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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뿌림의 의미
24: 1-11
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2.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찌니라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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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를 제외한 평소 주일에는 우리가 출애굽기를 배우는 중입니다. 출애굽기 20-23장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법칙들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에 그때 주셨던 법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얼마나 정확한 지침이 되는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25장부터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쓰일 도구와 성막을 만드는 방법과 모양, 자재 등 그들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을 주시는데, 그 내용도 깊이 연구해보면 당시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제도화하는 내용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4장은 그 중간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주신 말씀들을 백성들에게 다시 들려주어서 자기들이 어떤 명령을 받았는가를 재확인하는 기회를 주신 것이고, 앞으로 계속해서 받을 말씀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각 사람의 위치
본문 1-2절을 보면, 각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자기 위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장로 70인은 모세를 따라 산에 올라가 대기해야 했고, 모세는 산 정상까지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씀을 받아야 했으나, 일반 백성들은 산 아래에 있어야 했고, 조금도 산에 접근하거나 침범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각 사람이 서야 하는 자리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성전을 지은 후에는 더욱 분명해 지지만, 지성소에는 오로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가 있었고, 성소에는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성전의 안 뜰에는 일반 백성들이 들어갈 수 있었고, 이방인들 또한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나아갈 수가 있지만, 그러나 각자 자기가 나아갈 수 있는데 까지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차별하신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알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자리를 구분하셨을까요? 산 정상, 하나님 앞에 올라간 모세만 구원받았고, 산 중턱에 대기 중인 아론과 장로들은 구원에 가깝고, 산 아래 있는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구분하는 목적이 사실은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분수를 모르고 아무나 하나님께 접근하다가 망할까봐서 자리를 정해준 것입니다. 좀 더 가까이 나아가는 모세와 아론과 장로들은 더 잘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돕기 위해서 세움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말씀을 받아다 백성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자기들의 위치가 낮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므로 위험을 면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사가 되어야 신앙생활 제대로 한다고 생각하거나, 기어이 장로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사실 그 자리는 도리어 훨씬 위험한 자리입니다. 평신도보다 훨씬 더 많이 봉사해야 하고, 훨씬 더 바르게 살아야 하고, 훨씬 더 책임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직분만 가지고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무서운 책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자리를 사랑하고 현재의 위치에서 순종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신 말씀에 대한 감사
백성들에게 자리를 정해준 모세는, 이미 받은 율법을 읽어주었습니다.
모세는 다시 산에 올라가서 그들이 지켜야 하는 세세한 신앙과 삶의 규칙을 받아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에 앞서서 이미 받은 말씀에 대하여 그들의 반응을 요구하셨습니다.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미 받은 말씀을 읽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제단 앞에서 백성들에게 받은 율법을 읽어주고 다짐하도록 했습니다.
우선 모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보내어 제물을 가져오게 하여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는 자기들에게 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법을 받게 되면 그것 때문에 우리의 행동과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사회생활 하기에 힘드는 면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계명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는 것, 자기들을 특별취급 해 주신다는 것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려고 하면 당장은 남들처럼 행동할 수 없어 힘이 듭니다. 주일에 상거래를 할 수가 없고 꼬박꼬박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하고 물질을 벌면 맘대로 쓸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먼저 거기에 써야 합니다. 신자로서 산다는 것은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대통령이 길거리 노숙자처럼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해서 불평하고 대통령 안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길거리의 노숙자처럼 아무데나 소변보고 아무데나 누워 자는 것을 자유라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백성다운 행동을 해야 하고 그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천국을 상속 받을 사람으로서의 특권이며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기를 힘쓰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자식한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잔소리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니까 차 조심해라. 나쁜 친구 사귀지 말라. 집에 일찍 돌아오라고 잔소리하며 간섭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가 보기에는 자기 부모에게 간섭을 받는 아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친 아버지가 되셔서 세세한 법을 주시고 지켜보시며 감독하시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자랑할 특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래서 나는 매 주일 하나님 앞에 나가서 말씀을 받아야 하고, 힘들고 제약이 많지만 그래도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라면서 말씀 받는 자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것을 감사하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에게 제물의 피를 뿌림
모세가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렸습니다.
그 피는 제단에서 제물 되어 죽은 짐승의 피 입니다. 모세는 그 피를 앞에 둔 채로 언약서를 읽었고, 백성들은 모두가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한 조항 한 조항 읽어 내려갈 때 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라고 모두가 거듭 거듭 대답하였습니다(3,7).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아주 정중한 모습으로 명령을 순종할 것을 재 삼 다짐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일을 마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백성들에게 산 아래 자기의 자리에서 그대로 머물도록 다시 주의를 주고, 제사장 아론과 장로들을 대동하고 산에 올라가서, 그들은 중턱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모세만 다시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뵙고 계속해서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때 의외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읽어 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맹세하는 그들을 향하여, 양푼에 담아두었던 나머지 반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다짐하고 대답하고 맹세하는 사람들에게 피를 뿌리라고 하십니다. 참 이상하지요?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피를 뿌린 이유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읽은 언약서는 출20장에 23장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그들이 이미 받은 십계명 등 율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그 명령을 명령서라고 하지 않으시고 언약서 라고 하셨습니다. 7절 8절에도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언약이라는 말은 “디아데케”라는 단어와 “순데케”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순데케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맺는 약속을 말하여, 쌍방간의 계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디아데케는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약속을 일컬을 때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나, 모세가 백성에게 선포한 하님의 말씀은 일방적으로 선포한 약속이지 쌍방간의 계약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약속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살리시면 살아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죽어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지 하나님과 대등하게 “당신이 이렇게 하신다면 나도 이렇게 하겠소.” 하면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인 호의로 우리를 당신의 백성을 삼아주셨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고, 당신의 능력으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우리가 준행하겠다고 두 번 씩이나 다짐 했는데도, 모세는 왜 그들의 머리에 피를 뿌렸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것을 요구하시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다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각자 가까이 나와서 도장을 찍으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모세를 시켜서 제물 된 짐승의 피를 언약을 맺는 그들의 머리에 뿌리게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너희와 맺는 약속은 언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너희의 성실성으로 지켜질 것이 아니라. 이 피의 주인공의 공로로 지켜지리라.”는 예고였습니다.
그들이 말로는 지금 우리가 언약을 지키겠다고 용기 있게 다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모두 어기고 말 사람들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들의 약속 지키는 행위를 보아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너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한 그 피의 공로를 내가 보고, 너희를 나의 자녀 삼고 계속 보호해 주고 인도해 주마” 하시는 뜻으로 제물의 피를 말씀을 들은 그들에게 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다짐하지만, 나는 너희가 그것을 지지키 못할 것을 다 안다. 너희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배약을 해서 나를 실망케 할지 나는 안다. 그럼에도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내 백성을 삼고 내 언약을 지켜 보호해주는 이유는, 너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너희 대신 순종한 내 아들의 피 값 때문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모든 피는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나, 매일 제단에 드려지는 짐승들의 피나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날마다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도 다 교육용이었지 하나님이 짐승 고기를 좋아 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1:11-12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였습니다.
미가 6장 6-8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셨고,
요5:24에는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밝히셨습니다.
롬12:1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산제사 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물의 피가 아니라, 장차 피를 흘리며 죽어서 너희들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바라보고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교육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다 믿고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죄만 지으니,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해 주고 나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상대를 자비와 사랑으로 대하여 사랑이 가득한 사회를 이루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만족하시는데, 그것을 삶의 제사 즉 산제사로 여기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장담은 팔뚝같이 하지만, 한 번도 똑바로 행동하여 보인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이미 전적으로 부패 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데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나갈 힘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이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지금 장담은 잘 한다마는 내가 너희의 행동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낼 너희구주의 희생을 보고 내가 너희에게 준 일방적인 약속을 지켜줄 것이고 너희를 대신하는 중보자 예수를 보고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언약의 피가 성취되기 까지 많은 준비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먼저 해 주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워있는 구유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처음 창세기부터 마지막 말라기까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5:39에서 예수님은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의 피가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때마다 역설하시면서, 그 그림자를 시대마다 계속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에는 여인의 후손, 혹은 아담의 몸을 덮어준 가죽 옷으로, 출애굽기는 유월절의 양이나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나, 하늘에서 내려와 백성들을 날마다 살게 한 만나, 혹은 제사 때마다 드리는 제물 된 짐승과 그 피로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여주셨고, 민수기에서는 뱀에 물린 자들을 살리기 위해 높이 달린 놋 뱀으로, 여호수아는 기생 라합의 집에 매달게 한 붉은 줄 등으로 끊임 없이 우리를 구원할 구주의 그림자를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때가 되어 그분이 직접 오셨고, 그분이 우리대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9:11에 “그리스도께서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인류의 죄를 단 한 번에 사하고 구원하는 완전한 제사였습니다.
넷째,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고 그림자로 보여주시며 약속하신대로, 그리스도는 때맞추어 오셔서 우리 대신 처형을 당하셨고 피를 흘려주셨지만, 그것이 오늘 나에게 주관적인 사건으로 믿지 아니하면 나와 그리스도의 피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저 옛날에 일어난 남의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어 우리의 눈을 뜨고 귀를 열어주셔서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기 위함임을 깨닫고 믿게 하시어 구원을 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모세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장로 70인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산의 중턱까지 올라간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한 하나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홉 제자를 산 아래 두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 산에 올라갔다가 변화하신 예수님의 용채를 뵙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상황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그 발아래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였다”고,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은 비록 백성 중에서 뽑힌 사람이었고, 일반 백성들보다 경건한 사람들이었기에 백성들에게는 존귀한자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죄인이어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접근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사야6장에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고는 반가워 한 것이 아니라 절망하였는데, 죄인이 하나님을 뵈올 경우에 즉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을 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로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먹고 마실 때가 올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땅위에 사는 성도가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면서 사랑을 누리며 살 것을 의미하고, 장차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동거할 것을 보여주는데, 그런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신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개인의 행위나 경건함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혈공로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피 뿌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뵙고도 즉사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 공로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언제나 명심할 것은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우리를 보호할 것도 없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할 것도 없으며, 우리를 사단과 죄의 세력에서 승리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피, 그 피의 주인공이신 우리주님을 사랑하며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그분께서 주신 말씀을 순종하려고 애쓰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