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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 11,1-4.8ㅁ-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곧 타자와의 교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받고 싶은 것은 잘 받아들이고 받기 싫은 것은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욕이나 모욕, 꾸중이나 비판은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있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 시간과 노고,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주고받음’이라는 놀이 속에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한 가운데 떡 버티어 서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은 남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가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선사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존재의 원천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에 해당합니다.
곧 우리가 '거저 주어라'라는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거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늘나라를 '거저 받아들여야'만이 내 안에 하늘나라를 지니게 되고, 다름 아닌 바로 받은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자애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곧 우리가 만든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거저 받은 것’, 그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명확히 아는 일입니다.
이토록 신앙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포되고 증거됩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그릇되게 선포되거나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고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이 생명을 건네주어야 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되, 그분께서 목숨까지 거저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목숨까지도 거저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줄 것이 없다면>
오늘 복음은 어제 사도들의 임명에 이어지는 파견 내용입니다.
그리고 파견하시면서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오늘 저의 나눔은 한 말씀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ㄷ)
이 말을 듣고 내가 뭘 거저 받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은총을 사는 사람이 못됩니다.
왜냐면 은총이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한 대가나 공로로 받은 것이면 그것은 은총이라고 하지 않잖아요?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것만이 은총이고,
그렇게 받은 것이 많음을 아는 사람만이 은총을 사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은총을 사는 사람은 늘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늘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비결은 은총을 사는 것이라고 믿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면서 은총 체험이 없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자기가 뼈 빠지게 일해 번 것이지 거저 받은 것은 일체 없으며, 그래서 자기가 재산을 일군 보람은 있어도 감사할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은총 체험도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왔고, 거저 받는 것은 하나도 없이 자기가 다 애써 벌어야 한다면 무엇 하러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는지?
이런 상태로 성당에 왔다 갔다 했다면 그것은 하느님 체험은 없이 그저 신자들 만나러 왔다 갔다 한 것이거나 하느님 체험은 없이 그저 예수님 말씀이 좋아서 간 것일 겁니다.
지금 이 친구가 신자가 됐는지 모르지만 옛날에 제 친구는 예수님 말씀을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기 삶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가 지침으로 삼은 명언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지요.
아무튼 신자란 은총을 사는 사람이고, 자기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것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라는 존재도,
나의 건강도,
나의 능력도,
나의 성격도,
나의 부모도,
나의 형제도,
나의 친구도
하느님께서 다 거저 주신 것이고,
꽃도,
공기도,
바람도,
날씨도,
해님도,
달님도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프란치스코처럼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다 거저 받은 것이고,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래서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면,
이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니 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자도 아니고, 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이 없는 사람이며, 은총을 살지 못하는 사람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말타면 종 두고 싶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때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는 것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잠언 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원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 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제발, 가진 것에 의지하지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눌 줄 아는 자가 되기 위해 이 두 가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아끼지 말고 내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어줄 줄 모르는 이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성령의 힘을 잃습니다.
곧 마귀도 쫓아낼 수 없게 되고 병을 치유하는 힘도 잃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의 힘이 있음을 자신도 믿지 못하게 되어 하느님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영혼을 구원하려 하다가 지치고 쓰러집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나 신자들의 청빈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조건 가난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필요에 따라서는 다 내어줄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습관이 덕이 되고 덕이 본성이 됩니다.
오랜 습관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한두 번의 선행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본성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1800년대 후반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 해티 그린(1834-1916)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같은 속옷을 50년간 입을 정도로 검소를 넘어선 구두쇠였습니다.
오죽하면 그녀의 아들이 다리가 아팠을 때 가난한 행세를 하고 동네 보건소에 가서 치료하였을까요?
결국 아들은 감염이 심해져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나이가 들었음에도 탈장 치료비를 아끼려 복대를 하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해티 그린이 이렇게 구두쇠가 된 이유는 어렸을 때의 교육 탓입니다.
그녀의 집은 부유했습니다.
글을 알게 되자 아버지에게 신문을 읽고 받은 돈을 쓰지 않고 저축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할아버지에게 경제나 주식에 대한 정보를 읽어주며 용돈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누는 게 아니라 모으면 내 것이 된다는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나눔을 통한 즐거움, 하느님께 봉헌함을 통한 자유로움을 느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았을 때도, 그것을 투자하여 어렸을 때부터 깨우쳤던 경제 관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을 때도 그 돈은 여전히 자기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돈을 제대로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외롭게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록펠러는 십일조는 내었지만, 가난한 사람은 도울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성경 말씀을 보고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해 주게 됩니다.
그녀로부터 받은 감사의 편지는 그의 일생을 바꿔놓았습니다.
나눔의 행복을 알게 된 것입니다.
먹어보지 않고 어떻게 그 맛을 알겠습니까?
해보지 않으면 그 행복을 알 수 없어서 습관은커녕 그것이 고통인 줄 알고 할 용기를 낼 수조차 없게 됩니다.
반면 성 빈센트 드 폴은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면서 모든 것은 주님께서 섭리해주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힘든 상황에도 자녀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고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부자가 그 교육비를 전액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임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가 해적선에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경험을 하게 만드십니다.
그는 자유인이 되어 정말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을 믿게 됩니다.
그 이후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되고 지금도 전 세계에서 그가 세운 수도회와 수많은 시설에서 가난한 이들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김범석 교수의 책에 죽어가던 한 암 환자가 임종 직전에 인사라도 하러 찾아왔을 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는 마지막 말을 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어주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먼저 100원을 주면 10원은 하느님께, 10원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게 교육해야 합니다.
해봐야 행복을 알고, 행복해야 계속할 수 있고, 그래야 내어줌이 나에게 덕이 되고 본성이 될 수 있습니다.
십일조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은 매달 반드시 나에게서 일어나야 주님께서도 악령을 쫓는 능력과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사라지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하신 그대로 따라 하면 됩니다>
1)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 일들을 하라고 지시하신 것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제자들이 함께 하기를 바라셨음을 나타냅니다.
사도들과 교회가 하는 일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하는 일들입니다.
다른 일이나 새로운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삶’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지시입니다.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은 흉내 낸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다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흉내 내는 것과 닮는 것은 다릅니다.
닮는 것은 ‘온 마음’으로, 또 ‘온 삶’으로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흉내 내는 것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겉으로만 실천하는 위선입니다.
2)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주님의 복음을, 또는 주님의 은총을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입니다.
선교활동은 장사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선물로 주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 8,20)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셨으니, 제자들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금이나 은이나 구리돈이 없었을 텐데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지니지 말고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라는 말씀도 뜻은 같은데, 당신을 따르고 있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 떠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굶주림과 헐벗음을 감수하라는 강요는 아닙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먹이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는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입니다.
‘찾아내어’ 라는 말 때문에 숙식을 제공할 사람을 제자들이 찾아다녀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한다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고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여라. 그리고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는 짓은 하지 마라.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4)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라는 뜻이기도 하고, 참 평화를 얻는 방법을 알려 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평화를 전해 주려면 전해 주는 사람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날 것이고, 그런 모습으로 평화를 전해 주는 것은 ‘거짓’입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기뻐하고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복음에 대한 기쁨도 없고, 평화도 없는 사람은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혹시 한다고 하더라도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고, 그러면 상대방이 먼저 눈치를 챌 것입니다.
“마땅하면”은 “믿고 받아들이면”이고, “마땅하지 않으면”은 “믿기를 거부하면”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주었는데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멸망의 길’로 간다면, 그 책임은 전해 준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 사람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라는 말씀은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라는 뜻인데, 위협하라는 뜻이 아니라 늦기 전에 회개하고 믿으라고 타이르라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 “성 베네딕도 아빠스에 대한 자랑”>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시편 34,9)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은 유럽인들은 물론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인물인 유럽의 수호자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입니다.
아무리 자랑해도 샘솟듯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분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성인 자랑에 돌입하겠습니다.
자랑하면서 닮는다는 말도 있듯이 저도 성인을 닮고 싶습니다.
제 주특기가 자랑입니다.
특히 하느님 자랑, 예수님 자랑, 교회 자랑, 성모님 자랑, 성인 자랑, 형제들 자랑입니다.
이런 자랑보다 정신 건강에 좋은, 유쾌한 자랑은 없고 이런 자랑보다 큰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사제서품 35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했던, 이젠 바다가 된 강론들 모두가 이런 자랑들로 가득했음을 봅니다.
오늘의 입당송이 성 베네딕도의 삶을 압축 요약합니다.
“베네딕도는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네.”
오늘의 옛 어른들의 말씀도 그대로 성 베네딕도의 모습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어른스러움이란 곧 관대함이다.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에서 나온다.”
<다산>
“군자는 세 번 변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하며, 말을 들어보면 엄정하다.”
<논어>
저녁 성무일도 시 아름다운 독서와 계응송도 그대로 성인의 삶을 압축하는 듯 했습니다.
“그분은 위대한 증거자로다.
그는 구름들 사이에 있는 아침 별과 같고 보름의 둥근 달과 같도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전 위에 비치는 태양과 같고 영광의 구름에 걸린 무지개와 같도다.”
<집회 50,5-7>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했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계응송>
성 베네딕도 자랑의 절정은 복음 낭독전 흥겹게 함께 노래한 부속가일 것입니다.
길다싶지만 은혜로운 내용이라 전부 인용합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대축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속에 울리네.
동쪽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같도다.
작은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그의 생각 지극하여 예수님의 영복소에 우리 인도하소서.”
후배 수도승들이 세세대대로 얼마나 흠모사랑한 성인인지 부속가 전부가 감동적입니다.
어제 저녁 아름다운 무지개 선물을 받았는데 흡사 성인 임종 후 올라가신 하늘길을 상징하는 듯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제 좋아하는 성인이 베네딕도와 약 600년 후대의 프란치스코인데, 그대로 '성 베네딕도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사'라는 제 신원에 긍지를 느낍니다.
이를 노래한 짧은 자작시 역시 제 복된 신원을 드러냅니다.
“밖으로는 산,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강,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맑은 강, 성 프란치스코”
산과 강의 보완관계처럼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치스코도 그러합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성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강같은 성 프란치스코를 닮고 싶은 것이 제 간절한 염원이요, 결국은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 배치도 성인 자랑에 잘 들어맞습니다.
첫째, 성인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흡사 사랑의 찬가를 연상케 합니다.
그대로 성 베네딕도가 살았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성인이 베네딕도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평화의 사랑, 감사의 사랑, 말씀의 사랑 또한 베네딕도에게 해당됨을 깨닫습니다.
둘째, 성인은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지혜의 선물입니다.
바오로는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권고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사랑이 지혜이고 지혜가 사랑입니다.
참사랑에서 샘솟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에서 분별력의 지혜가 나옵니다.
참으로 평생 지혜를 추구했고 지혜를 사랑한 성인이었습니다.
역시 단숨에 읽혀지는 잠언의 말씀도 그대로 성인의 모습같습니다.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그래,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주님은 이런 지혜의 사람들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이들의 앞길을 보살피십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이들은 정의와 공정과 정직을, 모든 선한 일을 깨닫고 그대로 이를 실천하니 지혜는 바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성인은 “따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따름입니다.
사랑의 버림, 사랑의 떠남, 사랑의 따름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점차 버리게 되고, 떠나게 되고, 주님만을 따르게 됩니다.
베네딕도의 삶의 여정도 그대로 복음의 사도 베드로와 일치됨을 봅니다.
성인의 평생 여정도 자발적 사랑에서 기인된 버림의 여정, 떠남의 여정, 따름의 여정으로 요약됩니다.
참으로 성인은 주님을 향해 끊임없이, 한결같이, 묵묵히 버리고 떠나 따랐던 평생 삶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현세의 풍성한 축복은 물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 확약하셨는데, 베네딕도가 받은 축복도 베드로 못지 않습니다.
성인의 무수한 후예들인 수도승들의 활약은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했고 교회를 풍요롭게 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회 하늘을 환히 밝히는 태양같은 성 베네딕도 아빠스입니다.
아주 예전 저녁 불암산에 감동하며 써놨던 시도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저녁 침묵의 불암산이 상징하는 바, 평생 큰 사랑, 깊은 지혜로 고요히 묵묵히 주님을 따랐던,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성 베네딕도 아빠스입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겸손한 사랑과 지혜로 항구히 주님을 따랐던 성인을 닮게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시편 34,10-1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무엇이 희망을 주고, 무엇이 위로를 주며, 무엇이 용기를 줄 수 있을까요?>
교구 사제모임 프로그램 중에 ‘성극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동부에 사는 신부님들은 이미 성극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루레이 동굴’ 관람이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동부에서 온 신부님 7명이 동굴 관광에 다녀왔습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동굴이었습니다.
동굴도 인상적이지만 제게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희를 안내해 준 기사 겸 가이드 분이었습니다.
열심한 개신교 신자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목사님이었습니다.
숙소에서 동굴까지 2시간 정도 거리였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저는 목사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사제들의 ‘안식년’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는 동안 비용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2018년에 안식년을 했으니 사제생활 27년 만에 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안식년은 7년에 한번 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안식년 계획서를 제출하면, 기본적인 생활비는 교구에서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에 대해서도 좋은 제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목사님이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에는 ‘이판과 사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판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의 길을 찾는다고 합니다.
사판 스님은 불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사찰의 운영과 행정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때로 사판의 스님들 중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판 스님들이 있기에 불교는 사부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톨릭에도 수도 사제와 교구 사제가 있다는 걸 이야기했습니다.
수도회의 깊은 영성이 있기에 일부 사제와 교회가 물의를 일으킬지라도 가톨릭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에도 있고, 가톨릭에도 있는 이판의 치열한 정진과 수도회의 깊은 영성이 부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2006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 40일 피정을 했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당시에 영신수련에는 목사님도 함께 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분도 함께 했습니다.
저는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좋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에서 대림특강을 했던 이야기도 했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길상사 개원식에 축하 인사를 했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고, 정보가 소수에게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정치권력에 의해서 종교가 정해지기도 했습니다.
특정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탄압하기도 했고,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전쟁도 있었습니다.
종교가 권력에 편승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라는 제도는 있지만, 종교가 지니는 보편적인 사랑과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무력해진 적도 있습니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으로 우리는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40억 명 이상의 인구가 매일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종교만이 최고이며 최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민주화된 시대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는 시대에 무엇이 희망을 주고, 무엇이 위로를 주며, 무엇이 용기를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그만큼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황금률’을 지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잠시 머물다 가는 지구의 환경과 생명을 위해 함께 연대하는 겁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 승자독식이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홍익인간, 인내천, 자비와 사랑이라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바라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요?>
종종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스마트폰을 뒤집어 찍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래야 키가 커 보이고 날씬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찍으면 자연스럽게 카메라 렌즈가 아래에 위치하게 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디에 렌즈가 위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하긴 한 때 얼짱 각도라는 것이 있어서 셀카를 찍을 때 팔을 45도 정도 올리고 나서 15정도 몸을 틀어서 촬영하는 것이 인기였지요.
이 역시 시선의 차이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생각해 보니 우리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의 시선에 따라 세상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또 상대방이 잘못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나의 시선이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시선을, 특히 사랑을 담은 시선을 가져야 했습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얻고자 한다면 나의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의 삶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요?
이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시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고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평화였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평화를 비는 정도가 아닌, 사람들이 평화를 느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이 아닐까요?
이런 시선을 가지고서만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쫓아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곳이고, 대신 사랑과 평화만이 필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말씀으로 전해주십니다.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런 말도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가 그 사랑과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우리의 시선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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