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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0) 복음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시노달리타스, 더 효과적인 복음화 사명 수행하려는 교회 노력
위기의 교회
교회의 성장은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20세기 후반부에, 세속화라는 거센 파도를 넘어, ‘종교의 귀환’이라 불릴 정도로 종교가 활발해지는 것 같았다. 유럽교회를 제외하고 세상의 모든 교회는 성장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1990년대 한국교회는 팽창의 정점을 이뤘다. 하지만 21세기 탈세속화 시대에 뜻밖에도 종교가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한다. 한국교회 역시 수축되고 있다. 물론 사목자의 개별적 역량에 힘입어 성장하는 본당도 있다. 또한 인구 유입과 인구 밀집도의 확장이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 성장하는 교구도 있다. 하지만 교회의 전반적 흐름은 성장보다는 수축의 시기에 도달한 느낌이다.
위기는 늘 근본적 질문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한 교회인가? 정체성과 사명에 관한 질문이다. 정체성과 사명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이다. 교회는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선교하는 교회가 곧 교회의 정체성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인식하고 그것을 재구축하는 일이 위기의 시대에 응대하는 교회의 방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든 노력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적 교회라는 인식과 신념,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한 교회 내부적 쇄신으로서의 시노달리타스를 향한 노력 말이다.
팬데믹 이후 점점 활기를 잃어가는 교회 현상과 흐름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분석과 전망 역시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교회 수축의 시대에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서 선교적 교회로의 복귀, 교회 안 소모임의 활성화, 교회 운영과 통치 방식의 재구성을 주장하고 있다.(「한국교회 트렌드 2024」) 사실,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은 개신교나 우리나 비슷하다.
복음화, 선교, 사목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사명과 활동은 선교와 사목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왔다. 복음화라는 개념은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복음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선교를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를 심는 일”(선교 교령, 6항)이라고 정의할 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복음화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복음화를 선교의 한 요소로서 이해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선교의 개념이, 서구중심주의 문화의 특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식민지주의 경향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다. 「현대의 복음 선교」(1975)는 복음화 개념에 대한 총체적이고 새로운 이해를 제공했다. 「현대의 복음 선교」 이후 복음화라는 개념은 교회의 사명과 활동을 총망라하는 개념으로 자리하게 된다. 복음화에 대한 바뀐 이해는 선교 활동을 복음화의 한 요소로 받아들이게 했다. 즉, 복음화로서의 선교를 강조한다. 선교의 한 요소로서의 복음화가 복음화의 한 요소로서의 선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복음화는 교회의 사명과 활동의 3가지 측면 모두를 포함한다. 복음화는 “신앙인들이 영적 성장을 지향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온전하게 응답하도록 돕는” 일반 사목과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은 이들”이 회개를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복음화(재복음화)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여전히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외방 선교) 모두를 포함한다.(「복음의 기쁨」 14항)
복음화, 선교, 사목은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복음화, 선교, 사목이라는 개념은 교회의 사명과 활동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하게 한다. 선교와 사목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 활동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복음화에 대한 변화된 이해는 교회 활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평신도 참여 영역을 확장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복음화라는 개념은 선교와 사목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것으로서 다양한 측면에서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촉진할 수 있는 신학적 용어로 자리하게 된다.
교회의 복음화 - 시노달리타스
교회의 존재 방식과 작동 방식에 따라 복음화의 방식도 달라진다. 오늘날 복음화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교회의 존재 방식과 작동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사실, 교회가 존재하는 모습, 교회가 움직이는 모습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증거가 된다. 교회의 존재 방식과 작동 방식은 복음화 수행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 자체로서도 복음화 수행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복음화를 향한 교회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서 복음화가 이루어지지만, 또한 동시에 교회는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 복음화를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교회 구성원들의 복음화, 교회 구조의 복음화를 통해 복음화를 더 잘 증거하고 수행할 수 있다. 세상의 복음화와 교회의 복음화는 늘 함께 간다.
교회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자율적인 공간이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시대와 문화의 영향 속에 있다. 교회는 당대의 문화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온다. 하지만 교회는 그 빌려온 것을 복음의 관점에서 낯설게 하고 새롭게 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를 창출한다. 구조, 관계 방식, 통교 방식 그 모두를 새롭게 창조한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안의 구조와 관계 방식과 통교 방식을 새롭게 하여 복음화 사명을 더욱 잘 수행하려는 교회의 움직임을 반영한다. 시노달리타스는 세상 안에서 교회의 복음화 사명 수행을 더 효과적으로 하려는 교회의 노력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히 기능적인 차원에서 교회 작동 방식의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 방식과 활동 방식에 새로움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며, 영성적이고 사목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교회 방식을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교회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며, 신학적이고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다양한 형태의 복음화 사명 수행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복음화의 목표가 단순히 교리를 교육하고 제도로서의 교회를 형성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복음화의 총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질 때, 복음화의 구체적 실천 방식에 관한 생각들도 달라질 것이다. 복음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가질 때, “수많은 교리를 두서없이 전달하고 이를 끈질기게 강요하려고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본질적인 것에, 곧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크고 가장 매력적이면서 가장 필요한 것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복음의 기쁨」 35항)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교회의 복음화를 깊이 고민해야 하는 시절이다. 변화와 쇄신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것인지, 기존의 방식으로 살다가 쇠퇴의 길을 걸을 것인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9) 인연의 형식들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생각의 정직한 나눔이 중요하다
글의 인연들
인연을 맺는 방식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동됩니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에는 핏줄, 고향, 학교라는 요소가 관계의 주요한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면 자신이 꾸린 가정, 직장 동료, 같은 직업군의 사람들과 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종교와 취미의 영역도 관계 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연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 요소들은 사람마다 조금 다르지만,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는 방식은 변해갑니다. 요즘 저를 보면, 혈연과 고향을 매개로 맺은 인연들이 옅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사제로 살다 보니 학창 시절의 친구들 역시 멀어져 갑니다.
사람은 지금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주로 인연을 이어갑니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공간과 물리적 거리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가까이에서 자주 보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인연의 고리가 조금씩 약해지겠지요.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부딪치며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현실적 인연입니다. 현재라는 시간과 몸이 위치하는 물리적 반경이 인연과 관계 형성에 가장 깊은 파동을 만듭니다.
사람의 인연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잘 넘어서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연의 깊이와 친밀성이 반드시 물리적 환경과 조건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면서 한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어떤 친밀성을 느끼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저는 주로 읽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글을 통한 인연이 저에게는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고전과 옛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저는 저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글이 좋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시대를 읽고 당대적 삶을 해석하는지 궁금합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죽음 앞에서 다른 혈연적 친인(親人)의 죽음 때보다 더 깊은 슬픔을 느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시대의 삶과 문학에 대한 그의 성찰과 혜안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혈연의 친인보다, 직무의 친인보다 글을 통한 친인이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컴퓨터를 켜면 습관적으로 들어가 글을 확인하는 블로그들이 있습니다. 인문학자 이현우, 철학자 김영민, 철학자 김영건 선생의 블로그입니다. 이현우 선생을 통해 인문 서적들의 동향을, 김영민 선생을 통해 사유의 명민함과 창의성이 무엇인지를, 김영건 선생을 통해 개념과 실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와 논리적 사유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얼마 전 김영건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은평성모병원 사진과 “나는 지금 여기에 누워 산소 가자는 하늘을 보고 있다. 그런데 많이 아프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글이 블로그 마지막 포스트였습니다. 마지막 글에 달린 댓글들을 통해 그가 제자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교수였는지, 그의 블로그 글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글에 한 번도 댓글을 달지 않았지만 늘 그의 글을 눈여겨보는 나 같은 사람들도 꽤 많으리라 짐작됩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그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의 죽음이 슬펐습니다. 그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다시는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시(詩)의 인연들
좋아하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시집을 낼 때마다, 반가움과 기쁨으로, 사서 읽습니다.
김명인 시인이 그 하나입니다. 얼마 전 그의 열세 번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문학과지성사)를 즐겁게 읽었습니다. 시를 통해 시인의 인식과 정념과 사유의 궤적을 읽는 일은 적어도 저에게는 세상과 인간과 삶을 읽는 여정의 하나입니다. 한 시인의 전체 시집을 따라 읽는 일은 그의 삶의 궤적을 읽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난 적도 없고 교류한 적도 없지만, 수십 년 동안 그의 시를 읽어왔기에 오래 알고 지내는 지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시인의 시선 속에 자주 들어오는 풍경은 길과 강, 들판과 바다 같은 세월의 흐름과 풍화와 막막함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세월을 의식하는 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본성상 비극적 존재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의 존재인 인간의 근원적 정서와 정념은 슬픔과 쓸쓸함입니다. 김명인 시인은 다른 어떤 시인보다 인간의 쓸쓸하고 슬픈 정념을 잘 포착하는 시인입니다. 끊임없이 삶의 풍경을 읽고 그에 반응하는 내면의 의식을 응시하는, ‘비극적 견인주의자’ 같은 시인입니다.
김명인 시인은 나이가 들어도 삶을 읽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노년의 시간은 빠르고 때론 헛헛하지만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읽어가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건져 낸 것 하나 없이 또 하루가 흘러간다.”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기념되는 날은 흔치 않다.”(‘구름척후’) 삶은 읽기 어렵고, 해답과 결론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시인은 끝없이 묻고 관찰하고 읽어갑니다. “나는, 달을 관찰하며 살아왔다.” “누리의 달도 저무는 달도/ 지상의 표징으로만 읽어낼 뿐,/ 감기는 눈을 비비며/ 오늘 밤도 저 달이 유장한가, 지켜보는 것이다.”(‘달의 이행’) “평생을 새겨도 독해 버거운/ 비장의 어둠일까.”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등대를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고 있겠다!”(‘죽변도서관’)
“뭉개고 갈 지상의 좌표 몇 군데나 더 남았는가?”(‘비운다는 것’)를 묻는 시간에 이르면, 즉 소멸을 느낄 때쯤이면 인간은 누구나 우주적이 되나봅니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종시終詩’)라는 박정만 시인의 이 짧은 시는 김명인 시인에게서도 자주 변주됩니다. “일찍이 접합되지 못한 우주에 사로잡혔으니.”(‘초점의 값’) “흘러간다, 1억 광년 건너온 별빛도/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별자리도,/ 말문조차 닫게 하는 우주의 황홀이/ 오늘 밤은 한층 가까이 있다.”(‘이 구역과 저 별무리가 한통속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느 영원에서 다시 만날까?’)
생각을 나누는 인연
시간과 공간을 함께해도 생각과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삶을 공유하지 않으면 그 인연의 깊이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인연의 무게와 폭은 단순히 외적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인연들의 소중함을 거듭 절감합니다. 어떤 요인들에 의해 발생한 인연이든지 간에 생각을 나누고 일상을 다정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인연은 깊어진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습니다.
신앙의 인연,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으로 함께하는 물리적 시간만큼이나 생각과 말의 정직한 나눔과 교류가 중요합니다. 생각을 나누지 못하는 인연은 껍데기에 머무를 위험이 있습니다.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합니다. 생각과 공부가 사라진 시대여서 오늘의 우리 인연들과 신앙이 깊지 못하고 얕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합니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3) 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
‘읽기’는 보이지 않는 소리 경청하고, 감춰진 진실 발견하는 일
읽기와 식별
늘 읽고 있다. 읽는 행위는 내 생의 가장 큰 의식(Ritual)이다. 사회를 읽고, 교회를 읽고, 사람을 읽고, 책과 글을 읽는다. 신문을 읽고, 잡지를 읽고,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읽는다. 언제부터인지 TV 뉴스를 보지 않는다. 문자와 텍스트 중심의 읽기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책상머리 신학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의 읽기는 책상과 컴퓨터 모니터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읽기는 관심과 질문이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무엇이 오늘의 사회를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끌고 가는지.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는지. 시간 속의 인간 실존은 늙음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응대하고 있는지. 읽기는 주목하는 일이다. 사유와 인식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가기도 하고,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는 것에 끌리기도 하고, 의지적 행위와 우연적 행위를 포함하는 사건들이 시선을 사로잡기도 한다.
읽기는 시대를 읽는 행위이다. 시대를 읽는다는 것은 뉴스를 읽는 일을 포함한다. 오늘날 뉴스의 홍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탈진실의 시대에 대부분의 미디어는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는다. 모든 소식이 상업적 맥락 속에서, 당파적 시선 속에서 처리되고 소비된다. 심각하고 중대한 사건들마저도 호기심과 상품성의 차원에서 취급된다. 이 시대의 뉴스 읽기는 식별을 요청한다.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심, 섬세한 식별, 정직한 성찰을 포함하는 읽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뉴스를 읽는 일은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다. 몇 년 전부터 포털 뉴스를 읽지 않는다. 좋은 언론 사이트를 직접 찾아가서 읽는다. 뉴스에 대한 식별과 선택을 스스로 하겠다는 최소한의 의지 표현이다. 상업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오염되고 왜곡된 뉴스들이 너무 많다. 소심한 일상인인 나는, 식별과 선택을 통한 올바른 뉴스 읽기가 세상을 향한 정직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뉴스를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선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 및 비그리스도인 이웃들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보탬이 되는 도구적 선이 될 수 있다.”(제프리 빌브로 「리딩 더 타임스」, Ivp, 2023)
시 읽기를 통한 세상과 사람 읽기
문자주의자인 나는 글을 통해 세상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좋은 글을 통해 세상과 사람에 대해 배우는 즐거움이 크다. 주간 잡지를 통해 읽고 있는, 정치학자 박이대승과 소설가 장정일의 글은 이 시대의 사회적 흐름과 문화적 풍경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한신대 박선화 교수와 미국 교포 정재욱 선생의 글은 일상의 혜안적 성찰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나는 도처의 좋은 글들에서 생을 배운다.
시 읽기를 통해 사람의 내면과 정서를 읽는다. 한 개인적 실존이 자기 생의 여정에서 어떤 인식과 신념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어떤 시선으로 세상과 자연, 사람과 사물, 사건들을 바라보는지. 어떤 감정과 태도로 운명과 우연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응대하는지. 적어도 나에게는 시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성복, 김명인, 허수경, 최승자 등 숱한 시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과 삶을 읽어왔다. 시를 읽으며 내 생의 시간들을 건너왔다. 시가 없었다면 내 생은 얼마나 밋밋하고 헛헛했을까. 신앙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시를 읽으며 생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내 생의 가장 큰 은총과 축복이다.
다른 세대의 삶을 알고 싶어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의도적으로 자주 읽는다. 낯선 감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젊은 여성 시인들의 시집을 일부러 더 읽기도 한다. 하지만 늘 벽에 부딪힌다. 시의 감정과 정서는 논리가 어긋나고 막히는 곳에서 시작한다. 생의 신비는 논리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시의 미학적 측면보다는 시가 보여주는 생의 이면과 삶의 역설에 관심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세대 시인들의 시가 이해하기 더 쉽다. 확실히, “나이가 들면 쓸 수 없는 시가 있는 반면 나이가 들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시도 있다.”(황유원) 시간의 흐름이 초래하는 삶의 아픔과 슬픔은 삶의 시간을 경험한 시인들만 쓸 수 있는 것인지.
시 구절들로 생각을 구성한다
김소연 시인의 「촉진하는 밤」(문학과지성사)을 읽었다. 김소연 시인은 흐르는 시간이 주는 슬픔과 아픔에 예민한 시인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슬플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 같다. 때때로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촉진하는 밤’)을 믿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역설 또한 안다. 시간 속에서 사람의 얼굴도 변해간다.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분멸’) 느낌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를 생각나게 한다. 늙음과 죽음 앞에서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생은 늘 어긋남의 연속이다. 삶의 여정에서 듣기와 말하기는 자주 빗나간다. “응, 듣고 있어/ 그녀가 그 사람에게 해준 마지막 말이라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입술을 조금씩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그 사람은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그렇습니다’) 우리의 생은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사람을/ 밤새 기다리다가 홀연히 아침이 와버”(‘올가미’)리는 일이며, “자신의 목숨만큼만 자기 육체를 이끌고/ 자신의 방식으로 놀다가/ 가는”(‘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일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사랑과 혁명
“한때 모든 노래는 사랑이었다/ 한때 모든 노래는 혁명이었다// 모든 노래는 사랑에서 발원하여 혁명으로 가는 급행열차였다.”(박정대 ‘안녕, 낭만적으로 인사하고 우리는 고전적으로 헤어진다’) 하지만 구호화된 사랑과 혁명은 끝났다. 사랑은 뒤집혔고, 혁명은 후유증에 가깝고, 우리는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지 않는다.(성기완 ‘블랙에서의 변주’ 참조)
이 짧은 생의 여정에서 우리가 끝끝내 해야 하는 일은 사랑과 혁명이다. 이 시대의 사랑은 읽기와 식별, 이해와 공감이다. 읽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경청하는 일이며 감춰진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엇갈림과 어긋남 속에서도 끝까지 그에게 가 닿는 일이다. 이 시대의 혁명은 신념과 자세와 생활 방식의 쇄신이다. 신앙을 통한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가 우리 시대의 혁명이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이 읽기와 변화의 삶을 살고 있는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7)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 삶도 하느님께 드리는 편지와 기도였으면
시 읽기에 관한 아픈 기억
시 읽기를 좋아한다고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오래전 어느 교구 월간지에 시 읽기에 관한 글을, 매회 원고지 30매 정도의 분량으로, 스물여덟 번이나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신학교 선생으로 살면서 논문적 글쓰기의 답답함에 살짝 지쳐있었을 때, 시 읽기에 관한 글쓰기는 저에게 일종의 작은 일탈이며 즐거움이었습니다.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제 오랜 바람을 이룰 수 있었던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시에 관한 글들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를 통해 많은 힘과 위로와 역설적 기쁨을 얻습니다. 시를 매개로 인간과 삶과 신앙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는 즐거움도 누립니다. 좋은 시를 만나는 일, 또 그 시를 통해 시인을 만나는 일은 설레는 일이며 동시에 나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시는 인간이 언어와 상상을 통해 축조하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집이며 지상에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신비한 노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인들은 시대의 전위(前衛)에 서 있습니다. 시인들은 섬세한 촉각을 가졌기에 우리보다 언제나 먼저 삶을 감각하고 시대의 징후를 느낍니다. 시인들은, 그들이 가진 예지의 능력으로, 늘 우리보다 삶의 신비를 먼저 포착합니다. 시인들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시집을 사서 읽는다는 것은 시인들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헌사(獻詞)입니다.”
저는 문학에 대한 전문가가 아닙니다. 평론가 김현과 신형철의 시 비평에서 볼 수 있듯이, 시에 대한 공감의 식별, 미학적 분석, 섬세한 해석은 엄청난 역량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시에 대한 제 글쓰기는 시를 좋아하고 시를 읽으며 제 생의 길을 걸어온, 애독자와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시 읽기에 대한 제 연재 글을 책으로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교회 인가도 받았고, 최종 편집판도 완성되었습니다. 제 연재 글은 28명의 시인을 다루었습니다. 개별 시인의 모든 시집을 다 읽고, 시집 전체의 흐름이 매개시키고 촉발시킨 어떤 느낌과 상념들을 쫓아서 가보는 방식이었습니다. 문학적이고 미학적 차원보다는 시 속에 숨겨진, 세상과 삶과 인간에 대한 시인들의 사유와 정념들을 엿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서 사용한 단어와 문장을 통해 시인의 사유의 궤적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시 구절들의 편집과 인용이 많은 형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작권 문제입니다. 시 전편을 인용하는 것은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 구절 하나하나에도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시집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4개의 대형 문학 출판사 가운데서 유독 어느 한 출판사가 시 구절들에 대한 저작권료를 요청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출판사의 문학적 협량함에 속상했습니다. 마치 시에 대한 오랜 순정이 배신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출판사는 제가 문학청년 시절 정말 사랑했던 곳이었습니다. 시 읽기 원고는 제 컴퓨터 파일 안에서 몇 년째 머물고 있습니다.
“여름 가고 여름”
여름이 가고 있습니다.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현실을 절감하는 여름이었습니다. 계절은 우리가 흐르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지난 전반기에 읽은 시집들 가운데 인상 깊은 시집의 하나는 채인숙 시인의 「여름 가고 여름」(민음사)이었습니다. 세상의 풍경과 내면의 의식이 서로 긴밀하게 직조되어 있는 시들이 많았습니다. 무질서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초현실주의적인 시도 아니었고, 단순한 서정과 서경의 전통적인 시도 아니었습니다. 그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시들을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들이 보여주는 서술과 서사를 제가 좋아하나 봅니다. 잠언과 전도서의 서술 형식과 내용을 제가 사랑하나 봅니다. 11세기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같은 시들을 말입니다.
“계절은 한 번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우기의 독서’) 열대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아가고 있는 오십 대 여성 시인은 어떤 생각과 느낌과 정념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했습니다. 거의 모든 시에서 자연의 풍경과 그것에 조응하는 시인의 내면 풍경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 …… // 모두가 신은 없다는데/ 나는 오늘도 기도가 남았다.”(‘디엥 고원’) “시체꽃이 피었다는 소식은 북쪽 섬에서 온다// …… //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여름 가고 여름’)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정리하고 돌아보는 일이지만 동시에 타자를 향한 그리움과 인정에 대한 욕망인지도 모릅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나를 알아주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글을 씁니다. 낯선 타향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일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다음 생의 운세’), “인도양의 저녁 해가/ 은빛 가루를 뿌리며/ 구원의 기도문을/ 써 내려갔다”(‘해변의 모스크’)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 같은 것은 쓰지 말고”, “기도해서 얻는 것을 구하지 말고”(‘제이’) 살아가자고 시인은 때때로 다짐하지만, “어쩔 수 없어 쓰는 시가/ 봄 먼지처럼 수북”(‘비인’)하다고 고백합니다.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글을 쓰며 살아갑니다. “늙어가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습작 일기’)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쓰는 것은/ 버리지 못한 일생의 습관”(‘내가 당신의 애인이었을 때’)인 시인에게,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의 좌표를 확인하는 일이며 타자와 신을 향한 몸부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절과 세월은 여전히 흘러갑니다. 글을 쓴다고 시간이 멈춰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글을 쓰며 그 시간을 견디고 건너가는 일이 어떤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오랜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동안/ 여름이 지나간다.”(‘사루비아 화단’) “한 번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너를 견디느라 한 계절이 지났다.”(‘노산여인숙’)
채인숙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권경인 시인의 시집 「변명은 슬프다」(창비, 1998)가 생각났습니다. 두 시인 사이에는 시차적 간격이 있지만, 사물의 풍경과 내면의 풍경을 쓸쓸하게 응시하는 모습이 무척 닮았습니다. 시를 통해 시인의 서사를 상상하는 일은 오독의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시인의 삶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습니다. “아무 한 일이 없으나 그는 그곳에 살았다/ 그가 살았으므로 그 땅은 아름다웠다.”(권경인, ‘木魚者’)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편지와 기도였으면 좋겠습니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9) 젊은 세대의 종교와 신앙
나이만 든다고 해서 세속보다 종교에 더 관심 가질 수 있을까
유동하는 세속 시대의 삶
사유보다는 감정, 감정보다는 욕망이 사람을 끌고 가는 시대다. 정신적 가치나 이상보다는 물적 쾌락의 향유가 더 중요시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삶을 산다. 자기 성찰을 추구하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통해 절대적 존재와의 만남을 갈망하게 하는 정서가 부재하다. 현재는 흔들리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승리 속에서 공동체적 삶의 소멸을 목격한다. 공동체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정체성과 자기표현만 강조되는 세상이다. 형제애와 연대의 삶은 교회 문헌에서만 볼 수 있는 먼 유토피아가 되어버렸다. 가난한 청춘의 삶은 더 고단해지고, 노후 돌봄의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다. 힘들지 않은 세대가 어디 있으랴. 모든 세대는 다 저마다 자기 생의 무게를 지고 간다. 하지만 노년과 청춘이 사회적 삶에서 유독 더 배제되는 듯하다.
근대화의 여정에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교육과 문화를 통한 개인의 건강한 자율성과 주체성에 대한 인식과 정념을 습득하지 못했다. 물질주의적 자본주의 성장 과정 안에서 개체의 이기성만 강화되었다. 감정과 욕망의 자본주의화만 이루어졌지, 이성과 계몽의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전통적 위계 문화는 건강한 자율성의 구축과 수평적 공동체에 대한 지향마저도 방해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MZ세대
세대로 구분해서 사람의 특성을 찾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같은 세대라고 해서 다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 스타일을 갖는 것은 아니다. 개별적 인간의 다양성은 세대를 넘어서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세대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시공간을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세대는 같은 세계에서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자연환경과 식생활 변화에 따른 유전 인자의 차이와 성장 과정 속의 교육과 사회 문화적 배경의 차이는 세대적 감수성의 차이를 낳는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현상들에 대한 대응 방식이 세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를 구성하는 세대를 삼등분해서 구별한다. 젊은 세대, 중장년 세대, 노년 세대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를 흔히 MZ세대라 부른다. MZ세대의 일반적 특징은 ‘디지털 네이티브’, ‘개인주의적 성향’, ‘현재지향적 성향’으로 규정된다. 옛 세대에 비하면 고학력의 스펙을 가졌지만,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다. 급변하는 경쟁의 사회를 살아가기에 정서적 안정을 누리지 못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정서적·문화적 불안정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치적으로 극단주의에 빠지는 경향도 많다. 공동체적 가치와 신념보다는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확신이 정치·사회적 행동을 지배하기도 한다. 윤리적 가치에 대해서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지만 경제와 정치의 영역에서는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SNS나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많은 발언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들의 정치적인 힘은 기성세대에 의해 배제되거나 이용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선명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며 규범과 전통에 저항하는 성향을 지닌다. 위계질서에 대한 태생적 거부감이 강하고, 불평등 사회에서 역설적으로 공정을 강조한다.(로버타 카츠 외 「GEN Z: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
젊은 세대의 종교적 감수성
오늘의 세상이 세속화 시대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난 세대에 비해 이 시대의 젊은 세대가 유난히 더 세속적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젊은 세대 역시 그 나름의 내적 의미를 추구하고 영적인 것을 갈망한다. 젊은 세대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떻게 작동되고 자극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에 의해 종교 문화의 세례를 받았지만, 대부분 제도적 종교의 영역을 떠나있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것들이 낯설지는 않지만, 깊은 마음 없이 그저 이미지로 소비될 뿐이다. 젊은 시인들은 노래한다. “묵주 반지는 장미 모양/ 기도문을 외운다/ 기도문을 외우는 순간에 아이는 믿음을 밀고 나간다/ 그것에 말을 건다// 아름다움은 공포심과 마찬가지로 주도면밀하다.”(여세실 ‘빗댈 수 없는 마음’) “사실 우린 흙에서 온 게 아니라는 사설을 본 후// 나는 신은 없구나 생각했는데/ 너는 하느님의 눈물이구나 하는 것이다// 다르다 생각하니 틀리지 않을 수 있었다.”(유수연 ‘새로운 일상에서’) “나는 신이 깜빡 조는 사이 지옥에 잠시 다녀왔다 하얀 미사포를 쓰고 묵주반지도 꼈지만 하도 끔찍해서 미사 시간에 번쩍, 눈을 떴다 나란히 앉아 짓지도 않은 죄를 고백하던 엄마는 성호를 긋다 말고 소란스러운 나의 입술 위에 급히 검지를 가져다 댔다.”(이소호 시집 「홈 스위트 홈」 뒤표지)
젊은 세대의 종교와 신앙
젊은 세대가 더 나이가 들면 다시 종교와 신앙의 영역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 전망과 기대가 있다. 다시 말해, 중장년과 노년에 접어들면 세속에 관한 관심에서 조금은 종교적 관심으로 옮겨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이다. 하지만 종교적 감수성과 영적 습성은 유년 시기와 청소년 시기에 주로 형성된다. 앞선 세대보다는 종교적 환경에 훨씬 덜 노출되었던 젊은 세대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곧장 기존의 종교로 귀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든다고 세계관과 삶의 방식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는다.
사회학자 사라 윌킨스-라플람은 자신의 책 「Religion, Spirituality and Secularity among Millennials」에서 젊은 세대의 종교와 신앙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망한다. 첫째, 아날로그 형식이 아니라 디지털 방식의 신앙생활이 중심이 될 것이다. 둘째, 복잡하고 고단한 경제적 삶의 환경이 신앙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셋째, 인종, 성정체성, 여성주의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이 종교와 신앙생활의 다원적 특성을 강화할 것이다. 넷째, 종교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개인적 선택과 진정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은 지속될 것이다. 다섯째, 젊은 세대의 고학력 현상은 비종교적 성향을 여전히 강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연환경의 변화와 기후위기는 종교와 신앙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기존 종교의 귀환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앙은 전수되는 것이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종교적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신앙과 영성을 부모나 종교 행위자들에 의해 전수받지 못하면, 나이 들어서도 종교적인 것들과 영성적인 것들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발생할 확률이 낮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어쩌면 종교가 초기 설정(default)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 첫 세대다. 이 젊은 세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오늘의 교회가 신앙 교육과 문화를 과연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