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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
조선시대 유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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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정치/경제/생업 > 유배문화 > 시대적 배경 > 조선사회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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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의 초래
명종이 죽고 후사가 없자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의 14대왕, 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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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세력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이황, 이이 등 많은 인재가 이 때 등용되었다. 한편 억울하게 화를 입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남곤 등의 관직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선조의 사림세력의 대거 등용에 따라 이제는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붕당이 분기되어 자체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림파의 정계 장악으로 관직에 오를 자격자는 많아졌으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익은 『곽우록』의 「붕당론」에서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곧 2개의 당(黨)을 이루고, 이가 하나이고 사람이 넷이면 4개의 당을 이룬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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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선조8년(1575년) 이조전랑 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 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암투는 가속화되었고 급기야 이들을 중심으로 조정은 두 편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에 있다하여 이들 일파를 동인이라 부르고,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에 있다하여 이들 일파를 서인이라 불렀다.
이이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두 당은 서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이이가 죽자 대립은 더욱더 극화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두 당이 원수처럼 서로 공격하였다. 당초 심의겸이 김효원을 비방하자 김효원도 심의겸을 비난하여 각기 붕당이 나뉘었고 서로 알력하게 되었다.『선조실록』9년 3월 3일.
처음에 심의겸이 외척으로 권세가 있어 한때의 무리들이 모두 좇았는데 김효원이 전랑이 되자 비로소 배척하기 시작했으므로 심의겸에게 출입하던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붕당이 점점 나뉘더니 비로소 동서(東西)의 갈라지게 되었다. 이이가 대신들에게 말하여 둘 다 내쳐서 화단이 생길 빌미를 막아야 한다고 청함에 따라 김효원은 삼척 부사에 임명되고 심의겸도 감사에 임명되었는데, 무리들이 당을 끌어들이고 의로운 사람들을 배척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조정에 문제가 많아졌다.
<선조실록 9년 3월 3일조 (병지)>
<선조실록 10년 5월 27일조 (정축)>
<선조실록 10년 5월 27일조 (정축)>
역모자로 몰린 정여립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황해도 관찰사 한준에게 보고서를 올렸고 보고서를 받은 한준은 이를 즉시 왕에게 고변하였다.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의금부로 잡혀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여립은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정여립의 자살로 인해 역모고변이 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정철 등의 서인이었다. 동인인 이발, 이호,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동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때 숙청된 인사는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선조실록 22년 10월 1일조 (기축)>
<선조실록 22년 10월 2일조 (기축)>
정여립의 낙향과 대동계 조직
정여립은 경사와 제자백의 학문에 능통한 인재였다. 그 결과 1570년(선조3)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정여립은 조정에서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의 편에 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수찬이 된 뒤에는 이이를 배신하고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오히려 이이, 성혼, 박순 등을 비판하였다. 정여립이 서인을 비판하자 이번에는 서인이 정여립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신이 삼가 듣건대, 정여립이 경연에서 이이를 공격하고 드디어 박순과 정철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박순과 정철이 자리에 있기가 미안하여 은총을 피해 물러갔다고 하니, 그 말이 사실입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어도 정여립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정여립은 본래 이이의 문하생으로서 몸에 학사(學士)의 명함(名銜)을 띠고 조정에 들어온 것이 모두 이이의 힘이었습니다.『선조실록』18년 5월 28일.
서인은 이이에 대한 정여립의 배반과 그의 성품을 계속해서 비판하였다. 이에 왕도 인정하여 “정여립이 한 일이 처음에는 혹시 떠도는 말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었지만 뒤에 들으니 과연 근거 없는 무고가 아니었으므로 이미 이랬다 저랬다하는 형편없는 자라고 말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정여립은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형세가 불리해져, 결국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정여립은 전라도로 낙향한 뒤에도 그 지역에서 인망이 높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전라도 진안 죽도에 서재를 만들고 활쏘기 모임을 여는 등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기르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선조 20년(1587)에는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후 대동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세력을 끌어 모았다.
<선조실록 18년 5월 28일조 (을유)>
<선조실록 18년 6월 1일조 (을유)>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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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2005.
http://www.culturecontent.com/
저자 /제공처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kocc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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