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발렌타인데이를 하루 지난 날 집단상담 모임이 있습니다.
어떤 질문은 한번에 답해지지 않아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대답의 한 귀퉁이를 헐어서 우리 얘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글 읽고 함께해주세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며 사는가?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영문법을 배울 때 ‘재귀대명사’라는 것도 배웠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채 ‘self’라는 말의 용법을 외우기에 바빴다. 그런데 사회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가(I), 나를 보는 것(self)’이라는 개념을 “아하!”하고 알게 되었다.
주격인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할 때는, 내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자아개념이 그 바탕이 되는 것이다. 객관의 능력을 아무리 잘 갖추고 있어도 자신을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보고 있으면 그 능력은 충분히 제대로 쓰여질 수 없다.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을 꼭 그만큼만 펼치게 된다는 말이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를 뽑는 길고 긴 과정을 보면서 무척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한계를 좁고 작게 잡아 그 한계 안에 머무르는 때에 남성과 여성 모두의 대통령이 될 재목으로 자신을 파악한 힐러리가 있어서다. 그뿐인가.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흑인은 피부색깔 때문에 백인들과 학교도 같이 다니지 못하고 버스도 나란히 타지 못했는데, 흑인 오바마는 흑인과 백인 모두의 대통령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그 둘이 정말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어서 누가 이기든지 감격의 기립박수를 보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렇게 건강하고 정확하게 자기자신을 보는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자신을 정확하게 못 보게 된 채 자신의 삶을 살게 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삶을 잘못 진행시키게 되거나 한정된 틀 안에서 극히 축소된 삶에 멈추게 된다.
아이들에게 자기를 소개하라 하면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 아무개입니다”라고 똑같은 어조로 앵무새같이 말한다. 학교, 학년, 반이라는 기준으로만 자기를 틀지어 본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학교 소속도 그렇지만, 우리는 지연과 혈연, 계층으로도 우리 자신을 얽매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파로 자신을 한정하고 하나님도 그 속에 자신과 함께 묶어두려 하지 않는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강부자·고소영·SKY’ 같은 말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않는 우리 세태를 잘 들려주는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그냥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헛되게 살고 있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모든 사람이 다르고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로 스스로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보는 틀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그것에 맞추어 사람을 보고, 평가하고, 편 가르고, 정죄하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태도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겉모습으로 결론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하지 않았던가? 외모가 평생을 사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을 터이다. 외모 때문에 가인(佳人) 스스로 자기의 내면을 키우지 않았을 수 있고, 가인을 대하는 이들도 거기 멈추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리 가운데 있어도 늘 눈에 띄게 아름다운 사람을 상담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언제나 외모로 사람의 마음을 끌기에 그의 내면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대하게 되었고 따라서 깊은 관계를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그의 문제는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면서 내면을 개발하여 보여주지 않고, 새침떼기로만 살아가는 데 있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서로 소통하며 사는 것이 필요한데 말이다.
겉모습을 보기 위해서 좋은 거울이 필요하다.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볼 때도 좋은 거울이 있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거울 구실을 한다.
살기 고달프고 늘 아파서 짜증나있는 어머니와, 참을성 없고 욕설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 젊은이가 있다. 이제 연애해 결혼하게 되었는데 잘 하고 있는 일인지 자기결정에 대해 도통 자신이 없다고 했다. 늘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선뜻 아무 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냥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했는데 연애는 남 따라 할 수 없는 것이고, 결혼은 더더욱 남 따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오바마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케냐 아버지와 네덜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부모의 이혼 후 인도네시아 양부 품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이상주의자였고 양부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아이의 현실을 잊지 않게 해준 양부도 오바마가 자신을 비추어보게 된 거울 구실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남다른 인물로 자신을 보게 한 중요한 거울은 이상주의자 어머니였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한껏 자신을 살리고 꽃 피우고 열매 맺으려 하는 꿈을 가지도록 하려면 어머니는 이상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아이가 자기답게 충분히 자라는 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용납되겠는가!
우리 모두 오바마를 길러내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오바마가 되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베드로같이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해 통곡하고도 세 번씩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책임을 맡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출애굽지도자 모세이고, 우리가 여예언자 훌다이고, 우리가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자기개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평생을 두고 우리 마음을 비춰볼 거울을 잃지 말고, 눈뜨고 살아야 한다.
첫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하고 전학수속이 채 되지 않아 이사하기 전에 다니던 학교로 며칠 다녔던 적이 있다. 학교가 멀어, 등하교길을 동행해주었어야 했다. 아이 데리러 일찍 간 날에는 교실창문을 통해서 교실 안 풍경을 보며 즐기곤 했다. 하루는 아이가 칠판 앞에서 벌을 서고 있었다. 다른 날에는 선생님이 미술시간에 그린 아이의 그림을 칭찬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벌을 서게 된 일이나 칭찬을 들은 것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벌을 선 일이나 칭찬받은 일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그것 자체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행동이나 성취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는 기준이 이미 나름으로 만들어져있었기 때문에 타인의 상벌에 좌우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른들이 건성으로 칭찬할 때, 자기를 비교적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아이들은 쉽게 속지 않는다. 아이를 무시하며 낮추어보아 짐짓 봐주듯이 달콤하게 칭찬해주는 어른의 속내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야단맞는 것이 납득되지 않으면 야단맞았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평가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어린아이 때부터 나름으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마음에 그리면서 평생 자아개념을 정정 보완해간다. 그런데 우리는 혹,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두고 하는 말이 있다. “여우와는 살아도 곰과는 못 산다”는 말이다. 쓴 소리를 거울삼아 자기개념을 정확하게 만들어가려 하기보다, 당장 기분좋아지는 칭찬이나 아양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다. 반성할 일이다. 우리는 좋은 거울과 나쁜 거울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