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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새롭게 쓰라 / 김학중 목사
중년 이상의 성인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내가 10년만 젊었어도’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했거나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에
현재에 후회할 일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돌아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소망이 만들어낸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타임머신’류의 이야기들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80년대에 개봉되어 대흥행을 거둔 영화 ‘백 투 더 퓨처’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자신의 유약한 아버지를 돕습니다.
또한, 2011년에 개봉된 영화 ‘소스코드’의 경우에는
주인공이 과거의 열차폭발테러 사건으로 돌아가
아예 그 사건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원천봉쇄 해버립니다.
즉 과거를 조작하여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지나간 세월에 대한 후회만 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의 마음에는 절망과 분노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인생에 대한 후회와 한탄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오늘의 말씀은 굳이 ‘타임머신’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주일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복과 은혜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느리지만 확실한 길을 택하라. (5:2-9)
스파이를 보내어 첫 공격목표인 여리고 성을 정탐한 후,
하나님께서 베푸신 ‘요단강의 기적’으로 가나안 땅에 올라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매우 황당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 즉 남성 생식기 끝의 포피를 벗겨내는 ‘포경수술’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너는 …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여호수아 5:2).
당시의 상황에서 할례를 받는 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우선 수술환경이 너무나 비위생적이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할례를 위한 수술도구라곤 거친 ‘부싯돌 칼’만 있었을 뿐,
위생적인 수술대와 소독된 수술도구, 진통제 등은 꿈도 꿀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 세균에 감염되거나 염증이 심해질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성공적으로 할례를 끝냈다 할지라도
상처부위가 제대로 아물고 나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상처가 낫는 기간 동안, 사실상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들은 전투는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을 건너 이미 적군의 땅에 들어온 마당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들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할례는 즉흥적인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수백 년 전에 이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요구하신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증표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과 권리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 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창세기 17:10, 12, 14).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 40년 내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여호수아 5:6-7).
그러므로, 이왕 40년이나 할례를 미루어왔는데,
가나안 정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어 적군을 다 물리치고 나서
여유롭고 안전한 상태에서 할례를 받으면 안 되었을까요?
굳이 현재의 상황에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면,
전쟁에 나설 청장년들을 뺀 아이들과 노인들만 먼저 받으면 안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그토록 중요한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들에게 위험천만한 할례를 요구하셨을까요?
지난 5월 4일, 장장 5년 3개월만에 화재로 폐허가 되었던 숭례문이 복구되었습니다.
이 대공사를 위하여, 총공사비 245억 원이 투입되었고,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을 포함하여 연인원 3만 5천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자금과 인원이 동원되었는데도 불구하고,
5년 3개월이라는 오랜 공사기간이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보물(국보 제1호)인 숭례문을 복구하기 위하여
현대 건축기술과 장비 그리고 건축재료를 쓰지 않고,
세밀한 역사고증을 통하여 전통적인 건축기법, 장비, 재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약 2만 3천 장의 기와는 직접 손으로 만들어
충남 부여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전남 장흥에서 전통기법으로 구웠고,
깔돌인 박석은 강화도 매음리에서 가져오고,
단청안료는 기존에 썼던 인공안료 대신 천연안료를 사용했고,
현판도 조선시대의 탁본을 구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숭례문 복구자들은 왜 이렇게 번거롭고 힘든 길을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현대의 건축기술, 장비, 재료 등을 총동원하여 숭례문을 복구하였더라면,
더 빨리, 더 과학적으로 견고하게 지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최고 보물’로서의 가치는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에게 할례를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도
숭례문 복구자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목표는
그들을 탐욕스러운 정복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걸핏하면 참혹한 전쟁을 벌이는 난폭한 전쟁 미치광이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는
그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무작정 이기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서기 전에
고통스러운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부터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위험하고 느리지만 확실한 길’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목표도 잃어버린 채,
무작정 앞만 보고 정신 없이 인생길을 달리면
일부러 ‘번거롭고 고통스러운’ 브레이크를 거십니다.
때로는 그것이 육체나 정신의 질병일 때도 있고,
때로는 가정문제, 직장문제, 재정문제, 인간관계 등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브레이크는 결코 여러분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올바른 경로를 벗어났음’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리셨습니까?
이제는 여러분의 삶의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하여
차분하게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향한 ‘느리지만 확실한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원점복귀를 두려워하지 말라. (5:10-12)
이스라엘 백성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할례를 받은 시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온 지 만 40년이 되던 유월절 직전이었습니다.
이때는 가나안 사람들이 보리추수를 하던 시기여서,
들판에는 무르익은 보리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의 고통에서 벗어나자
들판에서 그 땅의 곡식들을 추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곡식으로 ‘누룩을 넣지 않은 빵’도 만들고 볶음 요리도 하여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여호수아 5:11).
40년 내내 만나만 먹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너무나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먹거리의 기쁨도 잠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곧장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먹을 양식으로 40년이나 공급해주셨던 ‘만나’를 돌연 중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여호수아 5:12).
비록 매일 만나를 먹는 것이 지겹다고 투정한 적도 있었지만,
40년이 흐르자, 만나는 어느덧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갑작스러운 만나 공급중단 사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장 스스로 먹거리를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 외에도
마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것과 같은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갑자기 이 시점에서 야박하게 만나를 끊으신 것일까요?
가나안 정복 전쟁이 마치기까지라도 만나를 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혹시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은 것이 하나님의 심기를 건드려서 벌을 받은 것일까요?
하지만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하나님께서 불쾌해지셨다는 암시가 없습니다.
이 만나 공급중단 사태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비상체제에서 정상적인 현실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지난 40년의 광야생활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등의 기적들이 항상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래서 기적이 오히려 상식이 되던 꿈 같은 시기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무사히 인도하시기 위하여
발동하신 비상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집트 해방 40주년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까지나 꿈 속에서만 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현실세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지난 40년 동안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냉혹한 현실 속의 ‘가나안 땅’으로 진군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비상식량 만나가 아닌 정상적인 곡식을 먹는 것은
불가피하면서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만에 원점, 즉 현실세계로 돌아왔습니다.
‘디즈니랜드’나 ‘디즈니월드’ 같은 세계적인 놀이동산에는
훌륭한 숙박시설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시설들을 다 둘러보고 즐기려면 한 나절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며칠이고 묵으며 관광을 하는 여행객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그리고 어린 아이들일수록,
그곳의 ‘꿈 같은 세상’을 떠나 각자의 가정, 학교 또는 일터로 돌아가기가 싫어집니다.
그리고 현실감각도 둔해져서, 비현실적인 공상에 사로잡히는 후유증을 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사람은 적절한 시점이 되면 환상적인 놀이동산에서 나와야 합니다.
놀이동산은 단순한 ‘임시 놀이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펼치기 위하여 구슬땀을 흘리며 살아야 할 곳은
바로 자신들의 일상적인 현실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놀이동산 후유증’과 유사한 증상을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원이나 교회의 집회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나면,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 이렇게 말씀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더 이상 가정/일터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곳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저를 못 살게 구는 사람도 많아요.
그냥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마냥 살 수는 없을까요?”
실제로 어떤 분들은 가정과 일터도 내팽개치고 그런 집회장소에 들러붙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은 선택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서신 모습을 보고
너무나 황홀해진 베드로는 ‘여기가 너무 좋아요.
여기에 집 짓고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요청에 대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시지 않은 채,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소란한 군중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예수님의 복음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하나님의 꿈을 이룰 장소는 바로 여러분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1시간이 멀다 하고 말싸움과 신경전이 벌어지는 현실,
하루에도 수십 번씩이나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체험을 하는 현실,
남몰래 숨죽여 눈물을 쏟아야 하는 현실,
바로 그곳에 여러분이 정복해야 할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 공급이 중단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도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서 40년 간 만나를 부어주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기적과 은혜를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현실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현실이 고되고 어렵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풍성한 은혜와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3.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5:13-15)
이스라엘 백성이 드디어 첫 공격목표인 여리고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여호수아의 눈에는 거대한 칼을 빼어 든 채 버티고 서있는 낯선 장수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일단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무장한 채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으므로,
여호수아는 그 사람의 정체부터 파악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정색을 하고 그 사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아니면 우리를 해칠 적이냐?”
그러자 그 사람의 입에서는 놀라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여호수아 5:14).
즉, 이스라엘 백성을 돕고 보호할 하나님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여호수아 5:15).
이것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즉, 그곳에는 하나님의 군대만 파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와 계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군대의 본부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한가운데로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곁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지원군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얼마나 비장한 각오로 개입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신경을 쓰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동북아시아는 ‘살인 진드기’로 불리는 ‘작은소참진드기’의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수년 전 중국에서 발견된 이 ‘살인 진드기’는,
최근 일본에서도 적지 않은 희생자들을 만들었고,
지난 5월 16일에는 우리나라 제주에서도 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몇 명의 의심환자들이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살인 진드기에 물리면, 일주일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
갑자기 열이 나고 구토, 설사와 함께 온몸이 쑤시게 됩니다.
그리고 혈소판이 떨어지면서 출혈 증상이 있고,
마침내 내부장기가 손상이 되기 때문에, 치사율이 10~30%에 이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살인 진드기가 퍼뜨리는 SFTS 바이러스에 대한
항바이러스제나 백신 등의 치료제가 현재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진드기에 물리지 않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진드기는 성충의 몸길이도 약 3밀리미터밖에 되지 않아
미리 발견하거나 피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엇이든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많은 경우, 정작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맨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그리고 작은 벌레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 중에 가장 강하고 위대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움직이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천하무적의 ‘하늘군대’를 동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바로 여러분의 곁에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소집하신 막강한 ‘하늘군대’가 있습니다.
그 ‘하늘군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러분의 곁을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냉혹한 현실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막강한 군대가 여러분의 앞뒤좌우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하늘군대’와 함께
냉혹한 현실 속으로 담대하게 진격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행복했던 또는 아름다웠던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지금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크고 놀라운 일을 시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느리지만 확실한 길’을 선택하십시오.
냉혹한 현실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여러분의 주변에 천하무적의 지원군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