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주년 광복절 경축을 앞두고,
일본 유도 제일인자를 제압하여
한국의 자존심을 살린
역도산(力道山 ,りきどうざん,
본명 김신락, 金信洛)을 소개한다.
병자호란도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환향녀 등으로 피해가 컸지만,
임진왜란과 한일합방 등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역사상 가장 큰
수난을 당했는데,
러일전쟁에서 발트 함대
(Baltic Fleet)를 패퇴시키고
청일전쟁에서 북양 함대
(北洋艦隊)를 괴멸시킨
왜군과의 임진왜란시 해전에서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전승했으며,
조선의 권총 명사수
응칠(應七) 안중근 의사는
하르빈 역두(驛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 3발 명중으로 사살하였고,
역도산(力道山 ,りきどうざん,
본명 김신락, 金信洛)은
일제시대 도쿄에서
일본 유도 제일인자인 기무라를
통쾌히 이겼다.
역도산(力道山, りきどうざん)
역도산(力道山)
출생: 1924년 11월 14일
사망: 1963년 12월 15일
해방 이후 세계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한 체육인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함경남도 출신.
1939년
일본에 건너가서
모모타(百田光浩)로 개명,
이듬해부터
역도산(力道山)이라는 별명으로
일본씨름을 시작하였다.
스모 선수 역도산
1949년 26세로
세키와키(關脇)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1951년
세계적인 프로레슬러인
브란스(Branth, B.)의
일본원정을 계기로
프로레슬러로 전향하였다.
이해 도미하여
본격적인 프로레슬링수업을 하였고,
1953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프로레슬링을 텔레비전에
방영하게 하였다.
강인한 체력과 태권도의 특기로써
https://www.youtube.com/watch?v=AmN2wroJOxg
1953년(쇼와 28년) 12월 6일,
루테즈를 상대하는 역도산
1957년 세계선수권자인
루테즈(Luthes, J. S.)를 물리쳐
헤비급 세계챔피언이 되었다.
이후 19회에 걸쳐
선수권을 방어하였으며,
1958년
월드리그전(World League戰)을
창설하였고,
그뒤 세계의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프로레슬링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일본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또한 여러 개의 체육관과
흥행장을 설립하였다.
1963년 봄에 귀국하여
우리나라의 체육발전을 위해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을 약속하였으나,
그해 겨울 12월 동경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일본 청년의 칼에 찔려
복막염으로 죽었다.
전설 속 영웅 역도산의 죽음
(1963년 12월 15일)
프로 레슬러 역도산(39세),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다이.
1963년 12월 8일 밤
도쿄 아카사카 캬바레에서
“발을 밟았다”
“밟지 않았다”의 다툼으로 인해
대일본흥업사원
무라타 카츠시(村田勝志, 25세)에게
복부를 찔려
부상을 입어
아카사카 산노병원에 입원했으나
15일 오후 9시 50분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아사히 신문 1963년 12월 16일
https://youtu.be/tINVPJpYwQo
일본에서 활약하는 유명인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피를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요즘 유명세를 타는 어느 연예인이,
부쩍 텔리비전 출연이 잦은
어느 정치가가
본래는 한국인이라는 설이
끊이질 않는다.
이런 설이 수두룩한 것만 봐도
아직 일본이 개방된 사회가 아님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남들과 다른 것이라면
우선은 감추어 두어야
득이 된다고 해야 할까?
유명인이 한국인이라는 이야기에
가끔 귀가 솔깃하기도 하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애쓰고 싶다.
왜 그들이 일본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또한
너무 궁금해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가끔 그런 소식들을 들으면
무척이나 반갑다.
역도산
60년대 초
일본에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킨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다.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1924년
농부 김석태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일제치하에서
함경도와 만주 간도를 떠돌며
생활하던 중
14살 때 씨름대회에 나가
우승을 거두어
그 용력을 자랑한다.
1939년 16세의 김신락을
씨름 대회에서 처음 본
일본 스모계의 거물
타마노우미 우메키치는
김신락을 일본의 스모계에
등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김신락은
“일본 사람이 되기 싫다.
고향에서 살겠다”고 항거하여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김신락은 일본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기까지 하였으나
타마노우미의 강제적인 결정으로
1940년
일본행에 몸을 실었고,
시쇼노세끼의
한 스모 선수 양육소에서
스모 선수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쇼와시대 일본의 영웅, 역도산
일본에 도착한 김신락에게
제일 처음으로 주어진 것은
위조된 호적등본이었다.
본명 모모타 코지(百田光浩),
생년월일 타이쇼 13년 11월 14일,
본적 나가사키현 오오무라,
호주 모모타 기지요시(百田巳之吉),
뿐만 아니라
김신락의 초등학교 졸업증명서까지
완벽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김신락은
모모타 코지가 되었고,
스모 선수로는
리키도잔(역도산)이란
이름으로 등단하게 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는
역도산의 좌우명이었다.
그는 스모에서 이기기 위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씨름판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선배선수들이었지만
역도산은 선배선수들에게
자기도 끼워달라고
끈질기에 설득하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선배선수들에게
내동댕이 쳐지면서도
연습에 힘을 기울였다.
역도산은 1940년
처음으로 스모 대회에 출전하여
승리를 거듭함으로써
인기를 손에 쥐고
승진을 해나갔다.
1949년
세키와케에 등극하여
출세의 길을 걸었으나
내장 디스토마에 걸려
잇달은 패배를 계속하였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스모대회에 출전하였고,
그해 10월
10승 5패라는 기록을 남기었다.
병마와 싸워 이겨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역도산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으나
1950년 9월 새벽
그는 자신의 집에서
홀로 단발식을 거행하였다.
스모계에서 빠른 성공을 쥐었으나
더 이상의 등단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 홀로 만의 단발식은
스모계의 묵은 인습에 대한
울분의 폭발이었던 것이다.
스모계를 떠난 역도산은
공사장의 간부로 전전하던 중
프로레슬링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1952년
하와이로 떠난 그는
레슬러로서 다시 태어나
미국 등지에서
여러 선수들을 제압한다.
1954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프로레슬링 협회를 창설하고
일본의 첫 프로레슬러로서
그는 텔리비전의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전쟁의 실패,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안고 있던
일본 사회는 영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때 역도산은
까만 타이츠를 입고
가라테잽을 무기로
미국의 거대한 선수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려갔다.
텔레비전이 궁하던 시절,
가두 텔레비전 앞에 모인 사람들은
역도산의 모습에 열광하였고,
역도산의 인기에 불이 붙을수록
텔레비전 판매량도 늘어만 갔다.
역도산은 반칙을 일삼는
레슬러와는 달리
정정당당하게 싸웠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일본 사람 모두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이미 ‘영웅’이 되어버린 그를
일본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웅=일본인’이란 공식속에서
그의 위조된 과거는
기정사실화되어 갔다.
역도산의 죽음
미국 원정, 브라질 원정에서
큰 승리를 거두자
역도산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많은 선수들이 일본을 찾았다.
스카이 하이 리,
돈 레오 조나던 등이
그에게 도전하였으나
역도산에게서 승리를
빼앗아갈 수 없었다.
역도산은 후배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박치기 왕으로 유명한
김일을 길러냈고,
자이언트 바바와
안토니오 이노끼도
그가 발굴한 선수들이다.
브라질 원정에서 만난
안토니오 이노끼는
상파울로 농민 시장에서
짐꾼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브라질 스포츠 대회
포탄 던지기에서
우승을 거두어
이미 유명인이었던
그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프로레슬링 선수로 만들었다.
야구선수였던
자이언트 바바도
프로레슬링 무대에서
활약하게 된다.
자이언트 바바와
안토니오 이노끼가
처음 링 위에 선 것이
1960년도의 일이었고,
그로부터 3년후
역도산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역도산 VS 기무라 2부 - YouTube
1963년 12월 7일
하마마츠시 체육관에서
결투를 끝낸 역도산은
야간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
목욕을 마친 후
신문을 읽고 잠이 들었다.
역도산이 미국에 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과 점심식사를 마친 역도산은
다시 잠들었으나
1시간도 못 되어 전화가 울렸다.
미국 선수 데스트로이야가
술을 마시고 있으니
동참하라는 전화였다.
술자리에 참석한 역도산은
라디오의 방송 출연 때문에
아카사카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 자리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던 도중
어느 조폭의 칼에 찔려 입원,
15일 저녁 숨을 거둔다.
역도산의 죽음을 두고는
아직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범인의 진술에 따르면
역도산이 밟을 밟고는
안 밟았다고 시치미를 떼었기 때문에
칼로 찔렀다고 하였으나,
범인과 역도산은
이전부터 얼굴을 알던 사이로
술자리에서 몇번
티격태격한 일도 있었다 한다.
범인은 7년형을 살았다.
또, 역도산의 두 번째 수술이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설,
수술 후 물을 마시면 안 되는데
목이 말라 꽃병 속의 물을
마셔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역도산을 이야기 할 때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조폭과의 관련성이다.
서민의 스포츠로 인기를 올리는
프로레슬링계의 수입을
조폭이 가로채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역도산도
있었다는 설이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뿐 아니라
리키 스포츠팔레스,
클럽 리키,
리키 아파트먼트 등을 경영하는
실업계의 영웅이기도 하였다.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였으나
역도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조선청년사에서 만든 책 속의
그는 우표(1995년)로까지
발매된 적이 있는
북조선의 민족적 영웅이었으며,
일본인이 쓴 역도산은
쇼와 시대의 텔레비전 세계의
영웅이었다.
때때로 그는 전후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프로레슬링으로 말끔히 씻어준
영웅이었고,
때때로 그는 술망나니였고,
때때로 그는 조폭이기도 하였다.
단 하나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생을 멈춤 없이 걸어왔다는
사실만이었다.
빠른 결단력과 강인함 하나만으로
삶을 버텨온 사람이란 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누군가의 철저한 계락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여하튼 그는 재팬 드림을
가장 완벽하게 이룩한
전후 시대의 최초의 영웅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azZM0sV3UQ&t=7s
2017년 WWE 명예의 전당 레거시 어워드 헌액자
2011년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옮겨온 글 편집
첫댓글 역도산의 본명이 김신락.^^
다양한 자료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참. 아까운 분이 일본인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었군요. 애석합니다.
바람새님
장문의 극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힘으로는 당할 수 없으니까 흉기를 사용했고 야쿠자의 계획적인 살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