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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단계('50.10.25~'51.6.23, 약 8개월)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
가. 총 개요
이 장에서는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한 배경을 먼저 알아보고 중공군의 압록강 압록강 도하와 유엔군의 오판과 위험에 대해 기술한다음 새로운 적과의 충돌을 맞이한 유엔군의 최종공세인 추수감사절 공세 속에서 서부전선의 운산의 비극과 온정리-희천 돌출부의 재앙, 초산 철수작전과 청천강 교두보 확보 작전에 대해 기술할 것이다.
동부전선의 장진호 진격전과 혜산진 진격전, 그리고 청진 및 합수.백암의 진격전을 기술하고 후방지역 평정작전으로 북한군의 제2전선부대 형성과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을 기술한다.
중공군의 대공세로 이어지면서 청천강 교두보 붕괴와 평양-함흥으로의 철수작전을 알아보고 통일의 염원을 안고 한만 국경선과 한소국경선에 도달한 국군 과 유엔군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51.1.4일에 다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 주고 37도선인 평텩-삼척선으로 철수한 유엔군은 '51.1월에 위력수색으로부터시작하여 재반격에 돌입하여 '51.2월에 홍천포위 공격(라운드업 작전)을 감행하면서 중공군의 2월공세에 횡성지역에서 국군 제8사단이 녹아버린다. 지평리에서는 미 제2사단 1개 연대(프랑스 대대 배속)가 중공군 1개군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돌파된 제천지역에 들어온 적을 격멸하고, 이어서 절단작전(리퍼작전)으로 다시 '51.3.15일에 수도서을을 탈환한 후 임진강선(캔사스선)으로 진출한다.
하지만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로 '51.4월에는 임진강변에서 영국군이, 사창리에서는 국군제6사단이 무력화되면서 필사적인 방어작전으로 서울외곾선에서 중공군의 남진을 격퇴한다. 그러나 '51.5월에 춘계 2차 공세로 현리지역에서는 국군 제3군단의 제3사, 제9사단이 오미재고개 전투에서 중공군의 성동격서에 무력화되고, 홍천북방에서는 미 제2사단의 분전이 있었지만 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이 무력화 된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이 지난 4월의 사창리 전투에서 당한 쓰라림을 용문산전투에서 중공군 1개 군단을 무력화시킴으로서 서울을 확보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다.
결국 중공군의 춘계 2차공세인 '51.5월 공세를 용문산과 대관령 운두령에서 미 제3사단의 돌파로 전세역전하여 중공군의 더이상 밀어붙이지 못하고 지금의 휴전선으로 밀려가고 '51.6월 말에 전쟁전 상황으로 회귀하여 신캔사스선에서 정체하게 된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미국 국내의 반전사상과 유엔군에 참가한 영국등의 휴전요구로 전선은 교착기를 맞이한다.
나. 작전 경과
1)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배경
가) 모택동.스탈린의 모스크바 밀약
중공은 소련 다음으로 북한의 남침 음모에 기숙히 개입하고 전쟁 개시 후 일본군이나 미군이 한국을 지원할 경우 중공군을 파병하여 북한을 도울 것임을 사전에 약속함을고서 김일성을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 내의한인부대를 북한에 인도하고 전쟁지도에 필요한 조언을 하는 등 북한의 전쟁 준비에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중공의 북한과 가진 남침계획과 관련한 비밀협의는 전쟁 발발 1년 전인 11949년 4~5월에 노동당 중앙위원이며 인민군 정치국장인 김일이 중공을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당시 중공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전개된 국공내전에서 장개석과 국민당 군대를 대만으로 축출하여 승리를 굳혔으나 아직 일부 지역에서는 저항세력에 대한 소탕작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회담보다 앞서 3월 5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김일성-스탈린의 회담에서 김일성이 제안한 무력침공에 의한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해 선제공격 방식이 아니라 "남한의 도발을 되받아치는 반격작전 형식을 빌려 남한을 공격한다'는 "반공격" 남침전쟁계획에 대한 합의를 보고 남침과 관련한 중공의 역할과 조중관계는 모택동과 협의를 거쳐 결정짓기로 한다는 결정에 따라 김일성이 김일을 북경에 파견한 것이다.
당시 모택동은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김-스탈린의 회담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젅쟁은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오래 끌 수도 잇다하면서 북한을 위해서는 지구전은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지구전이 되면 일본이나 미국이 끼어들 수 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당신들 곁에는 바로 소련이 있고, 우리들이 만주에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만약 일본군이 개입한다면 가능한 빨리 우리 군대가 파견되어 일본군을 격퇴할 것이다"라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모택동은 남침 명분의 정당화 수단으로 스탈린의 의도와 같이 남한의 도발에 반격을 가하는 형식을 빌려 남침ㅁ할 것을 조언한다. 또한 이 모든 남침과 관한한 사안은 오직 모스크바와 합의를 본 후에 시작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북한이 요청한 한인사단에 대하여, 모택동은 만주의 목단과 장춘지역에 배치된 2개 사단은 언제든지 북한으로 인도할 준비가 되어 있고, 나머지 1개 사다능ㄴ 중국 남부에서 국민당 군대와 전투 중에 있으므로 빨라야 1개월 후에는 가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중공정권을 수립한(49.10.1일) 후 그해 12월 16일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약 2개월에 걸쳐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수뇌부와 연쇄회담을 가졌다.
이회담은 세계 및 아시아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방안과 쌍방간의 현안문제를 협의한다. 1950년 2월 14일에 "중소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김일성의 무력남침에 의한 한반도 통일방아네 대해서도 진지한 논의를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중소동맹조약에서 양국은 동맹국이공격을 받개 될 경우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즉각적으로 군사 및 기타 웑조를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차관협정에서는 소련이 연리 1% 이율로 중공에게 3억 달러를 제공하고, 이의 대부분을 중공이 소련의 군사장비를 구매하는데 사용하기로 양해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은 소련제 전투기 586대를 주문하였고,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에 모택동은 서신으로 628대의 항공기를 추가 주문한다. 그리고 회담 직후인 '50.2.16일부터 3월5일까지 소련의 혼성 방공사단이 상해. 남경. 서주 등에 전개하여 이 직의 방공을 담당하였다. 이는 중공이 "대만 수복"작전 주비와 군의 현대화를 위하여 지원요청에 역점을 둔 결과다.
이 밖에도 이 회담간 모택동은 제2차세계대전 처리과정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가 댓가로 할양된 만주지역의 철도이익권과 여순항에 주둔한 소련군의 철수를 1952년 말 이전에 철수하기로 합의한다.
"모-스" 회담후 195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이 열렸으며, 여기에서 스탈린은 한반도 무력통일방안으로 김일성이 수정 제의한 선제남침 공격계획에 동의하였다. 이와 함께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만일 중공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김일성이 5월 13일에 박헌영을 대동하고 직접 모택동을 방문하여 "조.중 북경회담"이 개최되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직접 스탈린 동지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하여 주중 소련 대사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고, 이에 대해 스탈린이 북한지도부의 의견과 도일하다고 5월 14일 답신을 보낸다.
이어 모택동은 일본군의 분쟁개입 가능성에 대해 문의하자, 김일성은 일본보다는 미국이 2~3만의 병력을 파견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 것은은 결정적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택동은 미국이 개입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하여 북한을 돕겠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소련은 미국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그와 같은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울 수 있다"고하여 김일성을 고무시켰다.
2) 참전준비와 동북변방군의 편성
모택동과 중공지도부는 그들의 정권수립 전후의시기에 가진 중소, 중조 회담을 통항여 스탈린과 소련 다음으로 북한의 남침전쟁의 계획과정에 깊숙히 개입하고 있었고 , 시기에 대하여도김일성과 회담에서 도의하였음이 밝혀졌다.
물론 이들의 전쟁음모는 북한이 단기간 내에, 즉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승리로 종결한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렇지 못할 경우 파병을 약속한 모택동으로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미리해야 했고, 또한 북한군아 남침 직후 유엔과 미군이 즉각적인 응징 조치에 직면하게 되고, 자신들의에상이 빚나가자 대응조치와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참전준비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중공은 당면하고 잇는 "대만 수복" 등 대네외 안보상 현안들을 신속히 정리하고, 군의 현대화 촉진과 함께 파견할 부대(동북변방군)를 편성하는 한편, 외교적 대응방안을 강구하면서 한반도 전황의 추잉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가) 대만점령의 연기와 남부 국경의 안보 강화
1)) 대만 점령작전의 연기
중공은 본토를 석권한 후 그때까지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확보하고 있던 대만과 금문도. 팽호도. 등 근해도서의 통합을 최우선 목표로 정책을 추진하고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진전을 보지 못하고 한국전젱ㅇ을 맞았다, 전쟁 발발후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대많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자 중공은 자신들이 한국. 대만.인도차이나의 세 방향으로부터 미군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대만은 1894년 중일전쟁이래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제2차세게대전 종전과 더불어 중국으로 반환되었으나 국공내전에서 본토로부터 축출된 국민당 정부가 1949년 5월 이곳으로 철수하여 정치. 군사적 요새를 구축하고 본토 수복 의지를 천명함으로서 대만 해협이 양측간의 전장이 되었다.
중공 지도부는 "대만 해방'을 중국내전의 마지막 전투로 보고 이 전역에서 성공하면 국민당이 완전히 파멸하고 본토에서의 정치적 갈등과 소요도 종결되어 통일 중국을 실현하여 세계_의 중심국가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한다.
반면 대만에 도착한 장개석과 국민다은 곧 자신들의해군으로 하여금 중공의 항구를 봉쇄한다고 선언하고 공군으로서 해안도시 특히 상해의 상공업지대를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해.공군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모택동은 대만작전의 성공에는 중공군이 국민당군을 투항시킬 수 있는 능력을 ㅎ확보하던가 소련으로부터 지원을ㄹ받아 대만해협을 던너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1949년 여름에 이를 위해 소련과 협의를 하여 소련 해.공군의 지원이 도착하기 시작하여 상륙작전의 능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1949년 10~11월 금문도와 주산군도의 뎅부공격을 실시하여 목표는 점령했지만 미국제 함정과 항공기로 무장한 국민당 군의제공권과 재해권을 제압하지 못하여 결국 실패한다. 여기에서 중공군이 전 해방전쟁 기간을 통해 최악으로 기록되는 인명손실을 입어 이의 추역으로 중공의 대만 해협 적전은 본래의 계획 일정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중공지도부는 이번 작전의 실패의 가장 주 원인은 미 제 항공기와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이 제헤권과제공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 보앗다. 그들은 미국의지원이 없었다면 국민당군은 중공군의 공격에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함께 미제 폭격기와 전함을 이용하여 국민당군이 상해와 해안지역을 포격하고 주요 항구를 봉쇄함에 따라 중공지도부는 미국을 주 적을로 확신하게 된다.
여기에 중공은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의 후휴증을 치료하는데 한 5년은 걸릴 것으로 판단하였고, 한편 미 트루만 대통령이 '50.1월 5일에 "대만이 중국의 이부"라는 개념의발언과 그 일주후 "대만과 한국이 미국의 서태평양 방위선 내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국무장관 애치슨의 성명에 고무되어 중공은 미국을 적이며 종이호랑이로 간주하게 된다.
이와 같이 대만 해벙 정책의 수정과 작전의 연기로서 중공은 중앙전력에비를 한만국경으로 이동시켜 한국 전쟁에 투입할 군사력(동북변방군)을 신속히 조직할 수 있었다.
2)) 베트남 접경의 안보 강화
당시 베트맘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곧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한 호지명의 공산군과 일본의 점령이전의 기득권을 주장하여 재진주한 프랑스군 간에 이른바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1950년 1월에 중공은 베트남공화국을 공식 승인하고 대불투쟁을 벌이고 있는 호지명을 지원하는 것이 자신들의 안보보장에 기여하고 국제적 의무라고 주장하며 베트남 지원에 나선다.
당시 동서 냉전구조하의 이러한 국제정세에 편승한 호지명은 1월 말 비밀리에 중국, 2월 초에는 소련을 방문하여 직접 지원 요청을 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직접 소련군의 파견을 꺼려하고 중공에 지원문제를 협의토록하여 모와 주은래가 원조를 약속한다.
모택동의 이런 동의는 1949~1950년에 국민당의 잔존세력들이 중국-베트남 국경지역으로 은신함에 다라 이 지역에 관심이 고조되고, 또한 중공 지도부는 베트남을 아시아에서 그들의 공산화 혁명 모델로 따를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것으로 보고 있었다.
중공의 대 베트남 군사 지원은 1950년 3월부터 시작되엇ㄷ고 중공군사고문단이 대대급까지 배치되고 군사학교도 개설한다. 이어 베트남군은 '50. 9.16~10.12일의 전쟁에서 프랑스 군을 대파하였다. 이로인해 프랑스 군의 방어체계는 완전히 붕괴됙도 반격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중공은 그들의 정권수립으로부터 세계공산화의 역할 분담과 아울러 양국간 문제를 해결한 데 이어 대만점령계힉을 연기하고 베트남에 대한 지원으로 남부국경의 안보마저 강화함으로서 동북방을 제외한 안보상 현안들이 제거됨에 따라 혁명과업의 추진과 한국전쟁의 준비에 국력을 집중할 수 있데 된다.
나) 동북변방군의 편성과 참전준비
중공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곧 동방변방군이란 이름으로 파견할 중공군을 별도로 조직하여 준쟁준비에 들어간다.
중궁이 건국부터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도까지 "대만 수복'과 피폐된 국가경제를 복구하는 "평화건설사업"이 역점이었다. 이에 따라 군도 대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르는 동안 비대해진 군의 인력을 절약하여 산업역군으로 전환시키고 국방비를 줄여 경제부흥에산을로 전환시키기 위해 대복권과 정편조치를 취하게 된다.이에 따라 전군 총 54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축소하며 육.해.공군 및 공안부대의 편제와 정원을 확정하는 대대적인 정편운동을 추진한다.
이와 같이 중공은 1950년도에 국내외적을로 해결해야 할 많은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고 특히 군의 복원과 현대적 조직으로의 개편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과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함에도 모택동과 당 지도부는 김일성과 북경회담 후 곧 중앙기동 에비대를 그들이 동북지방인 만주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한국젅쟁이 발발하자 이들 부대를 동북변방군이란 부대로 편성하고 참전에 대비한 준비를 하였다.
당시에 김일성은 "남한을 공격하면 내부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나 정부를 전복시킬 것이며, 이를 이용해 신속히 남진하여 남해안까지 전개하면 미군의 개입을 피하고 남한을 점령,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잇다'고 하였다. 스탈린도 이를 믿고 승인하였으며, 모탹동은 이에 동의하면서 미군의 개입가능성을 경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인민봉기도 일어나지 않았고, 국군의 저항도 완강하여 최초부터 속전속결은 불가능하였고 도리어 유엔군 특히 미군의 신속한 전재와 참전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의 규모는 확대되고, 장가화될 수밖에 엊ㅄ다는 판단하에 구나위원회를 열어 전략기도예비인 제13병닩을 동북으로 올려 북한을 지원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주앙군사위원회는 이를 기초로 7월 13일에 동북변방의 제4야전군 주력인 제38, 제39, 제40, 제42군을 중심으로 지원부대 등과 함께 동북지구로 이동시켜 '동북변방군"을 조직하게 된다. 제4야전군에는 동북인이 많으며 해방전쟁 시기에 동북지역에서 싸웟고 이 때문ㅇ에 지리와 기후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이밖에 8월 하순에는 상해지역의 제9병단과 제19병단을 각각 진포, 용해의 철도교통 중심지로 전개시켜 중앙예비로 동북변방굱을 지원하도록 한다.
여기에서 중공이 동북변방군 편성 명령을 하달한 7월 13일은 북한군이 금강-소백산맥선까지 진출한 때이며, 동북군구를 간화한 8월 중순은 북한군이 작전주도권을 잡고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펴고 있던 싯점이란걸 고려해 보변 중공의 참전준비가 게획적이고 치밀학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외교적 책략 ; 북한지원과 참전명분 추구
한국의 지원요청을 받은 미국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신속하게 반응하여 북한군 남침이 개시된 지 불과 24~72시간 사잉에 북한의 침략을 응징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원조 제공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에 근거항여 미국은 6월 27일에 한구군에게 미 해.공군을 지원함과 아울러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전개한다고 대통령이 발표하고 이어 6월 30일에는 지상군의 참전을 결정하고 7월 1일에 미 지상군 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하였으며 이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소련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안보리회의 퇴장]
당시 중국의 유엔대표권은 국민당 정부가 보유하여 행사하고 있었다. 중공은 정권수립후인 '49년 11월 15일 유엔에 '중국 국민당 정부 대표단은 중국을 대펴할 수 없으므로 축출되어야 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ㅂ의대표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하여 소련대표가 유엔에안전보장이사횡데 상정하였으나 미국을 비록한 이사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에 소련대표부는 퇴장하여 안보리 회의에 스스로 불참하게 된다.
당시에 소련과 중공의 주장은 국제적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이로인해 그들의 당초 전쟁목표인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남한 점령을 끝낸다는 그들의 목표는 빗나갔고, 중.소의 외교적 책략도 설득력을 잃었다.
이렇게 ㄷ되자, 8월 1일 소련 대표가 복귀하게 되고, 이사회 의장직을 수행하게 되면서 8월 4일자로 한반도에서 적대행위 중지와 외국근의 철수를 주장하는 결의안을 상정하고 중공 대표의 참석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9월 6일 소련의 제안은 안볼기 표결에서 부결됨으로서 좌절된다. 이후 한국젅장은 9.15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수복으로 전세역전되어 이제는 38선 돒파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9월 30일 영국을 비롯한 8개국이 "유엔은 전 한국에 걸쳐 안정상태를 확보하기 위하여 무든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통일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유엔관리하에 총선거를 실시할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유엔 주도하의 "한국통일 결의안" 유엔 총회에 상정한다.
반면 이 무렵 중공은 미 제국주의가 군사적 큰 군사모험, 즉 38도선을 넘을 것을 결심하여 전략적 속전속결로 전조선의 점령을 기도한다고 판단하고 소련과 더불어 외교전략의 초점을 유엔군의 38도섲ㄴ돌파저지 및 지연에 두고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공군이 참전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나선다.
라) 조.중.소의 작전협의 및 전황판단
중공과 북한은 전쟁 발발 당시에 이미 외교관게를 1949년 10월 6일 수립했다. 중공 인민해방군 총참모부는 전쟁 발발 3일 재인 1950년 6월 27일, 미국 대통려의 참전 ㅅ6성명발ㅇ표 후 곧 "군사관찰 소조"의 평양 파견을 게획하여 대표단이 7월 10이ㅏㄹ 평양에 도착 김일성을 만난다.이 당시에 모택동은 이들을 통하여 전황파악에 주력한다.
모택동은 북경을 방문한 북한의 군사사절단장 이상조를 만나 전투상황을 보고받고 대책을 협의하면서 자신들이 판단한 "유엔군이 한반도의 동서 양안 어느 곳에 상륙하여 후방으로 부터 북한군을 공격할 가능성"에 북한이 관심을 기울이도록 갖조하였다. 그는 이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장소로 인천을 지적하며 북한이 우발계획을 준비하도록 제의한다.
이처럼 모택동은 8월 말과 9월 초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의 대표단을 접견하고 그들로부터 전쟁 경과를 설명들으며 상황전개에 협의하였다.
중공의 한국전쟁 상화파악은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더욱 에민해졌다. 상륙 3일 후인 9월 18일에 주은래는 주중 소련대사 로신과 군사고문관 코트브코노프를 초치하여 상황파악에 소련의 도움으 요청하였다. 중공은 북한으로부터 상황파악이나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2일 후인 9월 20일에 모스크바로부터 회답이 북경의 소련대사관에 도착햇다. 북한이 한반도에서 치러지고 있는 전쟁과정에 대해 중국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그러나 이는 전선에서 혼란 때문이니 고의적인 아니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모스크바도 평양 주재 대사로분터 전황에 대해 당편적인 정보만을 뒤늦게 제공받고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소련과 중공은 한국전쟁에 대해서 개전 초기부터 지대한 관신을 가지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3) 조.소의 지원 요청과 파병결정
가) 스탈린의 중공군 파병 요청
중공이 군사적으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동북변방군을 편성항여 전쟁준비를 하는 한편, 외교적으로 게책을 통해 참전명분을 축적하는 동안, 1950년 10월 1일 유엔군사령관의 김일성에 보내는 항북 권유문 발표와 때를 같이하여, 국군의 선두부대가 38선을 돌파하고 유엔군 역시 북진작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대전환점에서 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티코프 대사를 만나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스탈린에게 보낼 구원요청에 관한 조언을 구하였다. 스티코프는 38도선의 신속한 방어조치를 강조하였지만 이미 남침부대 대부분이 포위 격멸되어 자체적인 방어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 북한의 지원요청은 9월 30일 스티코프를 통해 국군이 38선을 돌파하던 10월 1일 모스크바에 타전되었으며 스탈린은 이를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휴양지에서 접수하였다. 여기서 스탈린은 주중 소련대사를 통하여 모택동에게 파병을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스탈린은 전쟁게획 과정에서의모택동과 사전 합의사항에 따르고, 일차적으로 미국가의 직접적 군사적 충돌을 피하면서 김일성을 돕기 위한 방한으로 중공군의 파병을 요청하되, 세계대전으로의 확전 가능성까지 심사숙고하여 의용군 형태를 취하도록 요망하였다.
나) 김일성의 중공군 지원 요청
스탈린이 김일성의 파병 지원 요청을 받고 모택동에게 중공군 지원을 요청한 날인 10월 1일에 김일성은 외상 박헌영을 위시한 그들의 대표단을 북경으로 급파하여 모택동에게도 파병을 간청하였다.
다) 모택동의 파병 결정
모택동은 국제공산주의의 전체 이익을 고려하고, 미국의 세게제패에 반대한다는 입장과 전쟁이 확전되면 비단 북한의 생존 위협에 국한되지 않고 곧바로 중공으로 직결된다는 점, 미국이 경제와 기술면에서 우세하지만 그곳에도 약점이 있기에 싸워서 이길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 이미 공식 요청이 있기 며칠 전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장고 끝에 10월 2일 그 스스로 국가적 대사인 참전을 결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공은 10월 2일에 파병결단을 내렸고, 팽덕회를 지휘관으로, 10월 15일경에 부대를 투입하기로 결전한다.
당시 중공은 10월 3일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를 통하여 미국에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요청한다. 그 내용은 대략 미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전쟁을 확대하고 있으며 중공은 좌시하지 않고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화전을 하기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식이었다. 이는 차후 중공의 참전은 미국과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해서 북진했기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활용되곤했다.
그러나 이미 중공은 참전을 결정해 놓고 군사적을로 북진을 지연하여 그드르이 준비기간을 확보하려 했다고 보는것이 정설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국내적으로 항미원조 운동을 촉진하여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고, 국제적으로 자신드르이 위상을 제고함으로서 영향력 확대에 중점이 있었다.
10월 4일에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원회가 열렸으며 주 의제가 파병 건이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파병과 관련된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여기서 임표와 고강 등 많은 인원이 단독파병에 대해 유보적 의견을 제시하였다.
[임표등, 참전에 유보적 입장 표명 이유]
첫째 : 중공은 수십년간 전쟁으로 경제적 제정적 문제를 안고 있다. 경제회복을 위해 중공은 평화적 회복기간이 필요하다.
돌째; 아직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고 대만과 일부 근해도서가 여전하 국민당 잔존세력에 통제되고 있다. 더욱이 해방구역의 토지개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참전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약화시킨다.
셋째 ; 중국군은 완전히 다른 지형에서 작전하게 되고 , 제공권과 군수지원의 보장이 없는 가운데 전쟁ㅇ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중국군은 미국의 화기와 징비에 많은 손실을 입을 것이다.
[모택동의 "순망치한 호파당위']
하지만 모택동은 이미 파병결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반박은 없이 폐회에 앞서 "당신들의 발언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웃 인민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우리가 수수방관만 할 수가 있느냐, 이는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한다"라고 우회적으로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모택동은 10월 15일까지 조선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라) "항미원조"중공군의 편성과 출병
1)) 동북변방군, "인민지원군"으로 개편
중국은 10월 8일 그동안 출전준비를 해 언 동북지원군을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하고 한반도로의 진입 명령을 하달하였다. 모택동은 같은 날에 스탈린에게 이 사실을 통보함과 아울러 출벼에 따른 소련의 지원을 보장받기 위하여 비밀리에 주은래를 모스크바에 급파한다.
도한 모택동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박일우를 심양으로 파견하여 팽덕회와 고강과 만나 입북에 과련된 작전을 협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지원군사령관에 임명된 팽덕회(당시 66세)는 그날로 임지인 심야으로 이동하여 동북군구 미 ㅊ제13병단의 책임자와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중앙의 결정에 따라 제13병단사령부를 기초로 인민지원군 사령부를 구성하였다.
2)) 인민지원군의 출병준비
10월 12일 북한 내무상 빅일우가 안동으로 건너왔다. 박일우를 통해 상황을 청취한 팽덕회는 중앙군사위원회가 결정한 평양-원산선 이북의 산악징애에 근거지를 장악한다는 전ㄺ대로 최초 배치선을 결정한다. 즉 1개 군은 펴양 동북 100km 덕천 산악ㅈ구로 전진하고 나머지 3개 군과 3개 포병삳간은 희천. 강계지역으로 전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국군과 미군이 위협을 느겨 더 이상 전진을 못하게 만들어, 평양--원산 이북지역을 장악하여 시간을 벌게 하여 차후 작전준비를 행할 수 있도록 하고, 만약 평양-원산선 서측의 미군이 덕천 드의 지역을 향해 북쪽으로 전진해 온다면 주력은 원산 방향에서 오는 국군을 집중하여 섬멸을 노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2~3개 사단 만 섬멸시키게 되면 정세는 크게 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3)) 주은래와 스탈린의 최후 오판
모스크바에 비밀리에 들어건 주은래는 10월 10일, 요양차 소련에 온 임표와 함께 휴양지로 별장에 머물고 있는 스탈린을 방문하여 저녁 19시부터 다음날 05시까지 마라톤 회담을 가졌다.
당시에 스탈린은 소련군을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했단 성명을 발표한 바 있기에 그곳에 병력을 다시 파견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과, 만약 파견한다면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을 의미한다고 강조하고, 대신 중국이 출병하면 충분한 무기와 전쟁물자를 공급해 주고 동시에 공군을 출동시켜 동북지역과 북경, 천진, 상해 등 해안 지역을 방어하고 북한의 압록강 연안에 전개하는 중공군을 엄호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러한 스탈린의 결정은 중공지도자들에게는 일종의 배반으로 비추어졌다. 8개월전 중.소협정상 소련의 약속을 위반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당시에 군사적 대결 상화응로 들어가면 소련은 모든 것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4)) 모택동의 출병결정 재확인
모택동과 중공공산당 지도부는 모스크바로부터 타전된 10월 12일자 주은래.스탈린의 전문을 받고 격노와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우선 팽덕회에게 지원군의 이동 중지 명령을 내렸다. 지난 10월 초 모택동과 지도부는 소련으로부터 충분한 공군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13일 북경의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 참석한 팽덕회는 소련이 공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원군 사령관직을 사임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소련이 전쟁 초기단계에서는 참전하지 않지만 스탈린이 중국군에 많은 장비 공급과 중국 영토의 공중방어를 약속하였다고 강조한다. 결국 찬반 양론 토의를 거쳐 중공의 한국전쟁 참전을 재확인 한다. 모택동은 이와같은 사실을 주은래에게 스탈린에게 통보와 계속적인 설득을 하고 돌아오도록 한다.
5)) 최종 장애의 극복과 중공군 출병
[스탈린의 거듭된 소련공군의 한반도 공군참여 반대]
'50.10월 13일 출병 재확인의 결과는 곧바로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는 주은래에게 통보되고, 주은래는 바로 스탈린에게 모택도의 요망사항에 대해 협조를 구하였다. 스탈린은 중공정부의 참전 결정에 "중국 동지들은 위대하오"라고 감동은 표했지만 결과적으로 공군지원 요청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운용은 할 수 없다고 계속거부하고, 중공 영토의 방호는 책임을 지겠으며, 후에 한국전쟁에 투입하겠다고 하였으나 그 시기는 확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장비와 물자의 보급을 보증하겠다고 확인하였다.
모택동으로서는 "배신"이라는 쓴 열매를 삼킬 수 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전쟁 개입과정에서 심어진 이 씨앗이 후일 싹이 튼 다음 중소 간에 간격이 벌어지는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팽덕회는 심양, 안동 현지지역을 여러 차례 답사한 후 최초 2개 군(군단)과 지원포병을 제1제대로 도파시켜 적의 진출을 저지한 후 제2제대로 2개 군을 도하시킨다는 계획을 바꾸어 4개군을ㄹ 동시에 압록강 남쪽으로 도하시키기로 하고 모택동의 동의를 구하여 12개 사단 26만 명이 동시에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다.
[모택동의 한국군 퇴초 타격 지시]
모택동은 전장에서 주도권을 획득하기를 희망하고, 한국군을 재물로 1~2, 혹은 2~3개 사단을ㄹ 완전히 격파하면 전세가 호전될 것이라고 하여 최초 전투를 한국군을 대상으로 삼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10월 19일을 기해 압록강을 건너도록 명령하였다. 동시에 산동반도에 위치한 전략에비인 제9병단(제20, 제26, 제27군)도 철로를 이용하여 북동지역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10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잉 평양을 탈취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심양으로 복귀 중인 팽덕회에게 전문으로 선발대를 17일 중으로 출발시키고 23일까지 덕천에 도착하여 25일까지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라 지시한다.
팽덕회가 심양에 도착했을 때는 그 곳에 북한의 박헌영이 와 있었으며 그는 중공의 지원이 가능한 빨리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김일성이 팽덕회를 빨리 만나길 원한다고 전하였다.
[중공군 제42군 선발대 1개 연대가 10월 16일 밤에 압록강을 건넜다]
팽덕회는 10월 16일에 안동에서 사단장급 회의를 주재하고 출병배경을 설명한 다음 가능한 빨리 한국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날 밤에 제42군(군단) 1개 연대가 선발대로 압록강 도하하여 입국하였다.
그러나 돌발 변소가 생겼다. 17일 중요 지휘관들이 항공지원과 대공화기 부재, 그리고 땅이 얼어 겨울철 방어진지 구축이 어려운 점을 ㅈ들어 겨울보다는 내년 봄에 출병하자는 것이었다.
[모의 직접 명령 : 10월 19일 저녁에 압록강 도하, 20일 05:00시에 완전한 엄페상태로 돌입하라]
이에 모택동은 18일 모스크방에서 주은래가 돌아올 때까지 명령을 유보하고, 팽덕회와 고강을 북경으로 호출하여 주은래로부터는 스탈린과 회담내용을, 팽덕회로부터는 일선 지휘관들의 건의 사항을 직접 보고 받았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조선파병 결정ㅇㄹ 변경시켜서는 안된다며 압록강 도하 마감시한을 10월 19일 저녁으로 확정하고 10월 20일 04:00시에 도하를 중단하고 05:00시에는 완전한 엄폐상태로 들어가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모택동은 이와 아울러 중공군 이동상황의 노출을 방지하도록 하고, 초기단게에서는 중공군이 북한인민군의 복장을 착용하도록 하고 출발전에 병사들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편지도 하지 못하게 엄격한 보안조치를 취하였다.
마침내 10월 19일 날이 어두어지자 4개군이 도하에 이어 추가로 제13병단 제50군과 제66군이 10월 26일에 압록강을 도하함으로서 10월 말까지 중군군 6개군 18개 사단이 한반도로 진입하였다.
모택동은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후, 10월 1일 소련과 북한으로부터 공식 출병지원을 받고 다음날 10월 2일 "순망치한.호파당위"라는 명분을 내세워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참전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은 10월 8일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하고 10워 15일 압록강 도하를 목표로 출병준비를 하게 되며 이후에 소련의 공군 지원확보 차질로 두 차례나 출병을 유보하여 우여곡절 긑에 , 마침내 10월 16일 선발대 투입ㅇ에 이어 10월 19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던 날, 본대가 압록강을 도하함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4)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
1950년 10월 중순의 전황은 38도선을 돌파한 국군과 유에ㅐㄴ군이 작전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미 제8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청천강 선에 도달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이 원산-함흥을탈환하고 장진호, 부전호, 성진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이 원산 및 이원 일대로 상륙준비를 하고 있어 유엔군은 11월 하순까지는 한국전쟁을 승리로 종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반면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의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지휘체게가 무너져 와해되 ㄴ가운데 도주하여 한만국경선 남쪽 강계부근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이 무렵 중공은 '한국전쟁 참전"리라는 결정을 내리고 보대의 도하에 앞서 10워 ㄹ12~16일 사이에 정찰대와 선발대를 먼저 도하시켜 주력부대의 도하를 엄호하도록 하고 평양이 피탈되던 10월 19일 저녁부터 안동에서 신의주, 장전하구에서 삭주, 그리고 집안에서 만포진으로 통하는 3개의 통로를 사용하여 압록강을 도하한다.
가) 중공군 압록강 도하
중공군은 도하를 은폐하기 위해 철저한 위장과 무선사용 통제로 보안을 유지하였다. 지원군이란 미명하에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침입한 중공군은 제13병단 예하 제38, 제39, 제40, 제42군의 4개군 12개 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포병 제1, 제2, 제8사단, 그리고 고사포 연대 , 1개 공병연대, 기타 지원부대로 병력은 총 26만 명에 이르렀다.
안동에서 도강한 제40군은 구장, 덕천, 영원으로, 안동과 장전하구에서 도강한 제39군은 구성, 태천으로, 집안에서 도강한 제42군은 사창리. 오롤리로, 그리고 제42군은 후속하여 도하한 제38군이 강계를 목표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이동간에 유엔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차량은 라이트를 켜지 않았고, 병력은 탄약과 식량을 짊어지고 행궁함으로서 전진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리고 철수 간에 간혹 후퇴하는 북한군과 교차된다든지 유엔항공기의 포격을 받기라도 하면 더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팽덕회는 20일 신의주에서 대유동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지원군사령부를 설치한다. 대유동은 운산-벽동 간 도로의 중간지점으로 본래 금광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김일성을 만나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사실을 알리고 북한군이 지연전을 펼쳐 줄 것을 요구하였다.
나) 중공군의 전략과 전개
팽덕회는 진지전(지역방어)과 운동전(기동방어)의 배합작전을 통한 역습, 기습, 매복으로 적의 유생역량(병력0을 소멸시킨다는 적전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의거 중공군은 방어에 유리하고 유엔군이 공격에 불리한 구성, 태첝, 구장, 덕천, 영원, 오로리를 연하는 산악지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압록강을 도하할 때 평양에서 북진을 개시한 유엔군의 진출속도가 그들의 에상보다 훨씬 빨랐다. 이때 20일, 유엔군은 서부전선에서는 그들의 예상집결지에서 90~130km 떨어져 있었지만 동부전선의 국군은 이미 그들 예상집결지인 오로리를 진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예상집결지인 구장, 덕천, 영원, 오로리에 도착하기란 불가능하였다.
에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한 팽덕회는 국군과 유엔군이 그들의 참전 사실을 모르고 분산된 채 전진하여 국군 3개 사단의 전선이 노출되었고, 또 미 제8군과 제10군단 사이에 배치공간이 생긴 취약점을 간파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그들은 기습공격을로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모택동은 21일 예상방어지역을 확보하여 일정기간 방어 후 공세로 전환한다는 작전방침을 변경하여 진격해 오는 국군과 유엔군을 기동하면서 각개격파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팽덕회는 3개 군을 서부전선에 집중시켜 국군 3개 사단을 섬멸시킬 것을 결심하고 부대배치를 일부 조정하였다. 제39군은 구성. 태천으로, 제38군은 희천으로, 제40군은 덕천.영원으로 진출하여 조우하는 국군을 섬멸토록 하였다. 그리고 제42군의 1개 사단을 장진호로 진출시켜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저지하도록 하고 주력은 유엔군의 전선을 양단할 수 있는 소백산(2184m)을 점령한 후 의명 맹산 이남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모택동은 국군과 유엔군을 격멸하기 용이한 박천, 군우리 및 그 이북지역에 도착하기전에 중공군의 노출로 인해 진격을 멈추지않도록 하기 위해 중공군의 진출을 정주-박천-군우리 선 북쪽 20km이내로 제한시켰다.
중공군 최초 배치('50.10.19~10.24)
집안 만포
42군
강계 장진
초산 38군
벽동 부전호
구장
유담리 장진호 42-126사
장전하구 삭주 40군 전선사령부 38군 42-125사 부전령
대유동 회목동 소백산 42-124사
40군 황초령 수도-18연
안동 39군 북진 온정리 희천
신의주 39군 6-2연 사창리 3-26연
구성 운산 국1사 묘향산
태천 구장동 영원 국8사 함흥
청천강 덕천
정주 박천 군우리 맹산
신안주 북창
미24사 (영27여)
이 무렵(24일), 국군 제1사단의 선두는 영변, 용산동에(운산), 제6사단은 초산. 온정리로, 제8사단은 영원 및 덕천을 경유 희천. 강계방햐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근거하여 팽덕회는 국군 3개 사단을 섬멸한 후 다시 미군과 영국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다) 유엔군의 오판과 위험
'50. 10월 중순에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은 시기를 놓쳣으므로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한만국경선인 압록강-두만강까지는 시간문제이며 북한군의 항복을 기다리는 것으로 낙관했다. 따라서 추수감사절(11월 23일)까지는 전쟁이 종료될 것으로 판단한다.
['50.10.15일 웨이크도에서 트루먼과 맥아더 회담록]
트루먼 : 한국전쟁의 전망은?"
맥아더 : 추수감사절까지는 종결될 것으로 믿는다. 크리스마스까지 미 제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트루먼 :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맥아더 :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들이 6~7월에 개입했다면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현상황에서는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주에 3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5~6만이 압록가을 건널 수 있다. 그러나 막강한 공군력으로 최대의 살육전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는 10월 24일 미군부대의 전진 제한선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국경선에서는 한국군을 제외ㅐ한 부대는 철수해야 하고 한국군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맥아더의 정부 부재와 성급한 오판으로 하달된 조치로 미군과 국군은 경주대회하듯이 분산 전진하는 취약점이 노출되었으며 5~6만명이 아닌 20여 만명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5)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
웨이크도의 "트-맥 회담"의 결과로 전쟁에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한국으로 반입되던 탄약들이 일본 보급창으로 전환되고 6척의 선박을 이용 하외이나 미 본토로 돌려보내도록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유엔군은 크리스마스는 본국에서란 구호아래 마지막 국경선으로 진격을 10월 24일 개시한다. 그라나 그 장도에는 이미 중공군이 들어와 길목을 조이고 있었다.
가) 운산의 비극
미 제1군단 우전방인 국군 제1사단은 신임사단장 최영희 준장의 지휘하에 10월 23-24일 안주 일대에서 청천강을 도하하여 25일 운산에 도착하였다. 좌인접 영 제27여단도 박천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그리고 사단의 우인접 국군 제2군단의 제6사단이 희천을 경유 벽동. 초산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은 10월 25일 청산장시를 경유, 수풍호 진출을 목적으로 군단에서 배속된 전차를 앞세우고 2개 연대 병진으로 공세를 개시한다. 하지만 공격을 개시한 사단이 운산을 빠져 나가기도 전인 11:00시경에 15연대를 지원하던 선두인 미 전차대가 삼탄천에 도착하여 교량을 건너려다 중공군의 집중포격을 받는다. 38선을 돌파 이후에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 잠시 후에 좌전방 제12연대 공격도 저지된다.
[한국전쟁에서 첫번째 중공군 포로 생포 : ';50. 10.25. 11:30분, 미 제8군은 중공 거주 한인 의용군으로 의심하다]
제2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다시 복귀한 백선엽 소자이 포로를 심문한 결과 중국 광동성 출신으로, 이미 운산 북방에 10,000명, 희천 부근에 10,000명이 들어왔다고 진술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제8군 지휘소는 중공 거주 한인의 의용군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 들어갔다. 연료나 탄약이 바닥나 27일 11:00시ㅐ에 수송기 10대로 공중투하하여 보급한다. 그 이후에도 미 제8군 전방사령부(평양 위치)는 3명의 포로를 더 심문하였으며 의심은 가나 믿으려 하지않고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하고, 대신 평양에 머물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을 투입해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수풍호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잠시 28~29일 소강상태를 보이던 중공군은, 미 제1기병사단 선두와 제8기병연대가 운산하여 국군 제1-12연대와 진지교대를 실시하자 공격을 개시한다.
[대형 산불을 내어 항공관측 차장하고 공격 진행, 38선 돌파후 처음으로 방어 명령이 내려졌다, 11월 1일 20:00시]
중공군의 기습에 결국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 1사단은 등을 맞댄 모양으로 운산을 중심으로 삼탄천-조양동 동측은 국군 제1-15연대, 동남측은 미 제8기병연대, 그리고 국군 제1-12연대는 철수하여 입석에 집결한다.
상황이 급변하는 가운데 미 제1군단장이 우인접 국군 제2군단의 철수상황을 확인하고 돌아와 긴급히 청천강교도부를 확보하도록 현 전선에서 50~80km를 후방으로 철수시켜 청천강 북쪽의 박천-용산동 영변-운흥리 선으로 철수하도록 한다.
그러나 철수 엄호를 받은 국군 제15연대가 미 제8기병연대가 철수도 하기전에 중공군의 공격으로 와해되어 무질서한 분산철수로 인해 제8기병은 도로상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버렸다. 결국 제8기병을 구출하기 위해 제5기병이 11월 2일 새벽에 투입되기는 했으나 이 마저도 중공군의 공격으로 공격이 돈죄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 제8기병의 제3대대는 주력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실제로 530명), 국군 제1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11월 3일청천강을 도하하여 안주에서 부대정비에 들어간다..
운산지구 전투('50.10.25.11.2)
중40군 중116사
삼
탄
천 263고지
199고지
국15-2대
국15-3대 국15-1대
중115사 조양동 구
미 제8기병 룡
강
운산
남
면
천
상초동
오봉산 693 중117사
하초동
입석 국1-12연
미1-5기병 11.1.24:00
나) 온정리-희천의 재앙
미 제1군단이 청천강을 도하할 무렵인 23일 국군 제2군단 우전방 좌전방 제6-7연대는 희천에, 후속한 제2연대는 군우리 북쪽의 자작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우전방 제8사단은 제16연대가 개천에, 제10연대는 맹산에서 영원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국군 제2군단은 추수감사절 총공세에 따라 24일 공격을 개시하여 좌전방 제6사단은 초산과 벽동을, 우전방 제8사단은 만포진과 중강진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최초 압록강변 초산 점령 : '50.10.26, 국군 제6-7연대]
공격을 개시한 제6-7연대는 첫날인 24일 극성령을 넘어 회목동에 진출하고 25이레 고장, 26일에 최종목표인 초산을 점령하여 아군 부대중 국경선인 압록강에 제1착으로 도착한다.
[제2연대, 온정리에서 제3대대 무력화 : 750명 중에 400명 만 철수, 모든 화기 유기]
그러나 제2연대는 벽동을 향해 출발하던 중에 중공군이 먼저 서쪽 감제고지인 도리산(841)과 동쪽의 감제고지인 동림산(1165)을 점령하고 매복진지를 구축하여 선두인 제3대대는 완전히 그믈망에 들어간 격이 되어 25일 대량피해를 입고 와해된다. 이날 생포된 중공군 포로들이 10,000여 명이 진출해 있다고 진술하였다. 중공군 제40군이 26일 03:30분을 기해 인해전술로 성동격서 방식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국군 제6-2연대는 교전개시 30분만에 혼이 나가버렸다.
이에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26일 아침 희천에 대기중인 제19연대(-)를 온정링에 급파하고 제7연대의 철수를 군단에 건의한다. 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이에 따라 우인접 제8사단의 진격작전도 전면 중지시키고 , 27일에는 희천에 있는 제8-10연대를 온정리로 출동시켜 제2연대를 구출하라 명령했다.
하지만 이 무렵 제2연대는 각개 분산하여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시도해 포로가 되거나 전사 또는 부상당한 인원이 무려 1,000여 명에 달하였다. 태평동에서 26-27일 병력을 집결시킨 결과 제1대대를 주축으로 약 400여 명에 불과했다.
[구출작전으로 출동한 제19연(-), 제10연대도 무력화]
여기에 제2연대를 구출하러 동측에서 진출중이던 제19연대(-)와 제10연대도 동측방 산악지대에 매복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29일까지 양 연대의 전차량과 3개 포대의 야포까지 잃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미 제8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 군 예비대를 투입하고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특히 초산으로 진출한 제6-7연대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온정리-초산전투
선도장 10.26 14:15
초산 제7-1대
고장 국6-7연
개천으로 10.29일밤
풍장
주원계곡 중125사
회목동
중40군 경성령 중38군
동림산 1165 제6-19연(-) 희천
제8-10연(-)
도리산 841 국6-2연
온정리
태평동
중39군 국1사=국6사
개천
다 ) 초산 철수작전 : 제7연대 3,552명중 875명 만이 살아남다.
[ 국군의 선봉부대로 나선 제6-7연대는 고장을 경유 26일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였다. 첨병소대가 26일 14:15분에 태극기를 강변에 꽂았다]
낙동강전선 신령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41일 만이다. 그러나 만 하루도 안된 27일 정오 무렵 회목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여기에 제2연대가 온정리에서 포위되어 보급선이 막혀버려 28일에는 공중투하로 휘발유 45드럼과 각종 탄약을 지원받았다.
[모든 장비를 파과 또는 소각하고 개인장비만 휴대하고 각자 최선의 수단으로 회목동으로 집결하라]
제7연대는 초산으로 진출했던 제1대대가 고장으로 철수한 29일 07:00시에 차량행군으로 이동을 개시한다. 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측방경계를 강화하며 철수 중에 선두인 제2대대가 주원계곡에서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차량을 버리고 북쪽으로 뛰었으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김종오 사단장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 각자 개인화기만 휴대하고 회목동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의 포위망에 든 제7연대는 진퇴유곡에 빠져들었고 중공군은 30일 자정이 되자 다시 지축을 흔드는 괴성으로 심야에 혈정을 했으나 중과부족이었다.
[임부택 연대장 명령, "연대 전 장병은 적진을 각개돌파하여 구장동으로 집결하라" "연대 3,552명중 875명만 탈출]
분산 철수괴정에 험준한 산악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배고픔을 극복하고 묘향산을 넘고 청천강 남쪽으로 11월 6일 개천으로 집결한 병력은 3,552명 중에 875명에 불과 했다. 대대장 1명을 포함하여 연대 고문관 등 많은 장병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라) 청천강 교두보 작전(11.3~11.6)
청천강 교두보 전투(11.3-11.6)
태천 온정리 희천
구장동
청
대 용산동 영변 중38-113사
천불산 고사동 천
령 중40-120사 구 국8사 봉천리
풍동 원리 998 덕천
강 중39-116사 천등산 룡 강
미19-1대 미 1군단=국2군단
반송촌 강 미 7기병 비호산 760 국7-5연
박천 검각산 미19-2대 연당 구운리 국7-3연 신림
옥녀봉 영27여 미19-3대 미5연
봉명리
추도리 연풍저수지 용현리 국7-8연
맹중리 영27여
안주 국1사
신안주 미24사
미 1기병사 순천 순천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는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좌절ㄷ되고 오히려 국군 제2군단의 전선이 붕괴되었으며, 미 제1군단도 운산지역에서 전황이 악화되어 11월 2일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의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청천강 교두보를 학보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에서는 미 제24사단과 영연방 제27여단을 철수시켜 청천강 북안에 교두보 진지를 편성하고, 군우리에서는 국군 제7사단과 미 제24사단 예하 미 제5연대 전투단으로 동측방을 방호하도록 한다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이 운산지역에서 자건중이고, 미 제24사단 예하 제21연대는 정거동에서 철수항여 안주에서 부대정비 중이었다. 또 구성에서 철수한 미 제5전투단은 국군 제7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개천으로 이동하고 있어 가용병력은 영연방 제27여단과 미 제24-19연대 병력만으로 박천지역과 반송촌 지역에 교두보 진지를 편성한다. 그동안에 미 제1기병(-)과 국군 제1사는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하여 안주와 신안주에, 미 제7기병은 개천 연당리에서 철수부대를 엄호하였다.
한편 군우리 우측을 맡고 있는 국군 제2군단은 온정리에서 실패한 국군 제6사단과 제8-10연대가 재편 중에 들어가고 제7사단은 비호산 일대에서 군단 동측방을 방호하고 있엇다. 군단의 가용병력은 제8사단 제16, 제21연대 뿐이었으며 군단장은 이들 부대를 원리 서측의 고사동-풍동 선에 배치하였다,
[비호산 전투 : 국군 제7사단이 중공군과 2차례에 걸친 혈전에서 거둔 최초의 전투]
당시 국군 제7사단은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와 미 제1기병사가 운산 일대에서 전투 중일때, 군단 에비로서 영변일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 제2군단의 상황이 악화되자 10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되어 군우리로 이동하였다.
당시 국군 제2군단은 국군 제6사단의 제2연대는 온정리에서, 제7연대는 초산에서, 제19연대는 국군 제8사단의 제10연대와 제2연대를 증원 중에 실패하여 제8사단 제16연대와 제21연대로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군단은 6개 연대중 4개 연대가 분산 철수 중이었다.
이에 제2군단장은 제7사단에 조속히 구장동-덕천 간의 저지진지를 점령하여 군단의 동측방으로 기동하는 중공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그러나 11월 1일 중공군이 먼저 공격을 하여 제3연대는 구장동 북쪽의 백령천을, 제8연대는 용문산(1190)을, 좌전방 제5연대는 덕천을 목표로 3개 연대 병진공격을 실시한다. 연대들이 이 목표들을 점령하여 저지진지를 구축할 무렵 중공군이 기습하여 결국 제3연대는 영변으로, 제8연대는 원리로 철수하고 제5연대는 알링령 부근 월봉산을 점령한다.
제2군단장은 제3연대를 다시 비호산 일대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11월 2일 제3연대는 비호산 일대에, 우전방 제5연대는 비호산 동쪽 760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중공군이 11월 3일 03:00시를 기해 제38군이 1개 사단규모로 제3연대와 우측의 제5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3차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하고 제8연대에 인게한다. 중공군은 다시 11월 5일에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사단은 전 연대를 동원하여 비호산을 확보하였다. 이후 중공군 제38군은 섯히 물러나고 제39군 , 제40군도 비호산 전투를 고비로 공격을 중지하고 자취를 감춘다.
[교두보선 전투]
교두보선으로 이동한 국군과 유엔군이 신진지를 강화하는 동안 중공군 제38군이 3일 비호산을 방어중인 제7사단을 공격하였고, 4일에는 중공군 제40군이 교두보상의 미 제24사단 제19연대와 영 제27여단을 공격하였다.
미 제19-1대대는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알지 못하고 싸워보지도 못하고 중장비와 대대 전차량을 유기한 채 청천강 이남으로 무질서한 철수를 강요받았다. 이에 사단장 처치 소장은 부사단장 데비드슨 준장에게 제21연대를 사용하여 교두보 진지를 회복토록 명령하였고5일 아침에 제1대대가 빼았겼던 진지를 회복하였다. 중공군은 574여 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5이 ㄹ새벽에 영 제27여단이 있는 박천의 미들섹스부대가 돌파되었다. 이에 여단장 코드 준장은 군단에 건의하여 철수를 승인받아 우군 전폭기들의 지원하에 청천강 북아능로 철수하게 된다.
11월 6일부터 청천강 연안의 전 전선이 소강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항공정찰 결과 중공군 부대들이 전면적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7-8일에 미 제24사단은 피탈ㄷ된 교두보 진지를 공격하여 모두 회복하게 되고 12일 동안에 걸친 중공군 제1차 작전은 종결된다.
[11월 6일 , 맥아더 원수 압록강 교량 폭파지시, 8일 폭격기 79대 출격하다]
맥아더 원수는 바로 이날(11월 6일) 미 합참으로부터 부대의 안전을 위하여 압록강 교량을 폭파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아 제1차로 11월 8일 79대의 B-29전폭기를 출격시켜 폭파작전을 전개하였다.
6) 동부전선의 불안한 전진
동부전선 진출전
백두산 무산 무산 옹기
중강진 청진
관모봉 수도사
백암
신갈파진 혜산진 국3-23연 어랑천
삼수
합수 만탑산 수도사
미7-32연 미7-17연 국3-22연
갑산
옹이강 대신리 길주
강계 2481
풍산 임명동
미7-17연 성진 수도사(-1)
부전호 미7-31연
장진호 수상리 국수도-18연
유담리
하갈우리 미7사 이원
소백산 북청
미7해연
사창리 국3-26연 수동
함흥
원산
낭림산맥 서쪽의 서부전선에서는 미 제8군이 중공군 제1차공세(10월 공세)로 고전을 치르고 있었다. 반면 국군 제1군단이 맡고 있는 산맥 동쪽의 동부전선에서는 적정이 경미하였다. 이때 국군 제3사단은 미 제10군다늬 우너산상륙 지원으 ㄹ위해 원산, 흥남, 함흥 일대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고, 수도사단은 24일 내려진 총공세 명령에 따라 한만국경선으로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선에 투입될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은 해상에 서 북한군이 부설한 기뢰 제거작업의 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6일 상륙이 임박해지자 ,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백두산에서 성진에 이르는 마천령산맥을 중심으로 전선을 조정하여 산맥 서쪽은 미 제10군단이 동쪽은 국군 제1군단이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진격은 장진호, 부전호 일대에 대거 투입된 중공군이 미 제10군단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 장진호 진격전
미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제7해병연대로, 함흥에서 장진호 계곡에서 국군 제3-26연대와 교대하여 장진호로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국군 제1해병연대는 원산 일대와 군단의 서측방을 경계하도록 임무가 부여되었다.
[미 해병의 북한지역 첫 전투, '50. 11. 2일 함흥 북방 마전리-수동리 지역]
미 제1해병사단은 10월 26일 09:00시에 원산에 상륙을 시작하여 28일에 완료하였다. 장진호로 진격을 명령받은 제7연대장 리젠버그 대령은 11월 1일에 함흥에서 차량으로 출발하여, 전날 중공군 제124사단 제370연대의 기습을 받고 수동에서 마전리로 철수하여 방어중인 국군 제3-26연대와 교대하여 첫 전투를 수동을 확보하기 위하여 11월 2일 개시하여 마을 입구의 연대봉(698)고지 에서 공방전을 벌인 끝에 4일 수동을 경유 진흥리로 진출한다
[중공군 제372연대가 반신불수가 되어 도망가 버린 황초령 도로 감제고지 750고지]
당시 중공군은 수동지역에서 철수하면서 황초령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담제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에 미 제7연대장은 이 고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미 해병이 진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제3대대와 가용한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5~6일까지 공격하였다. 7일 아침에 정찰대를 750고지에 올려 본내니 수 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남겨두고 도주해버렸다.
제7연대장은 도로정찰대를 투입하여 진흥리-고토리간 도로와 산악을 정찰하도록 하였으나 읭외ㅐ로 적저이 미약하여 연대는 접적없이 11월 10일에 고토리를 무혈입성하였다.
[주간 영하 8도, 야간 영하 26도의 혹한이 해병대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다]
[사단장과 연대장의 냉철한 판단, 보급로 확보와 돌 경계, 하갈우리에 비행장 등 작전 기지건설]
진출속도가 느리다는 질책을 받고 있는 제7연대자은 12일 고토리를 출발하여 하갈우리로 전진르 시작했지만 폭설과 도로상태가 불량하여 14일 13:00시가 되어서야 하갈우리에 도착한다. 이때 사단장과 연대장은 군단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측방의 노출과 후방경계가 불안한 가운데 진출은 큰 위험을 자초한다고 판단하고,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진흥리 고토리간 보급로 확보와, 하갈우리에 동게작전을 위한 작전기지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비행장 건설에 들어갔다. 그리고 제5연대가 미 제3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게하고 진흥리-고토리 간을 경계하고, 제1연대도 지경리 일대로 집결하게 된다.ㅣ
사단은 이러한 일연의 조치들이 마무리되자 한만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11월 23일 08:00시에 제7연대가 유담리, 제5연대는 유담리 북쪽의 매물리를 목표로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으나, 군단의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어, 사단의 임무는 한만국경선이 아니라 27일 군단 주고으로 유담리에서 60KM 떨어진 무평리를 공격하여 미 제8군을 지원하게 된다.
나) 혜산진 진격전
미 제7사단도 원상 앞바다의 기뢰 소해작업이 지연되어 부산 외항에서 10일 동안 대기하다가 27일 이동하여 미 해병사단보다 3일 늦은 29일 적의 저항이 없는 이원에 상륙하였다. 미 제7사단장 바 소장은 미 제17연대는 북청-풍산-혜산진으로, 제31연대는 북청에서 함흥-오노리-신흥 축선을 따라 부전호-신갈파진으로 진격하고, 제32연대는 후방경계를 하도록 하였다.
미 제17연대는 10월 30일 후치령(1335)을 넘어 풍산에 도착하였다. 이때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가 풍산 북쪽에서 적과 교전 중에 있었ㄷ다. 잉에 합동작전으로 적을 물리치고 제1연대는 미 제17연대에 지역을 인계하고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성진으로 갔다.
당시 이원항은 방파제가 없어서 파도가 심하여 제31연대는 11월 3일에야 상륙하여 이원-풍산도로를 거쳐 부전화 방면으로 이동하여 수도사단 제18연대와 교대하고, 제18연대는 성진으로 이동한다. 당시 미 제7사단은 이원항의 구조적 문제로 보급품과 차량 등의 양륙이지연되어 4일 공중보급으로 박격포탄과 탄약을 지원받았다.
당시 미 제7사단은 산악지역의 협곡이 많고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진출 속독가 느렸다. 11월 8일 백산지역을 통과하던 제31연대가 포로를 잡아 심문결과 중공군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지역도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하는 가운데 12일 풍산을 방문한 제10군단장은 계속 북진을 명령하였다.
[미 제7사 17연대 11월 21일 혜산진을 점령하다]
제17연대는 혜산진 진출을 위해 매덕령(1546)를 넘어 웅이강 도섭장에서 드럼통을 연결하는 임시 도보교를 이용 도하하는 등 15일 도하를 완료하여 갑산진출을 준비하게 된다. 적이 상류의 댐을 개방하여 부상자와 익사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19일에 보전포 협동작전으로 갑산을 점령하고 21일 혜산진을 점령하게 된다
이어서 예비인 제32연대가 먼저 갑산에 도착하여, 사단장은 삼수를 경유하여 신갈파진을 점령하라 명령하여, 이에 22일 오후에 신갈파진을 점령하고 제32연대 정찰대와 제17연대 정찰대가 연결됨으로서 압록강 진출 작전은 일단락 되었다.
다) 청진 진격전
서부전선 미 제8군이 추수감사절 공세를 시작할 무렵 동부전선 국군 제1군단의 주공부대인 수도사단의 제18연대는 부전호를, 제1연대는 풍산을 , 제기갑연대는 북청-단천-성진으로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11월 초 미 제7사단에게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동해안 축선을 따라 적을 추격하게 된다. 사단의 선두인 제1기갑연대는 10월 30일 성진을 점령하고 길주 공격을 목전에 두었다. 이때 북한군 제41사단 및 제507여단 등이 길주, 명천, 어랑천 일대에서 축차적인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따라서 송요찬 사단장은 풍산에서 제1연대가 도착하자, 제1기갑연대는 주공으로 성진-길주 도로를 따라 정면에서, 제1연대는 조공으로 동해안 도로를 따라 와현동을 우회하여 적 후바응ㄹ 공격할 수 있도록 기동하였다. 그리고 부전호 지역을 인계하고 돌아오는 제18연대가 제1연대를 초월하여 봉강 및 어랑천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7일 제1연대가 명천을 점령하자 열차 편으로 제18연대가 명천에 도착하였다.
[어랑천 공격에 3개 연대 투입 공격하는 수도사단]
그러나 적이 전차 등으로 증강되어 있어 어랑천 진출을 난항에 부짖치자, 제1군단장은 군단 후방을 엄호 주인 제3사단을 합수지역에 투입하고 이 지역의 제1기갑연대를 어랑천 공격에 투입하여 3개 연대로 공격하기로 한다. 어랑천 공격에서 철수한 수도사단은 다시 1주일만인 19일 공격을 개시하여 적은 청진방향으로 철수헤게 된다. 이병형 소령이 지휘하는 제18연대 제1대대가 25일 청진으로 진출하게된다.
라) 합수. 백암 진격전
국군 제3사단(이종찬 대령)은 미 제1해병사단의 원산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원산. 함흥일대에서 20여일 도안 인민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진행하였다. 미 제1해병에게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11월 5일에 흥원, 신포, 북청으로 이동하였다.
군단의 주력인 수도사단이 길주로 진격하자, 제3사단은 13일 성진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수도사단이 어랑천 공격에서 돈좌되자 군단장은 제3사단으로 합수 공격을 명하여, 제3사단은 제22연대로 길주-합수로, 제23연대는 성진-임명동-합수로 공격하게 되어 한만국경선 진출작전에 참가하였다. 당시 제26연대는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11월 9일)되어 잔진호를 공격중인 제7연대의 좌측방을 엄호하였다.
당시 합수에는 수도사단의 공격을 받고 철수한 적 1,000여 명이 험준한 준령을 이용항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 북쪽 백암에는 약 4,000여 명이 집결중이었다.
제3사단장(이종찬 대령)은 21일 연대의 전방 배치가 완료되자 합수를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23일 공군의 지원을 받아가며 합수를 점령하고 25일에는 백암을 무혈 입성하였다.
7) 후방지역 평정작전(공비토벌 작전)
"인민군의 제2전선 형성, '50. 10월 14일부터 행동개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탈환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38도선 북쪽으로 철수하지 못학고 남한지역에서 지휘체계가 마비된 채 산악지역에 잠적하거나 태백산맥을 따라 부분적으로 월북을 꾀하였다.
패잔병들은 철의 삼각지대로 일컬어지는 평강, 철원, 김화지역에 비교적 많은 병력이 집결하게 된다. 이에 인민군 사령부는 이들 패잔병 1만여 명을 수습하여 우선 3개 사단으로 재편성하여 인민군 제2군단에 배속하고 이 군단으로 하여금 비정규전을 전개하게 하였다.
북한 인민군이 제2전선을ㄹ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패잔병의 상당수가 38도선 이북에 잔류하고 있었고, 이에 이들은 북한주민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곳 지형에 익숙하다는 유리한 점도 있었다. 제2전선 부대로 재편성된 북한군 제2군단은 주로 강원도, 황해도 일대에서 10월 14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역주민과 유대를 강화함은 물론 종래의 당조직과 정권기관, 근로단체들을 복구, 정비하여 후방지역 작전을 위한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고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 활용하였다. 이들은 지방 당조직의 지도아래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협조된 작전을 실시한다.
인민군 제2군단은 이러한 방침에 다라 철의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중부산악지대에 주요 거점을 확보한 후 원산-평양 및 원산-철원 간의 교통로를 완전차단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측후방을 위협하여 보급시설, 야전병원, 보급열차, 통신부대 등을 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국군과 유앤군이 빠른 속도로 국경선을 향해 진출하는 과정에 반해 후방의 공백지대는 비례해서 점차 확대되면서 이 공백지대를 이용한 적의 교랂활동이 빈발하게 전갣되면서 이들에 대한 평정작전이 주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당시 38도선 북쪽에 유격대 10,000여명이 철의 삼각지대와 양덕 ,곡산 일대에서, 38도선 이남지역에는 약 15,000여 명이 오대산-태백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가) 서부지역 평정작전
미 제8군은 중공군의 개입이 확인되자 군예비로 있던 대전 부근에서 공비토벌과 후방지역 경계를 맡고 있던 미 제9군단(미 제2, 제25사)을 청천강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이 조치로 11월 초 미 제25사단은 개성-순천으로 진출하게 되며 평양 남쪽의 적 유격대를 일시적으로 소탕하게 된다.
[평강-철원간 철로에서 국군 제17연대, 적 40명 사살, 23명 포로 획득]
당시 이천, 평강 일대에 거점을 둔 적은 예쇼ㅓㅇ과과 임진강 지역까지 침투하여 유엔군의 보급로 기습 및 차단을 획책하였다. 이곳의 적은 10으ㅝㄹ 28일 이천의 국군 야전병원을 기습하여 부상자를학살하고 도주하고, 11월 2일 아침에는 평강 북쪽 16km 지점에서 1,000여 명이 적이 달리는 보급열차를 기습하였다. 다행히 이 열차를 호송하기 위해 탑승해 있던 국군 제17연대의 200여 명이 적을 추격하여 40명을 사살하고 23명을 포로로 획득하였다. 이 일대에 약 4,000여 명의 패잔병이 활동하고 있었다.
11월 9일에는 인민군 제4사단 제18연대 소속의 1,400여 명이 철원에서 한국 경찰대 800명을 습격하였고, 500여 명이 연천지역에 출모하여 미 제25사 제24연대가 1개 중대로 출도하였으나 전사 38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와같이 중부내륙지역에서 적 유격대의 활동이 증가하자, 미 제8군은 미 제25사단에 터키여단과 국구 ㄴ제17연대를 배속시켜 이 일대에 대한 강력한 소탕작전을 전개토록 하였다. 이에 미 제25-27연대는 이천, 시변리 지역에서, 제24연대와 국군 제17연대는 철의 삼각지대에서, 그리고 터키여단은 금천 남쪽에서 소탕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철원에서 국17연대 : 적 141명 사살]
이에 국국 제17연대는 11월 10일 철원으로 이동하는데 적 유격대가 박격포의 지원을 받아서 제17-1.2대대를 포위공격를 13일까지 계속하여 연대는 11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하며, 적 141명을 사살하고 20명을 생포한다.
이후 소탕부대들이 11월 17일붙너 5일간 강력한 소탕작전으로 이들은 내륙 깊숙히 도주하게 ㄷ되고, 미 제25사단과 터키여단은 11월 24일부터 청천강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군우리로 이동하게 되고 국군 제17연대도 제2사단 주력이 있는 가평으로 이동한다.
[낙동강 돌출부에서 사리진 북한군 제10사단이 건재를 유지하여 화천일대에서 유격전을 수행하다]
한편 38도선 부근 가평, 춘천, 화천 일댕에서도 패잔병에 의해 10월 22일 화천 댐 수문을 개방하여 수심이 1.2m 증갇되고 발전소가 심하게 파괴된다. 11월중 화천발전소 부근에 국군 제1. 제3. 제5 및 제7유격대대가 투입하여 잔적을 소탕하게 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인민군 제10사단 소속이었다.
육군본부는 이 적을 소탕하기 위해 신편된 제2사단 31연대를 가평에, 제5사단을 춘천 일대에 재배치 하게 되는데 적은 주력이 이미 북쪽으로 철수하여 분산된 소수의 패잔병을 소탕하게 되었다.
나) 동부지역 평정작전
'50년 10월 준순경 귀순한 인민군 연대장이 북한군 제3, 제4, 제5사단의 패잔병 4,000여 명이 삼척 남서쪽 태백산맥 일대에서 활동 중이라고 진술하였다. 이들 중 선두는 통천과 고저로 북상하여 민간에 침투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식량ㅇ을 약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또 체포된 포로의 진술이 인민군 제15사단장 박성철 소장이 패잔병 1만 명을 수습하였고, 이들이 약탈을 일삼아 주민들이 깊은 계곡으로 은신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50.10.26일 원산에 상륙한 후 국군제3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패잔병 소탕작전을 전개한다.
당시 고저에는 약 3,000명의 피난민이 몰려 매우 혼잡한 산황이었으며, 이런 틈을 이용하여 패잔병 700여 명이 10월 28일부터 미 해병을 기습하기 시작한다. 이에 민간수용소를 설치하고 귀순을 권유하는 선무할동을 전개했다.
11월에 들어서는 패잔병들이 원산-마전리 보급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마전리 북쪽 11km 지점의 두류산에 약 2,000~3,000명이 준동하고 있는 것이 항공정찰로 확인되었다.
반ㅁ변 고원 남쪽에 은거하고 있는 패잔병들은 원산-함흥 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보급차량을 기습하여 차량 23대를 소각시켰고, 보급열차를 공격한다.
이 무렵 미 제10군단장은 미해병사단의 장진호 진출을 강화하기 위하여 원산 일댕의 해병을 함흥으로 이동시키고 미 제3사단이 이 지역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11월 하순에는 중공군이 장진호전투를 개시를 지원할 목적으로 동양이롸마전리 일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때 동양리에는 국군 해병 제3대대가 적중에 고립되기도 하며 미 제3사단 15연대 1대대가 구원차 진출하다 이동 중에 기습공격을 받아 다수의 피해를 입기도 핝다.
미 제3사단 제65연대는 백산(1724) 일대에서 11월 18일부터 22일가지 이 고지 동쪽의 구군 제3삳4ㅏㄴ 제26연대와 연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당시 이 지역은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으로 적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패잔병 2,500명으로 유격거점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11월 한달 동안 원산 서쪽의 산악지대에 북상하던 북한군 패잔병은 25,000여 명으로 이들은 1일 평균 35회 정도로 도로, 보급시설, 이동 중인 보급차량, 부대 등을 기습공격 하였으며 출몰지역이 총 169개소에 이르렀다.
다)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
한만국경선으로 유엔군과 국군이 총진격을 하고 있을 때 38도선 이남에는 약 15,000명의 인민군 패잔병과 지방공비들이 합세하여 병참선을 차단하고 보급시설과 물자를 파괴하며 작전병력을 습격하였다. 특히 이들은 지리산 일대의 호남지방과 태백산맥 남쪽의 영남지방에 집중적으로 활동하였다.
호남지역 공비토벌적전 : 낙동강 서남부지역에서 작전을 하다 퇴로가 차단된 패잔병은 1만여명으로 이들은 지방공비와 합류하여 비정규전 태세를 갖추고 유격활동을 전개한다.
이들은 전남지역에는 전남도당 유격대 총사령부를, 전북지역에는 전북도당 유격대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회문산.속리산.불갑산.백아산.화학산 일대에 거점을 두고 호남지구 각처에서 보급로 차단차단, 식량 약탈, 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등 만행을 일삼는다. 특히 전라남도의 25개 시.군 중에서 4개 시. 군을 제외한 21개 시. 군에 인민공화국 체제를 모방한 통제기구를 설치하여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육본은 경북 영천에서 '50.8.27일에 창설하여 대구에 집결한 제11사단에 지리산 일대의 패잔병과 공비들을 소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제11사단(제9연대 결)은 10월 14일 남원으로 이동항여 그곳에 5개 경비대대(제3.5.6.7..8대대)와 지방경찰, 청년방위대를 배속받았다. 당시 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제13연대는 전북, 제20연대는 전남을 담당토록 하고 제9연대는 경북 상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공비토벌적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사단이 호남지역으로 이동하였을 때 인민군 패잔병으로 추정되는 공비 4,000여 명이 지리산 북쪽의 함양군 마천면 일대를 장악하고 광주-남원-진주 도로를 차단 중에 있었다. 이에 사단은 제13연대를 마천면 ㅇ닐대에 , 제20연대는 장성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자 공비들은 부근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11월 중순에 제9연대도 상주에서 진주로 이동하여 지리산 동부를 인수하였다.
[제11사-9연대-1대대 : 남원군 대전리 일대에서 공비 532명 사살, 98명 생포]
11월 20일 제11-9-1대대가 남원군 ㅁ대전리 일대에서 공비 532명 사살, 98명을 생포하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고, 제11-9-3대대는 산청 남쪽 단성에서 고비 3명 사살, 12명을 생포한다. 하지만 연대도 11월 28일 출동병력 41명이 이동간 경계를 소흘히 하여 열차에서 공비들의 기습으로 전사 31명에 부상 5명이 발생한다.
영남지역 공비토벌작전 : 낙동강 동부에서 작전을 수행하다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은 대부분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 도주한다. 그러나 일부 패잔병이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 제5사단이 영남지방에서 공비토발작전을 수행한다.
육본은 10월 8일에 제5사단을 재창설하여 제3군단에 배속하여 태백산맥 남쪽 영남지역의 공비토벌적전을 수행케 하였다. 사단은 지휘소를 대구에 두고 제27연대를 포항으로, 제35여대를 진주로, 제36연대를 김천으로 진출시켰다.
김천으로 이동한 제36연대는 영동, 거창, 김천에, 제27연대는 영해, 영주, 포항에, 제35연대는 하동, 진주, 단성에 각각 대대를 배치한다.
제35연대-1대대가 가 담당한 지리산 동부지역의 공비들은 11월 중순 경에 하동의 화개. 청암. 악양 일대와 단성 부근의 칠성. 자양. 호리. 딩상리에서 할동하다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 제2대대가 거창에서 소탕작전을 하자 소백산맥을 타고 북상한다. 이때 제36연대가 제1대대가 1차 차단선을 구축하고, 제2대대를 점촌으로 이동시켜 속리산. 보은. 상주를 차단하여 소탕작전을 하자 대부분 소탕되었다. 제27연대는 11월 14일--16일까지 문수산. 청양산. 구룡산. 산달산 일대의 공비들을 소탕하였다.,
제5사단은 11월 하순까지 활동 후 38도선 부근의 춘천일대로 북상 중인 패잔병을 소탕하기 위헤 제9사단에세 인계후 서울로 이동한다.
한편 제9사단은 '50. 10월 25일 서울에서 창설된 지 1개월 만인 11월 20일에 제3군단 작전명령에 따라 대전에 대둔산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한 후 대둔산 지역 및 제5사단의 경북내륙지역을 인수받아 공비토벌작전을 하였다.
[제9사단 28연대 : 금산리에서 공비 200여명 사살]
제9사단의 토벌작전으로 대둔산지역의 공비들 은거지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당시 금산 남쪽 성곡리 일대에 노동당 충남도당 위원회와 유격사령부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11월 15일 금산리에서 200여 며을 사살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의 침ㄹ략으로 전선이 38도선으로 남하하자, 제9사단은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호남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 중인 제111사단에 인계 후 12월 18일 원주를 경유하여 강릉으로 이동한다.
이로써 10월 중순부터 약 2개월간의 공비토발작전은 제5.제9. 제11사단에서 제5.제9사는 전방으로 복귀하고 제11사단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내륙 깊숙히 은거한 공비 소탕작전을 계속학게 된다.
8)38도선으로 반전
중공군 전쟁지도부는 제1차 공세작전이 종료될 무렵인 11월 초순에 "첫 작전에서 승리를 획득하였다. 이는 미국의 기도를 혼란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 진영에 불안과 시태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ㄷ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낙후된 장빙와 휴대 탄약 미츠 식량의 부족으로 유엔군 주력부대를 섬멸하는 데는 실패하였음을 자인하고 유엔군의 재반격을 우려하였다. 이 시기에 제9병단 3개 군(제20. 제26. 제27군)을 11월 7일. 12일. 19일에 3개 제대로 나뉘어 집안. 임강에서 압록강을 도하하여 동부전선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후방지원과 수송능력을 강화하고 복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후방근무지원부대를 증강한다. 또 철도사단을 투입하여 철도 수송과 보수능력을 향상시킨다. 아을러 공병부대를 투입하여 파괴된 도로의 보수를 완료하여 물자 수송능력을 개선하였다. 또한 소련으로부터 '50. 11~12월에 3,000대의 차량을 지원받았다.
전력이 한층 보강된 중공군은 1차 공세에 이어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 개시를 기다리게 된다. 이어 아군위 공격 개시을 간파하고, 서부전선에서는 11월 25일, 저녁, 동부전선은 하루 늦은 26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소련공군]
우리는 대부분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발표된 러시아측 자료에 참가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소련은 모택동의 요청과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에 따라 '50년 10~12월에 12개 항공사단을 중공에 배치하여 중공 영공을 방어했으며. 그중에 제64항공군단이 김일성의 소련군 지원 요청에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북한군 공군은 전쟁 초기에 괴멸되어 소련에서 재편성을 위한 조종사를 양성 중이었고, 중공 공군은 창설이 일천하여 소련군 지도하에 훈련을 받고 있었다.
소련 공군 제64항공군단은 3개 비행사단, 1개 정비사단ㄴ, 2개 고사포여단, 3개 독립여단(야간전투비행연대, 해군항공기전투기연대, 탐조등 연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력기종은 MIG-15로 미군의 F-86과 성능이 비슷했다. 그들 조종사들은 제2차세계대전시 독일 공군과 전투경험이 많은 최정예 요원들이다.
소련 전투기들은 '50.11월부터 한국전 공중전에 참전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제공권을 유엔군이 장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압록강 부근에서 만주의 성역을 이용하여 작전하였다. 실제로 11월 1일 신의주 상공에서 F-80전투기가 소련 공군기와 격돌했다고 미 합동참모부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참전사실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주로 평양-원산 선 이남으로 진출하지 않았고 해상에서 작전도 하지는 않았다.
가) 유엔군의 최후 공세
유엔군사령부는 예상하지 못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한만국경선으로 진출하려던 작전계획이 좌절되고 중공군의 1차공세로 추수감사절 공세('50.10.24~)는 청천강선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런데 밀물처럼 밀고 오던 중공군이 11월 6일 돌연 전 전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의 참전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만주의 40여 만명의 정규군 중에 약 6만 정도가 북한지역에 투입된 크게 우려 될만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제2차 진격작전(크리스마스 공세)를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판단은 오판이었다. 당시 중공군은 30만이 훨씬 넘었다. 그리고 괴멸되었던 북한군도 재편성을 완료하고 재등장한다. 이엏게하여 유엔군의 8만 정도라는 판단과는 너무나 다르게 당시 북한지역에는 42만명이 넘었다. 유엔군 수뇌부는 자신들이 제공권도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중공군의 능력을 경시하였다.
따라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이 침입하여 대학살을 자행하는 인류 역사상 다시 없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며, 북한지역에서 공산군을 격멸하여 한국의 통일과 평화를 회복하려는 유엔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재공격을 실시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맥아더 원수에게 조건이 허용되면 하루라도 빨리 공세로 전환하겠다고 보고하였다. 이를 위해 미 제9군단을 북상시켜, 미 제1군단이 서, 미 제9군단이 중앙, 국군 제2군단이 동으로 하여 협조된 공격으로 다시 한만국경선으로 진출하겠다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미 제9군단은 국군 제3군단에게 삼남지역 주보급로 확보와 인민군유격대 소탕임무를 인계하고 11월 3일 평양 북방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유엔군의 동계 2차 공세는 11월 24일로 정해졌다. 좌전방 미 제1군단(국군 제1사, 미 제24사, 영 제27여단)은 신의주 -평양 도로를 중심으로 서해안을 따라 진출하고, 중앙의 미 제9군은( 미 제2사, 미 제25사, 터키여단)은 군우리-희천 도로 좌측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우전방 국군 제2군단은 동쪽 산악지대에서 우인접의 미 제10군단과 협조를 하면서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국군 제2군단은 제7사단을 덕천지역에, 제8사단을 영원지역에서, 미 제9군단 은 미 제2사단이 구장동으로 진출하는 한편, 미 제25사단을 영변지역으로 북상시켜 국군 제2군단과 병행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은 용산동과 박천 지역에서, 미 제24사단은 대령강 서쪽의 서해안 통로에서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서부전선과는 달리 중공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미 제1해병사단의 제7연대가 하갈우리로 진격하여 전진기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제5연대는 고토릴로 기동하였다. 미 제7사단은 압록강을 향하여 북상하여 제17연대가 11월 21일에 혜산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국군제1군단은 우전방 수도사단이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11월 25일 청진ㄲㄱ가지 진격하고, 좌전방 제3사단은 같은 날에 백암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유엔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장에게 공격계획을 수정하여 장진으로 진출 후에 공격방향을 서쪽으로 전환하여 적 후방의 전략, 전술적 요충지인 강계를 공격하여 미 제8군의 공격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에 제10군단장은 병참선의 신장을 고려하여 유담리에서 바로 무평리로 공격하겠다고 하여 승인을 받았다.
[유엔군측 전쟁지도노선의 갈등]
중공군의 참전에 대한 대응방안의 선택을 놓고 많은 이견을 보이며 때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갈등이 유엔군사령붕와 미 본토의 행정부 간에 의견대립이 계속되었다.
첫번째 대립 ; 공중폭격 여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11월 5일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트메이어 중장에게 적의 능력을 마비시킬 목적으로 11월 7일부터 압록강상의 모든 교량(한국측의 끝 부분 파괴)과 수풍댐의 발전시설을 제외한 주변의 공장, 통신수단, 도시 등을 파괴하도록 하였다.
이 문제는 즉시 미국정부에 보고 되었고, 미 수뇌부는 참전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공중폭격을 연기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병력과 물자가 큰 무리를 지어 만주에서 압록강 교량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고, 실제로 도강은 야간에 은폐하에 이루어져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륙으로 진출하여 아군에게 대항하여 군사력을 위협하고 파괴한다며 긴박하므로 즉각 재고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즉각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 그 작전을 승인해 11월 8일부터 공중폭격이 시작되었다. 이 폭격으로 12월 5일까지 한달 여기간에 12개의 철로와 육로교량 4개가 절단되었으며 그러나 이미 동계 결빙으로 교량파괴는 작전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두번째 대립 : 군사목표와 정책 목표의 대립
중공이라는 새로운 적의 출현에 따른 유엔의 군사목표, 즉 북한 인민군의 격멸과 한국을 통일된 민주자유국가로 만들겠다는 유엔의 정책목표를 변경시켜야 되느냐, 아니면 고수되어야 하느냐를 놓고, 미 수뇌부는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맥아더 원수는 그의 공격계획을 포기할 의향이 없고 만주 폭격을 강력히 제의하였다.
하지만 미 국가안전보장회는 우리와 유엔군사령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학고 "맥아더 장군이 재량대로 작전임무를 수행하되, 민주공격은 허용되지 않으며 동싱에 미 국무부는 중공과의 협상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한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나)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미 제8군의 최종공세('50.11.24)
희천
원참
온정리
중39군 중40군 중38군 중42군
운산 묘향산 인처리
중66군
태천 미 2사 국8사
미25사 구장동 영원
영변
중50군 국1사 국7사
박천 군우리 덕천
남청정 미24사 터키여단
안주 미9군단 맹산
청천강 영27여단 북창 국6사 국2군단
미1군단
1950년 11월 24일 오전에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하도록 계획된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접적이 경미항여 공격 첫날 10~15km 북쪽으로 진출한다.이틀째인 11월 25일부터 중공군이 전 전선에서 완강히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미 제2사단은 구장동 북쪽에서, 국군 제2군단은 묘향산과 양감령 일대에서 제7사단과 제8사단의 공격이 돈좌되었다. 미제1군단도 태천지역에서 국군 제1사단의 공격이 돈좌된다.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중공군은 25일 해질 무렵부터 전 전선에서 일제히 반격(제2차 공세)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주공을 미 제8군의 동측방인 국군 제2군단 정면으로 지향하여 덕천과 영원지역의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을 강타하여 하룻밤 사이에 동측방이 붕괴의 위협을 받고 방어태세로 전환된다. 미 제9군단도 방어태세로 전환되면서 청천강을 중심으로 대결전이 전개 된다.
동부전선에서는 서부전선보다 3일 뒤인 27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미 해병대는 유담리의 서쪽 60km지점의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하고, 미 제7사단의 일부도 서측으로 이동하여 미 해병의 장진호 동안을 따라 공격한다. 그러나 공격 초일부터 강력한 중공군의 저항에 공격이 돈좌되엇다. 중공군이 해병부대 주변의 모든 고지로 침투하여 후방철수로를 차단하였다. 미 제7사단과 국구 ㄴ제1군단도 현지에서 급편방어로 전환하게 된다.
1)) 청천겅 교두보 붕괴
가)) 태천전투(국군 제1사 :11.24-11.28)
청천강 이남으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국군 제1사단은 11월 20일 미 제24사단으로부터 대령강-용산동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미 제1군단의 우전방이 되어 태천-구성-삭주-신의주로 진출하게 됭엇다. 이대 좌인접의 미 제24사단은 서해안을 따라 정주로, 우인접 미 제9군단의 미제25사단은 운산일대로 진출하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은 11월24일 10:00시에 제12연대를 좌, 제11연대를 우로하는 2개 연대 병진을로 태천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은 모든 교랴을 파괴하고 도로상에는 부비츄랩을 설치하여 진출을 둔화시킨다. 결국 강력한 적의 반격으로 27일을 전후하여 대령강 동쪽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여 포위공격을 감행하였다. 결국 28일 철수를 단행한다.ㅣ
나)) 구장동 전투(미 제2사 : 11월 25일~28일)
서부전선의 중앙 미 제9군단은 좌전방 제25사단이 운산을 , 우전방 제2사단이 희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번 작전의 핵심적인 임무를 부여받은 미 제2사단은 우전방 제38연대가 백령천으 넘어 묘향산 서쪽의 형제봉을, 좌전방 제9연대는 청천강 연안의 도로 축선으로 전진하였다.
11월 25일, 백령천 북쪽 도로변의 감제고지인 219고지(중공군의 모자고지)에서 공격이 돈좌되었다. 제9연대가 무려 7시간의 공격에도 중공군의 방어진지는 건재했고, 오히려 저녁부터는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면서 11월 26일 02:00싱에 대규모 중공군의 반격이 개시된다. 이 지역 일대에 은거해 있던 중공군 제40군이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여 미 제2사단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이에 미 제9군단장 콜터 소장은 미 제2사단에게 구장동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 당시에 우인접 국군 제2군단이 돌파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군우리에 집결중인 터키여단을 덕천으로 진출시켜 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도록 조치한다.
26일 어둠이 내리자 중공군은 구장동 일대를 방어 중인 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남쪽 원참지역으로 철수를 강요당했다. 그리고 사단의 우인접에서 작전 중에 철수한 국군 제7-3연대를 미 제2사단이 작전통제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미 제38연대와 구구 ㄴ제3연대는 백령천 부근에서 중공군을 격퇴하고 방어진지를 고수하였으나 사단 주력의 철수로 10km 남쪽으로 철수한다.
28일까지 적중에 고립된 제9, 제23연대는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여 적진을 돌파하고 사단 사령부가 있는 원리로 집결하고 있었다. 결국 원리 주변에서 재편성에 들어가고 국군ㄴ제3연대가 원리와비호산 사이에, 비호산에 미 제38연대가 배치되면서 원리-비호산에 저짖선이 국축된다.
다)) 덕천 전투(국군 제7사 : 11월 24~26일)
미 제9군단의 전선 투입으로 국군 제2군단의 작전지역ㅇ이 동쪽으로 이동됨에 따라 국군 제7사단이 덕천으로 19일 이동하여 군단의 좌전방이 되었다.
사단은 24일 제3연대가 묘향산 서쪽의 1531고지를, 제8연대가 묘향산 남쪽의 가마봉과 백애산을 목표로 2개 연대 병진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중공군의 주진지 지역으로 공격은 조기에 돈좌되어 미 제8군의 최종공세에서 가장 진격속도가 늦은 사단이 된다.
사단은 진출은 고사하고 제3연대는 1531고지 남쪽 3km 1101고지와 956고지를 점령하여 중공군으ㅟ 반격에 대비하게 되고, 내창천의 제8연대는 우현고대와 818굊로 물러나 사주방어 태세를 취하게 되자, 사단자은 양 연대간의 공백지대가 노출되자 제5연대에게 백령천 남쪽 탁고개로 2개 대대를 추진하여 공백지대를 경계하라 명령한다.
25일에 다시 공격을 개시하게 되는데 이미 침투한 중공군의 기습으로 사단 동측방 제8-3대대가 분산철수 하면서 동측바이 노출되었다. 결국 군단 에비인 국군 제6-2연대를 진출시켰으나 이미 중공군이 먼저 진출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26일 02:00시가 되면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어중공군 제38군이 구장동의 미 제2사단을 강타하고, 특히 제7사단 제8연대 정면으로 집중공격을 가하여 제8연대는 배후도 마비되는 대혼란이 발생하져, 지후ㅢ체계가 마비되면서 저마다 각개약진으로 사항산 계곡을 탈출하게 된다.
결국 26일 사단 전체가 중공군의 포위망에 들어가고 사단사령부도 기습을 받아 일부는 북창으로 일부는 개천으로 분산철수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 좌전방의 제3연대는 26일 오전까지 백령천 북쪽의 바어진지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제3연대는 미 제2사단 지역인 구장동으로 철수하여 구장동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후 국군 제7사단(-)은 북창을 경유 순천으로 남하하여 부대정비에 들어가게 된다.
덕천전투(11.25~26)
중공군 1개 사단 중38군
1531 가마봉(1304) 백애산(1524)
성불참 우현
백령천 국7-3연 국7-5연 국7-8연 내창천
국7-수색중
하령곡산
풍덕산 추동리 풍전리
구장동으로
탁고개
영원
덕천 국7-18포대 대동강
국7사
군우리 국5-3대
북창으로
라)) 영원-맹산전투(국8사 : 11.24-11.25)
영원-맹산전투(국8사 : 11.24-11.25)
백애산
고성산
1139
신기산
하령곡산 덕인봉
국8-10연
국8-21연
영원 국8-50포
국8-10연, 국8-21연 지휘소
덕천
대동강
두류령
국8-16-2대
애창천
상화리
맹산 국8-16-3대
국8사, 국8-16연 지휘소
북창 매재령
제8사단은 제2군단의 우전방 사단으로 서부전선의 가장 동측에서 공격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사단도 좌인접 제7사단과 함께 '50.11. 24일 10:00시에 좌전방 제10연대가 소쾌산을, 우전방 제21연대가 백암산을 목포료 공격을 개시한다. 사단 예비인 제16연대는 2개 대대를 동측방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사단예비로 맹산에 집결시켜 사단지휘소를 경계하였다.
하지만 산악지역으로 진출이 더디었다. 제10연대는 하령곡령을 넘어 용흥동에, 제21연대는 영원 북동쪽 12km의 작은 양감령으로 진출하여 야간방어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이곳으로 진출하여 국군을 기다리듯 중공군 제42군이 25일 역습을 개시하여 사단 공격을 돈좌시키고, 1개 사단을 제8군과 미 제10군단으이 전투지경선을 이용하여 침투시켜 맹산을 공격하게 된다.
결국 맹산의 사단지휘소가 마비되고, 전방 연대들은 포위되어 모든 무기를 유기하고 각자 분산하여 탈출하게되었다. 이에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제16연대로 하여금 매자령으로 철수하여 사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제16연대가 도착전에 이미 중공군이 선점하여 기습공격함으로서 사단 전체가 중공군에 포위되게 되자 군단에서는 제6-7연, 19연대를 북창주변으로 배치하여 철수부대를 엄호하라 하고, 11월 27일 01:00시를 기해 제7사다능ㄴ 순천으로, 제8사단은 가창으로 각각 집결하라 명령하였다.
마)) 북창 전투
국군 제2군단은 전방 사단인 제7사단과 제8사단이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크리스마스 공세 공격이 돈좌되어 각각 소규모로 분산하여 철수하는 비극에 이르르자, 군단 에비로 가창에 대기 중이던 제6사단 제2연대를 덕첝 북동쪽 풍전리로 이동시켜 남하하는 중공군을 저지하도록 한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은 지난 10월 추수감사절 공격시 초산-온정리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분산철수하여 개천에 집결하여 재편성하면서 군단 예비가 되었다. 따라서 전투력 복원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에서 군단의 명령으로 25일 진출하지만 26일 연대지휘소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연대는 분산하여 순천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제2군단 부대들은 지휘통신이 마비되고 덕천-북창, 덕천-개천 도로와 주변 산악지대로 분산되어 무질서하게 철수하게 된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제8군사령관은 국군 제6사단을 미 제9군단에 배속시키고, 국군 제2군단은 순천, 강동으로 철수하여 재편성 하도록 하엿다.
이에 미 제9군단장은 군단의 우측방을 방어하게 된 국군 제6사단을 보강하기 위해 순천-성천 도로변에 배치된 미 제1기병-제7연대를 북창리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였다. 29일 해가 뜨기전 공중정찰에 중공군 4개 연대 규모가 북창을 경유하여 국구 ㄴ제6사단 지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국군 제6사다는 미 제7기병연대가 도착하기 전에 역부족으로 그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다) 평양-함흥선으로 철수 결정
유엔군ㄴ사령관 맥아더는 이 전투가 개시되기 전에 "중공군은ㄴ 대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했으나 11월 27일과28일 이틀째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제8군과 제10군단의 상황보고를 접하면서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인정하게 된다.그리고 이날 미 합동참모부에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여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게 된다고 보고하였다.
28일 밤에 유엔군사령부는 긴급작전회를 개최하였다. 양 부대자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은 맥아더는 서부전선은 중공군에게 우측방이 노출된 것을 피할 수 있을 만큼 후퇴하고, 동부전선은 중공군과 접적을 유지하면서 함흥과 흥남의 해안교두보지여긍로 집결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맥아더는 미 제10군단이 해안교두보 지역을 확보함으로서 남하하는 공산군의 좌측방을 위협함은 물론 서부전선에 집중된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 미 제8군도 평양-원산 선을 무난히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라) 서부전선의 대재앙
워커장군은 28일 도쿄로 출발하기 전에 청천강 하구-박천-북원-태율리를 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작전지침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그기 도쿄회의를 마치고29일 오후 평양으로 복귀할 무렵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신창리에 배치된 국군 제6사단의 증원 실패, 터키여단의 와원리 철수, 그리고 미 제25사단과 미 제2사단이 청천강 계곡에서 입은 손실로 계획된 방어선의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무렵 서측방 미 제1군단은 청천강 북쪽의 박천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우전방 미 제9군단은 중공군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군우리를 중심으로 방어정면이 축소되고 있었으며, 특히 미 제2사단은 군우리에서 묘향산의 지맥인 산악증선을 따라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 제38군의 포위상황화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이 숙천-순천, 미 제9군단이 순천-성천 간을 방어하고, 국군 제2군은 제6사단과 제7사단 제3연대를 미 제9군단에 배속하고, 군단 주력인 제7사단(-)과 제8사단은 강동 남쪽에서 부대정비를 하도록 한다.
1)) 숙천-순천 방어
크리스마스 공세 5일 재인 11월 28일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은 태천 외곾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후퇴하게 되고, 우인접 미 제25사단은 영변 남쪽으로 진출 중에 접적 중에 있었다.
국군 제1사단장은 박천-용산동 일대를 고수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였으나 역부족으로 박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의 전투지경선인 청천강변의 구장동-개천 도로를 방어 중인 미 제2사단 제23연대의 진지를 돌파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면 미 제1군단의 주력부대들 퇴로가 차단돨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를 간파한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국군 제1사단과 미 제25사단을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하게 한다. 이어서 미 제24사단 제5연대를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앉주 일대에 배치하여 청천강 도하를 엄호하도록 하여 국군 제1사단은 숙천에 미 제25사단은 순천에 집결한다.
2)) 군우리 대혈전
군우리 철수작전('50.11.29~11.30)
청천강 북원 중40군
미2-23-1대
미2-23-3대 비호산 중38군
군우리 미2-23-1대 국7-3연
미2-38연 덕천
조통강 미 2-23연지휘소
건지산 132 개천 터키여단
개천강
미 2-38연
인천참
중38-113사
미2사
156
갈고개
갈현동
용원리
미 제9군단장은 좌전방 미 제2사단에 국군 제7-3연대와 터키여단을 배속하여 군우리 북동쪽의 부원-와원을, 우전방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덕천 남쪽의 북창일대를 방어하도록 한다. 군단 에비인 영 제27여단은 순천 남쪽 자산으로 이동시켰다.
미 제2사단이 부대 재배치를 하는 동안 중공군도 제38군에 덕천 전투를 종료 후에 군우리로 진격하도록 하고 일부 부대로 삼소리를 점령하여 미 제2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터키여단의 지연전]
터키여단은 경기도 장단 일대에서 인민군 유격대 소탕작전을 하던 중에 11월 20일 미 제9군다느이 에비가 되어 군우리로 이동하여 덕천 탈환임무를 부여빋고 26일 개천-덕천도로상의 와원으로 진출하였다. 여단 주력이 와원-덕천 도로상의 중간에 위치한 험준한 알일령을 넘고 있을 무렵 덕천 진출을 중지하고 알일령 동쪽의 용덕리에 저지선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여단장 야지시 준장은 알일령이 험준하여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용덕리 보다 서쪽의 와원으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28일 야음을 이용하여 알릴령을 넘어온 중공군이 일출 직전에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당시 터키여단은 상급부대와의 통신도 불량하고, 20도가 오르내리는 혹한의 추위속에서 5km,후방의 신립리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28일 자장부로 군단 에비에서 미 제2사단에 배속되었지만 이런 사실도 모르는체로 중공군 1개 사단 규모와 전투를 벌여 여단이 혼란상황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5km 후방 개천에 위치한 여단본부는 통신이 두절되어 전방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포병대대가 철수하여 중공군에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터키여단은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근접전투를 펼치며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며 29일 11:00시경 우군 항공기 8대가 신립리 일대를 폭격하는 사이 개천으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당시에 미 제2사단장은 터키군에게 개천강 남쪽에 저지진지를 구축토록 하였으나 지친 여단은 개천시내를 중심으로 저지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천강 남쪽으로 우회하여 개천-군우리 간 용복리로 진출 중에 있었다. 이에 여단장은 퇴로 차단을 우려하여 중대 단위 이하 소부대로 분산하여 군우리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때 여단의 좌인접에서 방어 주인 미 제38연대마저 개천으로 집결하여 이 통로로 철수를 개시하여 도로상에는 미군과 터키군의 차량으로 대혼잡을 이루게 되며 30일에 군우리 남서쪽에 집결하였다.
[군우리 철수 : 태형의 계곡, 미 제2사단 4,500여 명 사상자 발생]
중공군 제2차 공세시 군우리는 미 제2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28일 사단장은 청천강 계곡으로 진출한 중공군과 혈전으로 다수의 피해를 입은 제9연대를 군우리 남쪽으로 철수시켜 재편성하도록 하고, 제23연대를 구장동-군우리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북권에, 국군 제3연대와 제38연대를 비호산 남쪽에 배치하였다.
터키여단이 와원, 신립리, 봉명리에서 결전을 펼친 29일 중공군 제40군은 국구 ㄴ제3연대와 미 제223연대를, 중공군 제38군은 미 제38연대를 공격하여 군우리 전투가 시작되었다.
터키여단을 공격하여 사기가 오른 중공군 제38군이 미 제38연대를 공격하게 되자, 제38연대장은 정방 대대들을 지원하기 위해 전차 1개 소대 등 증원부대를 출동시켰으나 군우리로 철수 중인 터키군이 군우리-개천도로를 꽉메우고 있어 지원이 불가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제38연대는 와해되어 소부대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개천강 남쪽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132고지를 중공군이 점령하여 철수작전을 방해하였으며, 이때 미 제5공군의 야음과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근접항공지원으로 개천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에 중공군 제38군은 제113사단 2개 연대로 군우리-순천, 안주-순천 도로를 차단하여 군우리 남족으로 철수하는 미 제2사단을 격멸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었다.
이에 미 제2사단장은 사단 수객중대에 용원역 남쪽 6km에 위치한 고개부근을 점령 중인 중공군을 공격하도록 하여, 제503야전포병대대의 화력지원 속에 공격을 개시했으나 실패한다.
한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공격하는 동안 영 제27여단의 미들섹스 대대로 갈고개를 공격했으나 실패한다.
어둠이 깊어지면서 사단사령부 지역에도 적의박격포와 자동화기, 소총사격이 간간히 집중되자 사단장은 미 제9연대로 30일 08:00시에 적 차단선을 돌파하도록 명하고 철수순서는 제9연대를 선두로 사단본부, 포병 및 지원부대, 터키여단, 제38연대,국군 제3연대 순으로 철수하고 미 제23연대를 후위로 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도 30일 새벽에 주력부대를 증강 투입하였으나 미 제2사단이;나 상급부대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국군 제3연대의 분전]
국군 제7사단 제3연대는 묘향산으로 공격 중에 중공군의 역습으로 철수를 가요받았을 때에 퇴로가 차단되어 우인접 미 제2사단지역으로 우회 철수 중에 11월 26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된다, 연대는 구장동, 군우리 북쪽의 비호산을 거쳐 철수하여 29일 저녁 무렵 우인접의 미 제38연대와 터키여단이 개천으로ㅓ 철수를 개시하자 군우리 동쪽을 점령하여 미 제23연대와 연결하여 건지산에서 개천강 일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한편 공격 선봉에 나선 미 제9연대 2개 대대는 1개 전차소대를 앞세우고 30일 03:30분에 집결지를 출발하였으나 전차소대만 적의 화마응ㄹ 뚫고 용원리 부근으로 진출하고 나머지 부대들ㅇ느 필수 장비만 휴대하고 기타 보급품은 후방에 버리고 진출하게 된다.
미 제9연대는 전차 위에 보병을 태운 뒤 중공군의 포위마응ㄹ 돌파하려 했으나 강력한 적의 집중사격으로 이동이 정지되고 국군 제3연대가 급파되었다.
[미 제72전차 대대의 오탄으로 공격 돈좌]
연대는 미 항공의 근접지원과 전차등의 활력지원으 받으며 돌파작전을 진행하여 곧 성공하기 직전에 미 제72전차대대가 중공구으로 오인하여 두번에 걸친 오탄으로 연대의 공격은ㄴ 실패하였다.
국군 제3연대의 돌파작전이 실패한 가운데 중공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고 점점 미 제2사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동로는 사실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접전 결과로 중ㄷ공군의 종심이 그리 깊지는 않다고 판단한 사단자은 철수부대를 재편성하여 차량으로 강습돌파를 계획한다.
선두인 9대의 전차제대가 영 제27여단의 전초지역을 통과하자, 이 광경을 목격한 제27여단이 미 제9군단에 군우리-순천 간 돌가 개통되엇다고 보고한다. 선두인 제38연대는 일단정지-대기-출발을 반복하녀 중공군의 저지선을 통과하고 이어서 제9연대가 갈고개 에서 격전을 치룬 후에 돌파한다. 그러나 후속제대인 포병부대들이 8"곡사포인 제17야전포병만 톨파하고 나머지 포벼응ㄴ 포위되어 모든 포을 버리고 병력만 분산하여 순천으로 철수하였다. 그 뒤의 터키여단과 국군 제3연대는 적의 경미한 저항을 격퇴하면서 탈출에 성공한다. 후위부대인 제23연대는 어둠이 내리며 갈고개로의 철수는 불가 하다고 판단하고 조ㅏ인접 미 제1군단의신앉주-숙천도로로 철수할 것을 건의하여 승인받고 모든 장비를 파괴한 후 철수하여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12월 1일 집계에 의하면 11월 후반 미 제2사단의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4,940명이 었고, 이중 90%인 4,500명은 군우리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손실은 사단 병력의 1/3에 해당한다. 수백 대의 차량과 야포 64문, 제2전투공병대대의 공병장비 대부분, 예하 부대의 통신 장비 20~40%가 손실을 입었다.
당시 터키여단은 한국전쟁 당시에 전사 721명, 전상 2,493명, 실종 175명, 포로 234명 중에 이곳 군우리 지역에서 가장 피해가 컸으며, 특히 착검을 하고 투항을 거부한 채로 돌격하여 그들의 투지를 보여주었다.
군우리 전투 패배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영 27여단이 갈고개 남서쪽 5km에 있는 127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좀 더 북상하여 갈고개를 점령하였으면 사단의 철수는 용이하였을 것이다, 또하나는 국군 제3연대의 돌파시 전차부대의 오탄이 없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마) 동부전선의 철수작전
서부전선의 제8군이 청천강 교두보에서 철수할 무렵 동부전선의 미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도 공격개시 3일째인 11월 29일 공격을 중지하고 함흥 흥남 일대의해안교두보 지역으로 철수하게 된다.그러나 이 철수문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국군 제1군단은 해안을 따라 480km를, 헤산진으로 진출한 미 제7사단은 산악지형을 따라 320km, 장진호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며 철수해야 하는 미 제1해병사단은 240km를 철수해야만 했다.
1)) 장진호 설한지 전투
당시 해병사단은 장진호 북쪽의 한만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주력이 하갈우링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부전선 미 제8군과 연결하기 위해 무평리(희천과 강계 중간지점)를 공격하게 된 제1해병사단은 24일보다 3일 늦은 11월 27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을 준비하느동안 제7연대가 중공군 포로 3명을 심문결과 제60군 제20사단소속이며 2개 군단이 해병사단을 공격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병의 신분에 상세하게 작전계획을 숙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여 믿지 않게 되면서 큰 낭패를 본다.
[기동로 중간 중간에 통제부대를 배치한 해병의 전술적 행동이 철수를 보장하다]
당시 미 해병사단은 계곡통로를 따라 유담리에서 진흥리까지 신장배치되어 있었다. 또 장진호 동쪽의 풍류리강 부근에는 미 제7사단의 훼이스 특수임무부대가 차단진지를 점령하여 중공군의 하갈우리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간이 활주로 시설을 구축하여 해병사단의 전술지휘소와 보급기지가 설치된 중추지역이었다. 여기에는 제1연대 제3대대와 제7연대 제2대대가 기지 방어를 하고 있었다. 또 하갈우리-진흥리간 중간지저인 고토리에는 사단의 주보급로를 확보히기 위해 제1연대 지휘소, 제2대대, 화력지원부대들이 배치되고 그 남쪽 진흥리에는 제1연대의 제1대대와 화력지원부대가 배치되어 사단 후방지역을 엄호하였다.
27일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 08:00시에 제7연대 제3대대가 무평리로 향하는 도로 입구의 양 고지를 점령하자, 공격 제대의 선두인 제5연대 제2대대가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얼마 진출하지 못하고 1251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으로 진출이 돈좌되었다.
유담리 전투('50.11.27~11.28)
1524 중79-237연 중79사
1384 1214
중89사 중1개연(?)
1430 중79-235연
미7연-H중 미5연-I중 미5연-중 미7연-E중
1467 미5연-3대 유담리 1240 중79-236연
미5연-중 미5연-중 미5연지휘소, 미7연지휘소 1167
1251 미7연D중
무평리 미5연-중 미5연-G중 미5연-1대
미5연-D중 1426 미7연-중 1294 미7연-A중 포병연대
1554 1276 미7연-B중
하갈우리
미5연대 제2대대가 제7연대 제3대대의 지원을 받아 1251고지를 탈취하기는 했으나 주변의 고지를 정찰한 제7연대 정찰대들이 중공군이 사방에서 유담리를 포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각 연대들은 그들의 야간공격을 대비하여 영하 32도로 곤두박질친 악조건하에 야간 경게태세를 강화하였으나 당일(27일) 21:00시를 지나 중공군의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유담리 일대가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이때 유엔군사령부의 철수 결정이 내려와 해병사단장은 먼저 30일 저녁에 유담리에 배치된 제5, 제7연대와 풍류리강 부근에 배치된 미 제7사단 훼이스 특수임무부대를 , 철수에 지장이 되는 장비뫄 물자를 파괴하고 하갈우리로 철수하도록 한다
[당시 중공군의 작전 기도 및 전개]
중공군 제9병단장 송시륜은 제13병단을 증원하기 위하여 11월 초순에 제20, 제26, 제27군을 이끌고 임강과 집안에서 압록강을 도하하여 낭림산맥을 타고 남하하여 동부전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군과 국군이 자신들의 진출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들은 미 해병의 철수 징후를 간파하고 이동 중에 취약점을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제9병단장은 예하 3개군 12개 사단 중 제27군을 장진호 북방에서 전개하여 동서양 방향에서 해병의 주력이 집결된 유담리-하갈우리를 포위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20군으로 장진호 서쪽으로 우회시켜 제27군보다 남쪽에서 해병의 유일한 철수로인 하갈우리-함흥 간의 산악도로를 분할 차단한 후 포위공격으로 미군 병력을 섬멸시킬 계획이엇다. 제26군은 병단 예비로 하였다.
중공군은 27일 저녁무렵부터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해병사단의 강력한 저항과 우세한 화력에 압도당해 도리어 막대한 병력손실을 입게되고, 설상가상으로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 물자 부족에 탄약이 부족하여 작전에 많은 차질을 빚게 된다.
[미 해병사단의 철수 작전]
유담리에서 격전을 펼친 제5, 제7해병연대는 12월 1일 사단본부가 있는 하갈우리로 철수를 개시하여 중공군이 파괴한 교량들을 보수하며 4일 하갈우리에 집결하였다.
이 무렵 장진호 동쪽으로 진출했던 훼이스 특수임무부대도 철수 중에 아군기의 오폭과 중공군의 퇴로차단으로 다수의 인명과 장비의 손실을 입고 12월 3일 하갈우리로 복귀한다.
이때 사단의 가장 애로사항은 부상자의 후송이었다. 당시 하갈우리에 간이 활주로를 이용하여 5일까지 총 4,300명의 부상지를 항공기로 후송하였다(C-47 수송기 이용)
그리고 극동공군 전투화물 수송사령관 터너 장군이 해병사단장을 방문하여 전투장비를 포기하고 병력만이라도 공중 이동하도록 제의하였다. 그러나 사단장은 장비와 차량을 가지고 고토리로 철수할 것으로 믿고 그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는다. 당시 하갈우리에는 약 10,000명의병력과 1,500여 명의 피난민, 각종 전투장비와 1,000여 대의 차량이 집결하고 있었다.
[미 해병을 공격하지 않고 이 광경을 관망하고, 공중 투하한 복브품을 챙기는데 노력하는 중공군]
[ 해병대 지휘관의 전의 고양 : 후퇴는 적에게 강요된 상황에서 아군의 후방지역으로 향하여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전은 후방에도 적이 점령하고 있어 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 임무이므로 후퇴가 아니라 해안까지 새로운 공격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계전투와 산악전투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장진호 전투에 대하여 다시한번 상세히 알아 보면서 가장 투혼이 빛났던 덕동령 전투에 대해 일본측이 기술한 전사내용을 소개하여 그 정신을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장진호 전투(50.11.27~12.11)
1. 전투 개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유엔군의 최종공세계획에 의거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의 우전방과 연결하기 위해 미 해병 제1사단에 서쪽의 무평리(희천과 강계중간 지점)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공격 개시일은 미 제8군의 11월 24일보다 3일 후인 11월 27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중에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가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하여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가지 2주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미 제10군단장은 11월 1일,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이 무렵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간에는 80마일의 공백지대가 발생하여 맥아더 사령부는 미 제10군단장에게 이 공백을 엄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해병사단은 제1연대 전투단이 흑수리에서 지경-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를 따라 북상 중이었고, 제5연대전투단도 장진호 동쪽에서 유담리로 향했고, 제7연대 전투단은 이미 유담리로 이동하였다. 또한 미 제7사단의 1개 혼성연대가 장진호 동쪽에서 전진하여 제5연대 전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유담리 신흥리
장진호
덕동산 1,653m
신흥리 하갈우리
고토리
황초령
2. 전투 경과
가. 유담리 전투('50. 11. 27~12. 4)
미 제10군단의 명령에 따라 미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최초 목표를 유담리 서쪽의 용림동으로 정하고 고개동-무평동으로 기동하여 중공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만포진을 점령하는 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제5연대는 11월 27일 08:00시에 제7연대를 초월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여 용림동을 점령하고 계속 서진할 준비를 하고, 제7연대는 유담리를 확보하고 제5연대의 초월을 보장하며 유담리-신흥리간 보급로를 방호하며 제1연대는 사단 예비로써 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에 위치해 사단의 후방지역과 주보급로를 방호하도록 하였다. 또한 영 제41해병특공대는 유담리로 이동해 사단의 좌익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한편 중공군은 제20군단과 제27군단으로 기온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유담리로 공격을 해왔다. 이들은 신흥리와 유담리, 하갈우리 지역에서 유엔군을 포위격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27군단은 1개 사단(+)으로 신흥리 지역에서, 1개 사단으로 유담리 지역에서, 1개 사단으로 미 제7사단을 저지하여 군단 좌측의 안전과 유엔군 주력의 섬멸을 보장하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어 하갈우리로 공격을 확대하여 제20군단과 협조하여 이 지역의 미군을 섬멸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미 제1해병사단의 각 연대들은 진출간 애로지역의 주요고지마다 방호병력을 배치하였고 유담리 하갈우리간 덕동 통로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11월 27일 18:30분경 중공군의 유담리 지역 대규모 공격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백병전이 벌어지며 미 해병대는 결코 물러서지않고 진지를 사수하였으며 야간에 피탈되면 주간에 항공폭격을 지원받아 다시 역스으로 확보하며 혈투를 이어갔다.
결국 사단은 11월 28일 11:00를 기해 서진을 취소하고 현위치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며 보급로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11월 30일, 하갈우리에 위치한 제1해병사단 지휘소에서 제10군단장과 해병사단장은 긴급회의를 갖고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지역으로 철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 해병사단장은 제5 . 7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철수시킨 후 하갈우리와 고토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철수계획을 수립하였다.
모든 부대는 12월 1일 11:00시에 21km에 달하는 하갈우리로의 철수작전을 단행하여, 제5연대 3대대가 진격로의 양측 감제고지를 점령하면서 후속부대 엄호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전사자는 유품을 보관 후 현지 매장으로 조치하였다.
[미해병 5연대 제3대대 : 437명이 194명으로 감소]
12월 2일 선두인 제5-3대대는 중공군 제59사단의 차단부대를 격파하고 덕동통로를 돌파하여 지역일대를 확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제5-3대대는 437명의 병력이 194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피해가 컸다.
유담리의 전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영 해병 제41특공대가 16:30분경 하갈우리로 출동하여 북쪽의 도로를 점령한 후 철수부대를 엄호하였고, 마침내 19:00시에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부대의 선두가 하갈우리에 들어왔고 12월 4일 14:00시 무렵에 마지막 부대인 제7-3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전사164명, 실종 55명, 부상 921명 등, 총 1,140명의 인명손실이 있었으며 이 중 동상에 의한 비전투손실이 1,194명이었다.
[여기서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 회고록을 통해 중공군 제9병단의 참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9병단은 조선에 들어오기 전 추운 지역에서의 전투경험이 모자랐다. 월동준비 등의 준비도 부족했다. 포병은 소련장비와 바구기위해 미일제 야포 75밀리 10문을 가지고 참여햇다. 이 병단은 군사위의 명ㄹ령을 받고 서둘러 조선에 들어갔다. 부대는 동북으로 가는 열차에서 참전통지를 받고 솜옷을 건네받았으나 일부는아예 받지도 못했다. 솜신발, 솜모자도 없이 수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모포로 몸을 감씬 병사들이 적지않았다. 영하 30도의 혹한을 무릅쓰고 조선동부의 험한 개마고원으로 몸을 숨겨 잠입하는데 15만명이 미군 공중정찰에 발견되지 않아 미군들을 경악시켰다.
미군은 아군의 세찬 공격을 받더니 전투기의 엄호아래 자동차나 트럭 등을 타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부전선은 높은 산들로 미군 기계화부대의 공격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아군 대부분이 밀어붙이고 미군은 뒤로 철수하는 꼴이었다. 그들은 평원작전에 적합했던 것이다. 함흥까지 밀려나서는 그들은 후퇴하지 않았다. 함흥을 지나면서 평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군도 형편이 어려웠다. 동부전선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대포는 가져갈 수 없었고 박격포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데도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손에 쥘 수 있는 경화기에 의존해야 했다. 이 밖에 미군이 흥남항으로 철수하는데는 군함의 화력이 엄청났다. 그들은 해. 육. 공군화력으로 세밀한 화망을 구축해 엄청난 화력을 아군에 퍼부었다.
제9병단은 이같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며칠 밤낮에 걸쳐 투혼을 발휘해 포위망에 갇혀 있던 미해병 제1사단 소속 1개 연대 병력의 대부분과 국군 수도사단 일부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미군전투기가 수시로 우리를 찾는라 혈안이 되어 있어 연기를 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사들은 밤낮으로 행군을 계속해 상대를 추격해야 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밥을 지어 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숫가루가 한동안 지원군의 주요 야전식량이 되었다. 미숫가루는 70%의 보리에 콩, 수수, 또는 옥수수를 섞어 볶은 다음 갈아 0.5% 식염을 넣어 만든 것으로 휴대나 보존에 편리했다.
나. 하갈우리 전투('50. 11. 27~12. 7)
장진호 남단의 분기점에 위치한 하갈우리는 간이 활주로가 설치되어 있는 등 작전의 중심지였으나, 단지 미 제7연대 제2대대(-2)가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26일 야간에 제1연대 제3대대(-)와 임무 교대를 하고 제7-3대대(-2)는 덕동통로에 배치하였다.
11월 28일 야간에 중공군 제58사단이 하갈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영 해병 제41특공대가 투입되어 제10전투공병이 방어중인 동쪽 고지정상을 재탈환하였다. 이 과정에 미 제1-3대대는 전사 43명, 실종 2명, 부상자 270명의 손실이 발생하였으며 전투 및 지원 부대의 손실도 이와 비슷하였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제31연대 제1대대장이 부대를 지휘하여 하갈우리로 향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으로 대대장이 부상을 당하는 등 악전고투 긑에 개인별로 탈출하여 12월 2일 새벽까지 미 제7사단의 생존자중 670명이 하갈우리에 복귀하였다. 아침 일직 생존자 구출 작전에 나선 수색부대는 장진호 부근의 전투에 투입된 3개 대대 2,500명 중 1,050명을 구출하였는데 전투가능한 병사는 385명뿐이었다. 또한 전사자는 300명만 확인되었고 나머지는 실종되었다.
하갈우리에서 함흥으로 철수를 명받은 해병사단은 12월 2일부터 5일까지 4,312명의 부상자는 물론 병기와 대량이 병참물자를 후송시키고 후송이 불가한 것들은 파기를 하여 철수준비를 완료하였으며 598명의 증원병력을 공수받아 전력을 보강하였다. 이날 밤 중공군은 7개 사단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돌파작전 개시일인 12월 6일 새벽, 제7연대를 선두로 돌파작전이 개시되었으며 22:00시경 하갈우리 남쪽 5km 지점의 "불지옥의 계곡"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새벽이 오면서 공군의 지원을 받아 돌파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12월 7일 결국 계곡을 돌파하였으며, 하갈우리 동쪽지역을 방어하던 제5연대는 중공군의 야간공격에 악전고투하면서 200여 명의 포로도 획득하며 진지를 사수하였고, 제1연대 제3대대와 함께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적을 1,000여 명을 사살하였다.
하갈우리에서 후방을 차단하던 제5연대가 이동을 개시하고 마지막 폭파작업으로 하갈우리는 불길에 휩싸이고 10,000명의 병력과 1,000대의 차량이 실시한 돌파작전은 종료되었다. 기간 중에 사단은 전사 103명과 실종 7명, 그리고 부상병 506명이 발생하였다.
다. 고토리 전투('50. 11. 28~12. 11)
제1연대는 고토리에 연대지휘소를 설치하고 진흥리-하갈우리간 보급로를 방호 중에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11월28일 사단으로부터 하갈우리 보급로를 확보하라는 명을 받은 제1연대장은 일부 병력을 진출시켰으나 곧 고토리로 복귀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영 해병 제41특공대와 제3대대 G중대, 그리고 제7사단 제31연대 제1대대 B중대로 기동부대를 만들고, 2개 전차중대를 포함하여 하갈우리진출을 단행하였다.
[부상자는 후송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하는 미7-31연대 B중대]
그러나 고토리 북쪽 6km 지점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각 부대는 단위제대별로 야간방어태세에 돌입하고, 새벽에 다시 공격을 해왔다. 이때 중공군은 미군 포로를 이용한 심리전으로 항복을 권유하여 결국 제31연대 B중대는 부상자는 후송한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한편 행군제대의 전위인 전차대대 D중대와 제1연대 3대대 G중대 및 영 해병 제41특공대는 후위와의 연결이 끊어진 채 전진하여 하갈우리에 진출하였으며, 이 진격에 전사 및 실종 162명,부상 159명이었다. 이로서 중공군의 11월 29일, 30일에 단행된 중공군의 대공세는 일단 막아낼 수 있었다.
12월 7일 미 제1해병사단은 진흥리에 배치된 제1연대 제1대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병력을 고토리로 집결시키는데 성공하고 즉각적으로 고토리 돌파계획에 착수하였다.
이때에 상황은 중공군 제9병단 예하의 제20군단과 제26군단이 고토리 일대를 점령하고 고토리-진흥리간 보급로 차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병사단이 추진중인 이번 작전의 성공여부는 고토리-진흥리간 도로 중간에 있는 1,081고지 확보에 달려 있었다. 해병사단은 12월 8일 08:00시에 제7연대를 선두로 철수작전을 개시하여 제1대대가 12월 9일 02:45분에 진흥리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진흥리의 제1연대 제1대대는 1,081고지 점령을 위한 공격을 12:00시에 감행했으나 기상악화와 일몰로 중지하고 다음날 12월 9일 15:00시에 고지를 점령하여 이후 사단의 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2월 10일 08:30분에 차량제대의 선두가 진흥리를 통과하고 사단 지휘부는 10:30분에 흥남으로 향하였다. 제1연대는 오후부터 고토리에서 철수를 개시해 산발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순조롭게 남진하였다.
진흥리를 통과한 후에는 미 제3사단의 엄호를 받으며 함흥으로 이동하여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21:00시에 함흥지역으로 진입하였으나 고토리 돌파작전간 전사 75명, 실종 16명, 부상 256명이 발생했다.
3. 전투 결과
함흥으로 철수한 미ㅣ제1해병사단은 연포비행장 일대에서 정찰활동을 전개하였고 12월 15일 흥남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중공군은 제9병단 예하 3개 군단 12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투입되어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전투손실과 비전투손실이 막대하였는데 제24군단의 경우 90%가 동상 환자였고 제27군단은 10,000명의 비전투손실이 발생하였다. 미해병대와 접촉하지 않은 부대들도 미군의 강력한 공중폭격과 혹한에 시달렸다.
따라서 중공군 제9병단은 3개월에 걸쳐 재편성을 해야했고 '51. 3월 중순에야 전선에 복귀하였다.이번 전투에서 중공군은 지상전투에서 전사15,000~37,000명과 부상 7,500명, 항공 포격으로 전사 10,000명과 부상 5,000명이 발생하였다.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과 비교(제3권)]
무평리 공격
1. 미 제10군단의 공격계획
군단은 공격개시일을 11월 27일 아침으로 정하고 주공을 미 제1해병사단이며, 미 제7보병사단은 조공으로 사단의 우측방을 보호하게 되었다.
무평리는 유담리 서방 약 90km에 위치한다. 미 해병사단은 이곳에서 양호한 도로를 따라 북방으로 진격, 강계를 지나서 만포진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었다. 이 명령으로 사단의 후방지경선이 하갈우리 부락의 남단으로 추진 조정되었으며, 스미스 사단장은 군단장에게 건의하여 진흥리까지를 후방책임지역으로 하고 진흥리와 고토리에도 사단의 경계부대를 배치하도록 했다.
2. 미 제1해병사단의 공격
사단은 27일 주공을 제5연대 전투단으로, 제7연대 전투단은 유담리를 확보 점령하여 주공연대의 초월공격을 지원하면서 덕동고개-유담리 사이의 병참선을 방호하는 것이였다.
11월 26일,
미 제7연대 전투단 주력은 유담리에 위치하고, 제2대대는 하갈우리를 점령, 확보하고 있었는데, 전진해 온 미 제1연대 3대대와 임무를 교대한 후, D중대와 E중대는 27일 유담리로 전진하여 미 제7연대 제1대대장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F중대는 같은 날 저녁 덕동고개를 점령하여 주보급로의 엄호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제2대대 본부와 대대 화기중대, 제11포병 연대 H포대는 차량이 부족하여 아직 하갈우리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제5연대 전투단은 최초 장진호 동쪽으로 진출중, 명령이 바뀌어 서쪽으로 진출을 위해, 교대부대인 제7사단 제32연대 선발대인 제1대대에 25일 인계하고 26일에 먼저 연대 본부와 제2대대가 유담리로 이동하였으며, 27일 제1대대와 제3대대는 유담리로 이동했다.
또한 제1연대 전투단은 병참선을 방호하는데 있으며, 전투단 본부는 고토리에 위치하고, 다만 제3대대는 차량 부족으로 G중대를 지경(함흥, 서남 10km)에 남겨 두고, 하갈우리에는 H와 I 중대만 대대장 휘하에 있었다.
별도로 영국군 제41코만도와 수색중대로 하여금 사단의 좌우 측방을 방호하도록 했으나 아직 작전지역에 들어오지는 안했고, 사단 사령부는 28일 흥남에서 하갈우리로 추진할 예정이었다.
11월 27일,
조공부대인 제7연대 제3대대가 유담리-무평리간 1426고기와 1403고기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사이, 주공인 제5연대 제2대대는1271고지를 공격했으나 중공군의 저항으로 점령하지 못하고, 인접부대인 제7-3대대의 1403고지로부터 박격포와 항공기 지원으로 점령했으나 의외로 중공군이 저항이 대단하여 야간 방어를 위한 진지구축 작업에 들어갔다.
전면방어진지 전투
1. 혹한이 전투에 미치는 영향
11월 말경 북한지역은 낮 기온이 영하 20~25도, 04시경에는 영하 28~45도까지 내려갔다. 눈은 60cm가 쌓이고 눈보라로 시계가 제한도어 15m 이내도 잘보이지않아 중공군의 백색 군복이 보호색이 되었다.
칼빈소총은 혹한으로 기름이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 없고, 백병전에서는 총대가 약해서 잘 부러졌다. M1소총은 칼빈총에 비하면 추위에는 강하지만 윤활유를 많이 발면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 없기에 엷게 발라야 했다.
자동소총은 불발과 단발이 많고, 경기관총은 얼어서 2시간마다 사격을 해애 하고, 중기관총은 물대신 부동액을 사용해야만 했다. 박격포는 땅에 부딪쳐 금이 가기도 하고 곡사포는 복좌작용이 더디어 발사속도가 느리고 수류탄도 불발이 많았다.
트럭과 전차는 2시간마다 시동을 15분간격으로 걸어야 하여 기도비닉에 문제가 되었고, 땅 표면이 35cm로 얼어 굴토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며 미군의 휴대용 야전삽보다 노획한 중공군의 대형삽이 도움이 되었다.
군화는 물이 땀이 차서 동상에 잘 걸리어 수시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갈아신거나 발을 비벼야 하고 얼어붙은 전투화 끈을 푸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2. 11월 27일 저녁의 상황
미 제1해병사단의 전방 연대인 제5연대와 제7연대는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였고, 하갈우리에는 제1연대 3대대장이 지휘하는 2개 소총중대와 105밀리 2개 포대, 각종 보급정비부대가 위치하고 , 사단사령부가 28일 이동할 에정이라 사단 본부중대와 각 참모부의 주력이 하갈우리에 도착해 있었으며 공병이 수송기용 활주로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고토리에는 제1연대 전투단 2개 대대와 105밀리 곡사포 1개 포대가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고, 고토리 밑의 신흥리에는 제1연대 전투단 제1대대와 105밀리 포대가 있었다.
하갈우리에서 유담리에 이르는 보급로상 요충지 덕동고개에는 제7연대 전투단 F중대가 도착하고 있었다.
또한 하갈우리 북방 10km 지점의 신흥리에는 미 제7사단 1개 특수임무부대(보병 연대장이 지휘하는 보병 2개 대대와 105밀리 1개 포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시각, 서부전선의 미 제8군 정면의 중공군이 용산동부근에 있는 미 제25사단에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구장동 부근에 미 제2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을 따라서 돌파하고있었다. 이에 미 제8군은 정주 부근까지 진출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에게 철수하라고 명하였다.
이 시각, 중공 제4야전군 예하 제9병단의 12개 사단 12만명은 장진호부근에 부대 전개를 마치고, 미군에 대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그 세부내용은 제20군단 예하 제89사단은 유담리 서방에 전개하고, 제59사단은 하갈우리-유담리 도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유담리를 우회하여, 덕동고개에 잇는 미 제7연대 F중대의 방어진지와 유담리 남쪽의 제7연대 C중대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58사단은 28일 밤에 하갈우리의 미군을 공격하느 임무를 받고 하갈우이 서남방을 향하여 진격하고 제60사단은 고토리-하갈우리도로를 차단하려 고토리부근에서 북쪽을 향하여 이동 중이었다.
중공군 제27군 예하 제79사단은 유담리를 북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공격대기지점으로 이동이었고, 제80사단은 장진호 동쪽인 신흥리의 미군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끝내고예비로 2개 사단을 보유하였다.
중공군은 낮에는 동굴이나 민가에서 쉬고 밤에 산길을 걸어 목적지로 향하여 전진하였다.
3. 유담리 전면방어진지
11월 27일 저녁, 제5. 제7연대는 유담리 주변에 10개의 소총중대를 배치하여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미 제5연대전투단 3대대는 연대주력과 함께 무평리에 대한 공격을 하기 위해서 장진호 동쪽기슭에서 출발하여 27일 정오경에 유담리 서쪽 지역에 집결하였고, 2개 대대는 유담리에 집결하였다.
그 밖에 방어진지의 남쪽 주보급로상에는 미 제7연대 C중대(-1)가 있었고, 유담리와 하갈우리 중간인 덕동고개에는 제7연대 F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량 부족으로 제7연대 제2대대는 대대본부와 화기중대, 그리고 제7연대 대전차중대는 하갈우리에 남아 있어서 유담리의 제7연대 제2대대 소속의 D 및 E 중대는 제1대대장이 지휘하게 되었다.
27일, 제1근무대대의 분견대가 유담리에 도착하여 사단 보급소를 개설하였는데 식량과 연료는 각각 3일분, 소화기 탄약은 2일분, 포병탄약은 기본 휴대량 외에는 극하 적은 수량을 보유하였다.
제1자동차수송대대가 보급품을 실고 유담리에 도착했는데 유담리 부상자는 이 차량을 이용하여 전부 후송시켰다.
18시 30분경, 중공군은 제89사단으로 서북에서, 제79사단으로 북쪽에서 미 해병대를 야간공격으로 돌파하고, 제59사단으로 하여금 퇴로를 차단하게 하여 유담리의 2개 해병연대 주력을 섬멸하려 했다.
유담리-덕동고개
중-74사
1,384m 장진호 신흥리
중-89사 미5-I-1개소대/ 한국 경찰 1개소대
1,403m 1,282m 미7-E 미7-H 미5-G
미5-E 1,240m 미7-D
미5-3대대
1,271m 1,167m
미5-F 유담리
미7-1중
1,426m 1,294m 미7-A
미7-G
1,276m 미7-B
중-59사 1,419m
미7-C(-)
덕동산 1,653m
신흥리 , 덕동령 하갈우리
미7-F
가. 서북지역 산악전투
주공군 제89사단은 소부대로 하여금 간단한 위력수색을 실시하고, 미 제5연대 제2대대와 7연대 H중대를 정면에서 27일 21시 30분부터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28일 03시부터 재차 공격을 개시하여 제2대대의 1271고지는 탈취하지 못하고 H중대의 1403고지는 06시경에 탈취하였다.
나. 북쪽 산악지역전투
중공군 제79사단은 1384.1240.1167고지를 공격했으나 실제 미군은 1240고지뿐이었다. 그런데 1240고지를 공격하려던 중공군이 고지를 잘못 식별하여 미 제7연대 E중대가 방어중인 1282고지로 향하였고 피비린내 나는 혈투속에 고지는 지켜졌고 많은 사상자가 났다. 이에따라 미 제5연대 전투단 제1대대장은 A중대의 2개 소대를 증원하였다.
다시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고 결국 고지는 피탈되었다. 이어서 도착하는 증원부대 제5연대 전투단 C중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결국 미군이 고지를 다시 탈환하였으며 모든 부상자를 신속히 후송시켰다. 유담리에 벌어진 미군의 가장 격렬한 전투다.
※ 미군 자료중 일부 소개
중공군은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진격해 왔다. 1.2.3 제파식 공격을 감행했다. 피아가 혼전상태가 되어 총검으로 찌르고 때리는 격투가 벌어졌다. 케네모아 중사는 사상자로부터 수류탄을 모아 중대원에게 분배하고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고 발로 차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수류탄이 터져 양다리를 잃고 눈밭에 굴러 떨어졌다. 중대장은 착검이 된 소총을 얼어붙은 대지위에 곶아놓고 " 이 선에서 한 발자욱도 물러나지 마라. 부상자를 놓고 물러설 수는 없다. 우리는 E중대가 아니냐." 하지만 중대장도 곧 전사하고 말았다.
미 제5연대 C중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결국 중공군 제235연대 1대대 3중대가 공격하여 생존자는 6~7명에 불과했다. 결국 계속된 공격에도 미군의 용감무쌍한 감투정신에 중공군 제1대대는 무려 4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력화 되었다. 미군측의 피해는 E중대가 176명중 사상자 120명, 증원부대인 제5연대 A .C 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67명이었다.
1240고지에 대한 공격은 28일 01:00시에 중공군 제236연대 제3대대가 개시하였으며 미군은 제7연대 D중대가 방어중이었다. 중공군의 압력으로 정상이 피탈되며 제5연대 B중대의 1개 소대가 증언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전투에서 D중대는 거의 전원이 살상되었고 증원부대도 소대의 과반수가 전사 또는부상했다.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한국 경찰 1개 소대"
1384고지에 대한 공격은 28일 02:00시가 넘어서 시작되었다. 제5연대 제3대대는 전면 방어태세를 갖추고 I 중대의 1개 소대를 1384고지 남쪽 능선에 배치 하였고 그 남쪽 300m지점에는 기간총 2정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경찰 1개 소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중공군에 돌파되어 미군과 한국 경찰은 격멸되었으며 대대는 다시 G중대 역습으로 진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27~28일 어간에 1282고지와 1240고지가 돌파되어 포병진지에 대한 위협이 증가되었다.
28일, 서북방의 1271고지는 미 제5-2대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나 1403고지를 피탈당하여 중공군이 점령함으로서 감제당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제5 및 제7연대자은 협의하에 서남쪽 산으로 철수하여 진지를 재편성할 것을 합의하고 통합지휘를 제7연대 지휘소에 위치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5연대장은 제2대대를 철수시키면서 I중대로 1282고지를, B중대로 1240고지를 확보토록 하였으며, 제7연대장은 덕동고개의 F중대(바아버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제1/2대대를 하갈우리 방향으로 공격시켰으나 중공군의 저지로 구출에 실패하였다.
덕동고개 점령
유담리-하갈우리를 연결하는 도로는 유일하게 1차선도로 하나 뿐이고 그 중간지점에 덕동고개라는 중요한 요충지가 있었다. 사단은 양 연대의 보급로를 보장하기 위하여 덕동고개와 그 서북방 약 3km떨어진 무명고지에 1월27일 11시 30분경 하갈우리의 제7연대 F중대를 점령토록 명령하였고 중대장 바어보 대위는 지형정찰을 통하여 신흥리 도로 북쪽 도로에 진지를 선정하고 21시경 진지편성을 완료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 제79사단과 89사단이 유담리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고 서측방에서 제59사단이 유담리와 덕동고개 도로를 차단하고 먼저 덕동고개 서북쪽 제7연대 C중대 1개 소대가 점령중인 고지를 28일 02:30분에 공격하여 전사 15명, 부상 44명으로 완전 포위되어 있었으나 28일 저녁 때 제7연대 1대대가 도착하여 구출하였으나 F중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4. 11. 28일의 상황
흥남에 있는 사단장은 28일 아침, 고토리 제1연대장에게 고토리-하갈우리간의 도로개통을 명령하고 헬기로 직접 하갈우리로 날아가 11시에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28일 오후에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모든 지휘관이 하갈우리 해병대 지휘소에 모여 작전회의 개최하였으나 맥아더사령부의 별다른 통보가 없기에 그대로 공격명령은 유효한 것으로 되었다.
사단장은, 16시30분경 제7연대 전투단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공격하여 하갈우리로 통하는 주보급로를 개통하도록 명하고, 제5연대 전투단에게는 서쪽으로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제7연대 전투단과 협조하여 바어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날 유담리에 낙하산으로 각종 보급품이 투하되었다. 유담리의 연대들은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토리에 저녁때에 영국 제41코만도 보병 2개 중대가 도착하였지만 하갈우리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5. 하갈우리의 전면방어진지
가.하갈우리진지의 미군부대
11월 26일, 저녁때 미 제1연대 제3대대장 리지 중령은 하갈우리를 확보하기 위해 소총 2개 중대와 화기중대의 주력(G중대와 화기중대의 1개 소대는 차량부족으로 지경에 잔류)을 이끌고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하갈우리 진지 배치도"
← 유담리
근무대대 제7연대 대전차중대 분견대
분견대
수송대대
장진강
제2항공통제대 군단사령부분견대 중58-173연대
하갈우리
제7연대 화기중대/ 해-사령부 대대 전투공병중대
군단통신대대
제3대대 본부중대 제1연대 화기중대
비행장 공병중대 고토리→
제11-D포대(105)
제3-I중대 제3-H중대
중58-172연대
다음날 27일, 제1연대 3대대는 그때까지 하갈우리를 방어하던 미 제7연대 2대대와 교대하였으나 차량이 부족하여 제7-2대대장과 대대본부, 화기중대의 주력은 하갈우리에 남았다.
27~28일 사이에 중공군 2개 사단은 유담리의 미군을 공격하여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1403고지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다른 1개 사단은 유담리-하갈우리 보급로를 차단하고 덕동고개 F중대를 고립시켰다. 한편 장진호 동쪽 중공군 제27군단은 예하 80사단이 페이스특수임무부대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중군군 제20군단 예하 제80사단이 하갈우리-고토리 보급로를 차단하고 , 제60사단은 고토리 서쪽에서 공격중이고 그 일부는 진흥리 미군에 대해 위력수색을 실시했다.
28일 저녁, 유담리를 공격하던 중공군 제79, 89사단은 전력이 약화되어 공격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신예의 제58사단이 하갈우리를 공격하기 의해 진출하고 덕동고개의 중공군 제59사단이 또다시 공격 준비를 하였다.
28일, 하갈우리의 미 제7연대 2대대장은 덕동고개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제1연대 소총소대와 전차의 지원을 받아 보급로르 공격했으나 실패해쇼고, 제1연대-3대대도 고토리로 향하는 도로를 개통하여 했으나 실패하였다.
나. 미군의 중공군에 대한 판단
마침 I중대의 척후대가 홍문리 방향을 정찰했는데 중공군 1개 중대와 조우하여 되돌아왔다. 이로서 하갈우리가 중공군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고 하갈우리에 대한 긴급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하는 제1연대 3대대장은 원산지역 경계임무중 마전리에서 원형으로 진지를 편성하고 17일간 고립방어를 효과적으로 실시한 전례를 거울삼아 당시에 허용하여 효과가 좋았던 지역 주민을 이용한 정보수집으로 북한군의 기습을 방지했던 당시 미 육군 제181 CIC가 이번에도 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대는 주민의 자치를 허용하고 리사무소, 경찰, 등도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주민 스스로 출입통제. 기밀보장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하갈우리에 침투한 한국인 방첩대 2명"
하갈우리에 들어오는 주민은 대부분이 중공군이 진입하여 거주지에서 쫒겨난 주민들로 해병대에 검사를 받고 경찰서에 인계되어 정보과에서 심문을 받은 후 리사무소에 인계되었다.
이러한 피난민으로부터 많은 정보로 중공군이 가깝게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지만 무조건 믿을 수만 없기에 27일 아침부터 두 명의 한국인 방첩대를 주민속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토록 하였다
침투된 첩자들은 하갈우리주변에서 중공군도 만나고 주변 주민들도 만나고 수집된 정보로 중공군 부대가 하갈우리 남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방어준비"
미 제1-3대대장 리지 중령은 하갈우리에 주둔한 모든 부대의 지휘권을 사단에 요청하여 받았으며, G중대와 영국 제41코만도부대를 신속히 이동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28일, 흥남 사단으로부터 헬기로 하갈우리 지휘소에 들어와 지휘소를 개소하였고, G중대 등 추가 부대들이 오지 못하기 때문에 리지 중령은 미 제10군단 사령부 분견대와 해병 제1근무대대에게 담당시켰다.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으나 대부분 10명 이하의 선발대나 파견대였다.
다. 하갈우리의 공방
28일 저녁, 하갈우리는 적막 속에 잠기어 있었고 때때로 소화기의 총성이 울렸다. 이때 중공군 제58사단이 하갈우리 진지를 향해 남으로부터 제172연대, 동으로 제173연대가 접근하였다.
남서정면의 전투는 H중대와 I중대는 25cm 정도 지면을 파서 호를 구축하였다. 28일 22:30분경 중공군이 피리를 불고 이어서 수류탄을 던지며 시작되어 일시적으로 중공군에 돌파되면서 진내에 들어온 중공군은 전과확대보다는 약탈에 더 관심을 가져 미군들의 의복이나 소지품들에 달려들어 소지하기에 바빴고 바로 이어진 미군의 역습에 29일 04:00시경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H중대는 전사 16명, 부상 39명, I중대는 전사 2명 부상자 16명이 발생하였으며 중공군은 수백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하갈우리 동부고지에 있는 한국군 90명의 정체는?"
동부고지전투는 G중대가 도착하지 않고 있기에 혼성부대로 편성하여 미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는 미군 27명, 한국군 90명으로 편성되었으며, 도로가 차단하기 전에 28일 12시에 고토리에서 하갈우리에 도착한 부대였다.
중공군은 29일 02: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제10군단 사령부를 경계중인 한국군 제1개소대를 돌파하고 산 정상에 있는 미군을 격퇴시켰다. 미 제10군단 공병 D중대는 77명 가운데 전사 10명, 부상 25명, 실종 9명이었으며, 하지만 중공군은 더이상 밀어붙이지 않았다.
라. 미군의 역습
동부고지를 상실한 미군은 목에 비수를 들이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지 중령은 05:30분에 부대대장 마이야 소령에게 모든 예비병력으로 동부고지 탈환을 명했으나 동부고지 서남쪽의 2개 소대, 서북 반사면에 1개 소대가 산정상의 중공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29일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고토리에서 중원부대가 중공군의 사격을 무릎쓰고 하갈우리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라-1 :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
11월 28일 저녁때, 미 제1연대 3대대 G중대, 영국 해병 제41코만도, 미 제7사단 제31연대 B중대가 고토리에 도착했다. 모두가 하갈우리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고토리에는 미 제1연대 2대대가 11월 24일부터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병력은 제1연대 본부 및 본부중대, 대전차중대, 박격포 중대, 제11포병연대 2대대(105밀리 E포대뿐), 제1의무대대 D중대 등이였다. 제1연대장 풀러는 이곳에서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에 분산된 부대를 지휘했다.
이 무렵 중공군 제60사단이 고토리 서쪽지역으로 접근하여 27일 고토리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동북부의 1개 소대진지가 유린되었다.
"갈수 없는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
28일, 미 제1해병사단장의 명에 의해 제1연대 제2대대는 1개 소총중대로 고토리-하갈우라 통오를 개통시키려 했지만 중공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사단장은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가야할 모든 부대를 영 제41코만도를 지휘하는 드라이스텔 중령에게 임무를 부여하였고, 그 드리이스텔 특수임무부대는 하갈우리로 갈 수가 없었다.
29일 09:45분,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가 포병과 박격포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하갈우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29일, 사단 수색중대가 고토리에 도착하여 진지내 병력은 증강되었다.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는 출발 즉시 동북부고지를 공격하여 중공군 제58사단 예하 일부를 격파하였고, G중대는 북쪽의 1236고지에 이어서 1182고기를 공격했고, 후방에는 미 제31연대 B중대가 예비로 대기하고 있었다.
29일 13:30분경, 클라아크 대위가 지휘하는 제1전차대대 D중대와 여기에 배속된 제5연대 대전차중대의 전차소대가 특수임무부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제1전차대대 B중대가 15:00시경 고토리에 북상하여 이 부대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는 공격 개시 4시간후에 불과 4km 밖에 진출이 안되었으며 16시 15분경에는 고토리 북방 6.5km 지점에서 행군이 멈춰버렸다. 미 제1전차대대 D중대, 제5연대 대전차중대의 전차소대, 미 제1연대 G중대, 영 제41코만도 부대가 선두그룹에 있었다.
따라서 사단에 계속 진출여부를 확인하였으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갈우리지역의 방호를 위해 진격해야 한다는 명에 따라 계속 진출하기로 하고 제41코만도 후속 탄약차량에 불이붙어 도로는 폐쇄되어 후속부대는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선두부대는 후속부대의 차단당한 실태를 모르는 가운데 피해를 감수하며 전차를 선두로 진격하여 하갈우리로 들어섰다.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선 미군"
반면 차단당한 후속부대는 영 제41코만도 부대 일부, 미 제31연대 B중대, 사단 사령부 및 보급정비부대 주력으로 군수보좌관 챠이데스타 중령이 지휘하게 되었지만 전방부대를 통과 시킨 중공군이 소화기와 박격포로 맹공을 가해와 전투력 회복불가능 상태가 되어갔다. 뒤따라 오게 되어 있는 제1전차대대 B중대가 구출할 것으로 판단했으나 이 부대도 진출 중에 중공군의 공격으로 고토리로 돌아가 버려 완전히 고립된 후속부대는 죽거나 아니면 포로가 되거나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였다.
11월 30일, "항복, 부상자는 보내주라~!"
포로가 된 미군 중사가 특사로 후속부대 선두인 맥롤린 소령에게로 왔다.
"중국 사람 좋다해, 이제 끝났다 해" 포로가 된 중사는 중공군의 선무공작대원이 되었다.
"안돼, 우리도 명예가 있지"
"명예 좋다해, 그런데 총알도 없고 대포도 없는데 뭘로 싸울건지?"
"마지막 한 몸이 남을 때까지 우린 버틴다. 곧 전차가 온다"
"전차 안온다 해. 우리가 부셨다 해"
"우리는 부상당한 전우를 놓고 손들 수는 없다"
"좋다 해, 부상자는 풀어준다 해"
이렇게 해서 맥롤린 부대는 항복을 하고 무장을 해제당했다. 중공군은 무장해제보다도 전리품 챙기기에 더 정신이 팔렸고 이 틈을 이용하여 많은 인원이 서쪽으로 탈출하여 장진강을 건너서 고토리로 향했다.
중공군은 경상자는 포로로 연행하고 중상자는 도로변의 민가에 두고 갔다. 주민들은 이들 중상자에게 몰래 물도 주고 식량도 모포도 주고 간호를 해 주었으며 며칠 후에 미군이 이 지점을 통과할 때에 소속부대로 보내 주었다.
후속부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소수의 인원이 포로가 되었지만 상당한 인원이 어둠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나 고토리로 탈출하여 왔다.
선두에서 진격한 드라이스텔부대는 드라이스텔 중령이 부상으로 G중대장 싯다 대위가 지휘하여 29일 19시 15분에 하갈우리에 들어 갔으며 2개 중대 규모의 병력밖에는 없는 하갈우리는 약 300명의 인원이 증가되어 기지를 확보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고토리도 복귀한 인원도 약 300여 명으로 고토리 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
라-2 : 하갈우리에 대한 중공군 제2차 공세
30일, 하갈우리의 총성은 먼저 미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갈우리에 도착한 G중대는 리지 중령의 명으로 동부지역 피탈된 고지를 공격했다. 탈환은 못했지만 인근 고지에 올라서 중공군을 견제하게 되었고 이어서 중공군이 24:00시에 I중대와 G중대 있는 곳으로 공격을 감행해 와 I중대는 진지를 고수하였고 전사 2명, 부상 10명인 반면 중공군은 사망자만도 500~750명이 되어 퇴각하였다. G중대 지역은 12월 1일까지도 저투가 계속되고 제41코만도부대까지 지원하여 진지를 회복하였다.
중공군 제58사단은 이번 두번의 전투에서 확인된 사망자만 1,500명에 이르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반면 리지대대의 손실은 전사 33명, 부상 270명, 실종 및 기타 12명이이었다.
6. 진흥리 전면방어진지
황초령 남쪽 진흥리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는 미 제1연대 제1대대였다. 대대는 4.2인치박격포소대, 75밀리무반동총소대, 105밀리 곡사포 1개 포대를 배속받아 진흥리를 방어했다.
이 진지는 11월 26일 중공군의 탐새공격을 받았으며 , 27일 밤에도가벼운 공격을 받았다. 29일에는 진흥리-고토리간 도로가 차단되고 대대는 주민의 제보와 척후의 보고에 의해 진흥리 서쪽 계곡 부락에 약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매복하여 공격준비중임을 알았다.
30일, 대대장은 포병과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중공군을 기습하여 격멸하였으며 이 가운데는 1개 중대규모의 중공군 기마병도 있었다. 대대는 가옥을 불태워버리고 부락민은 진흥리로 이주 시켰다.
긴 애로지역 철수
1.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 결정
가. 전반적인 상황
미 제8군과 제10군단은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여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으려던 유엔군의 크리스마스공세는 중공군의 전면개입이라는 예기치 않았던 사태 발생으로 수초로 돌아갔다.
이미 공격 준비를 완료한 중공 제4야전군의 18개 사단은 25일 밤으로 서쪽의 미 제8군에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주공을 덕천지역으로 지향함으로써 제8군 우측방을 위협하였다. 그리고 중공 제3야전군 예하 12개 사단은 27일 밤부터 미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여 긴 애로지역에서 해병대를 포위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행정부는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게 되고 이에 놀란 영국 수상 애틀리가 워싱턴에 날아가 트루먼 대통령과 세계대전의 위험성을 언급하며 핵무기 사용의 자제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나. 맥아더 원수의 철수 결의
사태의 심각성을 논하기 위해 11월 28일 밤부터 29일 아침까지 동경에서는 미 제8군사령관과 미 제10군단장이 날아와 정세를 검토한 결과 철수를 결정했다.
다. 미 제10군단의 철수명령과 미 해병사단의 조치
29일 저녁, 미 제10군단은 해병사단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1개 연대 전투단을 신속히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전용하여 장진호 동안의 육군부대 페이스특수임무부대를 구출하라 명령하고 1대 전투단은 유담리-하갈우리 도로를 개통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미 29일 아침부터 해병사단 명령으로 공격을 중지하고 유담리의 미 제7연대 전투단은 제5연대전투단 A중대와 제7연대 B. G 중대를 혼성대대로 편성하여 덕동고개의 제7연대 F중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유담리간 도로를 개통하려 하였다.
2.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가. 양 연대장의 협조
유담리와 하갈우리는 유선은 두절, 무선은 지형적 영향으로 불통이었다. 하지만 두 연대장은 제7연대 전투단의 리젠버그 대령이 선임이었지만 통합지휘체계없이 양 연대장이 긴밀한 협조로 아무런 문제없이 원활한 작전을 수행하였다.
나. 돌파 준비
미 제7연대 전투단은 유담리-하갈우리의 도로를 돌파하여 하갈우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방어진지 남쪽 출구의 요충지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 제7연대장은 1246고지의 제7-3대대를 차출하기로 하였으며 이르 위해 제5연대 전투단도 그 배치를 변경하기 위해 30일 아침 제5연대 2대대가 배치를 변경했다.
대대의 우측방은 미 제5-3대대와 인접된 상태로 두고 좌익을 철수시켜 1294고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한편 제7-3대대는 유담리 남쪽 4km 지점에 신진지를 구축할 예정이었고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한 경비행기 활주로 작업이 한창 진행 되었다.
11월 30일, 중공군이 제5-3대대에 공격을 해왔으나 실패하였고 오후에 군단으로부터 명령이 하달되어 양개 연대 동시에 하갈우리로 철수하도록 지시되었다.
이에 양 연대장은 협조를 통해 12월 1일 08;00시에 제5-3대대를 전위대대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먼저 보병이 도로 양측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일부 병력이 적의 간격을 돌파해 산길을 따라 은밀히 덕동고개로 진출하여, 바아버중대를 구출함과 동시에 고개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주력의 통과를 엄호한다.
산길로 기동하는 부대는 제7-1대대로 하고, 남쪽으로 공격하기 전에 제7-3대대가 1542고지를, 별도의 1개 중대를 가지고 1419고지를 탈취하여 주력이 공격개시할 발판을 마련토록 하였다.
유담리 장진호
1294m 5-2대대 : 5-1,3대대 철수엄호 후 1276고지에서 7-1대대와 교대후 주력의 서북방면 엄호 및 후위
1100m
5-1대대 북쪽엄호/주력통과후 좌익 엄호
1276m 후위대대 5-2대대 ↓
1376m 우익엄호 5-1대대
1542m 좌익엄호
제7-3대대(-)
1419m 7-3-H중대
1581m ↓7-I대대 : 1276고지에서 5-2대대에 인계후 야간 기동으로 H중 대를 초월하여 산악기동으로 7-F중대 구출작전
전위대대5-3대대
덕동산 1653m
덕동고개 제7-F중대
신흥리 →하갈우리 8km
※ 유담리에 매장한 전사자 유해는 휴전 후에 본국으로 봉송되었다.
3. 중공군의 구상
사실 중공군은 미군을 포위 했으나 미군이 각개 진지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중공군은 마치 밤송이를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주 공격목표는 하갈우리 해병대로 하고, 유담리의 2개 연대는 철수로상의 애로상에서 공격을 가하여 포착, 격멸하도록 하고 황초령에서 미 해병사단의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도로 연변의 고지진지를 강화하여 유담리에서 탈출을 시작하는 즉시 공격 하도록 하였다.
4. 철수개시
12월 1일 아침, 제5-1/3대대는 북쪽에서 중공군 제79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제5-2대대는 1294고지를 점령하여 서쪽으로부터의 중공군 공격을 저지하고 , 1276고지에는 제7-1대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며 야간에 제5-2대대에 인계후 덕동고개로 산악전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7-3대대는 1542고지와 1419고지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으며, 08:00시에 미 제5-1/3대대가 철수를 시작했다. 항공기, 포병과 협조된 이탈작전으로 피해없이 철수를 하였으며 제5-2대대도 1276고지로 철수하여 제7-1대대의 덕동고개로 전진을 보장했다.
한편 제7-3대대는 1542고지와 1419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저항에 종일토록 격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철수 부대인 제5-1대대는 1100고지 일대를 점령하여 북방엄호에 돌입하였으나 제5-3대대는 제7-3대대가 1542고지와 1419고지를 점령하면 이것을 넘어서 전진하려 했으나 공격에 진전이 없자 바로 도로를 따라 15시에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1419고지의 중공군 저항이 의외로 거세 대대는 H중대만으로는 점령이 어렵다고 보고 A중대에 이어 B중대도 투입하여 19시 30분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제7-1대대가 피해가 컷기 때문에 연대장은 H중대를 이 대대에 배속시켜 제7-1대대는 A.B.C.H의 4개 소총중대로 재편성하고 부상자를 도로변으로 모두 옮겨 전위인 제5-3대대 구호소로 후송했다. 그리고 다시 목적지인 덕동고개로 산악기동을 계속했다.
5. 덕동고개 부근의 전투(5일동안 전투에서 F중대는 중공군 사살 1,500여 명, 미군전사는 30여 명)
유담리-하갈우리간 치대의 요충지인 덕동고개는 27일 저녁부터 제7연대 F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중대장으로 보직된 것은 11월 7일이었다. 그는 1940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병사로 2년간 근무하면서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1943년 11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유황도에서 승리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단련된 장교였다.
그는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천막설치를 뒤로하고 바로 진지구축에 들어가 전면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각종 장애물을 보강하며 포병과의 협조체계도 갖추었다.
영하 29도가 내려가는 혹한에, 중공군 제79. 89사단이 유담리에 공격을 개시하고 중공군 제59사단이 유담리-하갈우리 도로를 차단하고 F중대로 육박해 오고 있었다.
28일 02:30분경, 중공군이 바로 진전 동서남북에서 귀신처럼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무너지면 또 밀려오고 무너지면 또 밀려드는 제파식 공격으로 사면에서 압박을 가해 왔다.
하지만 F중대에는 유항도 전쟁의 영웅 중대장이 있고 제2소대에 "카페라다"일등병이 있었다. 서측을 방호하던 제2소대 소속 카페라다는 참호속에서 얼어있는 발을 문지르고 침낭안에서 전투화를 벗고 있는데 총성소리를 듣고 양말 바람에 뛰어나와 호 속에서 우뚝서서 소총으로 침착하게 조준사격으로 10명이상을 쓰러뜨렸다. 그런데 이제 소총이 작동하지 않는다.
"일등병 카페라다의 분전"
"너희들 잘 만났다. 어디를 감히 치고 들어와, 탕탕탕~"
"우리 쌀람 미군 좋아해"
"무슨 소리야, 너희는 적군이야, 탕탕탕~"
"우리 시계 하나만 주면 봐준다 해, 화내지 말고 살아야지"
"헛튼 소리마라, 우리는 물러나지 않는다, 탕탕~"
일시 적막이 흐른다.
앞에 있던 중궁군이 모두 쓰러지고 그들의 앞잡이 역활을 하던 미군포로도 어디있는지 사라졌다.
그런데 총알이 없다. 아니 총이 얼어붙어 작동이 안된다.
이걸 눈치챈 중공군이 다시 기어오르고 있다.
"총을 달라, 총을 달라~" 외치는 카페라다
"여기 있다. 수류탄도 있다"
"던져, 빨리 던져. 저기 바로 적이야!" 호안에 부상병이 본인들의 총을 던져주고 수류탄을 들고 호밖으로 굴린다
이어지는 전투는 1 : 20의 전투다.
기어오르는 중공군이 방방이 수류탄을 던진다.
달빛에 하얀 눈은 대낮처럼 주변을 훤하게 하고 있다. 포병부대에서 조명탄이 오르고 박격포 지원 사격도 이어졌다.
"에이, 퍽" 옆에서 총검으로 찌르는 백병전이 벌어져 두개골이 터지는 소리가 난다.
누가 고꾸리지는지는 알 수 없다.
날아드는 수류탄을 손으로 주어 호밖에 굴려보낸다.
때로는 양말밖에 안신고 있는 발로 수류탄을 발길질로 차내며 총을 당긴다.
중공군은 쓰러지면 또 올라붙고 쓰러지면 또 올라붙고 끝이없이 몰려든다
이번에는 남측으로 몰려들어 박격포 반장 등 10여 명이 살상되었다. 중대 지휘소로 몰려든다. 하지만 중대장 바아버가 있다. 중대장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때로는 기관총을 당기고 날아오는 수류탄을 군화발로 차서 중공군에게 날려보냈다.
하지만 동측 I소대는 피해를 입지않았다. 즉시 남측의 침투한 중공군에게 조준사격이 가해졌다
새벽이 온다.
1,000미터 이상의 고지, 덕동에 해가 오르고 드디어 비행기의 출격이 시작되었다. 항공관측반에서 무전을 날린다.
06:30분, 덕동고개의 전투는 끝났다. 중대의 피해는 전사 20명, 부상 54명으로 약 31%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공군의 유기체는 약 450구가 되었다.
중대는 부상자들의 화기와 탄약, 중공군 시체에서 수류탄 드을 모아 재분배하고 공중보급을 요청했다. 부상자는 눈속에 구멍을 파고 침낭을 깔아서 보호하고 교대로 천막에 들어가 온기를 찾도록 하였다.
28일에 하갈우리와 유담리에서 F중대를 구출하려 부대가 들어오지만 이미 도로가 차단되어 접근이 안되고 공중보급은 때로는 잘못 낙하되어 적진에 더러는 떨어지는 악순환을 하면서 소모된 탄약과 부상병을 위한 들것과 몰핀주사액등이 보급되었다.
29일 02:15분, 중공군이 다시 북측에서 시작하여 공격이 개시되고 아침에 재편성을 하니 전사 5명, 부상 29명이었으며 중공군은 200명 이상의 시체를 남기고 일단 후퇴하였다.
30일 02:00시경, 영어로~
"F중대 너희는 독안에 든 쥐다, 항복해라~"
"우린 절대 항복못해 못한다고~"
"우린 따듯한 옷을 주고 밥도 준다, 빨리 항복하라"
"우린 못해, 살고 싶으면 빨리 물러나라"
"카페라다야, 총을 버려라. 우리는 여기서 추위도 없고 인간답게 대우받고 있다. 카페라다야 총을 버려"
펑,펑 하늘에 조명탄이 터지고 대낮처럼 주변이 밝아졌다.
이 때다, 서북방 바위산에 거치된 중공군의 4정의 기관총 머리 위에 105밀리 포탄이 명중하였다.
"꽝 꽝꽝꽝~" 중공군 기관총이 하늘로 날라갔다.
12월 1일, 산발적인 중공군의 공격이 있었으나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유담리에서 출발한 제7-1대대가 적진지를 돌파하여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12월 2일 11시 25분, 드디어 제7-1대대가 F중대 진지에 도착하였다. F중대는 5일동안 피해는 47%로서 전사 26명. 부상 89명, 실종 3명이었으며 장교는 7명중 1명만 부상당하지 않았다. 진전에 나뒹굴고 있는 중공군 시체는 1,500구에 달했다.
중공군은 숫적 우세만 믿고 인해전술로 제파식 공격을 감행하다 미군 1개 중대에 연대병력이 죽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6. 야간침투 돌파
"야간에 도로가 아닌 산악기동을 택한 미군의 판단"
유담리-하갈우리간의 전투에서 미 제7-1대대가 취한 행동은 극히 드문 전례중의 하나다.
미 제7연대 전투단장 리젠버그 대령이 일부러 이런 전술을 택한 동기에 대해 "중공군은 반드시 미군은 도로를 따라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항공기나 포병 그리고 박격포의지원이 별로 유효하지 못한 야간에 도로가 아닌 지형으로 미군이 기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따라서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 야간에 도로가 없느 곳으로 기동하여 적의 간격을 돌파했던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산악지형 돌파에 맞는 장비와 고립을 고려한 준비"
제7-1대대장 데이비스 중령은 조지아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하여 제2차세계대전에 참여한 대대장 출신이다. 그는 출동에 대비하여 통신장비로 좀더 통달거리가 먼 무전기 AN/GRC-9을 휴대하고, 포병은 포병용 SCR-610을 휴대하고, 항공연락장교는 연대본부 위치에서 찦차에 장착된 무전기로, 전방항공통제관 등은 무전기로 항공기와 연락하여 대대정면세서 근접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식량은 각자 기호에 맞는 4끼분을 휴대하고 전원이 침낭을 준비하며 개인하기와 공용화기 탄약도 기본휴대량보다 많게 보유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갖고 이동하도록 하였다.
대대는 12월 1일 21시, 1419고지를 출발했다. 방향유지방법으로 나침반과 하늘의 별, 산봉우리의 생김새, 포병의 신호탄 등을 활용하게 되었지만 막상 깊은 산속에서 이러한 것은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나침반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제 기동간 선두부대가 방향을 잃어버려 그대로 진출하며 결국 도로로 나가 중공군의 먹이감이 되게되고 아군의 포병화력이 무용지물이 되게 된다. 이유는 아군의 머리위에 포탄을 쏘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전기는 불통이고 귀덮개를 하고 있어 구두로도 어려운 처지였다. 이때 대대장이 앞으로 직접 나가 선두에 방향을 바로 잡았다.
12월 2일 06시, 대대는 덕동고개 북쪽 1653고지를 공격하게 되는데 지형이 험준하여 공격이 어려웠다. 이때 무전도 어려웠는데 바로 F중대와 교신이 되어 F중대에서 항공지원이 요청되어 고지를 탈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7. 사단주력 철수
가. 전위대대(미 제5-3대대)
12월 1일 15시에, 미 제7-3대대를 초월하여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타플리트 중령이 지휘하는 이 대대는 인천상륙작전시 선발대로 월미도를 점령한 부대로서, 전차 1대를 선두로 도로 양측의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중공군에 대해 2개 중대를 도로 좌우에 전개시켜 공격하면서 전진했다.
심야에 중공군의 맹공으로 선두인 I중대가 피해가 심했다. 대대는 2일에 미 제7-2대대 D.E중대를 배속받았다. 이 부대들은 유담리 서북방 1282고지와 1240고지 전투에서 피해가 많았고 따라서 두개 중대를 재편성하여 1개중대로 하여 D.라 하였다.
12월 3일, 02시에 덕동고개 F중대에 도달하게 된다
나. 주력
12월 1일 밤,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제5/7연대 전투단의 주력은 중공군의 심야공격에 많은 피해를 받았다. 그러나 1542고지를 점령하게되어있는 제7-3대대는 고지 정상을 점령하지 못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여기에 공격을 하게 되었고 도로를 엄호하는 제7-3대대는 중공군이 효과적으로 도로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날이 밝자 중공군의 압력은 누구러 졌다.
다. 후위
미 제7-3대대의 북방에는 미 제5-2대대가 위치하여 1276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는데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후위가 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12월 2일 0시부터 제5-2대대는 1276고지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정상이 일부 피탈되기도 하면서 전투기의 야간 근접지원도 받으며 진지를 사수해 차량종대의 통과를 엄호하였으며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며 후위로 출발했다.
라. 측위
미 제5-2대대 동북방에는 동 연대의 제1대대가 북쪽을 향해 진지를 점령하고 유담리분지와 장진호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12월 1일 21시경에 장진호 위를 걸어서 약 100며의 중공군이 공격을 해왔으나 박격포와 포병화력으로 격퇴하였고 밤새 침투는 게속되었으나 진지를 사수하였다.
대대는 2일 정오가 지나면서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 종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 미 제5-3대대와 미 제7-1대대의 연결
12월 3일 아침, 전선은 15cm의 강설에 덮혀 있었다. 전위인 제5-3대대는 선두 전차를 따라 진출하며 공병소대가 후속하였는데 최초 48명이던 소대원이 17명만 남았다. 나머지 중대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덕동고개에 다가서고 있었다.
한편 덕동고개의 제7-1대대는 F중대와 합류하였으며 일부러 불을 피워서 중공군의 사격을 유도하여서 그 위치를 알아내 격멸하고 데이비스 대대장은 덕동고개를 감제하고 있는 북쪽의 덕동산 1653m를 직접 C/H중대를 지휘하여 탈환하였고, 부대대장은 덕동고개 남족쪽 중공군을 A/B중대를 지휘하여 공격하여 제5-3대대의 H중대와 협동공격이 되어 격멸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12월 3일 13시, 미 제5-3대대와 미 제87-1대대는 함류하게 되고돌파작전도 성공을하게 되었다. 4일간의 전투에서 전위대대의 손실은 약 56%에 달했다.
8.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로
차량종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중상자를 수용하였다. 경상자는 하차하여 중상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양 연대장 짚차에도 부상자로 채워졌다.
종대의 이동간 상공에는 정찰기 둗대가 더서 적 부대의 동정을 통보했다. 전방과 양 측면에는 전폭기가 엄호했다. 해병전투비행대는 12월 3일 총 145회의 출격으로 종대를 엄호 하였고 필요시에는 공중보급도 하였다.
12월 3일 19시에 선두가 하갈우리에 들어서고 12월 4일 14시에 후위의 제7-3대대가 들어옴으러서 22km의 1단계 철수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전언이 8일만에 난방이 된 천막에서 식사를 하였다. 기간중 부상자는 1,500명이고 이중 600명은 들것에 실린 환자였다. 이중 1/3이 비전투손실로 동상환자였다.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9시간, 후미는 77시간이 소요되었고, 한시간에 약 286m~370m 전진하였다.
반면 중공군은 하갈우리에 병력을 집중하지 못했고 유담리로부터 축차적으로 공격을 해 옴으로써 미해병대의 압도적인 화력에 피해가 막심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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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청진. 백암 철수 작전을 알아보겠다.
2)) 청진. 백암 철수 작전(전사 142명, 부상 448명, 해불 340명 발생)
국군 제1군단은 미 제10군단의 주력부대들이 압록강 상류지역(장진호-혜산진)으로 진출할 무렵인 11월 하순경 백암-청진 선으로 진출하여 두만강 진출을 목전에 두었다. 이 무렵 11월 27일 제1군단자은 유엔군의 총공세작전 방침에 의거 두만강 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명령을 내렸다.
수도사단은 2개 연대로 회령을, 1개 연대로 웅기를 점령, 확보하라. 그리고 제3사단은 최단시간에 1개 연대로써 나남-무산 가도를 따라 무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27일 국군 제3사단은 합수에서 무산을 포위공격하기 위하여 제22연대가 합수 북쪽 백암 일대로, 제23연대가 청진 남쪽 나남으로 각각 진출하여 공격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제26연대는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삼수, 갑산, 혜산진으로 진출하였다. 수도사단은 제18연대가 청진에서 회령을 목표로 부령에, 제1기갑연대가 웅기를 목표로 부거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서히 북한군의 반격이 강화되기 시작하는데 11월 30일 미 제10군단장으로부터 함흥-흥남으로 철수명령을 받았다. 이에 제1군단장은 12월 1일 제3사단의 엄호항에 수도사단이 북청-이원으로 철수하고, 이어서 제3사단은 성진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수도사단이 12월 4일 성진에 집결하였고, 제3사단 주력도 길주에 집결하였다.
12월 7일, 수도사단 본부와 제18연대는 내린 눈으로 육로이동이 어려워 미 함정편으로 성진에서 흥남(서호진)으로 철수하였고, 미 제7사단에 배속되었던 제26연대는 북청-흥남항 동쪽 마전리로 이동한다.
그동안 수도사단 철수를 엄호하던 제3사단(-)은 길주에서 성진에 집결하여 미 함정편으로 흥남 외항으로 이동하였다.
9) 38도선으로 반전
중공군의 2차 공세(11월)를 맞아 유엔군과 국군은 서부전선에서 청천강 교두보를 포기하고 철수한데 이어 동부전선에서도 함흥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병력의 열세와 현상황에서 추가적인 병력증원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미 합참은 평양-원산을 연결하는 선에서 방어하기를 요구하였다.
12월 4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이 도쿄로 찾아가 당분간 병력 증원은 불가함을 통보하고 4일~6일까지 전선을 시찰하고 12월 7일 2차 회담을 통해 단게별 방어선을 설정하여 지연전을 펼치면서 부산으로 철수하는 계획에 합의하였다. 이 계획에는 9개의 방어선이 설정됙거, 서울 북쪽에 4갱의 방어선, 최종 방어선은 개전초기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가) 평양 철수작전
당시 미 제8군사령관은 12월 2일 항공정찰과 정찰대의 보고에 의해 이미ㅐ 공산군이 평양-원산 도로를 차단하였음을 간파하고, 이는 적이 평양 이북에서 아군 주력을 포위섬멸하려는 징후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관은 12월 4일 08:00시를 기하여 평양 남쪽 겸이포에서 곡산에 이르는 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한다. 당시에 임진강과 서울로 철수하기 이전에 미 제8군이 점령할 제1단계 방어선은 평양 겸이포-중화-율리-곡산을 연하는 선, 제2단계는 해주-신믹-신계-이천-김화을 연하는 선, 그 다음은 서해안 예성강 입구-시변리-철원-화천을 -양양 선, 즉 38도선으로 계획하였다.
한편 전방 군단들이 철수하는 동안 평양, 진남포에서 물자 후송작전이 계속되었다. 지난 몇 주 동안에 평양에 집적된 복브폼은 단기간에 후송시킬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부상병 후송과 근무부대 수송에 열차가 우선 배정되어 열차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여기에 아군의 하옹폭격으로 열차 조차장이 일부 파괴되어 후송작전이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해군 구축함 4척과 영국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의 엄호하에 미 해군의 LST, 일본 수송선, 미 해군 수송전대, 100여 척의 소형선박 등이 총동원되어 부상병, 포로, 이 지역의 군수물자, 3만여 명의 피난민을 수송하였고 수송하지 못한 보급품 2,000톤은 파기 된다.
당시에 중공군은 미 제8군이 평양을 사수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 군의 주력부대들이 먼저 평양을 철수함으로서 그들은 평양을 무혈입성하게 된다.
당시에 미 제8군은 결정적인 전투를 피하면서 지연전을 펼치는데 주안을 두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12월 8일 주력부대들이 제2 방어선으로 철수를 개시하고 있을 무렵에 38도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서부전선 철수상황('50.12.1~12.23)
숙천 순천 (12.1)
성천 양덕 원산 동해안
(12.3)
평양 대동강
중화 율리
진남포 겸이포 곡산
사리원 신계 이천
평강 간성
시변리 철원 김화 제2방어선
예성강 연천 화천 A선
양양 B선 12.23
해주 개성
38도 38도
문산 포천 춘천
의정부 홍천 강릉
서울 횡성
수원 여주 원주
이 무렵 중공 팽덕회는 평양 일대에서 미 제8군의 주력을 포위격멸하지 못하게 되자, 12월 8일 모택동에게 보고하여 12월 17일 중화, 상원, 수안 지역을 집중공격하여 유엔군 주력을 격멸하면 기회를 보아 38도선을 돌파항여 서울을 재탈취할 것이며, 만약 주력을 격멸치 못하면 38도선 북족에서 추격을 중지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점령하도록 유인하여 낸년에 새로운 공격으로 주력을 격멸하고자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계획도 제8군이 서둘러 38도선으로 철수하여 차질을 빚게 되었고, 반면 아군은 주력부대의 전투력을 유지한 채 38도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나) 흥남 철수작전
미 제10군단은 최초에는 미 해병사단과 국군 제1군단이 함흥으로 철수하면 함흥-원산 일대에 강력한 거점인 해안교두보를 확보할 계획이었으나,. 12월 8일 유엔군사령관의 흥남철수지시를 받게 되자 서둘러 철수계획을 준비하였다. 군단장은 11일 해병사단의 장진호 철수 작전이 딜단락 되자 미 제3사단(배속:국군 해병대)을 연포-오로리에, 미 제7사단을 흥남 북쪽에, 그리고 국군 제1군단(수도사단 제1기갑연대, 제3사단 제26연대)를 함흥 동쪽과 동해안에 배치하여 교두보를 구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난 공세작전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미 제1해병사단을 선두로 미 제10군단 본부와 국구 ㄴ제1군단, 미 제7사단, 미 제3사단 순으로 철수하도록 한다.이런한 철수를 보장하도록 3개의 작전통제선을 설정하였다.
당시에 미 제10군단이 철수시켜야 할 물동량은 병력이 105,000명, 차량 18,422대, 전투물자 35,000톤이었다.
[국군 제18연대가 수도사단에서 제3사단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 서호진에서 같은 제대로 부산항으로 철수]
이러한 철수계획은 12월 11일 연포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 장군에게 보고되어 승인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 제3사단이 가장 먼저 철수하게 된다. 당시 사다능ㄴ 성진에서 해상으로 이동하여 10일 14:00시에 서호진에 상륙할 계획이었으나 상륙하지 않고 서호진에서 방어중이던 수도사단 제18연대를 승선시켜 동부전선에서 제일 먼저 부산항으로 출항하였다. 다음은 미 해병사단이 15일 09:00시에 부산으로 출항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미 제7사단 제32연대와 제31-1대대, 제10군단 본부가 출항한다. 국군 수도사단은 17일 야음을 이용하여 미 제7사단 주력에 방어지역을 인계하고 다음날 새벽에 부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해상이동 도중에 미 제8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삼척으로 상륙장소가 수정된다.
[주민들은 반동으로 몰려 다 죽습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원하는 주민부터 배에 태워 철수시켜 주십시오]
20~21일에 미 제7사단 제17연대와 제31연대(-)가 승선을 완료하자, 이어서 미 제3사단이 24일 승선을 완료하면서 14:30분에 흥남항은 화염에 휩싸이며 폭파 되었다.
당시에 국군 해병대는 제1,3대대는 원산비행장 시설의 철거를 지원하한 후 9일 야간에 미 함정편으로, 해병대(-)는 15일 항공기 편으로 부산으로 철수한다.
다) 38도선 확보
38도선 배치상황('50. 12.26)
시변리
임진강 철원 김화 북한강 동해
중40군 중42군
연천 화천 화천저수지 양구 북2군단 국-수도군단
중50군 중39군 중38군 중66군 북5군단 인제 소양강 양양
개성 고랑포 국8사 국3사
북-1군단 국1사 국6사 미24사 국2사 국5사 춘천
문산 덕정 가평 국3군단=국2군단 C방어선
미25사 미1군단=미9군단 국9사
미9군단=국3군단
봉일천 의정부 홍천강 홍천
터키여
서울 북한강 양평 횡성
인천 경안리 원주
수원 남한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