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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6,1-8
1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 10,28)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
(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운명 공동체>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태 10,25ㄱ)
사랑의 운명 공동체.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운명이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불가분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아이 사이를 갈라놓거나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우리의 불안 증세 가운데 분리불안증이 있고, 우리의 두려움 가운데는 분리의 두려움도 있는데,
제 생각에 이것이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사이는 갈라놓을 수 없다는 명백한 표시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힘주어 얘기하지요.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5.38ㄱ.39)
이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와 같은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확신합니까?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는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것에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같은 운명에 처할 각오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같이 사랑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주님과 다를 수 없다고, 다시 말해서 같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같은 박해를 받으리라 각오하라고 하시고, 동시에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주님 사랑에 대한 확신과 같은 운명을 감수하고 감당하려는 우리의 각오가 없다는 표시가 되겠지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회개하여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경외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사도 9,31. 히브 12,28).
잠언에는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잠언 1,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 15,1)라고 하셨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 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 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 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나를 연장으로 삼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때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르 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 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겠답니다>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 생각만 해도 연민의 정이 북받쳐 오르는 사람.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온 그, 그 오랜 기간 나와 일심동체이던 그,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그.
매일 먹이고 씻기고, 달래고 재우던 그, 어찌 보면 나의 분신이요 나와 하나이던 그, 그가 힘들면 나도 힘들고,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던 그.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우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지닌 그런 주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호세아 11,4)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이나 연인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듯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각자를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얼마나 총애하시는지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럭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마태 10, 29-31)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겠답니다.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기억하시겠답니다.
더 은혜로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의 사랑과는 격이 다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처럼 작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이거나 편협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한없이 큰 사랑, 한결같이 일관된 사랑, 지극히 이타적이고 영원불멸하는 참사랑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1)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제자가 스승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뒤만 잘 따라가면 된다는 뜻인데,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죽음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졌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기도 하고,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죽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인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2)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자들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육신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섭지 않으니까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죽는 것은 무서운 일이긴 한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그 무서움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만’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 영혼이 멸망당하는 것을 무서워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즉 공포심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우리는 ‘무서움’과 ‘경외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생활에는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고, 그 생활은 아무 의미 없는 강제노동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내가 사랑하는 분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3)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까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아주 세심하게 보살피시고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작가는 그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 23,4)
‘어둠의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인데,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시련들을 가리킵니다.
넓은 뜻으로, 지상에서의 인생살이를 뜻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둠의 골짜기’ 자체를 없애 주시는 분이라고 찬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그곳이 ‘어둠의 골짜기’ 라고 해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만 강조하셨고, 박해 자체를 없애 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활과 승천으로 직행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수난과 죽음을 거치셔야만 했는가?”, 또는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4)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너희를 더 아끼시고 사랑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박해자들은 참새들보다 못한 ‘하찮은’ 존재다.”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박해자들보다 더 귀하다.”, 또는 “너희는 로마 황제보다 더 귀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안 믿으면서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자들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참새보다 더 하찮은, 또는 먼지보다 더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사랑의 신비 체험의 일상화 - “영적 면역력 증진과 더불어 온전한 삶”>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1)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조그만 구멍 하나만 뚫렸어도 깨진 항아리가 된다.
큰 예의는 작은 예의를 지키는 데서 완성된다.”
<다산>
일상의 작은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크고 작은 예의가 없듯이 크고 작은 죄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는 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오래된 잘못을 말하지 말고 깔보는 표정을 지어서도 안된다.
갑작스레 방문하지 말아야 하며, 갑작스레 떠나서도 안된다.”
<예기>
이 또한 삶의 지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깨어 있는 삶이라면 이처럼 일상의 지혜에도 충실할 것입니다.
<예기>는 중국 고대 경전인 오경의 하나로, 예법의 이론과 실제를 풀이한 책으로 삶의 지혜를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하늘병원 진료차 방문 후 떠나려 할 때 두 젊은 여자 직원이 청해서 고백성사를 줬습니다.
뜻밖의 청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젊은 분들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은 참 갸륵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두 분께 각기 기도문과 더불어 준 동일한 보속에 만족했습니다.
“오늘 하루 병원 생활 중 환자들 겸손히 잘 섬기며, 기쁘고 감사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보속입니다.”
보속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하느님과 이웃을 겸손히 잘 섬기며 기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산다면 '참으로 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이 추구했던 유일한 목표는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정우 바오로 수사의 기일 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나 팔팔합니다!”
6월29일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날 영명축일을 지내며 건강을 뽑내신 88세 노령의 수사님이었는데, 약 2주 후 세상을 떠났고 당시는 아무도 선종하시리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생각입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살아계셨다 해도 돌아가신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냥 시간만 연장된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도 많지 않은가?
나이 30에 죽어서 70에 묻힌다는 말도 있지 않나?
하루하루 선물 인생을 생각없이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감 없는 죽은 삶도 비일비재하지 않나?”
어제 수도형제의 사랑의 권유로 함께 인근의 피부병 진료차 <소나무 한의원>에 들렸습니다.
진단은 “면역질환”이란 것이었습니다.
피부가 면역력이 떨어짐으로 인한 것이기에 장기적인 관리와 보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면역력이 좋고 강할 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피부이지만 면역력의 결핍은 만병의 시초라는 것입니다.
순간 연상된 마음의 면역력, 정신의 면역력, 영혼의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의 심각한 결과를 묵상했습니다.
피부 육신의 면역력에 앞서 이런 영적 면역력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다 싶었습니다.
이래서 영적 면역력의 증진을 위한 “신망애信望愛의 삶”, “진선미眞善美의 삶”, “평화와 기쁨”, “찬미와 감사”, “겸손과 섬김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영적 면역력에 대한 참 좋은 처방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 체험입니다.
인간의 본원적 치유는 하느님뿐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온마음을 다해 하느님 이름을 부름으로 웬만한 병은 다 나았다 합니다.
인간의 영육의 전인적 힐링은 물론 영적 면역력의 증진에 평범한 하느님 신비 체험인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는 확신입니다.
하느님 신비 체험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미사은총의 선물이 참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신비 체험의 대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정말 두려워할 바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나는, 하느님과 단절된 영혼의 죽음입니다.
두려움 속에 포위되어 사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일상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외경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향한 외경의 두려움을 키우는 데 흠숭의 기도가 제일입니다.
더불어 잊지 못하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매사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살아야 함을 절감합니다.
평범한 하느님 신비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이사야의 소명 체험 처럼 비상한 하느님 신비 체험도 있습니다.
이사야의 소명체험에 앞선 날개 여섯 개 달린 사랖들의 하느님 찬미는 그대로 미사전례에 차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미사전례 중 '거룩하시다' 장면 시 꼭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을 연상하시기 바라며 이사야의 체험을 여러분의 체험으로 삼기 바랍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순간 사랖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날아와 이사야 잎에 대고 말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타는 숯을 대신합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이사야의 하느님 신비 체험을 그대로 차용한, 영적 면역력을 증진시켜주는 미사전례야말로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새삼 고맙게 깨닫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사야 예언자가 주고 받는 대화는 그대로 미사중 파견 예식을 연상케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하느님 신비 체험 후 가야 할 복음 선포의 자리는 각자 삶의 제자리입니다.
빛의 주님과 늘 함께 할 때 두려움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사 6,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1989년 가을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자치회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자치회장 후보로 나온 동창이 제게 ‘지지 연설’을 부탁했습니다.
자치회장은 신학생의 대표입니다.
동창은 자치회장을 하고 싶은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동창을 위해서 지지 연설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제가 택한 성경 말씀이 오늘 독서에 읽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저는 친구를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지지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연설의 마지막에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응답과 윤동주의 열정이 통했는지 동창 신학생은 자치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자치회장을 하면서 동창 신학생의 절박함은 신학교 생활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동창 신학생은 사제가 되어,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저를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1998년 대한민국은 IMF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고, 저의 집도 그 수렁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따뜻한 손길을 주었고,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IMF의 수렁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신학교에는 낙산 중창단이 있었습니다.
후배 신학생이 이사야 예언자의 응답을 모티브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 곡의 제목이 ‘Ecce ego mitte me!(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입니다.
멜로디는 경쾌하고, 장엄합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주여 나 보내 주소서
주 나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주소서
님의 그 말씀 따라
나 살고자 하오니
추위에 목마른 자 위하여 보내소서 여기 있소
사랑에 굶주린 자 위하여 보내소서 여기 있소
당신처럼 나도 살으리니 보내소서 여기 있소
보내소서 여기 있소 여기 있소
고난받는 내 민족 위하여
내 정력 다해 사랑케 하고
아픔에 있는 형제를 찾아 당신의 희망을 그에게 주리다 나에게
고난받는 민족을 위하여 내 정열 다해 사랑케 하고
아픈 내 형제를 찾아서 당신의 위로 그에게 주리다 나에게
나 여기 있으니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주여 나를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 주여”
지금 다시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가사와 멜로디입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유트브에서 한번 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번 주 본기도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내가 마당을 쓸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집니다.
내가 꽃 한 송이 심으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집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면 지구가 온통 아름답고 밝아집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사랑하는 유일한 ‘나’>
우연히 인터넷에서 여성 크리에이터가 소위 ‘먹방’ 방송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먹는 양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2미터 피자를 먹지 않나, 장어 3kg을 먹는 영상, 고기 3kg을 먹는 영상, 라면 18개 먹방, 20접시 이상의 짜장면을 먹는 등….
정말 사람이 많을까 싶었습니다.
이 영상들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프로필을 보니, 그녀의 키는 161.5cm에 몸무게 48kg이었습니다.
영상 속에 나오는 모습은 너무나 호리호리했습니다.
괜히 화가 납니다.
저는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것 같은데, 누구는 한 번에 3kg의 고기를 먹어도 체중 변화가 없다니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는 물리학의 절대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요?
과학은 이를 불감증산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몸에서 수증기를 발산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생명현상, 신진대사, 물질대사가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는 되지만 불공평한 것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누구는 1kg을 빼기 위해 하루 종일 풀만 먹으면서 버티기도 하는데 말이지요.
결론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름으로 인해 불공평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나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달라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저를 향해 “너처럼 살지 못해서 너무 억울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다름을 유일한 ‘나’를 위해 필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일한 ‘나’면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유일한 ‘나’를 만드셨기에, 남들처럼 사는 ‘나’는 진짜 ‘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 없이 주님께서 명령하신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세상에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주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증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모른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유일한 ‘나’입니다.
소중한 나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닌, 주님 마음에 드는 ‘나’처럼 살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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