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농사지어 먹고 각자 옷 만들어 입으며 자기 풍속을 편안히 여기고 자기 일을 즐기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가까운 이웃 나라조차 왕래할 일이 없는, 그런 나라를 이루는 것이 최고의 정치다.” 무위자연의 사상가 노자가 꿈꾼 세상이다. 문명의 발달이 없으면 욕망도 줄어들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도연명의 무릉도원처럼 오랫동안 이상향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일찍이 사마천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사람들이 눈과 귀, 입과 몸, 그리고 마음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온갖 좋은 것에 노출된 지 이미 오래여서, 제아무리 기가 막힌 이론과 말솜씨로 설득하려 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게 그 이유다. 따라서 이제 최고의 정치란 사람들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서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익을 잘 얻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통치자가 사람들과 이익을 두고 다투려 한다면 그건 최악의 정치다. 부유해지고자 하는 욕망을 탁월하게 이룬 이들을 다룬 <화식열전(貨殖列傳>의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통치자가 사람들과 이익을 다투려 한다면 노자의 ‘소국과민’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공(公)과 사(私)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단계다. 따라서 개인이 추구하는 사적 이익이 전체의 공적 이익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가 확장되고 국가 체제가 세워질수록 사적 이익은 공적 이익과 충돌하기 시작한다. ‘公’의 자원을 ‘厶(私)를 등지다’라고 보아 ‘사심을 배제하고 공평하게 나눔’의 의미로 해석해 온 전통이 이를 반영한다.
유교적 국가 이념이 보편화됨에 따라 공에는 긍정, 사에는 부정의 가치가 점차 더 많이 주어져서,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넘어 멸사봉공(滅私奉公)을 강조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공’의 자원을 ‘사’의 반대로 해석하는 것은 후대에 생긴 뜻이 반영된 것이다. 이보다 앞서 갑골문에 사용된 ‘公’은 ‘조상’ 혹은 ‘신분이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공의(公義)라는 말에 이미 통치자의 그림자가 묘하게 드리워진 건 아닐까.
사마천의 말처럼 각자 사적인 이익을 잘 얻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적인 정치는 필요하다. 다만 이를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권력을 쥔 통치자가 공평무사(公平無私)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성호 이익은 백성에게 부과하는 사역 다섯 가지가 불공평하게 부과되고 있음을 비판하는 글의 첫머리에 <시경>을 인용했다. “나라를 공평하게 다스릴 위치에 있으니 온 세상이 제대로 유지되게 해야 하거늘.” 주나라 대부 윤씨를 풍자한 시 <절남산>의 한 구절이다. 이 시의 앞 대목에서는 “화려하게 빛나는 태사 윤씨여, 공평하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라고 하여 통치자의 기본 덕목인 공평함을 갖추지 못했음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춘추호씨전>에서는 그의 행적과 죽음을 기록하면서 신분에 따른 관례상의 호칭도 없이 그저 ‘윤씨’라고만 낮추어 지칭했다. 대를 이어 높은 권세를 누리면서 불공정한 처사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인물에 대한 경계를 담고자 한 것이다. 한 사람이 돌아앉아 눈물을 흘리면 통치자에게 공평무사의 원칙을 요구하는 것은 오늘도 다르지 않다. 사회가 아무리 복잡해지고 정치 제도가 발전한다 해도, 이 원칙의 견지 여부는 결국 권력을 쥔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달려 있다. 사적으로 흔들리기 쉬운 부부, 가족, 친지와 관련된 일에서 공적 잣대를 얼마나 엄격하고 일관되게 적용하는지가 늘 시금석으로 여겨져 온 것도 이 때문이다.
군 임무 수행 중에 안타까운 변을 당한 채 상병 사건에 대한 수사 외압 의혹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의혹을 증폭시키는 몇몇 정황이 가리키는 대로 그 외압의 근원이 대통령실까지 올라간다면, 이는 공평무사의 원칙이 매우 심각하게 훼손된 사례다. 사소해 보이는 틈이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는 법이다. 이 일의 실상을 떳떳이 밝히지 않는 한, 정권의 기반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역사에 ‘윤씨’라고 지칭되는 인물이 또 생기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호 이익은 불공평한 사역의 문제를 일일이 지적한 뒤에, “한 사람이 돌아앉아 눈물을 흘리면 온 집안사람이 그로 인해 즐겁지 못하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통치자가 부조리한 현실을 알면서도 방관만 할 뿐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린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도 손을 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오늘의 정치는 구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채찍질을 가하여 어서 죽으라고 재촉하고 있다.”
통치자가 누구나 자유롭게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공평한 여건을 마련해주는 본분을 망각한 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쟁취하는 데에 혈안이 된 최악의 정치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오늘, 돌아앉아 눈물 흘리는 이가 없는지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살펴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