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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로드십에 대하여 (두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 中에서)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가치관
풍성한 교회 김성곤 목사
우리나라 성경은 주主라고 한 가지 의미로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에 ‘주’는 구세주
Saviour와 왕Lord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세주Saviour는 10%에 불과하고,
왕Lord이란 의미가 90%를 차지합니다. ‘주님 Lord’은 우리를 통치하시고 보호하며 인도해 주시는
왕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분을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인정하며 기도합니까? “ 주인님!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구 달라고만
하는 ‘막달라 성도’가 많습니다.
또, 달라고만 하지 주님의 통치를 받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구세주만 좋아해서 복 받고 은혜 받으려고만
하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도움만 받으려
할 뿐 그분께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입으로 부르기는 “주여!”하면서 정작 주인은 나 자신이고, 주님은 종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장님에게 “사장님, 구두 좀 닦아 주세요. 걸레 좀 빨아 주세요”라고 사장을 부려먹는 부하직원이
있습니까? 마치 우리가 그와 같습니다. “주인님, 이것 좀 하세요, 저것 좀 하세요!”하며 주님을
부려 먹습니다.
바른 신앙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주여!”라는 부르짖음 그대로 그분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며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분께 순종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이 왜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무릎 끓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만드셨으니 나의 주인이십니다.
두 번째, 피 값을 치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고전 6:19~20). 우리는 원래 마귀의 자녀였는데, 주님께서
사신 아주 값비싼 사람입니다. 노예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쁜 주인은 종을 때리고 자식까지 떼어 놓습니다. 나쁜 주인을 만나서 고생하던 우리가 자비로운
주님을 만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나고 자녀로까지 신분이 변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당위성만 가지고 순종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에 생명을 다해
복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욕합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학생이 선생님 앞에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안다고 해서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교실 붕괴 현상으로 학생이 선생님을 고발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그들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일그러진 교육 현실 때문에 존경하기 어려운 많은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는데도 우리는 도무지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 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주님과 충분히 사귄다면 우리는 그분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랑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비전제자대학에서는 로드십을 가르친 후,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교제 훈련에 들어갑니다.
로드십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훈련을 통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로드십이 자라가는 과정에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이해하고 순종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해가 되고, 이익이 되어야 순종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주일 성수라든가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이해는 안 되지만 이익이 될 것 같아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베드로가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이해도 안 되고 이익도 없지만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마치라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로드십의 절정에 이르렀으며,
이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며, 자신을 포기하는 순종의 훈련 없이는
제자의 비전을 이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 포기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가는 것입니다. 로드십이란 그리스도는
주인이시며,. 나는 그분의 종이자 노예라는 것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순종함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거나 일이 잘 풀리는 날은 마음의 왕좌에 주님이 앉아 계시다가 뭔가 일이 틀어진다 싶으면
왕좌에 계신 주님을 밀어내는 것은 진정한 로드십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내 삶, 내 아내, 내 자식, 내가 가진 것 중에 나의 소유는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드려야 하는 노예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 되심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인정되고 구체적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경적인 가치관의 정립이며,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각 삶의 영역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을 정립하고 주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가족관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은 또 다른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적인 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물질관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지갑이 헌신되지 않으면 진정한 헌신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주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성경적인 물질관이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문화관입니다. 물질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문화관입니다. 아니 어쩌면 물질관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화관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미디어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고 듣는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아이가 컴퓨터 게임을 하닥 동생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상의 화면 안에서
살인하는 게임을 즐기다 현실에서 실제의 게임을 즐기고 싶었다는 것이 살인의 이유였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이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잠재되어 있는
일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미디어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은 연예인입니다. 모 탤런트처럼 되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가 하면,
어느 인기 프로그램에서 주인공이 입었던 옷, 액세서리가 유행을 주도합니다. 모두 미디어의 영향권
안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미디어를 통한 메시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
역시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비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음란, 폭력, 범죄 등의 미디어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여전히 위협하고 있습니다.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며, 인기 프로그램이다,
작품성이 있다는 평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보지 않는 절제가 더더욱 필요합니다.
넷째, 결혼관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결혼관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봅니다.
결혼이란 영과 육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지지 말라”(고후 6:14)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7절에서 자기와 같이 결혼하지 않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을 원하나 은사에 따라
결혼 여부를 결정해도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도
은사에 따라 결혼하는 것도 성경적입니다.
결혼의 자격 중 첫째는 인격적인 성숙이 되어야 하며, 둘째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독립되어야 합니다.
즉, 부모의 권한에서 벗어나는 것과 형제의 경우에는 경제적인 독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자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시간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시간관은 우선순위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 가장 우선을 두는 삶입니다.
현대인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바쁘다”는 것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구조로 인해
바쁘게 살지 않으면 뒤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으며
실제로 하루에 해야 할 일을 메모해 보면 30~40가지에 이릅니다. 어린아이들 역시 학교 공부 뿐 아니라
학원까지 서너 군데 다니다 보니 바쁘디 바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급하고 바쁜
순서가 아닌 우선순위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날 해야 할 일 중 가장 우선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순위를 정하고 그 순서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섯째는 직업관입니다. 직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교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비량 선교사이며 우리가 받는 월급은 선교비입니다.
그러므로 직장 안에 있는 믿지 않는 모든 불신자는 우리의 선교 대상입니다. 해외로 파송되는 자만이
선교사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일곱째, 노동관에 대해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노동은 예배이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3대 축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노동의 축복이며,
둘은 안식의 축복이고, 셋은 결혼의 축복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6일 동안 세상에서 하는 일은 육신의 일이며 교회를 섬기는 일만이 거룩하다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노동을 축복으로 주셨으며, 노동의 목적은 더 많이 섬기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2장 5절에 언급된 ‘경작’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야바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야바트는
노동한다는 의미 뿐 아니라 예배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일한다면
그것이 곧 예배입니다.
조선시대 복음이 막 전해졌을 때의 일입니다. 외국의 선교사님들이 오후에 테니스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선비들이 그런 일은 하인에게 시키지 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느냐고 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전해집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에는 ‘일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로 하나님 역시 일하시는
분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노동은 축복이며 예배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덟째, 육체관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는 우리 몸을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거룩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하여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며 육체적인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술이나 담배, 기타 음란물을
접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치 못한 장소에 출입하는 것이 잘못인 것은 바로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싫어하시는 장소, 놀이, 문화는 과감히 끊고 절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언어관입니다. 교회 안에서 물의가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말 때문입니다. 말로 인해
상처받으며 말로 인해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자”(약 3:2)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아도 덕이 되지 않으면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지체들이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운전하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운전자는 운전 태도에 따라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운전자는 인생의 핸들을 자신이 잡고 그리스도는 차 밖에 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 자연인(natural man)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인생의 왕좌에 자신이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불신자입니다.
인생의 핸들을 자신이 잡고 있으므로 모든 일을 자신이 주관하기에 좌절과 절망에 빠집니다.
두 번째 운전자는 인생의 핸들을 자신이 잡고 그리스도는 뒷좌석에 모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3)로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인으로 영접했지만, 인생의 주인은 여전히
자신이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겉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인인지 비그리스도인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자연인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은 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기복이 심하며 잘 넘어지고 율법적으로 살아갑니다.
세 번째 운전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spiritual man)입니다. 인생의 핸들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자신은 옆이나 뒷좌석에 앉은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통치하에 살아가며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며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세 종류의 운전자 중, 당신은 어느 부류의 운전자입니까? 그리스도의 주재권은 먼저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인생의 핸들을 여전히 내가 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확하게 진단한 뒤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정답은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나의 모든 삶을 그분께 전적으로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고래심줄 보다 더 질긴 것이 자기 애착, 자기 생각,
자기 이성입니다. 자기 자신을 쉽게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로드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얼마나 친밀하게 사귀느냐에 따라
우리의 로드십이 성장하며, 그것이 곧 영적인 성장입니다.
첫댓글 이 책을 바탕으로 교회에서 양육반 훈련을 받고 있는데, 참으로 유용하고 좋은 내용인 것 같아서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