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에 매우 뜻깊은 글이 실렸다.
우남 이승만 박사에 대한 추모의 글이었다.
양상훈 주간의 글을 참으로 공감하며 읽었다.
그 글을 읽은 소회를 칼럼 밑의 100자평에 적고 싶었으나,
할당된 공간이 너무 작아 그 내용을 원만하게 작성할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하게 이 곳 토론마당에 쓴다.
우남 이승만 박사는 독립과 건국의 원훈이다.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국제정세와 외교의 석학이었고, 애국자였고, 거목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왕조시대에는 개화를 위한 혁명가였고, 망국의 시기에는 독립투사였으며, 광복후에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너무 노령에 대통령직을 수행하게되자, 그의 주변에는 아첨꾼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 누구보다 청렴한 대통령을 속이고, 자신들의 치부에만 몰두하고, 권력에만 여념없는 자들이 거인 이승만을 겉에 내세우고, 횡포를 부렸다. 그러자, 그 분 밑에 있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그 분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원래는 신익희 선생도, 조병옥 박사도, 이시영 선생도, 장면 박사도 이박사 밑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도운 사람들이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 윤치영, 임영신, 장택상 같은 이들은 이박사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 이들이었으나, 이기붕 일파에 의하여 권력에서 멀어졌다. 빈 자리는 그렇게, 이박사 주변에는 권력지향적인 아첨꾼들로 채워져갔다. 이박사는 이 사실을 4.19가 나서야 알았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박사는 신익희 선생과 대결했던 1956년 대선에 불출마 의사를 밝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없이는 스스로 설 수 없는 아첨꾼 무리들은 관변단체, 정치깡패등등 수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대통령의 의견을 번의하라는 거국적인 데모를 일으켰다. 이를 민심으로 파악한 이박사는 결국 불출마 의사를 번의하고, 다시 대선에 나서는데, 그 때 이박사가 명예롭게 퇴진하였다면, 아마, 지금도 명실상부한 국부로 추앙받고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장면이다.
어쨌든, 자유당 말기의 부정부패라는 것은 너무도 심했다. 일설에 의하면, 경무대에서 대통령이 보는 신문을 따로 만들어 올린다는 말도 있었다. 지금으로치면 8급 공무원쯤되는 면서기 빽만 있어도 군대를 뺄 수 있다는 시기였다. 전후의 사회는 너무도 암울했고, 너무도 가난했고, 너무도 부패해있었다. 이런 나라의 사정이 후에 5.16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더 이상 자유당 정권의 횡포와 불의를 참을 수 없었던 학생, 시민들이 거국적으로 일어난 것이 4.19혁명이다. 그간의 사정을 그 때야 알게된 이승만 박사는 스스로 대통령직을 하야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없는 독재자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가는 노대통령을 국민들은 따뜻하게 배웅했다. 이박사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서.....
이박사는 국권이 상실되자 무려 35년간이라는 긴 세월의 망명을 했었는데, 다시 또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채, 한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박사를 잘 알던 이들도 역사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분의 90 긴 생애 중에 마지막 몇년의 과오가 던진 그림자는 짙었다.
압도적인 공은 어느새 묻히고, 자유당 시기 말년의 부정적인 그림자만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건국, 농지개혁, 반공포로 석방, 평화선, 한미상호조약과 같은 대통령으로써 남긴 불세출의 업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채, 냉대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그 분이 혁명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며,
자유당 말기의 너무도 극심한 부패와 가난을 경험한 세대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종북좌파의 공세와 매도 때문이다.
이승만은 결정적으로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세워서 막았고, 6.25 전쟁에서 막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승만과 박정희인 것이다.
위대한 대한민국을 폄훼하여,
부정이 득세하는 대한민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을 만든 이승만을 악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분이 서거하신지도 50년이 되었다.
그 분의 공과를 정당하게 봐야할 시간이 진작에 지났다.
그 분은 공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부당하게도
그 공에 비하면,
적은 과가 압도적으로 부각되어 폄훼되어 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진지하게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많은 분들이
오늘자 양상훈 칼럼을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