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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청간당과 장암정(봉화 2번째 여행)...........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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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청간당과 장암정(봉화 2번째 여행)...........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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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간당(淸澗堂)
유랑자는 봉화 여행을 마무리 하기 위해 2차 봉화로 출발 하면서 지난번 1차여 행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놓쳤던
정자를 1차 목표로 삼고 서울에서 04시 출발하여 8시 30분에 봉화 물야면 소대지에 도착한다. 우회전 하여 다
리를건너 들어가면 2001년 제2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교 숲 부문에서 1위로 뽑힌 물야초등학교가 나
온다.
학교 안은 우람하고 아름다운 소나무·향나무·단풍나무·느티나무들이 멋진 숲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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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운동장 곳곳에도 아주 크고 잘 생긴 소나무들이 여럿 서 있다. 학교는 이끼 낀 돌담이 둘러 있어 절로 아
름답기만 하다. 학교 입구에서 쭉 직진하면 오록 1리 장암정, 노봉정사가 있는 마을로 가는 길이고, 학교 입구
에서 학교를 끼고 좌회전 하여 가면 청간당(淸澗堂)이 있는 오록3리인 너다리(판교(板橋)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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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마을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청간당을 찾아보았지만 어라…….공사 중이 아닌가. 이를 어쩐다. 난감한
상황이다. 본시 청간당은 김정원의 본관은 선성(宣城), 안집사 김륵(金玏)의 후손이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사람으로 그의 후손인 김탁연(金卓然)이 그를 추모하며 청간당을 세웠고 후손들의 학
문을 지도하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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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간당 안에는 청간당이라는 현판과 청간당이라는 제목을 붙인 선조의 시라고 되어 있는 시판, 그리고 창설재
권두경이 썼다는 청간당십영(淸澗堂十詠)의 시판이 붙어 있다는데, 이를 볼 기회마져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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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전형적인 시골마을인 오록리 너다리 마을은 아담하면서도 아늑하고 그윽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마을이
다. 너다리 마을 높은 쪽으로 올라가면 멀리 보이는 전망도 아름다운데, 멀리 보이는 산들은 몽실 몽실한 자태
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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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간당은 마을 위쪽 너른 전망이 잘 보이는 언덕 아래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아쉬움을 달래고 유랑자는 오록
마을 장암정(藏庵亭)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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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초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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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정(藏庵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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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정(藏庵亭)
유랑자는 오록 너다리 마을에서 나와 물야 초등학교 입구에서 이번에는 들어 올때와 반대로 학교 입구에서 학
교를 끼고 좌회전하여 장암정, 노봉정사가 있는 오록1리 창마 마을로 들어간다, 그런데 좌회전 하자마자 마을
입구에 나타나는 수십그루의 소나무 숲이 너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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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방풍림처럼 마을 우측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약 100여m 정도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알고보니 1688
년경 제주목사를 지낸 선조(先祖) 김정(金政),선생이 이마을의 터를 잡을 때 좌청룡(左靑龍)의 꼬리가 짧아 이를
보충(補充)하기 위하여 제주 솔씨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일까 수백년쯤은 되어 보이는 소나무 군
락이 마을의 운치를 더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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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서곡(梧溪序曲) 시비.
梧溪山水蘊奇靈(오계산수온기령) 오계(梧溪)의 산과 물은 기이하고 심오하다.
曲曲風光儘幽絶(곡곡풍광진유절) 산은 높디높고 물은 절로 맑았구나.
山自高高水自淸(산자고고수자청) 굽이굽이 풍광은 그윽하고 절경일세.
漁歌唱晩動新聲(어가창만동신성) 어부들의 저녁 노래 메아리쳐 들리네.
~물야면장~ 이 시는 동계 이진재의 오계구곡(梧溪九曲)중에서 따온 첫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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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나무 숲에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1735년 김정 선생은 65세의 나이에 마지막 공직인 제주목사로 임명 받게 된다.
선생은 1737년 과로로 부임지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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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제주도민들은 아비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으며 부고를 전해들은 임금은 특별히 삼도감사에게 명해
장사 행렬을 호송케 하여 고향인 창마에서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이 때 운상을 따라 조문 온 제주도민
이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 솔씨를 가지고 와 심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 유랑자도 이설에 무게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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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으로 보았을때 노구에 봉화 까지 오가기는 무척 힘들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당시 제주와 봉화를 오가자면 엄청난
시일 이 걸렸을 테고 재임 중 몇 달씩 임지를 떠날 수는 없었으니, 미루어 짐작건대 제주소나무를 선생보다는 가족이나 주변사람
들 가운데 누군가가 심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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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나무 숲을 지나면 이번엔 솟대군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나타난다, 솟대는 마을 사람들이 급제를 할
때마다 마을 입구에 높이 세운 장대를 말한다. 과장도 이런 과장이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창마 '마을에선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런 말이 허투루는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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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오록마을엔 솟대가 많이 걸려 '솟대 그늘에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거나 '솟대 그늘에 방아찔 벼도 못
말린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떠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랑자는 솟대가 있는 곳 단에 올라가 까치발을 하고 마
을을 넌지시 바라다보았다. 너무나도 평온한 농촌 마을이다. 우리는 이런 마을을 두고서 명당지에 자리잡은 마
을이라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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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 김정 께서 1696년 이 동리에 입향하여 망와공파 장암공파 학사공파 3파가 모여 풍산김씨 오록문중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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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솟대를 세웠던 거리여서 '솟대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솟대거리의 솟대는 소과41명, 대과10명, 음직 45명, 수직 7명, 증직 8명
으로 총 111개가 세워 졌었다고 한다, 재단한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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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지명에 대해서 기록을 찾아보니 본시 이동네는 창마, 창촌 (倉村)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록이
라고 부르다가 마을앞에 큰 창고가 생기면서 부터 창촌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마을의 형세를 보면 마
을 윗쪽으로는 매봉산이 우뚝 솟아있고 앞쪽으로는 만석산,이 창마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밑 양지바른 곳
에 마을이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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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마 입구에서 바라보면 마을의 주택들 전부가 기와지붕으로 된 풍산김씨 집성촌인 봉화 물야면 오록마을은
마을 전체가 문화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가득했다. 지난번 닭실, 산수유, 해저마
을에서도 보고 이번 오록마을에서 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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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민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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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정(藏庵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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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긴 뭐~ 봉화군 전체가 한옥 민속촌이라 해도 틀린말이 아닐 정도로 한옥들로 가득하니 더 이상 할말을 잊었
지만..... 유랑자는 이제 장암정을 향해 발길을 잡는다. 장암정은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150호로
지정된 정자다. 유랑자는 때 마침 관리인이 있는 것을 보고 구경좀 하러 왔다 하자 기꺼이 허락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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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정은 지방 문화재로 지정 되었지만 대다수의 봉화 지방 문화재들이 그렇듯이 장암정 역시 관리가 되지 않
아 아주 퇴락해 보인다. 오히려 마을 입구에 있는 한옥민박의 풍치가 훨씬 아름답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장자는 정자다, 마을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정자의 운치가 어디 갈까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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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정은 장암 김창조(1581~1637)의 학문과 덕을 생각하고 기리기 위해 1724년(경종 4)에 풍산김씨 문중에서
건립하였으며, 지방 유생들과 사림에서 모여 시론을 강론하며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이다. 김창조(金昌
祖,)의 자는 효언(孝彦), 호는 장암(藏庵)·만축(晩築),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장암 김창조는 유연당(悠然堂) 김
대현(金大賢)의 3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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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조는 한양 장의동에서 태어나 1605년(선조 38) 25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자,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인조반정 이후 창릉 참봉, 의금부 도사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김창조는 성품이 강직하여 영남의 선비들이 간신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릴 때 그가 책임을 맡았는데, 선
비들 중 폐모론에 가담한 영남 인사들부터 먼저 단속해야 한다 하고 그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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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축정(晩築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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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635년 조정에서 여씨향약을 실시할 때 그를 도약정(都約正)으로 추대했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행실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아 온 고을이 숙연한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 해 청암도
찰방에 나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안방준(安邦俊)에게 군량미를 지급하여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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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김시성(金時聖)에게 편지를 써서 시국이 이렇게 되
었으니, 너희들은 태백산에 들어가서 농사나 지으며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관직을 사임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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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암의 아버지 김대현은 어려서 우계 성혼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보지 않은 글이 없을 정도로 학문이 깊
었으며, 특히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애독했다고 한다. 김대현은 장성해서는 영남으로 돌아와 23세에 안동
풍산의 오릉동 종택을 중수 이건하고, 학문에 전념했으며 36세에는 영주에 유연당(悠然堂)을 짓고 이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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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학문이 깊고 인격이 뛰어나 중망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영주 이산서원장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대현은 향병을 모아 안집사(按執使) '김륵(金玏)'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그는 1602년 50세를
일기로 산음현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대현이 세상을 떠날 때 남은 옷이 없어 고을의 선비 오장, 권집, 박문
영 등이 자신의 옷을 벗어서 소렴을 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청렴을 짐작케 해주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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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藏庵)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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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장암정의 현판을 보면 만축정이라 걸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현판을 보고 일반인들은 만축정
이라고도 부른다. 5량가구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왼쪽에 2칸의 온돌방을 들이
고 오른쪽에 대청을 두었는데 오른쪽 방이 왼쪽 방보다 조금 뒤로 물려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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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에서 만나는 고색(古色)의 정자를 보노라면 풍상을 낙수처럼 흘러놓았을 처마 끝
의 흘림과 틈을 보이지 않는 석가래와 들보의 맞배물림, 투박하면서 단정한 쪽문 등의 선(線)이 아름답다는 생
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옛 장인들이 깎고 다듬은 목재에게는 그 수명이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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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축정 중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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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축정 상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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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물결이 출렁이는 계절에 마음으로 느끼어지는 푸른숲의 나무들과 짙은 청록(靑綠)으로 덧칠한 들녘에
바람따라 출렁이는 건 여름의 땡볕속에 익어가는 곡식의 몸부림이요, 그 풍경을 줏어담는 것은 인간의 가득한
감성이 주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어찌 사람이 이 계절을 탐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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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하늘이 드리워진 늦 여름 아니 초가을, 들판은 스잔한 기운마저 감도는 가운데 한가롭기만 한 마을에 자
리잡은 장암정을 돌아보는 유랑자의 발걸음엔 옛 시인묵객들 지은 한수의 시조 보다는 시골 서정이 자꾸만 마
음을 붙잡아 두니 이를 어쩌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자를 떠나는 발길은 왼지 아쉬운 마음에서 일까, 자꾸만
멀어지는 장암정을 뒤돌아 보면서 또 한번 카메라 셧터를 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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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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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청간당.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록3길 81-2
(지번)물야면 오록리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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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장암정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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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질문드려요 ㅎ
봉화 유적 탐사를 15일간 하셨는데 저는 참 궁금합니다.
고적을 공부하시는 학자님이신지 참 대단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꼼꼼하게 글도 쓰시고 한문 주석 도 해 주시고 전국을 여행하시는 분인가
ㅎ 봉화 탐방을 보름 이상씩 꼼꼼하게 ~
봉화에 대해 새롭게 느꼈네요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전 그냥 순수 아마추어로서 학자도 아니고
그냥 취미삼아 쓰는 글 뿐입니다. 사실 저의글은
짜집기 수준이지요. 찾아보고 고증하고 모르는것이 있으면
한국 고전 번역원.또는 각 대학 한문학 교수님들 등등해서
자문료를 주고 자문도 구하고 또한 저의 상식과 생각들을 정리해서
그렇게 올리는 글들 입니다.
또한 글도 쓰다보니 느는것이 내공도 쌓이고요.
여행은 저의 취미로서 13년 전쯤는 저도 그냥 다녔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자꾸만 잃어버려서 기억속에서 사라지더라구요. 이래는 안되겠다 싶어
기록으로 남겨 두자는 것이 벌써 국내외를 통틀어 2.000여개 정도를쓴것 같네요.
글 하나 올리는 데 최소한 5시간 이상은 걸립니다.
많은 분들이 보기에 거짓으로 올릴수는 없구요.
검증 또 검증하여 이렇게 올리는 것입니다.
이놈의 오지랍이 문제 입니다. ㅎㅎㅎ
@유랑자1 그렇군요
우와
존경스럽습니다.
@추향 감사 합니다.
앞으로도 이 유랑자의 여행기 함께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