을 수 없다. 천재 앞에 다서 인정받을 사람은 드물다. 천재가 볼 때 나보다 머리 좋다고 할 사람은 없다. 똑같다. 천사 안에 가서 천사한테 내가 아무리 종노릇해도 천사한테 칭찬받을 일이 없다. 왜 그것 밖에 못하냐? 왜 그것 밖에 안 되냐? 이것이다.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사람 앞에 가면 다 바보가 돼 버린다. 그것도 모르냐? 이렇게 되어 버린다. 그 밑에 가면 다 무시만 당하니까 사람이 괴로운 것이다. 사람은 당연히 천사 앞에 가면 무시당한다. 아무리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은 체질상 당한다. 결국은 사람은 죽는다. 인생 별거 아니잖아, 너 별거 아니잖아, 그러면 할 말이 없다. 죽음 앞에 가면 천사한테 할 말이 없다.
이것이 참 역설적인 것 같을 것이다. 그런 천사가 상속자가 안 된다는 것이 역설적일 것이다. 그런데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 왜 가장 합리적인가? 사람은 능력이 없지만 십자가에서 이것이 밝히 드러났다. 그 체질이 드러났다.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상속할 수밖에 없구나. 이것이 드러났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 예수 그 사람이 뭔데 그 사람이 상속자냐? 예수 그 사람이 누군데 그 사람을 믿는다고 뭐 되냐? 이런 게 사람 속에 다 있다. 지금 세상이 다 그렇다. 복음을 전하면 왜 안 듣는 줄 아는가? 내용이 그것 때문에 안 듣는 것이다. 참 이상한 것이다.
여기서 그것이 딱 드러났다. 마지막 자리에서 드러났다. 체질로서는 천사가 조롱했다. 사람의 체질을 보고 조롱했다. 너는 아무리 해도 죽는다. 너는 아무리 별거 있어봤자 100년을 살겠느냐? 넌 아무리 해도 죽는다.
예수는 할 수 없이 조롱을 당했다. 내려와 봐라. 내려와 봐라.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다. 이것이 조롱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한 말 같지만 아니다. 천사가 시켜서 한 말이다. 그 말은 천사가 준 뭐가 사람 속에 있어서 그것을 무시한다. 십자가에 달리면 죽는데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들 안에 이 생각이 다 있다. 여러분 속에 다 있다. 내 속에도 있다. 솔직하게 생각해보라. 솔직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하는 인간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렇게 생각한다.
천사가 조롱할 때 사람들이 그래서 같이 조롱한 것이다. 그 천사를 사모한 인간들이 조롱했다. 사랑하는 제자들, 예수님에게 죽을 때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고 이렇게 맹세했던 사람들까지도 실망했다. 마지막까지 무엇을 기다렸겠는가? 거기서 내려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분이라면 내려올 수 있지 않겠는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인 분이라면 저기서 살아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기대를 마지막까지도 가졌다. 그런데 그 제자들마저도 실망하고 가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그래서 그 시체마저도 전혀 제자 아닌 다른 사람들이 치웠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니고데모가 와 가지고 시체를 치워 주었다. 제자들은 시체도 치우지 않고 가버렸다. 죽는 데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고 하겠다는 사람들이 다 가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기대가 아무것도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옳게 선택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천사가 조롱하고 사람들이 조롱하고 만물이 다 조롱한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예수 안에 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를 믿는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믿든지 안 믿든지 다 그 안에 있다. 체질이 똑같으니까 반대하는 사람도, 조롱하고 있는 사람도, 사실은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체질이 같다. 하나는 대장이고 하나는 말똥이지만 체질은 같다. 곰배쟁이나 말똥이나 사람은 다 똑같다.
예수 안에는 사람이 우글우글한데 천사 안에는 사람이 한 놈도 없다. 있겠는가? 거기에 사람이 없다. 능력이 있으면 사람이 우글우글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거기 모인 사람은 전부 다 각각 자기 욕심으로 모여 있기 때문에 언제 배신하고 갈지 모른다.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 지금도 능력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따라 다니는데 어느 날 가면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없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돼 버리면 다 달아나 버리고 없다.
정치하던 사람들이 정치에서 손을 못 놓는다. 정치할 때는 문전성시인데 장관하다가 장관이 떨어져 버리면 한 놈도 안 온다. 목사도 그렇다고 한다. 인기가 대단하던 목사였는데 정년퇴직하고 나니까 아무도 없다고 한다. 편지 한 장도 없고 엽서 한 장도 없다고 한다. 주일이 돌아오면 대단히 외로운 사람이 정년퇴직한 목사라고 한다.
여러분은 그것을 잘 모르실 것이다. 그래서 이 목사님도 갈 데가 없다. 그렇다고 그 교회를 갈 수는 없고, 남의 교회를 갈 수도 없고, 참 난처하다고 한다. 가능하면 그런 분들만 모이는 교회를 하나 만들어서 모이라 했으면 좋겠다. 말은 많겠지만 그것도 좋은 일일 것 같다. 너무 외롭다고 한다. 2~3명 모이는 데서는 그래도 인간적인 맛이 있는데, 수천 명 수만 명 모이던 데서는 다 떨어져 나가고 아무도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봐도 그렇다. 예수 안에 가니까 사람이 우글우글 꽉 찼다. 인간이라는 것이 다 그 안에 다 들어와 있다. 하나도 예외 없이 인간이 다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자 안에는 모든 인간이 다 거기 있다. 여러분 그것이 보여야 된다. ‘예수 안에’ 만유가 있다는 것이 보여야 한다.
바울이 그 유명한 말을 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나니.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 속에 다 있다. 그러니 하나님인들 어찌하겠는가? 하나님이 혹시 천사에게 점찍어 놓고 있다고 하더라고 어쩔 수 없다. 백성이 다 그렇다는데 어찌하겠는가? 하나님인들 어찌하겠는가? 천사에게 가니까 아무도 없고, 예수한테 가니까 온 인류가 다 거기 와 있으니까 하나님이 누구한테 상속하겠는가? 너무 쉬운 일이다. 잘 생각해보라. 성경 말씀이 어려운 것 같지만 그것이 너무 쉬운 것이다. 당연하다. 하나님이 어찌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게 아주 비참하고 비천한 것만이 아니고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인간 속에는 개도 있고 돼지도 있다. 만유를 포함했다는 말은 그런 말이다.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있다. 왜? 체질이 같으니까. 돼지도 오장육부가 있다. 사람도 오장육부가 있다. 소도 오장육부가 있다. 다 똑같다. 안 먹으면 죽는다. 숨 못 쉬면 죽고 다 똑같다. 똑같은 것끼리는 한 데 모여 있는 것이다. 천사에게는 우리가 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는데 제자 되려고 갔다가 못 견디고 나온다. 이 목사님이 너무 충만해서 밥 먹는 시간도 따로 없고 잠자는 시간도 따로 없다. 기도를 하면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기도만 하고 있다. 제자 되려고 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 사람들인데 배고파서 못 견딘다. 선생님은 먹지 않는데 제자가 밥 먹고 앉아있겠는가? 선생님이 주무시지 않는데 젊은 놈이 쿨쿨 잠자고 있겠는가? 견디다, 견디다 못해 다 나온다. 그래서 자기 혼자 돌아다닌다. 그 양반을 만나 봤는데 너무 충만하다. 얼굴이 달덩이 같고 겨울에도 고무장화 신고 맨발로 다닌다. 놀랬다. 그때는 내가 그것이 참 부러웠다. 어쩌면 저렇게 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일 썬다싱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얼마나 부러워했겠는가? 그런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 많이 있다. 그런 사람이 부러워서 근처라도 가보고 싶어서 삼각산으로 부흥회로 쫓아 다녔다. 그런데 안 되었다.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줄 것 같으면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쫓아다니는데 안주겠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못 받았다. 하나님이 주는 것 같으면 누구나 다 주어야 한다.
조롱을 해도 조롱을 받아도 그 자체로 보면 참 비참하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다 조롱하고 있지, 비웃고 있지, 제자들까지도 허망해서 실망해가지고 있지, 얼마나 비참한가! 그런데 하나님이 보니까 그 안에 사람들이 다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이라고 생긴 것은 다 와 있으니까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다. 누구도 거기에 잔소리를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는 말이 그 말이다. 자기도 후회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도 뭐라고 사족을 부칠 수가 없다. 그것이 너무 그렇게 당연하다. 아주 비합리적인 것 같았는데 가장 합리적이다.
누가 그 사람은 대통령이 아닐 수가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진짜 대통령이다.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출마하라고 해서 나갔더니 100% 다 도장을 찍어 버렸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미국 대통령도 그러면 할 수 없다. 여러분들이 전부 나와서 운동을 해서 나를 대통령으로 도장 찍어 놓았다면, 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다 도장을 찍었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도장을 찍지 않으니까 다행이다.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게끔 예수를 아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예수보고 상속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주려면 인류도 다 부족한데 모든 인류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주겠는가? 예수는 너무 부자다. 하나님의 상속을 받기에 너무 합당하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승리하게 하신 분이다. 사람을 지어놓고 천사가 얼마나 조롱을 했겠는가? 왜 저런 인간 저런 것들을 만들어놓고 내 자리를 뺏느냐고 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어떤 존재인데 나를 제쳐놓고 인간을 쓰다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을 승리하게 만들었다. 아, 그래서 사람을 만들었구나. 그래서 흙으로 만들어 놓았구나.
기왕이면 좋은 것으로 밀가루로 만들지 왜 흙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생각했다. 우주 안에 다른 존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인간 저것이 흙으로 만들어진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승리하게 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당하게 만들었다.
예수 없을 때는 하나님도 당당하지 못하다. 누군가 유명한 사람이 강의하는데 들으니까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그것은 하나님도 아니라고 한다. 잘한다고 상주고 잘못하는 놈은 벌주는 그런 하나님이 무슨 놈의 하나님이냐고 들이 대는데 그런 사람 앞에 가면 할 말도 없다. 하나님이란 분이 그것도 용서 못해서 기어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서 용서하느냐고 한다. 죄를 용서하려면 그냥 하면 되지 어떻게 사람을 죽여서 용서하느냐고 한다. 강의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할 말이 없다.
나에게도 옛날에 어떤 형제가 다른 데로 나갔는데, 이말 저말을 했다. 그래서 내가 좀 화를 내서 얘기를 했더니 씩 웃으면서 그렇구만, 했다. 화를 내지 않아야 하는데 화를 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가버렸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가 화를 안낸다고 나한테 있겠는가? 나에게 화낸다고 별것도 아니라고 하고 가버렸다.
하나님이 얼마나 독한 줄 아는가? 안식일을 안 지킨다고 때려죽이라 하는데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비난을 한다. 그런 하나님이 하나님이냐고 한다.
그 하나님을 승리하게 해준다면, 그 하나님을 만유가 다 찬양하도록 승리하게 해준다면, 하나님에게 그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사람이겠는가?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다른 분이 아니고 예수가 그런 분이다. 공자님처럼 유식한 것도 아니고, 석가모니처럼 심오한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이 없다.
예수님의 어록만 뽑아서 하고 있는 것이 도마복음 이라는 복음서라고 한다. 다른 것은 다 가짜고 꾸며 만든 것인데 어록만은 진짜라는 것이다. 어록도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사실 그것도 진짜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직접 말을 했는지 제자들이 와서 말했는지 모른다.
특별히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기도한 말을 요한이 다 써놓았다. 그것을 외워서 썼겠는가? 메모해서 썼겠는가? 그것은 요한이 경험하고 예수를 자기가 고백해 놓은 것이다. 예수님이 기도하는데 자기가 무슨 수로 그것을 들어서 그대로 기록해 놓겠는가? 도마 복음만이 진실이고 그것만이 진짜라고 해설하는데 답답하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누가 아는가? 고고학적으로 발견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것을 누가 언제 써서고 묻어 놓았는지 누가 아는가?
하나님을 승리하게 하신 그분이 독생자다. 영광을 받아서 마땅하다. 예수를 세세 무궁토록 찬양해도 마땅하다. 찬송 받기에 마땅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까지 포함시켜 주었으니까 너무 마땅하다. 우리가 그를 찬송하지 않고 누구를 찬송하겠는가? 마땅하다. 세세 무궁토록 찬송을 받을지어다라고 계시록에 늘 나오는데 너무 마땅하다. 다른 것이 좋은 것이 많이 있겠지만 우리의 찬송을 받을 분이 이분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축복과 권리를 받아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이것이다. 유일한 길이 그 안에 있다. 우리가 재주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해 놓은, 창조 때 부여해 놓은 모든 축복과 권리를 100% 누릴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길뿐이다. 예수 안에 포함된 것뿐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길을 갈 수 없다.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이것은 이 길밖에 없다.
나 혼자 가서 상속을 못 받는다. 하나님이 그 많은 보화를 누구 한 사람에게 특별히 줄 수 없다. 만민에게 다 줄 복인데 어떤 한 사람에게 그것을 어떻게 주겠는가? 만민을 포함한 사람에게 주어야 되지 자기 혼자 똑똑한 사람에게 주면 뭐하겠는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너무 당연하고, 너무 옳은 일이고, 이렇게 옳을 수가 없다.
요즘에도 그런 말이 있다. 부자는 자기 얻은 것을 사회와 더불어 알고 사회에 환원시켜야 한다고 많이 하지만 그것이 참 어렵다. 자기가 노력해서 힘쓰고 애써서 벌어 놓은 돈인데 그것을 전 국민에게 환원시킨다는 것이 쉽겠는가? 남의 세금 가지고 뭘 하는 사람들이니까 전 국민에게 10만원씩 주자거나 100만원씩 주자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가 벌었으면 주겠는가? 자기가 벌어서 주면 좋지만 국민 세금을 걷어서 나눠주라고 하면 누구는 못 하겠는가?
하나님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만민에게 다 상속해야 한다. 만민에게 주어야지 누구 한 사람에게 주면 안 된다. 예수 한 사람만 받았다고 하면 하나님은 욕 얻어먹어도 싸다. 예수만 유독이 그런 복을 받았다고 하면 하나님을 아무리 욕해도 할 말이 없다. 왜 그 사람에게만 주냐고 하지 않겠는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니까 우리는 이제 할 말이 없다. 예수 안에서 만민에게 복을 다 주니까 너무 완전하고 지혜로우신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에게 왜 그랬냐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예수 안에서 자격이 생긴 것이다. 얼마나 복인가! 생각해보라. 하나님 복음은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이 우주에 복잡한 문제가 간단해졌다. 이 우주의 복잡한 문제가 천사하고 겨룬 이 복잡한 문제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다.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누가 예수 안에 있는가? 이런 의문이 있는 분이 있을 것이다. 누가? 자기가 예수 안에 있다. 누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인가? 내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있으면 여러분도 있다. 사람이니까, 체질이 그러니까, 체질이 우리가 예수와 같은 체질이다. 능력은 다르다. 하지만 체질이 같다.
이것은 그 체질이 되어야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안에서 복을 받는다. 천사는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안 된다. 만물과 교통할 수가 없고, 만물을 포함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다 있다. 개도 있고 소도 있고 다 있다.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우리 안에는 다 있다. 다 우리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왜? 체질이 같기 때문이다.
나무도 오래 되면 죽는다. 사람도 죽는다. 그런데 이 천사는 안 죽는다. 그러니까 어떻게 포함이 되겠는가? 예수는 우리보다 먼저 죽었으니까 못 들어 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천사 같으면 모르지만 자기가 천사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인 사람은 그 안에 다 있다. 인간인 사람은 인간 예수한테 다 있다. 인간 예수는 똑같은 사람이다.
이보다 공평한 것이 없다. 이보다 공평한 것이 없고, 이보다 정의가 없다. 무슨 놈의 정의고 공평이고 그것 때문에 맨날 싸운다. 참된 공평 참된 정의를 알고 나면 세상의 정의와 공평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입장 달라지면 또 달라지고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것이 인간의 공평이고 평등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참된 복을 누려야 된다. 참된 평화, 참된 공평, 참된 자유, 이것이 있으면 이것은 갈등이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유를 가지면 평등이 안 되고, 평등을 가지면 자유가 안 된다. 그래서 싸우는 것이다.
예수 안에 와야 이 우주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된다.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이것도 할 것이 없다. 이 안에 오면 다 해결된다. 싸울 필요가 없다.
군비에 들어가는 돈이 엄청나게 많다. 무지하게 많은 돈이다. 그 돈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쌀을 갖다 주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겠는가? 거기에 돈을 소비하고 있다. 우주를 날아가느라고 돈을 소비하고 있다. 선거에 표 얻으려고 돈을 쏟아서 쓰고 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라도 정상적인 세계에 들어왔으니까 하나님을 승리하게 하면 나는 저절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된다. 내가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면 나는 피조물인데 나는 뭐가 되겠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나도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이 높아져야 나도 높아지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데 하나님 보좌다. 보좌 나름이지 김*은도 보좌고 문*인도 보좌다. 다 보좌다. 왕좌라는 말이다. 누가 그 옆에 있느냐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그 하나님이 높아야 자기도 높은 것이다. 하나님이 높지 않으면 그 보좌가 보좌가 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높게 만들면 입으로만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을 나를 통해 승리하게 만들면 나는 승리하신 그분 옆에 있는 것이다. 같이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잘 나려고 생각해도 안 된다. 나 혼자 똑똑해 봐도 안 된다. 우리는 피조물이라 딸려 있기 때문에 나 혼자 마음대로 안 된다. 내가 잘하면 된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 잘해도 안 된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 완전하고, 그분이 천하무적으로 승리하시면 우리는 저절로 다 승리하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에게는 송사하는 것이 천사다. 자기도 비슷하니까 송사를 한다. 우리가 그 송사를 끝내야 한다. 사람이 끝내야 한다. 사람의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도 혼자는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모두 승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승리자가 되게 하려면 하나님을 승리하게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는가! 한번 생각해보라.
이것이 끝이 없는 얘기고, 다음에 또 해야지 할 수 없다. 잘 들어 줘서 감사하다. 재미있었으면 다행이겠다. 여러분에게 축복이 되었으면 더 다행이겠다. 여러분에게 뭐가 정리가 됐으면 너무 다행이겠다. 눌러 붙어 있는 것이 많다. 이것저것 눌러 붙어서 앞에 못 가게 하는 것이 많다. 말씀은 들어도 안 들리고 가로막고 이런 것이 많다. 이런 것 싹 정리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이 쏙쏙 들어오도록 정리가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는 지금 싸우고 있다. 아주 깨끗하게 정리해 버리고 ‘나는 주밖에 복이 없습니다.’하고 정리되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너무 편하고 좋다. ‘나는 주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너무 편하고 좋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