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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6:1-4 내가 나의 완전함에
본 시편은 대부분 앞 시편과 유사합니다.
숱한 부당 행위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아무런 도움을 찾지 못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면서 부당하게 괴롭힘을 받고 있는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며 자신의 무죄성을 입증해 주실 것을 탄원합니다.
다윗의 상대는 위선자들이었던 만큼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하면서 그들이 거짓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점을 들어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결론에 가서 다윗은 마치 자신의 소원을 얻었다는 식으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1. 본문 1절은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판단에 호소한 것은 인간사회에서 공평과 인정을 못 찾기 때문입니다 여기 '판단하다' 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어떤 사건을 심리(審理)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윗이 하나님을 자기 권리의 변호인으로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분간 원수들의 해악과 오만불손에 내맡기실 때는 우리의 명분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제멋대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서 하나님은 우리 명분의 변호가 자신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을 뚜렷이 제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인간들의 도움이 없을 경우 다윗의 본을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호소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의지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혹자는 이것을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로 읽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 그러므로 나는 요동치 않을 것이니' 로 읽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어느 쪽으로 관련시키든 다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로운 명분을 지탱시키고 변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일이신 만큼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변호인으로 삼으면서 그 여호와를 자신의 정직과 진실의 증인으로 소환하고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것으로 소망합니다.
시편 26 편
그러나 이 구절을 분리시켜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라는 문장을 그 자체로서 독립된 것으로 읽고 다음으로 '그가 무례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요동치 않게 하시리라' 는 식의 기도가 따르는 것이 가장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석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나의' 라는 소유 대명사에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자신이 정직했다는 점을 단언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를 공격하는 원수들의 계략이 제아무리 막강해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한결같이 정직한 길을 지켜왔다는 점을 단언합니다.
악인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힘이나 기만을 이용할 경우에 사실 항상 동일한 인내를 유지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대개 우리는 힘은 힘으로 계략은 계략으로 단호히 왕성하게 맞서는 데 소망을 둡니다.
특별히 다른 경우에는 열심히 선을 행하려는 정직하고 끈기 있는 사람들도 원수들이 잔인하게 올바른 길에서 이탈하도록 강요할 때면 더욱더 이런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제공되고 또 그들이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괴롭혀도 다윗의 본을 통해서 우리의 진로를 확고하게 지키며 어떤 방법으로든 정직한 길에서 끝까지 인내하는 것에서 이탈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 본문 2절은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비천하고 부당하게 재앙에 쫓기는 신세인 것을 관찰할수록 그만큼 더 강력하게 자신의 강렬한 비애의 자극을 받아 자신의 정직성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외형적인 죄악으로부터만 깨끗한 것으로 말할 뿐 아니라 마음이 정직과 그 마음의 순결성을 두고 자랑하면서 자신과 원수들을 암암리에 비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경외심을 교만하게 떠들어대는 형편없는 위선자들이었던 만큼 다윗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뻔뻔스러움과 몰염치를 적나라하게 제시합니다.
이 항변에는 또한 그가 얼마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지 자기 마음의 온 구석구석을 하나님의 진단에 내맡길 정도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처럼 자신을 치켜세우도록 강요한 것은 그의 원수들의 사악성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인간들에게서 부당한 정죄를 받지 않았던들 다윗으로서는 그러한 심문을 겸손하게 사양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올바르게 행동하려는 열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완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26 편
그러나 자신이 무고하게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인간들의 부당성과 잔인성에 못 이겨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외형적인 무죄만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의 정직성을 제시합니다.
혹자는 여기서 '마음'은 보다 높은 차원의 느낌을 의미하고 '뜻'(신장 ; reins)은 그들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육감적이요 보다 천박한 것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확고하다기보다는 교활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뜻' 이라는 단어를 인간 속에 가장 은밀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죄성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자신을 통째로 하나님의 심문에 바칩니다.
이것은 위장으로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상상하며 자화자찬에 빠지는 경솔하고 우매한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입니다.
오히려 다윗이 자신을 그처럼 자신만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에 바치기 전에 정직하고 철저하게 반성했다는 점이 역력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준을 받고자 한다면 부당하게 박해를 받을 경우 보복을 삼갈 뿐만 아니라 올바른 정신으로 끝까지 견인분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특별히 명심해야 합니다.
3. 본문 3절은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입니다.
이 구절은 한 문장으로, 또 두 부분으로 나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전자의 견해를 택한다면 두 동사가 다 강조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곧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어 왔고 내가 주의 신실함을 의지하였기 에 내 원수가 악으로 충동질하여도 보복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나는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악한 정욕을 억제해 왔습니다' 와 같습니다.
이런 번역은 하나의 주장을 잘 묘사하는 셈입니다.
다른 번역, 곧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었기에 나는 주께서 명하신 진리 중에 행하였습니다' 라는 번역도 부적당하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히브리어에 공통적인 것이지만 접속사가 불필요하게 붙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비록 이 해설이 전자와 유사하지만 우리는 그 말에 더 가까운 편을 택합니다.
악한 행동에 대한 강한 유혹을 받을 때 그것을 삼갈 뿐 아니라 마음의 정직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희귀하고 어려운 덕인 만큼 선지자는 어떤 방법으로 그런 강력한 유혹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추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밝혀줍니다.
시편 26 편
악한 습관에 기운 나머지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자신을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의 종들을 아주 세밀하게 지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기 목전에 두는 방법으로 그렇게 했고 또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는 신실한 백성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고하게 믿는 나머지 자신의 영혼을 인내 속에 장악함으로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지 않았던들 그처럼 무수하고 혹심한 공격 속에서 정직한 길을 그처럼 끗끗하게 버티어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세속적인 사람들 사이에 있는 크나큰 차이점을 들자면 전자는 주님의 손으로부터 호의적인 결말을 소망하는 나머지 말씀을 의지하고 여러 가지 악한 습관에 정신 없이 동요되지 않지만 후자는 비록 그들의 명분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있기에 이리저리 바쁘게 쏘다니며 부당한 권고를 따르며 계략에 호소하고 맙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악을 악으로 이기려는 목적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아니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무시하고 사기와 기만에 빠지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윗이 자신의 정직성을 한결같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안내자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점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언급하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덧붙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 가운데서 꺾이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오직 그분의 약속에 의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4. 본문 4절은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다시 자기와 원수들과의 큰 차이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무슨 해악과 심술을 부려도 그를 정직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는 그 대조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앞 구절의 문장을 완성하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연결시킬 수 있는데, 곧 다윗이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만자들로부터 물러섰다는 식입니다.
'앉고 걷는 것' 은 제1편의 내용대로 '뜻을 같이 하고 일에 동참하는 것' 을 뜻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기만적인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았음을 단언합니다.
사실 우리를 악인들의 집회로부터 이끌어내는 최상의 해결책은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고정하는데 있습니다.
시편 26 편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살아가며 만사를 하나님의 섭리에 일임하는 자는 결코 그들의 기만을 본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상반절에서 '허망한 사람'으로 부른 자들을 바로 이어서 (나알라밈), 곧 '교활을 가까이하고 그것에 몰두하는 자들'로 부릅니다.
기만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혀로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을 마음 속에 감추는 데서부터 허영된 위장이 시작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알람; 놀다)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데 이는 그들의 협잡을 어린애들의 장난과 비교하는 것이 여기서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략을 일삼는 자들이 조롱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단어 자체가 모든 거짓과 기만의 출처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데도 억지 해석을 취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지켜주심에 올바른 영예를 돌리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꾸준히 바라보는 신앙을 우리에게 불신앙으로 채우는 모든 비뚤어지고 사악한 조언과 대조시키는 것은 적절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안전을 곧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경우에 우리의 정직성이 우리를 불경건한 자들의 먹이로 만들 것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추호도 없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중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중은 육신의 그것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통치 밑에서 그들이 모든 올무에 대해 필연적으로 조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교활한 계략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시편 26 편
시26:5-7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다윗은 주의 뜻에 합한 서원(誓願)으로 하나님의 은조(恩助)를 구합니다(4하반-7).
1. 본문 5절은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입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이 얼마나 악인들을 혐오했는가를 확실하게 말합니다.
앞에서는 그들과 아무런 교제도 갖지 않은 것으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혐오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모임에서 도망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나는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물론 악인들이 어디서나 증오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악을 모방하지 않으려고 그들로부터 물러서는 사람이 얼마나 극소수인가!
다윗은 두 가지를 주장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그들의 모임을 증오했다고 합니다.
또 그들과 전혀 사귐을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윗은 그들 개인보다는 그들의 악한 행동을 상대해서 싸웠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은 또 다른 점을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악인들을 기피했던 태도는 하나님의 회중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교제하도록 되어진 자들과의 사귐으로부터 물러서지 않기 위해서 취했던 태도였습니다
이 면에 있어서 크게 실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인들이 선한 사람들과 섞여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이 당장 전체 회중으로부터 당장 물러서지 않을 경우에 자신들이 오염될 것으로 상상합니다.
이런 꼼꼼함이 지나쳐서 옛날 도나투스파 사람들, 그 전의 카다리파 사람들 그리고 노바티우스파 사람들을 해로운 분열로 몰고 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재세례파 사람들이 유사한 기만에 이끌린 나머지 거룩한 공회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만큼 모든 불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해서 스스로 분리시킵니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오직 말만 붙잡고 늘어지는 나머지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분쟁을 해결하려는 어떤 집회가 모였을 때 그 집회의 회장은 도나투스파 사람들을 초청해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좌석에 앉을 것을 청하자 '악인들과 같이 앉는 것'은 부당하니 서 있겠노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어거스틴은 재치있게 '성경에는 내가 악인들에게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요, 또한 악한 자들과 함께 앉지도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당신들의 양심은 당신들로 하여금 우리 가운데 들어오도록 허락했단 말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26 편
그러므로 다윗은 신중하게 자신의 열성을 조절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을 악한 자들로부터 구별하는 가운데 성전을 자주 찾는 것을 쉬지 않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가 그런 열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악한 자들의 '집회' 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숫자가 소수가 아니었다는 점을 결론 짖습니다.
그들은 당시 자기들이 마치 하나님의 백성 위로 높이 세움을 받고 그들을 다스리는 자였다는 식으로 활보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예나 다름없이 계속 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교회가 그런 사악에 오염되지 않도록 공적인 배려가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만 각 개인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부주의하고 또 묵인함으로 무질서가 조장되는 일이 없도록 개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엄격성은 필요한 배려와 함께 행해져서는 안 된다 해도 신실한 자들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교회의 교제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을 붙잡아두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및 거룩한 일과의 교제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본문 6절은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내가 청결함으로 내 손을 씻고 - 칼빈)" 입니다.
다윗은 제사의 일상 용도를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고백하면서 자기들만 성소의 예배를 수행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나서는 자들과 다윗 자신을 구별합니다.
다윗과 이 위선자들은 그들이 성소에 들어가서 함께 거룩한 제단 앞에 엎드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참 예배자였다는 점을 자기가 외적인 의식만 부지런히 참예 한 것이 아니라 거짓 없는 헌신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서 입증합니다.
다윗은 지금 율법시대에 시행된 정결 예식을 두고 말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물로 씻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참된 청결을 소홀히 한 위선자들의 형편없는 미신을 비난합니다.
그 이유는 이 외형적인 상징을 정하는데 숨어있는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들의 마음에 그들의 내적인 오염을 생각하고 회개하도록 격려하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정결만으로는 위선자들에게 덕이 되기는커녕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더욱더 멀리 떼어놓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라고 말할 때 다윗의 암시는 위선자들이 정결 예식을 통해서 더욱 더 오염과 오물을 긁어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26 편
(니카욘)은 어떤 청결을 뜻하며 비유로는 '무죄함'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위선자들이 그들의 정결 예식에서 아무런 도덕적 청결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공연히 그러한 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헛수고를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교회에서 제아무리 높은 자리를 차지해도 다윗의 본을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외적으로 고백하되 그것의 외형적인 의식을 참된 헌신과 잘못 대치하지 않는 방향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경우라야 우리는 사악의 모든 얼룩으로부터 순결하고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제단에 손을 댈 수 없었던 만큼 다윗은 '둘러 싼다' 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3. 본문 7절은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위선자들의 행동과 거리가 먼 이 제사의 본래 목적과 용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위선자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예배의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 위선자들은 그 예배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장으로 가득찬 허영 그대로 하나님 앞에 불쑥 나서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다윗은 허구적이요, 마음에도 없는 예배와 영적인 예배를 구별하려는 뜻에서 자신이 성소에 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려는 목적에서라는 점을 확언합니다.
하지만 제사를 드리는 데 감사뿐 아니라 회개와 신앙 또한 요구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여기에 언급되는 예배에는 대유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의 궁극적인 의도, 혹은 최소한 제사의 핵심 목표는 하나님의 복을 인정함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송축하는데 있었던 만큼 예배의 다른 부분을 이 부분에 포함시키는 것은 적합한 일이었습니다.
시편50편 14절에서도 찬양의 제사가 마치 그 찬미의 제사만이 헌신의 전부인 것처럼 모든 외적인 의식을 제쳐놓고 우선적인 것으로 취급됩니다.
시편 116편 12절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다더 잘 칭송하고 하나님의 복을 보다더 인상적으로 찬미하는 뜻에서 '기이한'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도우신 것이 결코 평범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시편 26 편
시26:8-12 여호와여 내가
본문은 다윗이 기도한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1. 본문 8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앞에서 말한 점을 확인합니다.
곧 다윗은 자기가 경솔하게 성소에 온 것이 아니라 진지한 헌신의 마음으로 왔다는 점을 확증합니다.
불신앙인들은 비록 그들이 성스런 집회를 자주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은신처로 이용하려 들 뿐입니다.
반대로 진정 마음으로 하나님과 공예배를 찾는 신앙적이요 순결한 사람들은 헛된 과시욕에서 하나님과 집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데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도움을 자발적이고 정답게 사용합니다.
그 신앙인들이 거기서 받는 혜택은 그들 마음 속에 이 도움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선언은 다윗의 신앙이 제아무리 남들보다 뛰어나다 해도 그에게도 원수들의 횡포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베푸시는 일반적인 가르침의 수단을 박탈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교회의 공통적인 규율과 질서에 대한 자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내신 제도와 규례를 자신이 누리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 행위를 불필요한 것으로 모독하는 자들의 못된 교만과 그것 없이 살수 없었던 다윗의 자세를 살필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 가정 교사와 같은 율법이 옛날 사람들을 우리들과 비교할 때 노예 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태와 그들의 상태는 우리들의 신앙의 연약성이 그들의 신앙 못지않게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서 이 의식뿐 아니라 교회의 전반적인 규례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그처럼 높이 평가하는 예배 행위를 무모하게 팽개치는 자들의 교만에 화가 미치길 기원합니다.
혹자는 (메온)이라는 히브리어가 '눈'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면서 이것을 '단정함' 또한 '모습'으로 번역합니다. 칠십인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시편 26 편
그러나 이 단어는 거의 '처소' 로 쓰이는 만큼 보다 단순한 이 견해를 택합니다.
성소가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 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뜻에서 성경에 자주 사용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막 속에 거하셨거나 자기 백성의 마음을 지상적인 상징에 국한시키려 했다는 말이 아니라 신실한 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공연히 찾았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 주시는 선하심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들 가운데 거하도록 하려면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선하심에 대한 생생한 모습이 말과 의식을 통해서 환하게 빛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교황주의자들 가운데에서 그처럼 존귀하게 여기는 성전들이란 사단의 더러운 사창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2.본문 9절은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의 무죄성을 확증하고 다시 기도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변호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을 악인들과 동일한 파멸에 처하지 말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모순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의 관용을 베푸시면서 기도에서 이런 자유를 허용하셔서 자기 백성이 이런 방법으로 스스로 불안을 바로잡고 빠지기 쉬운 공포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합니다.
또 다윗은 선과 악을 뒤섞는 것을 무엇보다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자기 눈앞에 떠올립니다.
(아사프) 는 '함께 모은다'는 의미도 있고 '파괴한다' 는 의미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혼잡한 살육에 있어서 그렇듯이 '산적한다' 는 의미를 택합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항변이기도 했습니다(창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이런 형식의 기도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먼저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의로운 심판을 내리시려고 여전히 모든 사람의 사건을 심문하고 계시다는 점을 서슴없이 확인하도록 하는 뜻에서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악한 자' 라는 표현대신 '살인자' 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자기가 앞서 말한 내용을 강조합니다.
시편 26 편
수많은 악인들이 당장에 살인을 저지르려고 돌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은 차츰차츰 자신들을 잔인하게 만들어 갑니다.
사단 역시 그들이 피의 행동에 말려들 때까지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3. 본문 10절은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입니다.
(짐마)라는 히브리어의 본래 의미는 '내면적인 정책' 또는 '계략' 입니다.
여기서 이것을 '손'에 적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언급하는 악인들이 은밀하게 기만을 꾸며댈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계획한 것을 그들의 손으로 대담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는데 다윗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라는 표현에서 다윗이 주목하도록 지적한 상대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더없이 타락한 습관에 빠져 있던 귀족들입니다.
일반 천민들이 보상을 내걸고 고용될 수도 있고 어떤 사악에 있어서 하수인으로 매수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뇌물이란 주로 재판관들과 그밖의 권력을 쥐고 있는 높은 자들에게 바쳐지기 마련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여기에 언급되는 시대로 말하면 가장 악독한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공의가 매매의 대상이었다고 불평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통해서 선물을 마냥 좋아하는 자들은 자신을 불의에 팔아 넘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권고 받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16:19)고 선언하시는 것은 결코 공연한 말씀이 아닙니다.
4. 본문 11절은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입니다.
이 반복에서 우리는 다윗의 의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상황을 주목합니다.
다윗은 무수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고수했습니다.
다윗은 무수한 사람들이 뇌물로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어떤 일을 지배하는 자들이 순식간에 무진장한 재산을 축적하고 호화로운 저택을 지으며 자신들의 토지를 넓히고 확장하는데서 엿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 어떤 유혹도 다윗으로 하여금 이 면에서 그들의 본을 따르도록 유인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다윗은 희귀하고 영웅적인 덕을 증거한 셈입니다.
시편 26 편
그러므로 다윗은 비록 온 세상이 그들을 행복한 것으로 여길지라도 자신이 늘 갖고 있는 정직에서 벗어난 일이 없으며 악한 습관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더 귀중하게 여겼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을 확증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나를 구속하시고" 라고 간청하는 것은 자신이 부당한 행위로 압박을 받고 여러 가지 시험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할 것이라는 점을 신뢰하고서 하나님께만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크나큰 난관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다윗은 "긍휼히 여기소서" 라는 말로 자신의 구원의 진정한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원인이 결과대신에 나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5. 본문 12절은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다윗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송축하고 동시에 감사드릴 것을 서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비유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안전하게 지탱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윗은 서 있도록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찬양과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선하심을 은밀하게 개인적으로만 인정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회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하심의 은혜를 증거하겠다는 점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 본으로 공석상에서 찬양하는 일은 지극히 필요한 일입니다.
시27:1-6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다윗은 자기가 처했던 큰 위험 속에서 곰곰이 생각했던 소원과 명상을 되풀이합니다.
다윗이 언급하는 감사는 본 시편이 자신의 구출 사건 뒤에 작성된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여러 다른 기회에 묵상했던 기도와 생각을 한번에 반복합니다.
이 거룩한 사람이 얼마만한 불굴의 인내로 무장되어 있었기에 원수들의 더없이 혹심한 공격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입니다.
다윗은 삶의 유일한 목적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만 두었습니다.
그 어떠한 불안이나 고통에 상관없이 이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시편에서 다윗의 경이로운 신앙이 환하게 비추인 사실을 다시 한번 봅니다.
1. 본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입니다.
1) 다윗이 이렇게 시작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나서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더없이 신랄한 시험을 상대로 겨루어야 할 투쟁을 파악한 후에 미리 자신을 무장합니다.
우리는 확신에 필요한 문제를 모두 제시하고 있다는 해석을 택합니다.
성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스스로와 씨름함으로 육신이 소중하게 여기기 쉬운 의혹들을 물리치거나 억눌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여러 가지 폭풍에 이리저리 시달린 끝에 마침내 기운을 차리고서 자기를 괴롭힌 여러 고통을 상대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비와 선하신 뜻을 보이실 때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기뻐합니다.
이 점은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빛"으로 부를 뿐 아니라 "나의 구원"과 "내 생명의 능력"으로 부르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서 공포를 물리치기에 충분한 삼면(threefold) 방패를 제시합니다.
"빛" 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기쁨이나 행복의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자기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구원'과 '자기 생명의 능력' 이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다윗이 사망의 공포로부터 안전하고 자유롭게 느낀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확실히 우리의 모든 공포의 원인은 하나님을 우리 생명의 보호자로 인정하지 않고 생명에 대해서 너무 근심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27 편
그러므로 우리 생명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기에 충분한 경호를 받고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아무런 평온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의문문 역시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를 얼마나 귀하게 평가하고 있었는가 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모든 원수와 위험을 상대로 담대하게 만면에 미소를 머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된 도움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확실한 안전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올바른 경의를 표하지 못한 셈입니다.
지상과 지옥의 모든 권세를 저울에 달아보면서 다윗은 이 모두가 깃털 하나보다 가볍다고 계산하며 하나님 한 분만이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2) 그러므로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되 모든 공포를 쫓아 낼만큼 그 능력을 부여하는 법을 배우십시다.
이것은 육신의 연약성을 생각할 때 신실한 자들의 마음이 언제나 전적으로 공포를 모르고 지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우리는 당장 용기를 되찾고서 우리의 확신의 높은 망루에서부터 우리의 모든 위험을 내려다보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주 자신들에게 화를 내시는 것으로 아니 최소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것으로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 약속이 주는 은혜를 갖고도 불굴의 용기로써 담대하게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원수들과 대항하시도록 하지 못할 경우 우리의 불신앙은 하나님께 심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 보기에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우리를 자신에게 이끌어들이셔서 우리의 안전을 책임지실 것으로 확증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 찬양하며 우리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탄으로 황홀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무엇이뇨" 라는 식의 대조를 주목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 확신을 더 확대해서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담대하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라고 외치던 바울처럼 우리 의식에서 모든 공포를 추방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2. 본문 2절은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미래 시제로 번역하는데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편 27 편
우리가 이 선지자가 사용하는 과거 시제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두 가지 면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다윗이 하나님의 복에서 얻은 승리를 송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다윗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호의를 생각함으로써 시험받는 와중에서도 최선의 소망으로 자신을 격려한 태도와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후자가 우리가 택하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다윗은 과거의 체험을 곰곰이 생각하고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우리 신앙을 확증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뚜렷하게 증거 해 보여주신 실례들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 구절을 다음 구절과 관련시킵니다.
앞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미 얻은 승리를 마음에 되새기고 이것으로부터 제아무리 많은 무리들로 자신이 휩싸인다 하더라도 또 그의 원수들이 무슨 해악을 자신에게 불리하게 고안한다 하더라도 두려움 없이 그 모든 것을 상대로 맞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히브리어 (카랍)의 의미는 '접근한다' 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다윗의 원수들이 그를 공격하면서 일으킨 난동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싸운다' 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신의 정직성을 증거하는 뜻에서 그들을 '악한' 또는 '뻔뻔스러운' 자들로 부릅니다.
그들이 '자신의 살을 먹으려고 왔다'는 표현은 그들의 야만적인 잔인성을 나타냅니다.
3. 본문 3절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과거 체험을 통해서 어떠한 역경에 부딪친다 해도 자신이 과거에 필요할 때 그처럼 효과적으로 자신에게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보호를 마땅히 그대로 바라며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의구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다윗은 이미 1절에서 주장했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더 입증하는 뜻에서 반복합니다.
'군대' 나 '진' 이란 말에 다윗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모든 것을 포함시킵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내 파멸을 두고 음모해도 우리가 그들의 횡포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 편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라는 말은 자신에게 공포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감각으로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시편 27 편
다윗은 자기 마음이 자기가 대적해야 할 공포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공포를 신앙의 방패와 대조시킵니다.
혹자는 '그 중에서' 라는 말을 다음 문장과 관련시켜서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거할 것을 확신한다는 뜻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앞에 나온 가르침과 관련되는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 두려움 없이 확고히 서 있어야 믿음이 열매 맺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련이 다가올 때 자신의 믿음이 정복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4. 본문 4절은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입니다.
1) 혹자는 이것을 자신의 개인 행복 뿐 아니라 자기 온 민족의 행복이 의존하는 다윗 왕국의 영속성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이 특이한 증거로 아주 만족하고 있기에 밤이나 낮이나 그밖에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가 없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비록 다윗이 자기 나라에서 추방되고 아내를 빼앗기며 친척을 약탈당하며 결국 자신의 재산을 박탈당한다 하더라도 다윗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이 가슴 아파하는 하나님의 성소에서의 추방과 자신의 거룩한 특권의 상실보다는 못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간단한 해석입니다.
"한가지"라는 단어는 다윗이 모든 다른 유익을 무시하고 하나님 예배에 대한 강렬한 애정을 표현해 주는 대조법입니다.
결국 다윗에게는 성소에서 추방되는 것이 자기 집에 출입을 거부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을 열망했다는 내용은 한 문장입니다.
자신을 주로 괴롭혀 온 것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을 명백히 밝히기에 이것을 다윗이 억눌러 온 은밀한 소원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이 이 기도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밝혀서 끈질긴 의지를 덧붙입니다.
처음에는 크게 소란을 피우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열기가 식을 뿐 아니라 거의 동시에 꺼져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일생에 걸쳐서 이 소원을 간직할 것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자신과 위선자들을 구별합니다.
2) 하지만 다윗으로 하여금 그처럼 강력한 자극을 받게 한 동기가 무엇인가 입니다.
시편 27 편
혹자는 '물론 다윗은 성전 밖에서도 하나님을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망명객으로서 유랑할 때 그에게는 어느 곳이나 하나님의 귀한 약속이 따랐다. 그러므로 다윗은 외적인 건물을 보는 것에 그렇게 큰 가치를 둘 필요가 없었다.
다윗은 어쩌면 어떤 조잡한 상상력 따위에 의해 하나님께서 나무와 돌로 둘러싸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는 식으로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좀더 세밀하게 살필 경우에 다윗의 의도는 웅장한 건물과 장식을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웅장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에게는 그것이 모세에게 보여진 하늘의 모형이요, 그 모형의 실체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40절은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입니다.
성전의 모습이 인간의 지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들에 대한 형상이었던 만큼 이 선지자는 자신의 눈과 모든 애정을 이 대상에 집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그림과 우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곡해하는 자들의 광기는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그들의 그림과 우상은 성전의 장식물로 여겨질 가치가 있기는커녕 거룩한 것의 순결성을 모조리 더럽히는 똥이요, 오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시대, 또는 복음 시대의 신실한 자들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옛 조상들과 아주 다른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기 백성을 일정한 외적 질서 밑에서 지탱하시며, 지상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한 성전들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이 아름다움은 신실한 자들의 애정과 욕망을 성전으로 이끌어야 마땅합니다.
말씀, 성례, 공적 기도, 그리고 이와 같은 기타의 도움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악한 경멸이 아니라면 결코 소홀히 여겨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거울이나 형상과 같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5. 본문 5절은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입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자기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에게 약속합니다.
비록 다윗은 당분간 눈에 보이는 성소를 박탈당하고 있지만 자기가 어디를 가든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하는 능력을 체험할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시편 27 편
다윗이 성전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청원에서 자신이 결코 헛수고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진지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찾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 아래서 안전하게 숨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성전의 비유가 의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참 신자들을 그의 보호 아래로 모으기 위해 그의 날개를 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이 날개 아래에서 피난처를 찾으려는 소망 외에 다른 것이 자신에게 없었던 만큼 자신이 역경에 처할 때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자기를 위한 피난처가 마련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바위'라는 비유를 써서 말하면서 그것이 옛날에 든든하도록 높은 곳에 세워졌던 망루와 같이 난공불락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온 사방으로 원수들에게 포위되었지만 이들을 압도할 것으로 자랑합니다.
압제를 받는 사람들은 허리를 굽히고 또 풀죽은 얼굴을 하고 다니지만 그들의 기쁨이 회복될 경우에는 그들이 고개를 들고 다닌다는 것이 성경의 일상 표현법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말합니다(3:3). 그러나 여기서는 포위가 이것과 대조되는 만큼 다윗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피난처 안에서 자신이 높이 들리워 질 것이요, 따라서 자기를 찌를지도 모를 원수들의 투창을 두려움 없이 무시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비록 자신이 당장 죽일 것으로 위협해 오는 역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승리를 바라면서 자신의 신앙의 경이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외적 모습이나 수단에 의해 평가할 것이 아니라 사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의 손으로부터 구원을 소망할 것을 배웁니다.
6. 본문 6절은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자신이 위험에 서 구출된 다음에 감사를 돌리겠다는 점을 엄숙하게 서원함으로써 다윗은 다시 한 번 구원의 소망을 다짐합니다. 율법 시대의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출한 복을 받을 때마다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자신들의 서원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비록 추방되어 성전 출입을 금지 당하고 있는 신세지만 자신이 다시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찬양의 제사를 드릴 것으로 자랑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면서 보이기로 약속하는 거룩한 기쁨과 환희를 암암리에 이 세상의 속된 개선식과 대조시킵니다.
시편 27 편
시27:7-12 여호와여 내가
시편에는 하나님께 돌려지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산성, 요새, 피난처, 반석, 방패, 빛, 길, 목자 등입니다.
이 표현들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경우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나은 산성, 요새, 피난처, 반석, 방패, 빛, 길, 목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비유들은 인간이 이해하도록 계시한 것일 뿐 하나님 자신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떤 형상이나 그림으로 표현해서는 안됩니다(요4:24).
하나님은 모든 성도의 참된 도움과 구원과 생명이십니다.
그럴진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라는 이 고백으로 본 시편은 시작합니다.
택한 백성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과 구원과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1).
그러므로 교회를 대적하고 훼방하는 세력은 오히려 넘어지거나 무너질 것입니다(2).
사단의 군대가 전쟁을 일으켜도 우리의 마음은 여유와 의연함을 잃지 않습니다(3).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사망조차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멈추게 하거나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39).
그 모든 것이 사방으로 우겨 쌀지라도 우리가 낙심하거나 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도우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때문입니다(고후4:8, 9).
하나님은 우리를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우리를 해하지 못하게 높은 곳에 두십니다(5).
이렇게 도우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6하).
1. 본문 7절은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다시 기도하면서 자신의 시험을 타파할 어떤 무장을 갖추었는가를 밝힙니다.
"부르짖을 때에" 라는 단어를 써서 다윗은 자신의 강렬함을 표현합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빨리 자신을 돕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동일한 의도에서 다윗은 또한 조금 뒤에 자기 비참함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신실한 자들이 압박을 받을수록 그만큼 그들의 긴박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확대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27 편
2. 본문 8절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입니다.
1) 본 구절 동사의 인칭이 다르기에 여러 해석이 따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의도를 면밀히 검토하면 문맥이 잘 통한 점을 파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기 전에 그의 존전에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얼굴을 찾을 것을 초청하실 때 주의 얼굴을 찾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온유하고 부드럽게 그 백성들을 제지하는가를 주의 깊게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 기쁨을 되찾은 후에 하나님이 어디로 부르시든 나아갈 것을 밝힙니다.
(레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약간 모호한 데가 있습니다.
이것은 라틴어의 tib 곧 '당신에게'와 동일한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라멧)이라는 히브리어가 ".....의" 또는 ".....에 관하여"라는 전치사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충분히 적절한 번역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 주석가들이 따르고 있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 선지자와의 상호간의 대화로 보는 것이 더 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으로 먼저 길이 트이기 전에는 아무도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단계에까지 다다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슥13:9) 는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자신에게 하나님을 찾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점을 뚜렷이 밝힙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이 약속을 제시함으로서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이 협주곡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초대의 합창을 올바르게 지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에 우리는 정중하게 '아멘' 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친히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참 신자들이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안내함에 있어서 아무런 은밀한 수단이나 거추장스런 우회(迂回)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 여호와여 우리들은 제아무리 주님의 영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오라고 권면 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들에게 충분한 격려가 됩니다' 라는 이 서론이 그들에게 너무도 쉬운 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7 편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소리가 깊은 산 속 메아리처럼 우리 마음에 울려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상호간의 일치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확신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2) '얼굴' 이라는 단어는 보통 도움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소가 암시되고 있으며 다윗이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방향으로 자신을 보여주시던 계시 방법을 두고 언급하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대해서 흉측하게 육적인 관념을 품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언약궤로 하여금 자기 임재의 상징 노릇을 하게 정하셨듯이 어느 곳이고 자기 얼굴을 명명한 것은 결코 부적당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믿음이 눈으로 보는 것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자신을 우리에게 공공연히 제시하실 때까지 우리가 현재 하나님을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나마 보고 있다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고전13:12).
그러므로 이 단어에 하나님께서 자기 상상할 수 없는 영광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와서 지상에 있는 그분의 하늘 영광에 대한 소망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자신 앞에 일으켜 세우는데 사용되는 도움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그렇게 하듯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허용하는 것이 자기 주권적인 뜻에 입각한 것인 만큼 우리로서는 이 견해를 고수함으로써 더없이 난잡한 생각을 가지고 사악하게 하나님을 자기들의 환상이나 머리가 고안해 낸 형상으로 악하게 바꿔놓고 마는 교황주의자와 같이 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3. 본문 9절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동일한 어법을 우아하게 계속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여기 사용되는 "주의 얼굴"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그분의 은혜와 호의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점을 나로 하여금 참으로 체험하게 하시고 주의 능력이 나를 구원함을 역력히 보게 하소서"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유래하는 이론적인 지식과 소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실증적인 지식을 구별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활동 중에 계신 것으로 자신을 보이시는 만큼 하나님은 먼저 그의 말씀 안에서 찾아야 됩니다.
시편 27 편
2) 다음에 이어지는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라는 문장을 유대 주석가들은 '주의 종으로 하여금 분노와 광기에 지나지 않은 이 세상의 악한 걱정거리에 잠기지 말게 하소서'라는 식으로 너무 억지 해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타) 라는 히브리어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돌이키다' 또는 '옮기다'로 번역하는 것을 택합니다.
'주의 종으로 하여금 분노에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자들의 의미가 더 가능해 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전적으로 버림받게 되는 경우에 그 사람은 속으로 불만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번민과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혹 누가 다윗이 이런 시험을 예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를 약화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성급함을 두려워했던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째 해석이 다음에 나오는 두 단어에 의해 확증되는 만큼 그것을 고수합니다.
이렇게 되면 '노' 라는 단어에는 일종의 죄에 대한 고백이 암시되는 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쫓으시는 것이 정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것을 기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과거의 호의를 마음에 새기면서 다윗은 스스로 더 많은 것을 소망하도록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러한 논증을 통해서 하나님을 감동시켜 자신을 계속 도와 자신의 일을 불완전한 채 내버려 두지 않도록 합니다.
4. 본문 10절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입니다.
성경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이새가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가 허용되는 한 자기 아들 다윗에 대한 임무를 수행했었기에 여기서는 귀족들과 고문관들이 풍자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생각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부친이나 모친에게서 변태적으로 버림받았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이 비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설령 자신이 모든 인간들의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키)라는 히브리어는 대부분 '왜냐하면' 의 의미로 쓰이지만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 즉 '.......인 때' 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편 27 편
그러므로 다윗이 나타내고자 의도한 것은 인간 사회에서 무슨 자비, 사랑, 열성, 조심, 또는 봉사가 발견되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감싸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부모로서의 자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사랑의 극치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 어머니가 자기 태에서 나온 자식을 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을 마음에 둘 것이라는 점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밝혀주십니다(사94:15).
다윗은 하나님을 이런 수준으로 높임으로써 모든 선의 근원되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태어날 때부터 악의적이요 인색한 모든 유한한 것들을 능가하는 분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이사야 63장 16절의 말씀처럼 미완료법 입니다.
이 모든 내용의 의의는 지상의 부모들이 제아무리 천성적으로 자기 자식들을 위한다 하더라도 또 그들이 더없이 크나큰 열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소중히 아낀다 하더라도 또한 이 세상에서 애정이 통째로 말살되어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부모로서의 임무를 다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인간 본연의 모든 허식보다 뛰어나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비천하게 과소평가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실망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연의 이치를 수백 번 뒤엎어 버리는 것이 더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5. 본문 11절은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원수들보다 더 포악하고 사악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이 자기를 그분의 영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 가르침도 아주 유익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본 문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다윗이 자기 원수들의 올무와 횡포를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분의 손길을 뻗쳐주시며 안전하게 자기를 인도하심으로써 자기 일을 즐겁게 마쳐주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간단한 해석 같습니다.
다윗은 "평탄한 길"(올바른 길-칼빈) 을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는 안내자 직분을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험하고 어려운 길목에 놓여 있던 난관 및 장애물과 대조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안전과 보호에 위탁하는 사람은 먼저 간사하고 악한 수단을 포기해야 됩니다.
시편 27 편
우리는 오직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과 그분의 신실성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주실 것으로 약속하는 하나님께서 비뚤어지고 사악한 권모술수에 복 주실 것으로 예상해서는 안됩니다.
6. 본문 12절은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입니다.
(네페쉬) 라는 히브리어에는 '욕망, 의지, 바람' 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의 말은 '나를 내 원수들의 뜻이나 욕망에 내맡기지 마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이로서 다윗은 그들이 자신의 파멸을 위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두 가지 방법으로 구출하시는데 악인들의 잔인성을 달래어 유순하게 하거나 아니면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분노로 불타도록 허용하실 경우 그들의 능력과 횡포를 제지함으로써 심술을 부리려는 욕구나 시도가 허사로 끝나게 하는 방법이 그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뒤에서 자신이 중상모략과 거짓 비난, 그리고 공공연한 횡포에 의해 박해를 받는 것으로 덧붙입니다.
그들이 '나를 치려 한다' 에서 다윗은 그들이 전쟁과 도살만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사람이 비참하게 온 사방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봅니다.
다윗의 독특한 정직성도 그를 쓰라리고 독한 중상모략에서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폭력과 위세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이 어느 때고 우리를 상대로 일어나 위협하고 잔인한 폭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적대감정을 정당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우리를 거짓으로 중상 모략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양면으로 공격을 받은 다윗의 본을 명심하십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폭력보다는 거짓말하는 혀에서 더 많은 상처를 입으셨다는 점을 상기하십시다.
더욱이 이 기도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무죄함을 지지하시며 원수들의 잔인성에 보호의 방패를 휘두르신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어서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시편 27 편
시27:13-14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본 시편의 전체 시제를 박윤선께서는 "모든 것을 갚으시는 한 분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자"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박윤선께서는 표제 "다윗의 시"를 서론에서 간단하게 다룹니다.
1. 본문 13절은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입니다
이 문장이 불완전하다는 점은 주석가들이 전반적으로 일치합니다.
하지만 (룰레)라는 히브리어가 여기서 확증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것이 특수한 맹세였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히브리인들의 서원에는 생략법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중단하고 그것을 미완성인 채 남겨두고 만약에 자신들이 위증할 경우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처벌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보충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해석을 취합니다.
곧 다윗이 오직 신앙으로만 지탱해 왔으며 그렇지 않았더라면 수백 번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들이 끌어내는 의미는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지 않았던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안전하게 보존하실 것으로 호가신하지 않았던들 더 나아가서 내가 계속 이 확신 안에 굳게 있지 않았던들 나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며 그 밖의 다른 처방이라곤 없었다' 는 식입니다.
혹자는 "산 자의 땅"을 하늘의 기업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이 해석은 억지요, 성경의 통상적인 양식과 다릅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38장 11절에 기록된 노래에서 자신에게 '산 자의 땅에서'(칼빈) 하나님을 뵐 소망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현재의 생활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가 곧이어 덧붙이는 "내가 세상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비슷한 표현법이 다른 곳에서도 나옵니다(렘11:19).
그러므로 다윗은 현재 자신이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모든 체험을 박탈당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아무런 빛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시편 27 편
그래도 다윗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게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망의 흑암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 대할 것을 다짐합니다.
비록 육적인 이성의 판단으로 볼 때는 그 생명이 회복 불가능한 것이요 상실된 것이었지만 바로 이 확신이 있었기에 다윗의 생명은 지탱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윗이 무모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딤전4:8)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가 특별한 계시에 의해서 이야기를 듣고 그의 왕좌에 언제고 대를 이을 후계자를 확실히 약속 받지 않았던들 결코 이런 확신을 품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시132:11, 12).
그러므로 이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을 확신한 것은 정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부당하게 그의 본을 본받으려고 신앙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도록 이 문제가 우리에게 속하지 않고 그에게 특유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공공연하게 우리를 위해 구원을 베풀지 않고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에게 자비로우실 것이라는 점을 소망해야 합니다.
2. 본문 14절은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입니다.
다윗이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여기서는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면서 자신의 본을 통해서 그들에게 불굴의 인내를 권면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시편 31편 19절의 결론에 가서 특별히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 다음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서 엿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단수로 말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흔적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만큼 아마 다윗은 어느 때고 자신의 마음이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다짐하는 뜻에서 이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자기 연약성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자기 믿음이 자기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큰 수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적절한 때에 장래 문제를 두고 자신을 격려합니다.
'바라다' 는 단어를 써서 다윗은 새로운 시련을 마음으로 대비하고 자신이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시편 27 편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자신의 은혜를 철회하시고 우리가 고통으로 시달리도록 허용하실 때도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받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한 가지 투쟁을 통과했기에 새로운 투쟁에 대한 각오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서 숨기거나 자신의 도움을 지연할 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스스로 기운을 차려 힘을 가다듬습니다.
다윗은 '비록 두려운 마음이 네게 덮친다 해도 비록 시험이 네 신앙을 흔들어 놓는다 해도 비록 육신의 감정이 소란을 피운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불요불굴의 각오로써 이 모든 것을 딛고 올라서도록 하거라' 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뾰로통한 것이 아니라 인내로써 곧 자신들의 영혼을 침착하게 하나님께 맡길 때 승리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15)이라는 이사야의 말 그대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크고 어려운 힘과 겨눌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빌립니다.
사도가 만약 사나이답게 행동하거라(고전16:13) 는 말만 했더라면 자신의 자유 의지의 충동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겠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곧이어 교정 형식으로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마음에 힘을 주시리라' 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성도들이 고전 분투할 때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남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라는 점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다윗은 교황주의자처럼 자기 노력을 맨 앞에 두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다윗은 자신에게 힘이 전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임무를 다하면서 자기 결점이 성령의 은혜로 보충되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 일생에 걸쳐서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새로운 결투가 날마다 일어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성도들의 고통이 종종 장기간에 걸쳐 계속된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자기가 하나님을 바라는 문제에 대해 이미 언급했던 점, "곧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라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시28:1-2 여호와여 내가 주께
하나님의 도움으로 큰 환난에서 구출된 후에 다윗은 이 시편에서 자신의 습관에 따라 그가 환난 중에 했던 서약을 먼저 기록합니다.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편 기자들이 이와 같은 다윗의 예를 따릅니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의 핍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시작과 더불어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향해 나아간다고 선언함으로 자신의 신앙과 정직을 보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고통 가운데서 괴로워해도 정작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백 명에 한 명 정도만 있을 정도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양심이 죄에 눌려 하나님의 도우시고 인도하는 은혜의 능력을 결코 체험해 보지 못한 채 교만하게 이를 악물거나 쓸데없는 불평으로 대기를 채우든가, 아니면 고통에 정신이 아찔하여 자포자기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반석'이라고 부름으로 그늘에서나 평화로운 때나 맹렬한 시험에 놓여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확신을 더욱 충분히 보여줍니다.
다윗은 자신을 "무덤에 내려가는 자" 로 비교하면서 자신의 곤경이 얼마나 컸는가를 암시합니다.
다만 다윗의 목적이 단순히 곤경의 크기를 말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할 때 여기저기 헤매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자기에게 어떤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보이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계속해서 말해 온 그대로 '주께서 나를 떠나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주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으면 내가 망합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도울 수 없는 무능력을 깨달아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도움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지 않으면 고통 속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진실 된 신자들의 간구를 주의 깊게 들으시고 그 신자들에게 응답하신다고 성경으로 말씀하시듯이 마찬가지로 '잠잠하시면' 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피부로 느끼며 즉각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인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참 신자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듯한 경우입니다.
시편 28 편
2. 본문 2절은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기도는 다윗의 마음이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열렬하고 맹렬하게 기도했는가는 '소리'(voice)라는 명사와 '부르짖다'(to cry)라는 동사가 암시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걱정과 두려움으로 고통을 받았던지 냉랭하게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비통에 시달려 맹렬히 부르짖는 자들처럼 가슴이 불붙는 격렬한 갈망으로 간구 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라는 대유법적 표현에서는 몸짓을 통해 무엇인가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기도 중에 손을 드는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흔한 일입니다.
인간의 천성은 이교 우상숭배자들에게도 이 몸짓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향하고 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증거 해 줍니다.
사실 이 의식(儀式)에 만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이 발명품에 아무 효력 없이 바쁘기만 한데 비해 아무런 위선과 기만이 없다면 손을 드는 것은 헌신적이며 열심 있는 기도에 도움이 됩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성소를 향해 손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다윗의 기도가 성소의 도움에 힘입어 하늘에 상달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다윗은 외적 성소에 얽매일 만큼 그렇게 조잡하거나 미신적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영적으로만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때에는 세상을 떠나 믿음으로 하늘 영광에 들어가는 때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역시 사람이었다면 허약할 때 생긴 이 도움을 다윗이 결코 무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의 보증이거나 증거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된 은혜가 마치 거울에 나타난 것처럼 성소에 임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가까이 하심을 알아보고 싶으면 당장에 그들의 믿음을 아버지께 우리를 끌어올리기 위해 성육신 하여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께 즉각적으로 돌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해할 것은 다윗이 성소를 의지했던 것이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도움으로 다윗이 늘 하던 대로 율법의 지시에 따라 세상의 요소들을 벗어나려 한 것밖에 다른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성소'의 히브리어 (데비르)는 회막이나 성전, 또는 가장 거룩한 장소의 내부에 있는 방을 의미합니다. 이곳에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이곳을 성소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은혜로 임하시는 것을 그들에게 증거하시기 위해 거기에서부터 응답하시거나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8 편
시28:3-5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종말이 악인들의 종말과 같지 않게 되기를 말씀합니다.
1. 본문 3절은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렇게도 다른 상황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악인과 함께 똑같은 무차별의 파멸로 섞어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적들에 대해 말하면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이러한 태도로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차별 없이, 또 까닭없이 사람들에게 노를 발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선한 소망을 품어야 할 것도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에 의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는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알맞은 보상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악하는 자" 라는 표현은 사람이 전적으로 사악에 빠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때때로 타락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또 얼마간 실수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악을 행하면서 어떤 즐거움도 취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회개의 몸부림을 칩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자기가 묘사하고 있는 자들의 사악성을 정의하고 확대합니다.
그 악인과 행악자들은 친구로 가장하여 선한 사람들을 속임으로 배반했습니다.
그들의 혀로 한가지를 말하지만 사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전혀 다른 것을 품었습니다.
확실히 드러난 부패는 사람이 악을 행할 기회를 찾기 위해 말쑥하게 차려입는 이 여우같은 교활함보다는 차라리 더 참기 쉽습니다.
따라서 이 진리는 독이 든 그럴듯한 말로 단순하고 조심성 없는 자를 엄습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눈에 가장 거슬린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2. 본문 4절은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무죄를 생각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한 후에 다윗은 그의 적들에 대해 저주를 발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많은 말로 이러한 복수의 욕망을 폭발하기까지 고통 속에서 오랫동안 애처로이 신음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편 28 편
여기 암시돼 있는 것은 다윗이 말하는 행악하는 자들이 단 한번이나 짧은 기간동안 범죄한 것도 아니요, 얼마간 범죄한 것도 아니라, 그들의 계속적인 악행이 극치에 다다라서 이제 더 이상 그들의 파렴치함에 견딜 수 없게 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의 행악을 묵인하신 것으로 여겨서 괴도하고 끝없는 불경건의 행진을 계속하는 자들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가혹한 유혹인가를 우리는 압니다.
다윗은 끊임없는 인내에 지치고 심한 고통에 쇠약해진 나머지 결국 하나님을 부르며 사악에 사악을 줄기차게 쌓아 가는 원수들의 방종을 억제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다윗이 이 구절에서 "저희의 행사" 에다 "그 행위의 악한"과 "저희 손의 지은"이라는 말을 첨가했을 때 불필요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세 번씩 반복한 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될 보응을 받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여기 덧붙여 다윗은 그 순간 자기 자신의 믿음에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은 교만한 위선자들이 종종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속임수와 트집으로 악해진 세상에 대한 심판이 없다고 속입니다.
유별나게 사악한 자들은 자신들이 무사한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은 죄 없는 자를 허위 고발하여 짓누르는 데에 얼마나 참지 못하는가를 우리는 잘 압니다. 이것은 마치 일반 격언에 있는 대로 늑대가 양들을 삼키고 싶어서 그들이 물을 어지럽힌다고 트집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같은 절박함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금 복수를 위한 기도라는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로 만일 정욕이 일어나 우리로 복수를 기도하게 한다면 이 욕망이 하나님의 눈에 사악하다는 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 손해에 대한 보복으로 원수들에 대한 악한 것을 간구하지 못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밖에도 보복의 기도는 증오에서 생겨나는 모든 욕망의 혼란된 상태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수를 기도하기 위해 자신의 과격한 열정에 빠진 자들이 다윗의 실예를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이 거룩한 예언자는 그의 적들을 파멸에 처넣기 위한 자신의 개인적 비통으로 불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정욕적인 욕망을 버리고 일 자체에 관해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어떤 사람이 사악한 자들을 보복해 달라고 고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모든 부당한 감정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야 됩니다.
둘째로 우리를 공격하는 가증스러운 악이 우리를 과격한 열심으로 몰아넣지 못하게 신중함을 연습해야 합니다. 종종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던 것으로 그 제자들은 주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한 자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사르도록 갈망했습니다(눅9:54).
사실 그 제자들은 엘리야의 본을 따라서 행동하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시편 28 편
주님은 엄히 그들을 꾸짖으시면서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관찰해야 하는 것은 일반원칙 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전 인류의 복지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일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절망으로 끈질기게 돌진하는 것같이 보이는 자들이 회개할 것을 원하는데 이르게 됩니다.
다윗은 모든 악한 열정에서 벗어나는 한편 사리와 판단의 정신을 부여받았기에 여기에서 자기 자신의 소송을 탄원한다기보다 하나님의 소송을 탄원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함으로 자신과 신실한 자들로 하여금 비록 사악한 자들이 모든 종류의 악덕을 위임받아 당분간 아무 벌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놀아날지 모르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합니다.
3. 5절은"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저희가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오니 여호와여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마소서-칼빈)"입니다.
1) 본문 상반절은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악한 자들이 너무도 대담하게 악을 행한다고 선언하면서 불신앙의 근원을 공개합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이 그렇게 그들의 원한에 빠져서 온갖 종류의 사악을 저지르면서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그들을 찌를 때면 그들은 거짓 희망으로 자신들을 달래고 완고히 자신들의 마음을 굳혀 결국 양심이 냉담해져 버립니다.
첫째로 그들은 번영에 도취되어서 하나님을 자기들의 친구라고 아첨하는 한편 그렇게도 많은 환난에 압도되어 있는 선한 사람들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세상이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낮의 밝은 빛 가운데서 소경이 되고 맙니다. 이 같은 고의적 태도로 다윗의 대적자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임명하셨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대담하게도 다윗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런 엄청난 무지에 대해 불만을 호소합니다. 이는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당시 모든 악한 자들에 대해 일반적인 말로 같은 불만을 토로하는 것과 같습니다(사5:20). 이 교훈은 두 가지로 사용됩니다.
첫째로 이 교훈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당한 괴로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을 인내로 유익하게 단련시키며 이 세상사가 모두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에 있어도 하나님은 하늘의 높은 보좌에 앉으셔서 만사를 지휘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결코 적지않은 위로입니다.
시편 28 편
둘째로 이 교훈은 우리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기에 아주 적절합니다.
그러나 행악자들은 마치 Andabates들이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시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우리는 흑암에서 눈을 감고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하여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스리실 때 자신의 의로써 심판하신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비록 만사가 혼돈가운데 난잡하게 쌓여도 믿음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비밀스런 심판을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최대의 암흑 속에서도 자신의 섭리의 표증 주시는 일을 결코 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표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핑계 댈 수 없는 게으름입니다.
예언자는 이 같은 사악을 더 무겁게 "여호와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반복합니다.
예언자는 악한들이 자기들의 갈 길을 무모하게 추구함으로 그들의 광기를 억제하기 위해 그들이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지으신 것을 여지없이 짓밟는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2) 본문 하반절은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의 처음 부분이 마지막에 있는 동사들에 대해 하나의 실사라기보다 주격이라는 견해를 갖습니다.
이 견해는 다윗이 이 짐승 같은 광기가 그들을 파괴시킬 것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은 오히려 충족케 되고 문맥은 훌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동사들은 미래 시제로 되어 있기에 이 문장은 다윗이 최근에 기도해 왔던 타락자들의 파괴를 지금 확신한다는 의미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의견은 이 말도 단순히 다윗의 계속되는 탄원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다윗은 사악한 자들이 다시 일어나거나 그들의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지 못할 만큼 타도되도록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멸하시고 건설치 마소서'(칼빈) 라는 표현은 히브리인들 가운데 흔한 표현 양식으로 말라기 선지자도 에돔에 대해 말하면서 이 양식을 따랐습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말1:4) 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치의 병에 걸리지 않는 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일깨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또 우리 마음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배우며 인내 중에 견디고 경건한 중에 전진을 계속하자는 것입니다.
시편 28 편
시28:6-9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다윗은 기도 응답을 받고 찬송합니다.
여기서는 청구의 신앙이 갑자기 소유의 신앙으로 옮겨 갑니다.
1. 본문 6-7절은 "(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 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이 부분은 본 시편의 두 번째 부분으로 예언자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윗이 얼마나 자신의 위험 속에서 기도에 몰두했는가를 보았습니다.
이제 다윗은 감사를 드림으로 자기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자신의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진리 안에서 진지하게 자기를 찾을 때마다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다윗은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힘' 과 '방패' 라고 부름으로 같은 진리를 보다 충분히 선언합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통해 들으시고 놀랍게 자기를 보호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다윗은 자신이 확신과 소망 가운데서 도움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자신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다윗은 감사의 간증을 함으로 그의 기쁨이 더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악한 사람들과 위선자들은 그들이 환난으로 압도될 때 하나님에게서 도피할 뿐 아니라 그들이 환난에서 벗어났을 경우에도 곧바로 그들의 구원자를 망각하고 미치광이 같은 환희에 기뻐 날뜁니다.
다윗의 신뢰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보호하는 능력을 지금도 소유하고 계시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늘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 그에게 참되고 확실한 기쁨이었다는 점을 체험에 의해 진실되게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 자신의 복을 뿌리실 때 틀림없이 우리는 그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해 우리의 입을 열 것입니다.
시편 28 편
2. 본문 8절은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 되셨다는 것을 설명할 목적으로 다윗은 앞의 말을 반복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군대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람의 손과 노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만 승리를 돌립니다.
다윗은 자신이 얻은 모든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순조로운 성공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호의에서 흘러나온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구별하였는바 마치 그 손길이 하늘에서부터 뻗쳐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인간적인 수단이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한다는 것은 굉장히 부끄러운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것보다 흔한 죄는 없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병사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마치 손가락으로 그들을 지적하는 것처럼 '저희' 라는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은 대단한 무게의 어법입니다.
하반절은 다른 이유를 마련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 군대가 하늘로부터 승리적 용맹을 부여받은 사실을 선언합니다.
이는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규범 하에서 싸웠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기름부음 받은 자"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임명하지 않고 자유로이 다윗을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베푸신 호의는 사울에게 하셨던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전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찬양함으로 자기 자신의 정책이나 능력에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습니다.
한편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의 정당성에 만족할 때에 이 교훈은 그 신자에게 용기를 주고 그 신자가 갖고 있는 일들의 순조로운 결과에 대해 좋은 희망을 품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관찰할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이 흘러 넘치는 샘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다윗은 '구원' 이라는 말을 복수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다윗이 자주 보호를 받았고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손으로 다윗을 기름 부을 때부터 다윗 돕기를 결코 중단하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윗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그를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시편 28 편
3. 본문 9절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이 보여주는 것은 다윗의 관심의 대상이 자신의 행복이 아니요, 오히려 전 교회의 행복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윗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 통치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이익을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다른 목적에서 왕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에서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으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스가랴가 "구원을 베풀며"(슥9:9) 오시리라고 예언하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은 아들에게와 아들의 지체들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약속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 구원의 효과가 아들의 온몸을 통해 그 지체들에게로 확산되리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예를 통해 지상의 왕들에게 규칙을 정합니다.
지상의 왕들은 공적 이익에 헌신함으로 백성을 위해 이익이 보호되는 것만을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아주 거리가 멀다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 두신 그 왕들은 자만과 뻔뻔스럼에 눈이 멀어 세상의 안정을 멸시합니다. 이는 마치 그 왕들의 허영과 높은 벼슬에 대한 체면이 인간의 공통된 상태로 그들을 들어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인류가 군왕들의 발아래서 거만하고 오만불손하게 짓밟힌다고 놀랄것 없습니다
인류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인내를 포기하고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마치 하나의 거울을 제시합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이 이 거울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은총의 계속적 진행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순종이 하나님 아버지 같은 사랑과 일치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백성과 하나님의 유업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종종 다윗을 목자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다윗 자신은 그 목자 직분에 전혀 부적합하다고 여깁니다.
다만 다윗은 목자의 직분이 하나님의 사역자에 불과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목자의 직분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