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하여짐이 은혜라
[요한복음 3:22-30]
어제 KBS 연기 대상에서 이순재 씨가
연기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모든 연기자가 일어나 박수치며
이순재 씨의 수상을 축하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있죠.
이순재 씨처럼 주인공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주인공의 든든한 조연들이 함께 있죠.
그 외에도 잠깐이지만 극을 풍성하게 해 주는
단역(엑스트라)도 있습니다.
만약 모두가 다 주인공이 되려고만 한다면
그 영화는 산으로 갈 것입니다
성경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들 중 주인공은
단 한 분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 모든 인물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단역이나 조연 쯤인 거죠.
오늘 본문에는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이 했던 말이 있죠.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자신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지 알았어요.
무엇이었다고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랍니다.
그는 ‘소리’였습니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나 소리는 소식을 전달해 주죠.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오심을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이들이 자신을 따르며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은 위치에
앉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자신의 지위로써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았음에도
철저히 세상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아갔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광야로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묻습니다.
“스승님이 세례를 줬던
예수라는 사람 잊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저쪽에서 세례를 베푸는데
사람들이 다 그리고 가더이다.”
제자들의 말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 밥그릇 뺏기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러한 반응 앞에서
세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 함께 본문 27절을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3: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여기서
‘하늘’은 헬라어로 ‘우라노스’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종종 하나님을
우회적으로 표현할 때 우라노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 지금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인 자세 하나를
발견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 관점으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신앙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접근하면 인간적인 결론 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관점으로 해석하면
방법이 달라집니다.
인생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이집트 왕의 경호실장인
보디발 집에 노예로 갔습니다.
17년을 부잣집 아들로
도련님 대접 받으며 살던
그에게 노예 생활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그가 받았을 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말도 제대로 안 통하고,
몸이 온전히 성장하지도 않았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을 게 분명합니다.
“그릇 가져오랬더니, 국자를 가져오면 어떡해?”
“여기 물을 채워 넣으라고 했더니
물을 버리면 어쩌냐!”
그런 그가 고통 속에서도
놓치 않았던 게 있습니다.
하나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고통 뿐인 인생을
하나님 관점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은혜였고,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우연이 없었던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2025년을 어떻게 시작하고 계십니까?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고 고백하셨다면,
올해도 주님이 이끌고 계심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가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 관점으로 바라보며
승리하길 축복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볼까요?
세례 요한이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함께 본문 28-29절을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3:28-29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은 자신이 누군지 명확히 알았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신랑의 기쁨에
동참하는 자일 뿐이라는 걸 알았어요.
얼마 전 주례를 하러 결혼식에 갔습니다.
그때 사회 보던 친구가
신랑의 아주 오래된 절친이었습니다.
신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결혼식 내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그 친구도 함께 기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결혼 예식의 주인공인
신랑이라면,
자신은 신랑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에서
신랑의 보조역할을 할 뿐입니다.
철저히 자신은 낮추면서
신랑과 신부를 빛나게 해주죠.
신랑이 주목받는다는 이유로
시기하거나 원망하는 친구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기쁨이 충만하였다’는 표현은
원어적으로 볼 때
‘물컵의 물이 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사명에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주인공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주님이 주인공 되게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은
참된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날 것입니다.
이어서 세례 요한이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요한복음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사실 여기 보면 ‘쇠하여야 하리라’가
‘쇠해도 괜찮음’ 정도가 아닙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그는 반드시 흥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쇠해야 한다.”
여기서 must는 ‘반드시 ~ 해야 한다’는 의미죠.
이렇게 자신이 철저히 낮아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 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높아질 수만 있다면,
그가 흥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낮아지고 쇠하여질지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남을 밟고
내가 드러나려고 하는 욕심이라는 게 있죠
내가 더 잘 나가야지 되고,
내가 더 높아져야 하는 게
인간의 마음 아닙니까?
그러나 진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은
내가 죽고 예수만 사는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함께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죽고 예수만 사는 삶이야말로
그는 흥하고 나는 쇠 하는 인생이 되는 거죠
혹시 여러분은 이 원리를
거꾸로 적용하고 있진 않습니까?
나는 흥하여야 하겠고, 그는 쇠하여야 한다.
내가 주인공이고
예수님은 나를 뒷받침해주는
조연이나 엑스트라 정도로만
치부해 버리면 이렇게 되는 거죠.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런 유혹에
휩싸여 살아갑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
“하나님 제게 물질을 많이 주시면,
이만큼 드릴게요.”
”하나님 제게 건강을 주시면
이렇게 헌신할게요.“
”우리 자녀 좋은 대학 보내주시면
제가 이렇게 헌신할게요.“
”하나님, 이번 사업만 잘되면
내가 이렇게 헌금할게요.“
여러분 진짜 주님만 흥하는 인생을 사는 자는,
석청과 메뚜기만 먹어도 기뻐하며 삽니다.
대궐같은 집이 아니라 광야에서도
사명을 향해 걸어가는 거죠.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쇠약하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비춰보면 그게 은혜였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개척 교회를 섬기며
날마다 이렇게 기도하셨답니다.
”하나님, 제가 좋은 설교자가 되길 원합니다.“
이 기도가 나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강력한 감동을 주시더랍니다.
”너는 왜 그토록 좋은 설교자가
되고자 하느냐?“
그 순간 목사님 중심이 쿵 하고
한 방 맞은 것 같았답니다.
그리고 자신이 좋은 설교자가 되려고 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답니다.
예배 끝나고 성도들과 인사하며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거죠.
주님만 흥하고 자신이 쇠하길
말로만 고백했지,
실상은 주님도 흥하고
나도 흥하는 인생을 원했던 것이죠.
저도 이 글을 읽으며 많이 회개했습니다.
저도 똑같더라고요.
나도 흥하고 주님도 흥하는 인생을
원했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그것이
제 인생의 우상이 된다면,
저는 망한 목회자 실패한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설교를 하고,
인정받으려고 사역한다면 안 된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
재물을 빼앗아 가시고,
심지어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하시는
어려움에 때가 은혜란 걸 알았습니다.
그제야 우리가 쇠하여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의 인생은
부유함과 축복 그 자체 아니었습니까?
믿음 생활도 잘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브레이크를 거십니다.
재물을 다 빼앗기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죽고,
건강과 사랑스러운 아내마저
그를 떠납니다
그에게 남은 건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 뿐이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욥은 낙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를 포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죠.
”누가 이 세상을 지었느냐?“
그제야 욥은 깨닫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자가 하나님이시구나!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나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그리고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에게 있어서 재앙,
떠남과 질병은 축복이요, 은혜였습니다.
그는 철저히 낮아지고 쇠하여 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기간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카메라만 응시하며 예배를
인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마룻바닥에 서서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울부짖었다 적도 있습니다.
마치 모두가 나를 죄인인 것 마냥 치부하여
괴로움 속에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들 수 없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바로 그때가
제가 쇠하여지는 시간이었더군요.
그때 만약 제가 승승장구 하였으면,
저는 교만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버림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 서 돌아보니 쇠하여 짐이
은혜였습니다.
주님이 흥하여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라기는 앞으로
저의 인생과 목회 사역이 날마다 저는 쇠하고
주님만 흥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새벽 예배 때 불렀던
찬송가가 떠올랐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 일세
영생 허락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기도 하는 중에 자꾸 후렴이 맴돕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이 받은 증거많도다"
건강한 자녀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혼자 예배 드리지 않고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계심에 감사했습니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주시니 감사했으며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믿음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기도하는 양가 부모님을 주시며
먼저 믿음의 길을 걷고 또 걸어 가시는
귀한 장인 장모님을 주심에 감사했습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은혜였고,
예수 믿는 것에 증거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 한분이면 족한 줄로 믿습니다
내가 흥하려 하지 않고
주님이 흥하는 인생
바로 그것이야말로 성도의 삶 입니다.
오늘도 이 복된 인생 함께 걸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