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19.木. 맑음
어쩌면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킬리만자로 산山이나 사하라 사막沙漠, 바이칼 호湖를 간다면 모를까 사실 집 나서는 게 귀찮을 때가 많다. 그렇긴 하지만 어느 날 오후 정신을 차려보면 검은 내 가방이나 배낭을 메고 낯선 길을 걷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그런데 이 귀찮을 법한 여행 중에 내 의견들이 만세삼창으로 일치하는 즐거운 시간이 한 대목 있다. 여행이든 답사든 일정을 끝내고 최단거리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그것이다. 그 시간 동안에는 눈으로 찍고, 귀로 듣고, 혀끝으로 적셔가며 코로 들이마신 온갖 것들이 머리와 가슴속을 터질듯이 채우고 있어서 오직 이 재료들을 어떻게 볶고, 지지고, 삶고, 튀기고, 버무려서 맛깔난 글로 옮겨볼까 생각하며 온몸으로 명랑한 서정적 떨림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고나서 그 느낌과 연관된 그늘 푸른 상상을 나 혼자 즐기며 글 쓰는 일을 어쩌면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컴퓨터를 켜고 문자판에 손가락을 올린 채 손등을 타고 전해오는 스멀거리는 그 긴장감을 어쩌면 더 즐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취미 란에 한 번도 여행이나 글쓰기라고 써본 적이 없다. 여행이나 글쓰기는 내게 있어서 취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취미가 독서나 음악 감상, 바둑이나 낚시도 아니다. 물론 관심 있는 분야가 없는 건 아니다. 식도락은 희망하는 바이나 내 식성으로는 식食을 도락道樂으로 삼기에는 쉽지 않을 듯하고, 가슴 아려오는 연애질은 취미가 아니라 늘 소망하는 바이지만 내게는 힘에 겨운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체념하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취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구태여 말하라면 나와 남의 인생들을 엿보고,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꼼꼼히 기록하기가 그것이다. 그래서 내 시간들은 멈춤이 없이 온갖 인연들과 부딪쳐 흘러 다닌다. 나는 어느 한 때라도 여행을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나는 여행이나 답사를 여전히 떠난다.
소쇄원에서 식영정을 가자면 턱밑에 가사문학관이 있는데 그 앞에 바람 시원한 삼거리가 있고, 그 너머에 충효교라는 다리가 있다. 이편에 소쇄원, 가사문학관, 식영정이 있다면 저쪽에 환벽당, 취가정이 있고, 이쪽이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이면 건너편이 광주시 북구 충효동이다. 그 다리 아래로 자미탄紫薇灘이 흐르고, 광주호로 흘러들어가는 자미탄을 경계로 광주와 담양의 경계가 나뉜다. 자미는 배롱나무의 한자이름이라 한다. 자미탄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소쇄원을 지나 887번 지방도를 계속 달려 올라가면 금세 남면 면소재지가 나오고, 시골학교 꼴이 이마에 예쁘게 박힌 남면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좁다란 길로 들어서면 산음동 산기슭에 또 하나의 정자 독수정이 서 있다.
독수정獨守亭은 16세기 호남 사림들의 정신적 의지처였던 광주호湖 주변의 여느 정자와는 성격이나 분위기가 다른데다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아 나 혼자 은근히 좋아하는 정자다. 식영정에서 해가 조금만 게으름을 피웠더라도, 김치와 손 두부가 조금만 덜 맛있었더라도 풀었던 허리띠를 다시 채우고 대장님을 살살 부추겨 독수정을 친구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배를 두드리며 먹고 놀다보니 사위가 이미 깜깜이다. 배는 부르지요, 날은 어둡지요, 찬바람을 불지요, 가야할 길은 멀지요, 버스에 발동은 걸려있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때난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냥 모르는 체하고서 따라주는 맥주만 날름 받아먹으며 서울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내내 마음이 이렇게 끌쩍지근한 모양이다. 당신이 독수정에 올라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한 뒤에 내려오시거들랑 차머리를 그대로 앞을 향해 계속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길이 담양에서 화순 동복 쪽으로 넘어가는 지방도인데 걸어서 가도, 자전거를 타고 가도, 차를 슬슬 운전하며 가도, 한적하면서도 바람과 빛이 매우 아름다운 길이다.
영남의 지세가 태백산을 끼고 있어서 우람하고 위엄이 있다면 호남의 땅들은 아담한 짜임새와 단아한 선으로 그림 같은 정경을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어느 땐가 담양 길을 다시 나서려거든 배롱 꽃이 피기 시작하는 6월 말경 늦은 봄 길을 택하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여름을 부르는 비가 푸근히 내린 다음 날, 짙은 녹음에 둘러싸인 자미천 위로 붉은 배롱 꽃이 그림자를 떨구는 늦은 봄날 오후에 향기와 색에 취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왜 그 땅에서 유난히 시인詩人 묵객墨客 문장文章들이 많이 나왔는지를 몸소 느껴보시라고 알려드리고 싶다.
(- 90차, 담양 답사길 낙수落穗 -)
첫댓글 식영정에서 열정적으로 설명 해 주시던 그 목소리가 들리는듯..자미가 배롱나무란것도 처음 알았네요..다음에 담양 갈일 있으면 6월 배롱나무 빨간꽃 그림자 드리울때 밤이라서 잘 못 보았던 식영정도 다시보고 긴울림님 생각하며 독수정에도 꼭 올라보고 싶어요...
광주호에서 지실마을을 지나고, 남면 면소재지를 거쳐 화순 동복에 이르는 길은 모두 무등산 자락이랍니다. 무등산無等山의 무등이라는 명칭은 '위없는 최상의 진리'라는 뜻과 함께 '절대 평등'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사방이 툭 트인 공활한 말이지요. 그래서 무등산은 그 품 넓은 자락에 좋은 땅을 품어 안고 천하의 영재들을 많이 키워냈답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가도 늘 눈 시원하게 맑고 좋은 곳이지요.
유월 말경 늦은 봄날에 긴울림님과 다시 가고싶단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소탈한 웃음과 걸음걸이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시는 아침사랑 님 반갑습니다. 언제 형아 님, 범초 님, 모시고 함께 늦은 봄날 오후를 그 길따라 걸어보기를 희망합니다. 아침사랑 님을 위한 선물 하나 모놀 가족방에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이네요. 담양의 주변에 대해서 손바닥 보듯 소상하게 잘 아십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과 정보를 부탁드립니다.
백설왕비 님 반갑습니다. 부족한 글 찬찬히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언제 독수정 한번 가볼랍니다
꽃님이 님, 제가 그쪽에 일 년이면 몇 차례씩 가게되거든요. 전주를 지날 무렵 해서 연락을 드릴께요. "꽃님이 님, 긴울림입니다. 지금 독수정 한 번 오르지 않으실래요?" 하고 말이지요.
남의 인생들을 엿보고,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꼼꼼히 기록하기~~이번에 버스 뒷좌석에서 많은 걸 보셨겠네요.```6월 담양 또 가야겠네요...글이 참 좋습니다.
나는 세상의 여자들은 딸과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여자로 보기라고 원칙을 세워놓고 살아가는데 버스 뒷좌석에서 점점 친해지다 보니 모놀 여인들이 자꾸 손위 혹은 손아래 누이로 보이려고 해서 지금 소략난감 중 입니다. 누이로 보이기 시작하면 감성의 날이 무디어져 아무래도 긴장감이 떨어지는데...
정말 담양을 잘 아시는군요.... 소쇄원 조금 지나가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는곳,,, 그 연수원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하며 성산을 비롯하여 참 많이 거닐었던 곳들입니다... 충효교 건너에 있는 환벽당의 봄과 취가정의 가을도 적극 추천합니다.... 지금의 자미탄은,,, 유감스럽게도 배롱나무가 아닌 철쭉과 영산홍이 심어져 있습니다.....
몇백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미탄 주변의 꽃과 나무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유월의 늦은 봄날 둥근 달이 솟아나면 개울 위에 떠다니는 배롱꽃 그림자는 빛이 되어 어른거리고...
담양은 단 한 번으로 다녀오기엔 허기가 지는 곳. 가사문학의 뿌리를 찾아서 문학기행으로 찬찬이 다시 밟고 싶은 곳입니다. 독수정도 만나고 싶고,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공훈을 세우나니 이것은 뜬구름/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 장군의 혼을 위로하고자 세운 취가정도 가고 싶고,,,,'~싶은' 것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살아야 할 이유니 긴울림 님, 괜찮은거죠?
충효교를 건너 무등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무등산장 가는 길과 마주치는 지점 바로 옆에 김덕령 장군 위패와 묘역이 모셔져 있는 충장사가 있답니다. 덕字 령字 할아버지와 서포西浦 만字 중字 할아버지의 일화와 말씀들은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거든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할아버지만큼만 되라는 게 우리 어마씨 간절한 기원이었구요. '~싶은' 것 자체가 살아야 할 이유이자 죽어도 좋을 이유를 함께 아우르고 있지요. '~싶은' 것, 우리를 무럭무럭 키워주는 참으로 힘있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서 다 그렇겠지만 특히 담양은 저에겐 참 따듯한 그리움이 남아있는 곳이 되어 버렸읍니다. 정말 6월 백일홍 꽃이 필때 꼭 가보리라 다짐해봅니다. *^^*
별꽃 님, 우리 주변에는 맑은 터, 좋은 땅들이 많이 있지요. 그 중에서도 서로 길들여지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마음의 고향이지요. 그곳에는 우리가 언제 가더라도 티없이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겠지요.
[내 식성으로는 식食을 도락道樂으로 삼기에는 쉽지 않을 듯하고] ㅋㅋㅋ 긴울림님이 식을 도락을 삼는 날이 빠를까요? 저의 답사 참여 소망이 이뤄지는 날이 빠를까요?
호밀밭의파수꾼 님, 참 다정한 이름입니다. 어느 쪽이 빠를는지는 나보다 호밀밭의파수꾼 님의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인 것 같아 보이는군요. 호밀밭의파수꾼 님을 뵈는 순간 답이 나올 듯도 하고요.
뒷좌석에서 여인네들의 재잘~재잘~수다를 어찌 감당하셨는지...ㅎㅎㅎ 말없이 빙긋~ 웃는 모습이 참 보기좋았습니다...
언뜻 맛 보기에 밍밍할 듯한 작설차도 익숙하게 길들여지면 다섯 가지의 오묘한 미감味感이 들어있다는 군요. 수다도 하루 내내 듣고 있다보니 신산한 삶과 농익은 정이 그 안에 함뿍 들어 있어서 그대로 또 좋았답니다. 내가 미처 건너가 보지 못한 세상의 재치와 낱말들이 무성히 뛰돌아다녀서 신선한 발상들이 그 또한 좋았지요.
담양 다녀온 후 아시는 분이 명옥헌의 배롱나무 꽃이 너무 좋았다고 하던데 그곳의 배롱나무도 없어졌는지 궁금하네요 글에서 나타나는 감성이 남 다르십니다.
반갑습니다. 미라지 님.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명옥헌 앞 마당에 있는 연못 가에 묵은 배롱나무가 주욱 둘러서 있어서 여름 날이면 분홍 빛 오케스트리를 펼쳐놓은 듯 하다고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난 자료이긴 하지만 지금도 그러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은 서울에서도 배롱나무꽃을 볼 수 있지만 원래는 남부지방이라고 하네요 시골마당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자리잡은 배롱나무꽃을 보고싶습니다.
어렸을 적 많이 보았던 한해살이 풀 백일홍과 목백일홍, 배롱나무가 항상 혼동이 되었답니다. 더우기 배롱나무 꽃을 백일홍이라고 부르거든요. 배롱나무는 백일홍나무에서 배기롱나무, 배롱나무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시골 고가나 절, 사당 주변에는 언제나 심어져 있었던, 그래서 여름 한 철 동안을 크리스마스 츄리처럼 불 밝히고 있었던 배롱나무 꽃이 기억 속에서 더 붉게 빛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