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원천교회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퍼갈 수 있도록 배려한 쌀독이 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쌀독 옆에는 쌀을 가져갈 수 있는 비닐봉지도 놓여 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안 보고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불도 꺼놓고,
옆으로 드나들 수 있는 쪽문도 있다고 한다.
최근 두 달 동안 어려운 사람들이 퍼간 쌀의 양은 1t이라고 전해진다.
구례 운조루(雲鳥樓)의 쌀 뒤주가 생각났다.
운조루의 쌀 뒤주는 둥그런 원목으로 되어 있다.
지름이 1m쯤 되는 커다란 통나무의 내부를 파내서 그 안에
다가 쌀을 담게 되어 있다. 두 가마 반 정도 들어가는 용량이다.
뒤주 하단부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여 있는 마개가 설치되어 있다.
'누구라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마개를 열면 쌀이 조금씩 나온다. 그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이나 지나가는 과객들이 이 '타인능해' 마개를 열고
쌀을 조금씩 가져가곤 했다.
운조루에서는 한 달에 평균 두 가마 반 정도를
이런 방식으로 주변 사람에게 나눠줬다.
쌀 뒤주가 놓인 위치도 절묘하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틈새 공간에다가 뒤주를 놓았다.
쌀을 퍼가기 위해 이 집에 오던 사람들이 집주인과 쉽게 마주
치지 않는 지점이다.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도 배려한 셈이다.
쌀을 퍼가는 사람들도 무한정 퍼가지 않았다.
1인당 평균 한두 되 정도 가져가는
것이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월말에는 운조루의 어른이 뒤주에 쌀이 남았는지를 체크하곤 하였다.
만약 쌀이 남아 있으면 '우리 집이 인색해서 덕망을 쌓지 못했구나!'
한탄하면서 쌀을 관리하는 며느리를 야단치곤 하였다.
1948년의 여순사건과 6·25를 거치면서 빨치산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지리산 노고단 자락에 있었던 부자 지주 집 운조루가 불타지 않고
오늘날까지 건재한 이유는 바로 이 쌀 뒤주 하나에 있었다고 본다.
지리산 일대에서 평소에 인심을 얻지 못한 지주들은 대부분 빨치산에게
살해당 하거나 평소에 원한이 있었던 주변 사람에게 보복을 당했다.
난리가 났을 때 평소에 쌓인 개인감정을 정리하기 마련이다.
교회의 쌀독 기사를 보면서 한국의 교회가 조선시대 명문가의
두터웠던 인심을 계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