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26-27
출발하자마자 바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종두가 보이지 않는다. 어둡고 사람이 많아 찾기도 힘들다. 초반에는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일단은 그냥 가야겠다. 가다보면 만날수도 있겠지...
사람들이 달리니 나도 휩쓸려 달린다. 오버하지 않는 한도에서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다. 경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초반에 병목 현상이 생기면서 시간 초과로 많은 탈락자가 생긴단다. 실제 구간 컷오프 타임을 보면 초반에 빠듯하고 후반에 다소 여유가 있다. 초반에 어느 정도 속도를 유지할 수 없다면 후반에 완주할 확률은 거의 없으니 쓸데없이 힘빼지 말고 집으로 빨리 가라는 대회측에서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6.5km 지점에 있는 CP1 Checrouit 에서는 쉬지않고 곧바로 14km 지점 CP2 Lac Combal 를 향해 나갔다.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내 뒤를 따르는 끝없는 헤드랜턴 불빛과 내 앞에 있는 끝없는 불빛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몸이 풀리면서 다리가 가벼워지고 조금씩 추월을 해나간다. 큰 산을 하나 넘고 내리막을 뛰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배에서 신호가 왔다. 그리고 참을 사이도 없이 끈적한 그 무언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체면이고 무엇이고 없었다. 주로 옆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바지를 내렸다. 마저 일을 보고 바지에 묻은 액체를 대충 닦아내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랜턴 빛을 밝히며 내 옆을 지나갔다.
조금전까지 탱천했던 의욕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제는 이런 상태로 완주나 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휴지도 없는데 다시 신호가 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레이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몇 년전 남아공 파견 때 기억이 떠올랐다. 시운전 일정이 없는 주말에는 캅스훕 숙소 주변 산길을 달리곤 했었는데 도중에 배가 아프면 으레 숲으로 들어가 일을 보았고 휴지가 없으면 자연스레 나뭇잎을 사용했었다. 그 순간 어두운 밤길이었지만 주로 옆에 나와있는 연잎처럼 넓은 잎사귀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충분한 양의 잎을 따서 앞주머니에 가득 넣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속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힘을 내어본다. 다행히 더이상의 불상사 없이 CP2에 도착할 수 있었다.
CP3 La Thuile 까지는 구간거리만 21km에 획득고도가 1200m나 된다. 초반이긴 하지만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한다. 다행히 날씨는 좋다. 높은 산에서 부는 바람은 섬뜩할 정도로 매서웠지만 반팔과 팔토시 경기복 위에 앏은 긴팔 상의를 걸쳤는데도 견딜만 하다. 몸에 열이 식거나 CP에서 쉴 때만 중간중간 방풍자켓으로 보온을 했다. 작년에는 레이스 도중 눈이 오고 너무 추워서 많은 선수들이 포기했다고 하는데 정말 다행이다. 비가 오지 않으니 방수자켓과 방수 바지도 쓸 일이 없을 것이고 따로 준비한 두꺼운 보온용 상의도 필요 없겠지만 그래도 좋다.
어두운 밤길은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졌다. 배탈 때문인지 고산증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속이 불편하고 머리가 아프다. 페이스도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동이 틀 무렵 커다란 호수를 지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사진을 찍고 잠깐이라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하고 지나갔겠지만 지금은 다 귀찮을 뿐이었다. 복통과 두통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어 다른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다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 다만 어떻게 해서라도 완주 해야하겠다는 독기만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길고 지리한 구간이 끝나고 드디어 35km에 위치한 CP3에 도착했다. 많이 늦어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예상 도착시간보다 별로 늦지 않게 도착했다. 우선 좁고 긴 나무 의자에 대자로 뻗어 휴식을 취하고 나니 아침이 주는 힘찬 기운을 받아서 그런지 신기하게도 원기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음식을 몇 가지 챙겨 와 먹으려는 순간, 우웩~ 구역질과 함께 음식을 입 근처에만 가져가도 바로 토할 것 같았다. 지난 몇 년 동안 훈련을 하든 대회에 나가든 이런 문제는 한 번도 없었는데, UTMB 대회는 CP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거의 먹지 못했다고 다들 이야기 할 때 조차도,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먹성 좋은 내게는 예외인 줄 알았었다. 그래도 완주를 위해서는 에너지 보충을 해야만 하고 그러려면 무엇이든 먹어야 하는데.... 눈을 딱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바게트 빵 한 조각과 주먹밥 한 개를 억지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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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S 코스는 산이 높고 깊다보니 전반적인 주로 상태는 한국보다 좋더라도 오르막 또는 내리막 구간길이가 엄청 길어 힘이 더든다. 또한 주로 2000m에서 2500m 사이의 산을 계속 넘다보니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선수들이 고산증으로 고생한다. 거기에다 CP에서 주는 음식이 빵, 과자, 치즈 등인데 동양인 입에는 맞지 않아 선수들이 먹지 못해 경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아니면 먹거리를 충분히 준비해서 러닝조끼(Vest)에 넣고 뛰어야 하는데 필수장비만 넣어도 조끼가 꽉차기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은 일이다. 엘리트 선수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선수가 이틀 밤을 꼬박 세워야 하는데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 헤드랜턴 빛을 계속 보면서 밤길을 걷다보면 의식이 몽롱해 지면서 순간적으로 졸기도 하고 환청, 환각까지 나타난다. 더우기 주로 옆이 낭떠러지인 곳이 많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집중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3년전에도 TDS 참가 선수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져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