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3일 (금)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말씀 묵상 (코헬 3,1-11) (이근상 신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렛 3,11)
문제가 되는 단어는 '시간 의식'으로 번역한 '올람'이다. 구약에서 수 백 번 사용하는 단어인데 주로 영원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영원한 계약, 영원한 소유... 뭐 이런 뜻. 그런데 바로 이 영원이 문제다. 이게 불멸의 영원성이 아니라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길고 긴 흐름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보통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 먼 옛날부터 아주 먼 미래까지의 시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감각을 주셨고,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감각을 주셨으나 그 시작도 그 끝도 우리의 몫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멈추고,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것.
우리의 신앙은 내내 하느님,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에 뛰어들려는 몸부림이다. 어떻게든 당신과 결부되고픈 바람.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당신의 것을 간직하고픈 바람. 그런데 그와의 관계를 이루는 대부분의 공간이 비어있다는 건 어렴풋하지만 그럴 것 같다. 온 우주를 채우는 가장 큰 자리가 빈공간인 것처럼.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그 빈 자리를 한 해 두 해, 아니 백 년 이 백 년, 아니다 일 광 년 억 광 년 건너가야 하는 것.
당신은 우리에게 별같은 기쁨을 주고 그 사이에 광대한 빈공간을 허락했다. 옛날에 배운 독일어 Weltschmerz란 말의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다. 네이버사전으로 찾아보니 염세, 비관적 세계관이라고 딱 두 단어로 정의를 해 놓았다. 아... 말이란게 이렇게도 저렴하게 난도질 당하기도 한다. 블레이크가 많이 서운할 거 같다. 세상이 사람의 마음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이라 배웠다.
사실 빈공간을 빼면 별들이, 아니 우주가 어찌 텅빈 마음을 위로하는 우주가 될 것이냐.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pfbid0247KnEvKvFmZYLJN3z3Lf4PKs9Po7odcjeX5USUNNux4D2wkrEwbLYJ9QxVmPhZr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