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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7,1-9
1 우찌야의 손자이며 요탐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 임금 르친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2 아람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3 그러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4 그에게 말하여라.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5 아람이 에프라임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너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말하였다.
6 ′우리가 유다로 쳐 올라가 유다를 질겁하게 하고 우리 것으로 빼앗아 그곳에다 타브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자.′
7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8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9 에프라임의 우두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도시들을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이 경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사실 이들 도시들이 꾸짖음을 받은 이유는 복음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거나 윤리적으로 심각한 죄악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죄악으로 본다면, 바알 숭배에 빠져 여러 차례 예언자들에게 책망을 받았던 페니키아의 티로와 시돈이, 그리고 부패와 타락의 전형이었던 소돔이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래아의 이 도시들에게 엄중한 심판의 경고가 내려진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와 기적들을 대부분 그들 지역에서 행하셨건만,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특은을 받고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면서 저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두려움입니다.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혹은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았건만, 아직 하느님과 형제들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루카 12,41-48)의 마지막 구절이 제 마음을 압박해 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저 역시 그들처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고, 완고함으로 굳어져 있음을 봅니다.
지금도 저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자꾸자꾸 체험시켜 주건만,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파라오처럼 완고하고 변덕스런 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시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곧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마치 뒷날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셨듯이 말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마태 23,37)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듣습니다.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애간장 태우시는 마음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이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건네주신 우리 주님께 우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이오니,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제 마음을 부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불행으로부터 회개>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기에 코라진이 불행하다고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마태 11,21ㄱ)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저는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김찬선 레오나르도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 불행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행복한 줄 모르는 불행과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입니다.
그런데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 왜 불행이고, 불행한 줄 모르는 것은 또 왜 불행합니까?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은 사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은 행복할 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행복할 줄 모르기에 행복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행복할 줄 아는 것은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행복으로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다른 행복과 큰 행복을 욕심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할 줄 앎으로써 행복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이런 식으로 행복하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에서 회개함으로써 참으로 행복할 줄 알라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다 우리의 참 행복을 위한 것이고,
우리가 불행으로부터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이며,
그래서 사랑의 호소이지 불행해지라는 저주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불행한 줄 알면 불행으로부터 회개할 겁니다.
그런데 불행한 줄 모르기에 계속 불행하게 삽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내가 왜 불행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앞서 얘기한 것이고 그래서 다시 얘기하는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의 행복에 만족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더 풀이하면 이 세상의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기에 저세상의 행복을 살려고 하지 않아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하고 저세상에서도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까요?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부터 소유하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입니다.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200주년 마태 5,3참)가 그것 아닙니까?
영 안에서 가난하면 이미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지금 여기서부터 곧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부터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만 행복하면 그것이 진짜 불행이고,
이 불행으로부터 회개하라고 오늘 주님께서 불행 선언의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불행 선언에서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쁨이 충만한 날>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 날은 긴장된 날이지만 노력한 결과를 시험하는 날이기 때문에 기대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동안의 수고와 땀의 결과를 대면하는 날이기에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환히 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날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심판 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나이니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구원의 날이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감사하는 날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흔들비쭉,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주시고 자비와 용서로 함께해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에제 18,30) 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과거는 올가미가 아니라 새 삶의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여기서 새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과거를 들추어내며 무어라 하든지 내가 주님 앞에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가야 합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은총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간수 하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허물과 연약함에 대한 인정과 새 삶에 대한 희망이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삶이 요구됩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교만의 죄입니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죄는 하느님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코헬 12,14) 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 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허물과 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나의 잘못에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길 다짐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네 삶 속에 때로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마음은 아직도 이팔청춘인데, 어느덧 세월에 흐르고 흘러버렸습니다.
그래도 제 혈관 속에는 살레시안의 푸른 피가 뛰고 있기에, 청소년 사목자로서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지만, 그게 참 여의치 않습니다.
정년이 지나면서는 청소년 시설이나 청소년 사목 현장에 남아 있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는다 치더라도 세월의 간극, 문화적 차이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좌절감이랄까 우울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청소년 사목자로서 반드시 아이들 앞에 서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터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청소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일종의 사목적 회심이라고나 할까요.
찾아오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것, 아주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환한 얼굴로 인사하고, 환대하는 것도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예초를 하고, 꽃나무를 심는 것도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예초기를 돌리면서, 돈가스를 튀기면서, 안전 요원으로 보트를 운행하면서,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마태 11, 21-22)
회개라는 것은 사도 바오로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처럼 아주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의 회개도 있습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되풀이해야 할 일상 안에서의 회개입니다.
우리가 매일 행하는 수많은 일들, 사건들, 만남들은 일상적인 회개를 위한 좋은 계기입니다.
오늘도 저는 신나게 예초기를 돌리면서 또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초기를 등에 지고 허리춤보다 높은 잡풀들을 시원시원 날리다 보니, 기분이 좋았지만,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습니다.
한 시간쯤 돌리다 보니, 더위와 갈증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다 벗어놓고 야외 식당 그늘에 잠깐 앉았습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맥주 하나를 꺼내 땄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원샷으로 끝냈습니다.
그 순간은 일종의 작은 천국 체험이었습니다.
모든 세포, 모든 기관과 장기를 통해 시원함을 받아들이는 그 맛이란...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우리네 삶 속에 때로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결핍을 느껴봐야 풍요로움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때로 갈증과 허기가 있어야 삶이 더 단단해집니다.
큰 병고를 겪으면서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가 회심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안 믿는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1)
오늘 말씀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특정 고을들을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고을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고을들로 그 세 고을들을 언급하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라는 말은 그 세 고을들에서만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고, 다른 곳에서는 기적을 덜 일으키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말인데,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뽑으신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그들이 특별히 선택되고 뽑혀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으면서 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성모님도 사도들도 모두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유대인들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긴 한데, 그 특별함 때문에 그들의 죄가 더 커졌습니다.
여기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입니다.
물론 그 믿음에는 회개도 포함됩니다.
2)
여기서 언급된 티로, 시돈, 소돔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언급하신 것은 그들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고, “너희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지만, 이방인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심판 날에는 그들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믿었던 신앙인들은 알 기회가 없어서 믿을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차라리 안 믿고, 덜 엄한 심판을 받는 것이 낫겠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심판보다도 지금의 태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뭔가 아쉬운 일이 있을 때에는 주님께 간청하고 매달리다가, 그 일이 지나가고 나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랬다가 또다시 아쉽고 급한 일이 생기면 주님을 찾고...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가?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의 내가’ 선택하는 일입니다.
3)
이스라엘을 꾸짖으신 말씀과 21장에 있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같은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마태 21,43)
이 말씀은,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은총을 잃게 될 것이고, 그 은총은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이 경고는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됩니다.
교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의 각 신앙인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역시 유대인들처럼 은총을 잃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니, 주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로마 11,21-22)
여기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라는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여러 번 강조하셨던 말씀에 연결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경청, 회개, 그리고 믿음의 여정 - “무신불립(無信不立)”>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시편 95;7.8)
오늘 복음 환호송 시편입니다.
경청에 따른 회개요 믿음의 성장입니다.
어제 교황님이 방문하신 수녀님들에게 강조한 두 핵심 요소가 “아름다움과 단순성”입니다.
“오늘날 세상안 구체적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발산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피상적인 것을 떨쳐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선택하라.
단순성이다.
날마다 복음 안에서 빛나는 하느님 사랑의 단순성에 의해 형성되도록 하라.”
단순할 때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도 있듯이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하고 정화하고 치유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교황님은 성소를 위한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하라, 기도하라!
그리고 양성(formation)에, 좋은 양성에 집중하라!”
기도가 답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회개에 대한, 믿음에 대한 답도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해야 회개에 믿음이요 두려움도 약화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요 믿음입니다.
참 좋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아 아름답고 단순합니다.
다산의 말씀도 믿음의 어른들에게, 특히 믿음의 상담가에게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어른은 독촉하듯 뒤에서 밀지 않고, 응원하듯 앞에서 끄는 존재다.”
<다산>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봤던 분이 생각납니다.
나름대로 60-70 평생 험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면 절로 연민의 마음 가득해지기 마련입니다.
많은 분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신부님, 한 번 안아주세요!”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마치며 청했던 60대 후반 자매의 ‘외롭고 힘든’ 마음을 환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산전수전 다 겪어내며 삶들을 떠받치며 순종해온 주님의 살아 있는 거룩한 성체같은 몸들을 보면 저절로 감사(感謝), 감동(感動), 경탄(敬歎)하게 되고 외경심(畏敬心)도 지니게 됩니다.
주님의 성체를 대하듯 존중과 배려의 사랑으로 보살펴야할 거룩한 성체와 같은 몸들임을 깨닫습니다.
수없이 생미사나 연미사를 봉헌하다보면 참 다양한 사연에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인간 사회 현실인지 실감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고 용기를 줍니다.
아람 연합군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 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합니다.
예나 이제나 두려움 앞에서는 똑같이 불안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전달을 받아 아하즈 임금을 격려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힘이 됩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는 성서에 가장 많이 나올 것입니다.
무려 365회 나온다니 예나 이제나 두려움 속에 포위되어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1년 365일 날마다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하십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는 예수성심상 바위판에 새겨진 주님의 말씀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격려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성심상 앞을 지날 때 마다 잠시 멈춰,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불안해 하는 이들에게 평화를, 아파하는 이들에게 치유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와 평화와 치유를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오늘 이사야서 마지막 말씀은 평생 마음 깊이 새기고 지나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Unless your faith is firm, you shall not be firm!)
‘믿다’ ‘서 있다’ 동사는 같은 동사 히브리어 ‘아만(aman)’의 두 형태로 ‘견고하다’ ‘확고하다’는 뜻이고 ‘아멘’도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신불립(無信不立)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의 집처럼 허약하여 곧 무너집니다.
반석같은 믿음 위에 인생집을 짓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믿음의 삶은 필수이며, 이런 믿음으로 믿음을 위해 날마다 쓰는 제 강론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된 세 도시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 세도시의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경청하지 않았고 주님의 기적에 회개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반복되는 불행한 현실의 모습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다.
너, 가파르나움아,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회개를 위한 충격요법적 표현입니다.
무신불립의 세 도시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이 있었더라면 주님의 기적에 응답하여 마음을 열어 경청하고 회개하였을 것이며, 믿음도 더불어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경청과 회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경청도, 회개도, 믿음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평생 경청의 여정에, 회개의 여정에,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는 길뿐입니다.
새삼 경청의 선택, 훈련, 습관을, 회개의 선택, 훈련, 습관을, 믿음의 선택, 훈련, 습관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유비무환의 진리입니다.
그리하여 경청과 회개와 믿음의 반석같은 삶을 위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를 바치며 믿음을 비축해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경청과 회개,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이사 7,9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
제게도 ‘오십견’이 찾아왔습니다.
매일 걷지만, 스트레칭을 자주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리치료를 받는데, 선생님이 오십견 치료에 쉬운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자꾸만 어깨를 돌려주고, 늘려주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이 아플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치료가 된다고 합니다.
심할 때는 마취하고 어깨를 늘리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오십견인데 60이 넘어서 왔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몸도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로 꾸준히 관리해 주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오십견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믿음이 약해지고, 의욕이 없고, 불평과 불만이 늘어나고, 기도 생활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몸의 오십견은 증상이 있고, 불편하여서 치료받지만, 신앙의 오십견은 증상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함도 느끼지 못해서 점차 심해지게 됩니다.
신앙의 오십견을 치료하기도 쉬운 방법이 없습니다.
‘회개’가 최고의 방법입니다.
회개란 어딘가로 향하는 것과 어딘가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이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고 찾는 회개에 있으며, 어딘가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것은 그동안 하느님 사랑에서 벗어나 우리의 본래의 지향을 어지럽히는 무질서한 충동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회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며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단죄했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잡으러 다녔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체험은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고 찾는 회개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 사도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눈물은 무질서한 충동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회개였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상실에 대한, 고통에 대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강대국들의 위협 앞에 두려워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때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품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진흙탕에 빠질지라도, 옷이 더러워질지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에 안주한다면, 섬기려 하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에 사과 4개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과 4개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막막하실 것입니다.
사과가 그냥 4개 있을 뿐인데 여기에 무슨 설명을 할 수 있을까요?
‘사과 1개와 사과 3개가 모여서 4개가 된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과 반쪽 2개와 사과 3개가 모이면 4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수학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숫자상으로는 5개의 사과가 아닐까요?
간단해 보이지만 설명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사과도 설명하기 힘든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설명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하느님 존재에 대해 우리는 그냥 아는 것일 뿐입니다.
증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증명하려 할수록 그 모호함에 갇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감으로 확인하고 지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느님을 믿겠다는 사람은 어떻게든 믿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많은 성인 성녀는 이 신 존재 증명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방법 없음’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분명히 공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공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공기가 없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숨 쉬고 있음이 공기가 있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음 자체가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고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적을 직접 보고 직접 체험했어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 모든 기적을 그저 자기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그 모습에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같이 있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었고, 그 결과 하늘에 오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많은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또 들리지 않는다고 주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과거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불행하여라.”라는 예수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의 삶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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