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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꿍’이란 말의 묘미
출산율이 저조한 대한민국에서 어린아이는 정말 귀중한 보배다. 그 귀중한 보배가 작년 시월에 우리 집에 순순히 입성했다. 순식간 집안 전체가 우지끈 달아오르고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아이가 태어난 자체가 집안에 큰 경사인데 왠지 집안일도 술술 잘 풀리는 것 같고 무엇보다 웃음이 끊이지를 않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지 싶다. 집안의 생동감이 아이의 생명력으로부터 만개하고 있다. 3.2㎏으로 태어난 아이는 6개월 만에 거의 3배가 늘었다. 나는 이 영화로움을 시도 때도 없이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갤럭시가 너무 고맙다. 갤럭시는 스펙타클하게 대변신했다. 언제 어디서나 들여다보는 생생 다큐가 나를 즐겁게 한다. 이만한 기록 영화가 있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뼈와 근육과 장기와 기관이 엄청난 속도로 자라면서도 어떻게 정교한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보호받고 배려받아야 할 보배로운 아이는 몸의 성장과 더불어 다양한 기술도 착착 습득해간다. 아이의 성장 과정을 보며 나는 새로운 발견을 하는 양 감격하고 그로 나름의 분석도 한다. 웃기는 얘기지만 성선설인가 아니면 성악설인가 관찰을 잘 하면 알아낼 것만 같다. 누워 살던 아이는 점차 잡기, 물기, 뜯기, 옹알이, 이유식 먹기를 거쳐 지금은 한창 뒤집기와 억지로 앉히기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며 몇 달 만에 능력치가 빠르게 올라갔다. 원하는 대로 손을 쓸 수 있다는 게 큰 변모다. 분유를 받아먹기만 하다 이젠 젖병을 가까이 가져가면 두 손으로 젖병을 받아 스스로 먹는다. 떡 뻥튀기를 손에 쥐여주면 혼자 다 먹고, 또 달라는 시늉을 한다.
잠시인데도 아이를 보는 게 쉽지는 않다. 아이가 나를 상대로 놀아주는 것만 같다. 황제가 따로 없다. 어찌하면 지루하지 않게 잘 이끌 것인지가 매번 고민이다. 그런 아이는 할아버지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한 걸까. 4개월 조금 넘어 아이가 집에 왔을 때다. 나는 열심히 뛰뛰빵빵 장난감 차를 끌어주었다. 아이는 소리까지 지르며 좋아하고 방긋방긋 웃음으로 내게 즐거움을 표현했다. 나는 그때 나를 알아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5개월이 넘어 집에 다시 왔을 때 이는 착각임을 알았다. 나를 알아보기는커녕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는 잠을 잘 때 칭얼거리는 시간이 길어졌고 급기야 놀다가도 놀아주는 사람이 엄마가 아닌 사람이라는 인식을 한다 치면 울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4개월과 5개월 사이 분명 아이가 의식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책을 찾아보니 그 무렵이 사물의 존재와 시각적 깊이를 인지하는 시점이라고 나온다. 그래서인지 아무한테나 방긋 웃어주던 아이가 빤히 쳐다만 볼 뿐 웃어주지도 않는다. 낯을 가리는 것이다. 대신으로 아이는 어느 참 목놀림이 자유로웠다. 주 양육자인 엄마를 부지런히 찾기 위한 아이가 갖는 우선 발달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휙 고개를 돌리며 엄마를 찾는 아이, 발달 과정이 흥미롭기만 하다. 태어나 냄새에 의존하던 정적으로 지내던 아이가 4개월쯤에는 움직임을 즐거워는 하는데 시야가 아직은 여리니 그냥 웃어서 고맙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는 필시 생존 본능의 유화론 적 발현이지 싶다. 왜 강아지들이 아무한테나 안기고 까부는 그 무렵과도 같은.
비로소 5개월째, 사물을 인지하고 나름의 의식구조를 갖춘다는 그 무렵이어서인지 ‘ 너는 누구냐’ 하듯 엄격해졌으며 아이는 잠을 잘 때 종전과 달리 무척 애를 먹였다. 마치 수험생이 책임감으로 꾸벅 졸다가도 바로 서듯이 졸다가 억지로 몸을 가누며 칭얼거렸다. 눈을 감으면 캄캄한 암흑 속에서 큰 공포가 밀려오는 것 같이 느끼는 것만 같았다. 6개월이 다 되는 지금도 그 현상은 여전하다. 눈을 감아도 편안해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까꿍’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게 바로 그 무렵이다. 생후 4~5개월경의 아기는 시야에서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려주어도 눈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므로 아기에게 반드시 엄마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안심을 할 수 있다. 생후 6개월경에는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들려주면 엄마 목소리인 것을 인지하고 덜 불안해한다. 하지만 물건을 보여준 후에 수건으로 덮으면 아기는 물건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생후 8~9개월이 되면 눈앞에 있던 물건에 수건을 덮어도 수건 밑에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손으로 수건을 들춰내 물건을 찾는다. 이러한 인지발달에 맞춘 놀이가 바로 '까꿍놀이'다.
아이 장난감 중에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아주 단순한 기능을 갖춘 장난감이 제일 많이 팔린다. 가성비가 떨어진다 싶었는데 이는 그 대문을 통해 엄마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인지능력을 키우는 데 큰 효과가 있어서였다. 그런 ‘까꿍’은 꽤 오랜 전통이 있다. 옹알이할 무렵부터 '도리도리 까꿍', '곤지곤지 잼잼' 등의 소리를 하며 어르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육아법 '단동치기십계훈(檀童治基十戒訓)'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예컨대 '도리도리 까꿍(道理道理 覺躬)'을 '머리를 좌우로 흔들 듯 이리저리 생각해 도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뜻'으로 풀이해 놓았다고 한다. '도리도리(道理道理)'가 그 도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깨달을 각(覺)에 몸 궁(躬)으로 표기되는 '각궁(覺躬)'에서 나왔다는 ‘까꿍’은 맞는 것 같다. 뜻풀이대로 분명 그 시기에 아이는 자아 인식하기 시작하며 분별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까꿍’같은 인식 화법은 아프리카나 외국에도 있다. 이는 아마도 인류가 똑같이 갖는 발달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는 직립 보행으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중력을 이겨내며 뇌에 피를 공급하는 관계로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졌으며 긴 몸의 중심에 자리한 허리에 하중이 가중됨에 따라 만성 요통이 생겨났고 중심을 잘 잡기 위해 골반을 좁히는 바람에 애를 낳는데 큰 고통을 수반해야만 했다. 다행히 생물학적 진화는 또 다른 문화의 진화를 낳았다. 다른 동물들은 출산할 때 혼자 조용한 곳을 찾아서 가지만 인간은 무거운 머리를 혼자 받아낼 수 없는바 경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낳을 수가 없다. 인류가 존엄성을 갖추기 위해 수백 만년의 진화가 거듭된 것이다. 한 생명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데는 집안 전체가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요즘 부지런히 ‘까꿍’을 반복한다. 변함없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까꿍’을 자꾸 하다 보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든다. 고은의 ‘문의 마을에 가서’란 유명한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충북 청원군의 문의 마을은 대청호에 수장되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마을이다. 세상이 신성해진다면 문의는 잠들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이 구절이 ‘자식들이 잘만 된다면 당신은 잠들어도 좋다.’란 구절로만 생각된다. 가족의 표정을 하나하나 챙겼던 아버지 얼굴이 소상히 다시 떠오른다. 그 시 그대로 저만큼 가서 뒤돌아보듯 낮게 위치하여 참고 참으며 여전히 자식들을 껴안은 채 쳐다보는 아버지 그 모습이다. 세속의 희생으로 사라진 문의를 차마 대할 수 없었음인지 시인은 눈으로 덮인 문의의 죽음을 절대 죽음엔 닿지 않는다 하였다. 나의 아버지 또한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 신성한 마음의 곳에 늘 계시면서 우리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버지는 '각궁(覺躬)'하여 그렇게 내 곁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다. 우리 집 손자도 꼭 그렇게 나를 기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나는 영상 편지를 띄운다. ‘까꿍! 까꿍!’
1.
소확행의 의미 1
* 행복은 누구나 바라는 희망이다.
행복은 누구나 바라는 희망이다. 하지만 갈수록 험악한 세상에 행복은 저 멀리 달아나는 것만 같다. 흔히 말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의미라는 ‘소확행’(小確幸). 요즘 TV매체의 최대 흥행 먹거리는 다름 아닌 일상 속에서 작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 또는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에 대한 것들이다. 요 몇 년 사이에 쿡방 먹방이 유행이고 나 홀로 여행유람에 혼자 산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배경이 되었다. 이는 비단 우리만은 아니지 싶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채널 J라는 곳에서 "고독한 미식가"라는 제목의 이색적인 일본 먹방 드라마를 마주했었다.
대개 여러 명이 왁자지껄 소란한 말과 행동 표정으로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기 마련인데 그러나 이 먹방 드라마는 오로지 주인공이 하나로 시대가 만든 새로운 단어 "혼밥"의 의미를 적나라하게 펼친다. 일본의 만화를 드라마 한 것이라는 데 주인공은 결혼에 대한 중압감에 결혼도 안 하고 사무실도 없이 전국 이곳저곳을 다니며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인물로 길 따라 일 따라 자연 각 지역의 유명하지 않은 소박한 식당을 찾으면서 혼밥을 즐긴다. 나레이터가 주인공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그의 대사라곤 오로지 주문할 때뿐이다. 주인공은 눈과 입으로 맛을 표현하는데 그의 눈과 입에 집중하다 보니 지극히 단순한 행태인데도 중독성이 생긴다. 그런데 그 프로의 시작에는 꼭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시간이나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배를 채울 때, 잠시동안 그는 이기적으로 자유로워진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쓰지 않으며 음식을 먹는 고독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포상이라 할 수 있다."
중독성 때문인지 이 말을 나는 순순히 수납하고 있다. 어느새 나도 그 대열에 서서 행복에 대해 다시 헤아려 보고도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소소한 행복을 무기력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자는 일념도 생긴다. ‘소확행’의 일상적 파급효과는 실로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이 말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이는 1986년에 발행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맨 처음 쓰인 말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 또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인 말이다. 그의 소설 속 등장하는 ‘소확행’은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등등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 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심신이 편안한 상태. 또는 그러한 삶을 추구하는 경향으로써 안락하고 아늑한 상태라는 뜻으로 주로 소박한 일상에서의 행복감을 찾는 것을 말한다.
2018년 최고의 유행어는 바로 그 ‘소확행’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설문조사플랫폼 두잇서베이가 성인 2917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2018 유행어 설문조사’ 결과 소확행을 비롯해 ‘갑분싸’, ‘인싸’ 등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되는 신조어들이 대거 순위에 올랐다. 의미를 알지 못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신조어들, 성질 급한 우리의 전형적 말 표현이 요즘 급증하는 현실로서 표준어 저해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감이 적지 않으나 젊은이들의 이런 추세를 딱히 막을 방도도 마땅치는 않은 듯싶다.
어쨌든 ‘소확행’의 1위 등극은 작지만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라이프 트렌드의 확산을 엿보게 하는 점이다. 2017년에는 ‘한 번 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는 뜻의 ‘욜로’가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행복과 기쁨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이면에는 어려운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즉 결혼과 출산, 내 집 마련 등 미래에 대한 추구보다 지금 당장의 소소한 행복 추구로 위안을 삼는 젊은 세대의 어려움을 꼬집고 있다는 해석이다. 2위는 ‘갑분싸’가 차지했다. 갑분싸는 ‘갑자기 분위기 싸늘해지다’의 준말이다. 시초는 인터넷 방송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갑분싸를 응용해 ‘갑자기 분위기 OO해지다’로 의미가 확장되기도 했다.
이어 ‘인싸’가 3위에 꼽혔다. 인싸는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을 뜻한다.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아웃사이더’(Outsider)와 대조된다. 최근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고, 극단적인 사건 등을 저지른 이들이 사회부적응자로 나타나면서 인사이더에 대한 가치가 높아졌다는 평가다. 다만 인사이더가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주변인이 많은 사람을 비꼬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4위는 ‘영미’다. 영미는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컬링 대표팀의 스킵 김은정 선수가 동료 김영미 선수에게 비질을 지시할 때 쓰던 말이다. 특히 김은정 선수가 영미의 강세만을 조절해 여러 가지 지시가 가능했던 것이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됐었다.
유행어는 다분히 사회현실을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확행’은 현대 사회에서 업무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빈부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등 각박한 일상생활 속에서 작은 기쁨에라도 만족하고자 하는 서민들의 욕구가 드러난 용어라 할 것이다. ‘소확행’의 사례는 개인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바쁜 오후 시간의 차 한 잔, 동료나 친구와 주고받는 작은 선물, 퇴근 후 맥주 한 잔 같은 잔부스러기 같은 하찮은 존재들이다. 공부하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확실한 미래에 부와 성공보다 일상에서 얻어지는 소소한 행복에 가치를 두고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편의점 맥주를 마시는 일, 바쁜 시간에 짬을 내서 즐기는 한 잔의 커피, 집 주변에서 즐기는 산책, 동네 맛집을 찾는 작은 행복, 가까운 친구와 수다를 나누는 시간과 같은 작은 여유에서 행복을 찾는다. 이는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삶 속에서의 편안함과 안락함, 달콤한 휴식으로서의 덴마크의 휘게(Hygge), 스웨덴의 라곰(lagom)이 바로 그것이다. ‘휘게 라이프’에서의 행복은 일상생활 속에서 누리는 ‘웰빙’이고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다. 이를 보면 행복은 마음의 옹달샘 마냥 마구 솟구치는 빈도와 지속성에 치중을 하고 있다. 그러한 행복은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하고, 남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이 더 중요하다.
흡사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작은 의식의 고취가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오늘의 행복 추구가 어디 일상뿐이랴. 나는 제일 시급하고 앞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우리의 교육의 행복 추구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입시지옥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했던 나의 한 시대가 다 갔지만 여전히 교육은 비상구를 못찾고 있다. 정작 당사자인 학생은 제두고 한 판승부가 여전히 벌어지는 현실. 단적으로 말해 학부모는 자녀의 행복이 학력에 좌우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학부모는 자녀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갖고 자녀의 학력에 집착한다. 오직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길 바랄 뿐이다. 교육의 본질은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정말 동떨어진 것이 우리 교육 현실이다. 나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다.
돌이켜 보자면 물질적 풍요와 출세가 행복에 이르는 첩경은 아니었다. 이보다는 현재의 행복이 성공을 불러오고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 행복은 현재의 자신의 삶을 중시하고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현재를 즐기고, 원하는 길을 개척하며, 행복을 많이 체험한 아이가 미래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게 여실히 부족한 행복 추구. 어릴 때부터 자녀가 행복감을 자주 느낄 수 있도록 부모는 자녀가 하고자 하는 것을 ‘더 잘하도록’, ‘스스로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도록’ 도와줘야 한다. 학생이 가진 재능과 끼를 찾아내 교육이라는 적절한 자극을 통해 꿈을 이루게 하는 교육이 행복 교육이 아닐까.
‘무확행’이란 말. 무모하지만 확실한 행복 ...신체적 성장, 지적 성장, 정서적 발달, 사회성의 발달 등을 조화롭게 하여 넓은 교양과 건전한 인격을 갖춘 인간을 육성하려는 전인교육이 바로 이 꿈같은 ‘무확행’에 이르는 첩경이 아닐까. 아무튼 소소하다지만 행복이 사람들 마음마다 곳곳에 퍼진다면 그것으로도 이 세상은 보다 윤택해지고 밝아지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한다. 누구는 소확행이라 하니 소고기를 확실하게 먹는 행복감이라 하더니만 그것도 배고픔의 이상형으로서 행복하다면 그저 괜찮겠다. 아무렴 어떤가. 비록 작고 하찮은 것이라 치지만 자주 행복을 접하고 현실을 맛나게 살겠다는데.
살다 보니 큰 욕망은 어느새 저편으로 사그러들고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또는 하고 싶지만 감당이 안 서거나 용기가 부족했던 아니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라 하여 망설였던 것들이 부스스 내 마음의 창가에 떠오른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 왜소하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소박한 웃음소리를 촘촘히 재생하여 기억해두는 것, 과거 역사 속 숨은 인재들은 고독을 어찌 견뎌낸 것이며 난관을 어찌 헤쳐 나간 것인가에 작은 의문을 두는 것, 소국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삶의 가치에 대해 재삼 논해 보는 것 등등 이런 것 들이 객쩍없이 떠오르며 내 알상의 반란을 도모한다. 이런 모의가 곧 일상 속에서 일탈을 이루는 첩경이 아닐까. 이름 모를 산을 찾아 그 누군가 남 모르게 올려놓은 돌탑이라는 공적위에 내 돌 하나를 모르는 척 사뿐히 선사하는 것도 소확행의 한 일원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한 요즘의 수수함이다. 그리하자 한 것도 아닌데 자연 그쪽으로 발길이 닿는다. 기력이 쇠한 만큼 의욕이 떨어진 이 나이쯤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세상 한복판에 서 있고 싶지는 않다. 무명으로서 그저 오늘이 행복하다면 그뿐이다. 이는 나의 작게 사는 여남은 희망이기도 하고 자연 속으로 서서히 귀의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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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복과 욕망
2020년 초 짧은 4개월 새 내 가슴속을 그것도 두 차례나 뚫고 광폭횡단한 대형 사건이 벌어졌다. 그 하나는 당연히 누구든 답할 수 있는 인류에게 너무도 큰 시련을 안겨준 ‘코로나 19’인 것이고 나머지 하나도 내 평생 통털어 전혀 예견조차 못 한 ‘어찌 이런 일이’ 라는 후렴이 절로 나오는 대형 사건임에도 잠시 반짝하다가 코로나에 질려 이내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 하나가 다름 아닌 ‘기생충’이라는 영화다. 이 영화가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했다는 것이 더 주목받는 건 전 세계 영화인이 꿈꾸는 곳인 할리우드의 본진이라 그들만의 잔치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자국 영화에게만 그간 높은 점수를 주었는데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했던 아카데미가 비영어권 영화에 최고상을 수여하였다는 데 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중심에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우리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우뚝 선 것이다. 총 6개 부분 후보에 올라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영화 장편상을 수상한 기생충이라는 영화. 외국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것 자체가 사상 최초이기 때문에 더욱 세계가 놀라워하고 의미가 큰 것으로 그 자체가 역사가 되었다.
그 영화가 전 세계 영화인의 꿈이라는 아카데미상을 받은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치밀한 구성으로 많은 공감을 자아내기 때문일 것인데 그 영화의 주제를 말하라 한다면 나는 한마디로 축약하여 ‘행복과 욕망’ 이라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돌덩이와 같이 시작한다. 행운이라며 건네받은 돌덩이(수석) 하나. 철석같이 행운이라 믿고 욕망의 언덕을 오르는 친구, 기우. 자신의 이름을 닮은 걱정을 숨기기 위해 뻔뻔해지기로 작정한 기우. 문서를 위조하고도 죄으ㅟ식을 갖지 않는 기우에게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를 말하는 기택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반지하에서 직업도 없고 대책도 없는 네 식구는 모처럼 함박꽃이 핀다.
하지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봉준호감독은 가난한 주인공들을 기생충에 비유하여 구조적 역설을 표현하려 하였다. 영화 곳곳에 숨겨 놓은 메타포와 장치들은 富와 貧의 대물림을 보여주고 기생충들로 하여금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사회구조를 인식하게 함으로서 피아를 모르고 물고 뜯는 기생충들끼리의 생존경쟁구조를 질타하면서 사회 저변 층의 자각과 분노를 유발한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행복을 되묻고 있다. 행복은 자연스레 우리 삶의 목적이 되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행복 강박증에 사로 잡혀 행복을 과시하고 행복에 저당 잡혀 산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행복은 인간의 최고의선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했다. 그는 행복을 목적으로 두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행복이 삶의 목적인가.
행복의 대응개념을 생각해 보면 보다 행복의 개념은 뚜렷하지 않을까. 불교의 출발은 행복의 대응개념인 고통에 대한 통찰에 있고 목적은 고통의 극복에 있다. 붓다는 인간의 존재현실이 괴로운 상황에 처해있음을 밝히고 이는 욕망과 관련한다고 한다. 그래서 괴로움이 제거된 행복의 조건은 바로 욕망의 제거에 있음을 강조한다. 붓다의 행복론은 욕망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있어 현대 행복론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불교 행복론은 보시와 지계라는 도덕적 실천에 기초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불교 행복론은 무엇보다도 붓다의 중심 가르침인 사성제 체계에서 그 대의가 있다. 사성제법에 의하면 행복감은 원인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원인에 따른 결과이다. 때문에 인과의 차원에서 행복감은 좋다고 하여 무작정 얻으려 하거나 지속시키려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고통이란 것이 원인이 아니고 결과이기에 결과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원인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괴로움을 제대로 통찰해야 만이 가능하다는 행복의 역설이 내포되어 있다. 참으로 나로서는 범접 가능한 사고는 아닌 듯 한데 흡사 괴로움을 잉태하지 않으려면 부질없는 원인에 뜻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도 들린다. 불교의 논리와 흡사하다는 노자는 그래서 불필요한 원인제공에 대해 온갖 현란한 볼거리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솔깃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하며, 혀끝에 착착 감기는 산해진미는 우리의 입맛을 망쳐놓는다고 설파했던 것일까.
그에 따르자면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나 멋, 그리고 맛의 가치는 그 판단 기준이 절대적일 수 없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과연 그들이 미인으로 대접받았을까? 이렇게 절대적이지 않는 감각적 기준에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이 획일적으로 맞추어지게 되면 다른 사물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편향되고 왜곡된 기준을 고집하게 된다. 또한 내면적 가치는 도외시하게 된다. 실제 우리는 보거나 듣거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욕망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아니 적어도 그것에 대한 욕망에 덜 시달릴 수 있다. 욕망의 양이나 내용은 본래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인위적으로 키워지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을 낳는 연쇄 반응을 한다. 욕망은 새로운 대상을 계속 열거하여 우리에게 만족이라는 단어를 망각하게 한다. 감각적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만족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욕망의 잣대를 낮추거나 아예 바꾸어 버린다면 어떨까. 그러면 만족과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을까. 행복을 위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있는 것들을 세어보곤 한다. 과거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가 겨우 비상구를 통해 탈출 할 때제일 많이 생각한 것이 내게 있는 행복의 요소에 대한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로서 나는 얼마만큼의 행복으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가치들은 모두가 내 마음에 귀납된다는 생각 같아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새삼 각인했었다. 이제는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기술이 필요하고 숨겨진 재능인지 알 것도 같은데 솔직히 이는 여간한 도를 연마해서는 다가설 수 없음을 또한 여실히 느끼고도 있다.
소유의 존재가 아닌 마음의 여유로서 갖는 포만감. 욕망을 배제한 행복이 정녕 가능한 것일까. 어쨌든 행복이 반드시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님은 맞는 진리 같다. 행복과 욕망의 함수 관계, 인간 가치의 탐색 - 행복과 욕망의 관계, 그리고 진정한 행복. 사람들은 오욕락을 행복이라 하지만 성현의 가르침에는 그런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 욕망은 채우려 하면 할수록 만족과 행복을 상실하며, 비울수록 우리의 행복지수는 올라간다 말하며 행복감은 욕망에 반비례하는 것이라 말한다. 과연 행복은 어디쯤 있는 것일까. 여직 잘은 모르지만 아니 죽을 때까지도 모를 것이지만 내 경우 자성의 글을 쓰거나 선행을 하는 때 잠도 잘 오고 꿈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 우리는 행복을 위해 끝없이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해 회의하고 반성해야 할 것은 틀림이 없다 싶다. 그러자니 욕망도 수렴을 하는 양 행복의 숨겨진 재능이 눈앞에 아른 하여 감히 오늘 소소하지만 나름의 행복에 대한 글도 이렇게 적는다 싶다.
첫댓글 1. 소확행의 의미 중, 끝에서 4째줄, '내 알상의 반란을 도모한다' 에서 알상이란 표현~~~일상이 아닐런지요? 2. 글구 오타있어요 <죄으ㅟ식을>
토요일마다 친구들과 산을 오르내리며 웃웃고 맛있는거 먹으러 다니는 소확행의 일부를 누릴수 있는 날이 어여 오기를 바라며...........
<기생충> 영화보고 무언가 무겁게 남는 그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봉준호에 반하여 '살인의 추억'을 다시 보았지요. 진짜 영화의 귀재임을 실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