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짜면 한 그릇
짬짜면 한 그릇에는 심리학 한 강좌가 담겨있다.
음식 주문을 할라치면 볶음밥과 짜장면, 짬뽕과 군만두로 나뉘며 특별한 날에는 그 가운데에
탕수육이 등장하곤 한다. 다른 사람과 달리 유독 짬뽕파와 짜장면파는 주문할 때 결정 장애를
일으킨다. 이것을 시키면 저것이 먹고 싶은 사람의 심리를 파악한 누군가가 사람의 욕구 충족을
위해 마음을 쏟다가 두 가지 음식을 한 그릇에 담아내도록 그릇을 개발하여 두 가지를 함께 먹고
싶은 사람을 만족시켜 준 셈이다. 결정 장애자들에게 다가온 선물이다.
짬짜면 한 그릇에는 의식혁명이 담겨있다.
창의적 발상을 일삼는 사람이 없었다면 짬짜면 그릇은 태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다양하게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한다면 얼마든지 그릇은 바꿀 수 있다는 의식전환으로 하여 태어났다. 누가 왜
의식을 바꾸는지에 따라 묺하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충족도가 높아지면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사람들의 욕구를 읽을 줄 알아야 역사를 바꾸는 주인이 된다.
짬짜면 한 그릇에는 색과 맛이 다른 역사의 상징이 담겨있다.
가운데 칸을 중심으로 음식이 달리 담기듯, 서울이란 그릇에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과 강북이
담겼으니, ‘짬짜면 서울’로 서울을 이분화하여 표현한 건축학과 유현준 교수는 졸지에 칸막이로
상징된 한 강이 섞일 수 없는 경계선이 되고 만다. 다리는 건너라고 만들어졌고 문화는 바람처럼
흐르게 되어있다. 강북은 정도전과 박자청의 개발정신이 깃들어있고 강남은 계획도시 스타일로
개발되었으니 달라도 많이 다르다. 내용면이나 외관상 짜장면과 짬뽕만큼 다르다. 색과 맛이
달라서 섞이지 않게 문화를 담아야 제 맛이 난다.
강북의 부촌을 사대문 안이라고 표현하고 주거용 건축물을 집이라고 말한다면, 강남에서는
강남3구라고 표현하며 주거용 건축물의 대부분이 아파트나 빌딩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렇게 구분짓는 표현이 소위 '짬짜면 갈등'처럼 이 시대의 확연한 갈등이지 않은가
싶다. 강북에는 짬뽕색을 닮은 단청색이 깃든 궁이 있고 강남에는 짜장면처럼 외벽으로 덮어버린
고층빌딩이 위용을 드러내고 서 있어서 서로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나는 강남에
거주하고 살면서 강북의 개성이 담겨 있다. 종로와 명동, 인사동 문화가 내 역사의 밑둥을 차지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짬짜면 한 그릇에는 대조란 의미가 담겨 있다.
짜장면의 단색과 짬뽕의 다채로운 색감은 시각적으로 구별된다. 걸쭉함과 국물로도 대별된다.
먹을 때 비비는 손길과 건지는 손길로 갈린다. 짜장면의 부재료는 깎둑썰기를 하고 짬뽕의 부재료는
채썰기를 하여 구분되고 짜장면에서는 야채색이 짜장에 묻힌다면 짬뽕에서는 색이 다 드러난다.
짜장면에서는 통일성이 두드러지고 짬뽕에서는 개성이 두드러진다. 짜장면에는 돼지고기가 쓰여서
흙냄새를 연상할 수 있고, 짬뽕에는 해산물이 쓰이므로 바다내음을 맡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취향은 바다 냄새와 다양한 색채가 드러나는 것으로 확실해진다.
짬짜면 한 그릇에는 하늘 사랑과 땅심, 사람 손 맛이 담겨있다. 식문화의 대륙 이동 역사가 들어
있다. 짜장의 진화력이 들어있다. 졸업식 풍경이 전래동화처럼 엮여져 전해내려오고 숱한 사연을
근대사 안에 흘려냈다.
근대사의 외식으로 등장하는 짜장면은 연예인이나 작가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만화가 허영만, 작가
정진권과 이상보는 짜장면을 매체로 쓴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대본 중 “지나간 짜장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대사로 유명해진 연예인 한예슬도 그 한 예이다.
국민애용 음식이 된 짜장면을 나는 거부했다. 음식 맛이 싫어서가 아니라 입술에 칠해지는 검은
색이 민망하고 옷에 짜장면 가락이 꼬리를 치면 볼성사나워서 기피음식이 되었다. 이래저래 자주
먹으면서 친해진 짬뽕은 식재료의 개성이 덮히지 않아서 좋다. 요건 새우, 요건 홍합, 요건 오징어
하면서 한 점씩 집어먹는 재미도 곁들여져 있다. 뒤집어도 식재료가 그대로 드러나서 나는 좋다.
색스런 음식스타일도 나는 좋다. 재료의 투명성이 좋은 것처럼 나의 글 개성도 투명성으로
분류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