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년대, 전국 방방곡곡에는 쥐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극장들이 있었다. 동전 몇 푼이면 2편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던 그곳. 당시 밥 한 끼 보다 훨씬 싼값에 입장이 가능했던 변두리 동시 상영관과 읍내극장들은 돈없는 이들의 소중한 문화공간이었다.
사실, TV를 제외하면, 영화만큼이나 저렴하면서도 저소득층 친화적인(?) 문화매체도 없다. 게다가, 가장 저렴한 문화매체인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음악과 미술, 문학은 물론, 수많은 예술 장르가 혼합된 매체인 영화를 보는 행위는 종합예술이라는 표현대로, 예술의 모든 장르를 보고, 듣고, 즐김으로써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쾌감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밥 한 끼 또는 그 이하의 부담만으로도 감상이 가능한 저렴한 매체였다. 하여, 영화는 하층민에게도 문화적 소양을 키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줬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몇십만원짜리 오페라 티켓 대신, 단돈 천원으로 영화 '오페라의 유령'을 빌려, 작고 낡은 TV를 통해서 오페라가 선사하는 장르적 쾌감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지 않은가?
당시의 변두리 극장들은 가진 것 없고, 오갈데 없는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문화적 소양을 키우고 자신들의 꿈을 키워 나가는 공간이었다. 브로드웨이가 어디 붙어있는 동네인지도 모르는 박씨네 둘째는 영화 '그리스'를 통해, 뮤지컬의 화려한 군무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흡수하고, 최씨네 막내딸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 치밀한 이야기 구조가 만들어내는 희열이 어떤 맛인지 느낄 수 있었고, 김씨네 셋째는 하루종일 극장 화장실에 숨어있다 나오길 반복하며, 엔리오 모리꼬네가 빚어낸 환상의 선율을 배워 나갔다. 그렇게 그들은 문화적 소양을 키워, 부족하나마, '계급의 간극'을 메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세련된 장식과 화려한 카펫이 깔린 멀티플렉스는 밥 한 끼 이상의 요금을 대가로 요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읍내극장들은 프린트를 구하지 못해, 결국 문을 닫았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도곡면 별다방 옆 까지 들어서 있던 6만여개의 비디오대여점은 3,500여개로 줄어, 인구 밀집지역에만 드문 드문 들어선 탓에, 도곡면에 사는 최씨네 VTR은 TV드라마 녹화용으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다.
컴퓨터는 뒀다 타자칠 때 쓰냐고? 인구 밀집지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케이블은 커녕 아직도 전화 모뎀을 써야 하는 '인터넷 강국'이요, 통신비가 미국보다 비싸다는 'IT강국'이거늘, '빵 대신 고기, 쌀 대신 라면'은 말그대로 언감생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딴 섬 가거도에 들어선 영화관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반도 최서남단 가거도.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145km, 쾌속선으로 4시간 30여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섬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 섬에 영화관이 있다.
지난 9월, 멀티플렉스 체인인 '프리머스시네마'에서는 나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신안군과 함께, 인구 500여명의 가거도에 무료 영화관을 설치, 운영하기 시작했다. 가거도 행정사무소 2층에 자리잡은 가거도 영화관은 70여석 규모의 작은 영화관이지만, 본사가 행정용 인터넷망으로 전송해주는 디지털 파일로 영화를 상영하는 어엿한 디지털 영화관이다.
월2회,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주민들은 영화관 좌석 쟁탈전을 벌인다. 70여석의 좌석이 모두 메워지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거나,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설레는 마음으로 스크린위에 펼쳐지는 '문화'를 남김없이 빨아 들인다. 지금까지 상영된 영화는 모두 5편. 슈렉2, 이장과 군수, 황진이, 권순분여사납치사건, 극락도 살인사건이 가거도의 밤을 포근히 감쌌고, 오는 12월 4일에는 '만남의 광장' 차례다.
동시대, 같은 영화를 보며 자란 세대는 특유의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청소년기에 '영웅본색'에 열광했던 우리는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다닌 추억을 공유한다. 어엿한 개봉관에서 봤건, 지린내와 담배연기 자욱한 시골 영화관에서 봤건, 영화가 만들어준 추억은 그들 사이의 소통을 쉽게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다. 이제 가거도의 아이들은 내년 설날에 내려올 도시에 사는 사촌형제들과 함께, '슈렉'을 양념삼아 소통을 시작할 수 있을 게다.
도시화, 현대화는 다양한 그늘을 만들어낸다. 농어촌에 드리워진 그 그늘은 점점 더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기만 한다. 간혹, 가거도처럼 '선택받은 어느 곳'에는 실낱같은 햇살이 드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뿐이면 정말 곤란하다. 도시의 청소년들이 지근거리의 멀티플렉스에서 추억을 공유하고 문화적 소양을 쌓아가는 동안, 읍내극장과 강씨네 비디오대여점이 사라진 농어촌의 아이들은 공중파가 간택한 '특선영화'로, 눈치 빠른 친구가 선생님 몰래 학교 컴퓨터에 '다운' 받아 둔 불법 파일로 목마름을 달랜다.
도심의 멀티플렉스가 빨아들인 것은 '시골의 스크린' 뿐만이 아니다. '마을'에 사는 아이들의 '기회' 또한 빨아가 버렸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뭉치면 강해진다'는 말이 진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문화의 영역에서는 뭉치면 다양성과 기회가 사라지더라.
나는 가거도 영화관에서 희망을 본다. 비록,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딱 하나'뿐인 영화관이지만, '간극'을 메우려는 이들의 관심과 정성이 하나, 둘 쌓여가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문화적 불평등이 해소되리라 믿고 싶다. 아니, 꼭 그리 되어야 한다. 나와 나의 친구들이 그러했듯, 초롱 초롱한 눈망울로 스크린을 응시하는 저 아이들이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의 '간극'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소통하는 시대가 열려야 한다. 제발, 영화만이라도...
분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에 따르면, 시골 아이들은 방과후에도 도통 귀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교시간 직후, 통학버스를 타지 않으면, 적어도 30분에서 1시간 남짓을 걸어서 귀가해야 함에도 불구,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호통이 있기 전까지는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학교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것도 과거의 일이란다. 첨단을 최고의 덕목으로 숭상하는 대한민국답게, 시골 분교 역시 요즘에는 '무인 경비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터라,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경계선 밖으로 쫓겨나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