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베르디의 오페라로 대표되는 초기 오페라시대(17세기)에는 오페라 공연에서 노래와 연극이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연극적인 재미보다는 성악가의 기량이 중시되었고, 특히 20세기 들어 녹음 기술이 발전하면서부터는 타고난 미성과 기교를 자랑하는 스타 가수들이 오페라의 모든 것처럼 인식되었다. 어쨌든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이므로, 성악가의 목소리만 좋으면 연기력 따위는 별의미가 없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출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와 함께 오페라는 다시 발생 초기 그 본래의 성격을 되찾았고, 그로 인해 “오페라의 ‘BC(기원전)’는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을 의미”한다는 농담까지 나오게 되었다.
브라운관의 발명은 20세기가 열리기도 전인 1897년에 이루어졌지만, 무성(無聲)시대와 최초의 올림픽TV생중계(1936년 베를린 올림픽)라는 사건을 거친 TV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지난 2000년 사이의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텔레비전을 꼽은 어느 학자는 “TV보급이 인간의 외모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1950년대에 활발해진 오페라 리허설 방영과 공연 생중계는 성악가들을 외모로 인해 긴장하게 만들었다. 오페라 무대는 객석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짙은 분장에 가려진 가수의 얼굴을 관객이 뚜렷하게 보기가 어렵지만, TV의 ‘클로즈업’은 배역들의 생김새를 가차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칼라스와 함께 일한 감독 프랑코 체피렐리는 칼라스를 처음 보았을 때 “눈도 코도 입도 가슴도 키도..... 그 모든 것이 커서 마치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기분 이었다”고 말했다. 가창력과 연기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났지만 남자 같은 강한 인상을 주는 외모에 볼품없이 뚱뚱했던 초기의 칼라스는 나비부인이나 비올레타, 미미 등의 가냘픈 여주인공 역을 스스로도 꺼렸다. 관객의 비웃음을 살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캐루비니의 「메데아」에서도 도대체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뚱뚱한 몸매로 고민하던 칼라스는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고 오드리 햅번에 매료되어, 햅번을 목표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1953~54년 사이에 체중을 무려 92kg에서 64kg까지 감량한 칼라스는 마침내 미운오리새끼 시절을 청산하고 무대의 백조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최고가 되겠다는 투철한 의지로 이루어진 칼라스의 체중 감량은 이후 그녀에게 오페라 프리마 돈나로서의 절대적인 성공을 보장했다. 신문기자들과 TV카메라는 칼라스의 여신 같은 아름다움을 기꺼이 담아내고 싶어했다. 40~50년씩 무대에 서는 성악가들에 비해 칼라스가 오페라 가수로서 겨우 13년밖에 활동하지 못한 이유가 급격한 체중감량 조절로 인한 성대 손상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구체적으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 칼라스를 가르친 첫 스승 이달고가 칭찬했듯, 칼라스는 아테네 음악원 시절에 언제나 제일 먼저 와서 자기 레슨 말고도 다른 학생이 지도 받는 것까지 빠짐없이 지켜본 뒤 제일 늦게 귀가하는 열성파 학생 이었고,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한 학기 만에 마스터할 정도로 머리도 뛰어났다. 바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공연 연습 때 빠짐없이 참여했으며 오히려 다른 후배 가수들에게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고 화를 내곤 했으니 “난 리허설이 필요 없다”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무대에 올라가 오페라 전체의 호흡을 망쳐놓는 요즘의 국제적인 스타 성악가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여주인공 역으로 196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공연 때 청중에게서 16회나 되풀이되는 커튼콜을 끌어냈던 칼라스의 직업적인 성공은 비극적인 사랑 때문에 너무도 빨리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었다. 아버지 같은 후원자 메네기니와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이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의 출현으로 파경을 맞았지만, 오나시스가 칼라스와의 오랜 연애 끝에 케네디의 미망인이었던 재클린과 결혼하자 칼라스는 그 충격과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약물중독에 빠지게 된다. 1958년에 칼라스의 파리 데뷔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시민들은 1977년,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결국 심장마비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세기의 프리마 돈나를 꽃으로 뒤덮어 떠나보냈다.
툴리오 세라핀이라는 명지휘자와 비범한 연출자 루키노 비스콘티를 만나 그들과 작업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칼라스에게는 진정한 행운이었고, 발전된 녹음 기술로 감동적인 칼라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건 우리의 행운이다. 곱지 않은 고음처리와 때로 거칠게 들리는 칼라스의 음색을 놓고 비판도 무성했고 “외모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부족한 목소리를 커버하는 가수”라는 공격도 있었지만, 청순하고 아름다움 배역보다 ‘메데나’나 ‘노르마’같은 격정적인 배역을 선호했던 칼라스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어떤 감언이설로도 미화할 수 없는 고통이며 끝없는 투쟁입니다. 마냥 맑고 곱기만 한 목소리로 어떻게 인간의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증오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오페라, 행복한 중독/이용숙> 에서 발췌 - 저자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올렸습니다. 저자가 허용치 않으면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첫댓글 부탁드립니다. (혹시 저자분께서 이 카페의 회원분일지도 모릅니다. 아닐 수도 있고요...) 운영자분들께서는 면접보실 때 꼼꼼히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이 꼬리말도 저자분께서 보시게 될지 모르니... 좀 있다가 삭제하겠습니다.
연휴동안 신라로 가서 수학 여행을 햇더니 몸살이 났군요. 음악은 몬듣고. 글만 내리 읽습니다. 저자의 글은 이미 칼라스의 다큐에서 많이 밝혀진 내용인 듯 합니다. 평론가님께서도 양해해주시리라 믿어요.특히나 칼라스의 스토커께서 올리신 글인줄 아신다면...
무대에 충분히 익숙해진 칼라스가 손발을 덜덜 떨고 있기에 왜 그렇게 긴장하느냐고 물엇더니 '나의 결점을 잡기 위해 온 사람들도 많다'는.(대강 그런).. 그녀의 영욕이 교차했던 삶을 생각하게 하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우스님의 모처럼의 귀한 글인데.. 이제사 제대로 봅니다. 맘이 좀 분주하였어요... 글이 안읽혀지는 때 더러 있거든요 죄송^^ 참, 이렇게 마우스님의 함께함이 얼마나 힘이 나는지... 아시지요? 언제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