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일부러라도 비번날이 필요할 듯...택시 기사의 비번일처럼
▣ I'm off, today. ▣
내게 주어진 비번일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가
가을 소풍을 나서듯 단풍 구경삼아 진해 임도를 달리기로 맘 먹은 게 어제...
진해 임도는
창원과 진해 사이 안민고개를 넘어가서 1km 가까이 내려가면 있다.
수리봉, 천자봉 방향으로 나 있는 그 길은 편도 11.5km, 왕복 23km의
자갈, 모래가 있는 흙길, 산길이다.
경사도 완만하여 오르막이다 싶으면 금세 내리막이 나타난다.
한 뼘만큼의 오밀조밀한 진해 시가지 너머로 쪽빛 찬란한 남해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낯익은 부두의 풍경들이 거기 있다.
우우웅 기계음 소리도 살아 움직이는 도시의 목소리 같다.
탁 트인 시야로 다 들어오는 그런 풍경들에 눈이 즐거워진다.
♪나는 나는 갯바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파도∼
♬안녕하고 돌아서는 그건 아니잖아 사랑을 위한 여행을 하자 바닷가로∼
진해 임도를 처음 달려 보았던 때가 엊그제만 같다.
- 점미 언가, 현천 언가, 미해와 함께 했었지...-
차 안에서 옷을 갈아 입고, 입구의 바위 근처 풀 속에 차 열쇠를 숨겼었는데...
샘터까지 같이 뛰고선 발목이 시원찮다며
"팔각정까지 너네들끼리 갔다와라..."
그 때는 후배 훈련(트레이닝)을 그렇게 시키나보다 했었는데...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으며 뛰다보니 고지는 쉽게 발 아래 닿았고
그 군기 먹은 손으로 그 날의 훈련 보고서를 홈피에 올렸었는데...
돌아오던 길, 포장마차에서 먹은 뜨거운 어묵 국물의 맛이 그리워진다.
나서기 전부터 시작된 갈등의 고리들...
삶의 시작은 울까 말까의 선택에서부터였을까...
달림이옷(런닝복)을 어떻게 맞춰 입을까...낮부터 기온이 오른댔으니 짧은 걸로 할까...
- 해님 껑충 떠오르기 전에 마칠텐데, 무얼... -
결국 등산객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 고의적인 시기 질투의 눈길(-_-;;), 쫴끔 불편한 풍기문란(@.@), 예기치 않은 위화감(→_←) -
긴 달림이옷 위에 여차하면 벗어서 풀숲에 숨겨둘 요량으로 운동복(트레이닝복)까지 챙겨입고 나섰는데...
아차차...사람이 너무 많다.
예서 벗어 던지고 후다닥 뛰어 내려갈까를 주차장에서 갈등하다가
남의 시선 의식 않은지 오래 되었지 싶은데 그래도...완전 중무장한 그네들의 차림새에 주눅들어
올 사우나 함 해보자...
콩, 너는 죽었다가 아니라...살들아, 너그들 주겄다...
가을 들면서 움켜쥐었던 살들을 오늘은 얼마간 내놓아야 할끼다.
▩ 콩, 너는 죽었다 - 김용택 -
콩 타작을 하였다/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또르르 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콩, 너는 죽었다 ▩
대략 3km를 지나니 땀이 솟는 걸 느낀다.
안경(고글) 낀 콧등이 미끌거린다.
이래 갖고야 어디 등줄기로 땀 한 방울 흘러내리겠는가...
하지만 도대체가 속도(스피드)를 낼 수가 없다.
평탄한 주로만 달리던 다리가 비칠비칠 자갈길을 위태하게 내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숨소리가 아직 헉헉대지 않아 얘기꽃을 피우며 가던 등산객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아
지그재그(ZigZag) 비껴가다 보니 더 그렇고
- 담 주 통일마라톤 달려야하는데...예서 발목이라도 삐면 안되는데... -
그래도 4km 통과 지점인 샘터에 다다르니 산길 사정이 좀 낫다.
겨울에 피는 장미나 개나리는 보았던 터이지만
샘터 지나 철쭉꽃 군락지에서 때를 모르고 몇 송이 피어난 진분홍 꽃잎을 만난다.
♪겨울에 피는 흰 장미여 아직도 나를 기다리나∼
♬그대 눈물 씻어주고픈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완연한 가을 날의 동화 속이다.
길 가 정자나 의자에서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는 등산객들의 옷차림이 색깔이 곰살맞다.
가을 산행길이니 좋은 이들과 함께 하는 길이니 더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등산객의 옷 뿐만 아니라 보이는 색깔이 다 붉다.
빨간 열매, 발그레해진 벚나무 잎사귀, 붉그스레 바래져가는 풀들까지...
소나무 숲 사이로 하얗게 이어진 산가리마를 따라 오르는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웃음이 청량(淸凉)하다.
산을 삼등분하여 활엽수림-침엽수림-활엽수림으로 이어졌는데
초록 그늘을 드리워주는 향수림(香樹林) 너머로 눈을 들면
하늘과 맞닿은 산꼭지까지 울긋불긋 단풍물이 든 가을 산을 볼 수 있다.
40여분 달리니 내가 지나쳐 온 길들이 아스라이 시야에 잡힌다.
산허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 벚나무 단풍잎들의 와인칼라 행렬들...
오르막이다 싶으면 나타나는 내리막에 다리는 촐래촐래 길을 따른다.
천자암에 닿아 화장실(깨끗!!)에서 볼일을 마치고 샘물이 있으려나 찾아 언덕을 오르는데
앞다리를 들고 일어서는 커다란 개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졌다.
얼른 개의 시야에서 빠져나와 다시 시계(타임워치)를 누르고 팔을 흔드는데
못 먹은 물에 미련이 남았음인지 갑자기 입술이 바짝바짝 타기 시작한다.
침을 연신 발라보지만 소용이 없다.
이럴 때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생각의 창고를 가동시켜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문득 신랑 생각이 난다.
어젯밤, 치마를 다림질하고 있던 내게 신랑 왈(曰)
"남자들 눈 즐거우라고...그런 짧은 치마는 입지 말그라..."
"이거요...업무용 정장 치마인데..."
"남들은 바지 정장도 잘만 입고 다니더구만..."
"예에..."
- 짧은 달림이옷 다림질은 말아야겠군...-
샘터에 다다르면 물 한 모금 마시리라 하던 맘이 변해 그냥 지나친다.
어느새 갈증은 사라진지 오래다.
샘터 지나 지압보도를 보니 발걸음을 멈추고 거기를 걷고픈 유혹이 순간 스친다.
어느 계절이었는지 기억에는 없는데 - 아마 얘기하느라 주변 풍경를 못 보았으리라 -
지인에게 첫사랑의 얘길 들려주며 지압보도를 천천히 걸었던 때가 생각난다.
짝사랑하던 샘이 결혼한다는 소문에 부엌칼을 안고 유서를 쓰며 울다가 잠들었던 그 때를...
깔깔깔 웃어제꼈는지 흐흐흐 웃음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는지는 모르겠다.
- 지금은 훈련 중이야...그러니 담에 와서 걸어보자... -
구름에 가리워있던 해가 등 뒤에 따라오는지라 끄덕끄덕 그림자가 앞장을 선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에 무거워진 발소리에 등산객들이 길을 비켜준다.
껍질도 안 벗긴 오이를 우적거리며 먹는 등산객을 지나치는데
"비켜주라..."
친구를 잡아당기는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오이의 상큼한 내음이 내 폐 안에 그∼득 찬다.
- 차에 가면 시원한 얼음물도 있지...김밥 꼬투리 몇 개 있지...
담에는 #오이#를 갖고 와야지...-
기분좋게 땀에 절은 몸이 상쾌하다.
좀은 가벼워진 듯도 하고 개운한 기분도 든다.
- 퐁당퐁당 훈련(강약약 중강약약)을 하려면 내일은 쉬어 줘야 하겠지.
근육이 만들어질 시간도 필요하다니까...-
다음 비번일을 기다려본다.
그 때는 무얼 할꼬...
권미해 10/28[21:39]
진해임도를 그렇게 젬나게 달린지도 넘 오래된것 같아 나스스로가 못내
넘 아쉽다. 몇년전 푸짐했던 겉절이에 파찌짐, 시원한 탁배기 한잔이 그
렇게 꿀맛이더만, 지금은 그런 꿀맛을 못느끼니 이 신세를 우얄꼬...
진희언닌 항상 느끼는거지만, 소녀라는 단어가 넘 잘 어울리는것 같아
항상 그렇게 아름답게 살어...진희소녀 홧팅!!!!!
송석철 10/29[10:44]
캬~! 멋지다.!
창마의 훈련부원 답게 회원님들 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행동으로 보여
줬구만..... 문학소녀의 글을 읽고 있노라니 저절로 뛰고 싶단 충동이
느껴지네 *^^* 쉬는날 편하게 쉬고 싶단 충동도 많았을 건데...마라토너
답게 기특(?)한 생각을 했구먼...ㅎㅎ 홀로 가을을 음미하면서
멋진"마라닉"(피크닉+마라톤)을 즐긴 문학 소녀에게 박수를....ㅉ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