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7장 2절에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보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소식”을 뜻하는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해진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1)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너의 온 마음 안과 너의 온 영혼 안과 너의 온 정신 안에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율법 중에 “첫째 계명”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2) 우리가 사랑할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보이셨습니다(창 12:7).3)
하나님께서는 목적에 행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시 29:3).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이성을 전적으로 초월하시고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헤아려지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4)
죽지 않으시며(Immortal), 보이지 않으시며, 지혜로우신, 유일한 하나님(God Only)이십니다(Walter Chalmers Smith).
가까이하기 어려운 빛 안에 우리의 눈으로부터 숨김을 받으시며, 가장 복되시며, 가장 영광스러우시며,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이성으로 성찰하면서 창조 만물과 자연 질서만 바라보더라도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것입니다. 하나님 곧 영광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5)
그 하늘이 신(God)의 영광을 선언합니다(declare). 그 창공(firmament)이 하나님의 손의 일을 선포합니다(시 19:1).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하여 그 자신을 일부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직접 그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기도 하셨습니다.6)
영광의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2절 본문의 핵심입니다.7)
“좋은 소식”인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며 역사를 다시 돌아 올라가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8) 스테판은 아브라함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서 구약성경을 이야기합니다.
요즘 시대 무원칙의 아버지들은 징계와 훈육을 중시하지 않습니다.9)그 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에 대하여 필히 징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우리 대신 죗값을 받으신 것입니다.10) 죄의 값을 지기에 족한(enough) 어느 다른 좋은 것도 없는 까닭에,11) 그 흘린 보배 피로써 날 속량했습니다(찬송가 146장 3절).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들은 돈을 숭배합니다.12) 돈을 좋아하는 것은 돈을 예배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녀들이 하나님인 것이고, 그들에게 돈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만을 위해 산다면 그에게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이 세상을 지으신 때는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성경은 세상이 미개한 상태에서부터 진화하였다고 말씀하지 아니하고 이와 반대로 완벽한 상태로 창조된 세상이 타락하였다는 말씀합니다.13)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까닭에 세상이 타락하게 된 것이며, 오늘날 많은 참사들이 돈벌이에 혈안인 사람들의 탐욕 때문에 생깁니다.
다음 내용은 통일찬송가 80장에 시인이 섭리를 묘사한 가사입니다.14)
하나님께서 그 기적들을 행하시기 위해 신비한 길 안에 움직이십니다. 그는 그의 걸음걸이들을 바다 안에 심으시고 폭풍우 위에 올라타십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보고들 안에 깊이 결코 약해 가지 않는 솜씨로 그가 그의 빛나는 설계들을 비축하시고 그의 최상의 의지를 일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성도들이여, 신선한 용기를 취하시오; 구름들을 두려워하나 당신들의 머리 위에 축복들 안에 깨어질 것입니다.
연약한 감각으로 주를 판단하지 말고 그의 은혜를 위해 신뢰하십시오. 언짢은 섭리의 뒤에 그가 미소하는(smiling) 얼굴을 숨기십니다.
그의 목적들은 빨리 익을 것이며, 모든 때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싹은 쓴 맛을 가지지만 그 꽃은 달 것입니다.
맹목적인 불신은 잘못한 것이 틀림없고 그의 일을 헛되이 조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해석자시고, 그가 그것을 분명히 만드실 것입니다. 윌리엄 쿠퍼의 하나님께서 신비한 길 안에 움직이신다는 찬송 시입니다.
사람들이 돈에 눈이 멀어 안전을 고려하지 아니하면 인재가 생깁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자들이 그 재앙 때에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습니까? 참사가 일어난 때에 뭐라고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 범한 죄의 결과를 거두게 내버려두십니다.15) 죄인들이 자신의 죄의 열매를 거두면서 하나님께 불평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신 사례들은 성경 곳곳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을 시시한 싸구려로 만드는 행위는 커다란 죄입니다. 비록 세상은 타락하였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 보이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오신 이야기입니다.16)
1.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에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3절에 “너는 너의 땅에서와 너의 친척에서 나가고 너에게 내가 보여준 바의 그 땅 안으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이 현세에 주저앉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런 삶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입니다.17)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세상“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며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세상은 돈을 숭배하고 자동차와 주택과 쾌락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반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은 거기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악의 땅이요, 우리는 장망성에 살고 있기 때문 입니다.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땅에서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에서 떠나지 않으면 심판에 휩쓸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시고, 새로운 땅으로 부르십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현재의 삶은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의 준비일 뿐입니다.19)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가 영원히 살 참된 고향은 지온입니다.
사람들은 크리스트교가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게 장려하고 사회를 개선하여 나가면 마침내 세상이 바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메시지가 아니며 복음의 메시지는 그와 반대인데, 복음은 세상이 장차 망할 성읍인 장망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20)
현재의 하늘과 땅에는 소망도 없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21) 우리의 소망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으로 된 신천신지의 세상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가 나온 바의 고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수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더 나은 고향을 사모하였으니 하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22)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후에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거기에서 원수들을 자신의 발등상 삼으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23)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떠나라고 하실 때에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24) 예전의 땅 안에 가지고 있던 것과 누리고 있던 것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왕국으로 오라는 초대에 응할 때에 복됩니다.
2.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4-5절에 “그때에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거기로부터 너희가 지금 거주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고. 그가 그에게 그것 안에 유산을 발의 걸음도 주지 아니하셨고, 그가 그에게와 그의 씨에게 소유를 위해 그것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에게 자식이 없는 때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스테판은 하란이 메소포타미아 지역 밖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며, 스테판은 메소포타미아가 우르의 주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행 7:4).25)
그때에 테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롯과 며느리들을 취하고 그들이 그들과 함께 칼데아 사람 우르에서 가나안의 땅에 가기에 나오고 그들이 하란까지 들어가고 그들이 거기 거주하였습니다(창 11:31).
“하란”은 우르, 바벨, 니네베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4대 도시입니다.26) 우르에서 가나안에 가려면 하란까지 간 후에 지중해를 따라 내려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테라가 죽자 가나안으로 갑니다(창 12:4-5).27)
하나님께서 그에게 유산을 한걸음도 주지 아니하셨습니다(행 7:5).28) 그가 그에게와 그의 씨에게 소유를 위해 그것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에게 자식이 있지 아니하는 때였습니다.
아브람이 말하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당신은 나에게 주실 것입니까 그리고 나는 아이가 없이 걷고 나의 집의 획득의 아들(steward)은 다메섹 엘리에제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창 15:2).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상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이 없다는 현실을 보고하며 그의 소원을 간접적으로 아룁니다.
그가 말하기를, “보소서 나에게 당신이 씨(seed)를 주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집의 아이가 나를 상속하는 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창 15:3).
아브람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집의 아이가 자신을 상속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는데(창 12:7),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가 기도하기 전에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까닭에 아브람의 믿음이 약하여지고 그의 신앙이 흔들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우리가 아무리 요구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며 기다려서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는 늦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길어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니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람이 요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언제인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반드시 씨를 주실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창세기 15장 4절에 “이 사람은 너를 상속하지 아니하리니, 너의 내장들로부터 나올 그가 너를 상속할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그 외부로 나가게 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에 “너는 하늘에 바라보고 그 별을 셀 수 있으면 세라, 이와 같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야훼 안에 믿었으므로, 야훼께서 그것을 그에게 공의로 간주하셨습니다(창 15:6).
“믿었다”는 완료형 동사에 의할 때에 그는 하나님을 계속 믿었습니다. 믿는 것은 과거의 고백에 의해 다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믿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믿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공의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그를 믿는 것을 사람에게 공의로 간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가 그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이 땅을 점유하도록 주기 위해 너를 칼데아 우르로부터 나오게 한 야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7).
여기서 “점유하다(take possession)”라고 번역한 단어(야라쉬)는 “가지다”, “상속하다”, “점유하다”(take possession of)라고 번역됩니다.
“점유(占有)”는 “차지할 점”이며 영역, 지위 따위를 차지한다는 뜻이며 “상속(相續)”은 “이을 속”이며 다음에 이어주거나 이어받음을 뜻합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이 땅을 점유하게 주기 위해 너를 칼데아 우르로부터 나오게 한 야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7).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점유시키시려고 그곳으로부터 나오게 하셨는데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주시려고 악마의 왕국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그가 말하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으로 내가 그것을 소유할 것을 내가 알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창 15:8).
그리고 야훼께서는 그에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 세 번째 암송아지와 세 번째 암염소와 세 번째 숫양과 산비둘기와 어린 새끼를 취하라.”라고 하셨습니다(창 15:9).
창세기 15장 10절에 “그리고 그가 그를 위해 이것들의 모두를 취하고 그것들을 그 중앙에서 둘로 자르고 각자의 조각이 동료를 대하기에 주고 그 새는 그가 둘로 자르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6-7절에 “그의 씨가 다른 땅 안에 외국인이 될 것이고, 그들이 그를 노예로 하겠으며 그들이 400년을 학대하겠으며. 그들이 종이 될 그 이방인을 내가 판단하고 이 후에 그들이 나올 것이고 그들이 이 장소 안에 나에게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5장 13-14절의 인용입니다.29)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를 “너의 씨가 다른 땅에서 거류민이 될 것이고 그들이 그들을 섬기겠으며 그들이 그들을 400년을 괴롭히겠고. 내가 그들이 섬길 민족을 심판하고, 그들이 큰 재산을 가지고 나오겠고. 너는 너의 조상들에 평화에 돌아가겠으며 너는 좋은 노령에 매장되겠고. 넷째의 세대가 지나고 여기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5:13-14).
그의 씨가 다른 땅 안에서 다른 민족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창 15:13). 하나님께서 괴롭힘을 받게 하시는 이유는 겸손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창 15:14). 그의 자손은 이집트를 섬기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집트를 심판하십니다.
그 자른 조각 사이에 연기 화덕과 불 횃불이 지나갔습니다(창 15:17).
그 날 안에 야훼께서 아브람과 함께 언약을 잘라내시며 말씀하시기에, “너의 씨에게 이 땅을 주었으니,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라”고 하셨습니다(창 15:18).
“언약(言約)”(브리트)은 “언약”, “계약”(covenant)을 의미합니다. 첫째의 언약은 야훼 하나님께서 아담과 잘라내셨던 언약입니다(호 6:7). 노아와의 언약에서 “세우다”라는 동사(쿰)가 사용되었지만(창 6:18) 언약은 보통 “잘라내다”라는 동사(카라트)와 사용됩니다(창 15:18). 홍수의 물로부터 잘라내어진다는 표현에서 사용된 동사입니다(창 9:11).
언약과 함께 “잘라내다”라는 뜻의 동사(카라트)가 사용되는 것은, 동물들을 둘로 자르고(창 15:10) 자른 조각들 사이에 지나가는 것으로써 언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창 15:17).
이러한 언약을 체결하는 방식에는 ‘만일 내가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 동물처럼 나도 잘려서 죽게 될 것이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연기의 화로와 불의 횃불을 통해 그 사이에 지나가심으로, 그는 자신의 생명을 거시고서 아브람과 함께 언약을 잘라내신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 언약”을 “횃불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8절에 “그리고 그가 그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고 이렇게 그가 그 이삭을 낳았고 그가 그를 그 여덟째 날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그 야곱을, 그리고 야곱이 그 열두 족장들을”이라고 하였습니다.
할례의 언약은 창세기 17장 9-14절에 나옵니다.30)
창세기 17장 9-14절에 “너와 너의 씨는 나의 언약을 지킬지라. 나와 너희와 너의 씨 사이에 할례를 행함을 받기에 지킬 나의 언약이고. 너희는 너희의 포피(foreskin)의 살을 할례를 행함을 받았으며, 그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between) 언약의 표시(sign)에 되었고. 8일의 아들은 집의 태어난 자와 외국의 아들로부터 돈의 구입이 너희에 모든 남성은 너희의 시대들에 할례(割禮)를 행함을 받을 것이라. 너의 집의 태어난 자와 너의 돈의 구입이 할례를 행함을 받겠고 나의 언약이 너희의 살에 영원의(everlasting) 언약에 되었고. 포피의 살을 할례를 행함을 받지 않을 할례를 받지 않은 남성이고 그 영혼은 그의 백성들에서 잘라내어지니 나의 언약을 어겼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하였습니다(창 17:9). 그것은 할례를 행함을 받기에 지킬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창 17:10). 그것이 하나님과 그들 간에 언약의 표시에 되었습니다(창 17:11).
창세기 17장 15-16절에 “너의 아내의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사라’가 그녀의 이름임이고.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었으며, 또한 내가 그녀로부터 너에게 아들을 주었고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었고 그녀가 민족들에게 되고 백성들의 왕들이 그녀로부터 있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Sarah)”는 “왕후”를 뜻합니다. 사라는 그녀의 이름의 뜻과 같이 ‘왕들의 어머니’인 왕후가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왕들이 사라로부터 있게 될 것입니다.
아직 사라에게 아들이 하나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이름을 ‘왕들의 어머니’라는 뜻의 “사라”라고 부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왕들의 어머니’야 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 ‘왕들의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고, 사라는 그 남편의 이름을 부를 때 ‘많은 군중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그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함께하셨습니다(창 17:6).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성들의 왕들이 사라로부터 있을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창 17:16).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여자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겠으며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르고, 내가 나의 언약을 그의 뒤에 그의 씨에게 영원의 언약에 확립할 것이고. 내가 이스마엘을 복을 주고 그를 열매를 맺게 하고 그를 매우 많게 하며, 그가 열 두 지배자들을 낳게 만들 것이고 내가 그를 큰 민족에 주었으며. 내가 나의 언약을 다음 해 이때에 사라가 낳을 이삭과 세울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7:19-21).
창세기 21장 1-5절에 “야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라를 방문하셨고, 야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라를 위해 행하셨고(did for).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한 때에 노년에 아들을 낳았고. 아브라함이 사라가 그에게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그를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음을 받은 때에 그는 100세였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것처럼 사라를 방문하셨습니다(창 21:1). 하나님께서 사라를 방문하셨습니다(visited). 사라에게 주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방문하실 때 그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방문하셨으며 사라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창 21: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팔일 째 할례를 행하였습니다(창 21:1-5).31)
이삭이 태어난 일은 자연의 이치로 보자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32)
사라가 말하였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만드셨으며 듣는 모든 자가 나에게 웃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 21:6).
사라는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을 이삭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33)
사라가 말하기를, “‘사라가 젖을 먹게 하였노라’고 누가 발언하였느냐, 이는 아브라함의 노년기에 내가 아들을 낳았음이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으며 아브라함을 큰 민족으로 만드신다는 약속으로 시작되었습니다(창 12: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씨에게 땅을 주신다는 것은 씨를 주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먼저 그에게 씨를 주실 때에 그의 씨에게 땅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가 약속하신 것의 일부를 이루신 것을 살폈는데, 하나님께서 아직 땅은 주지 아니하셨지만 약속대로 씨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에게 약속의 땅도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약속하였던 것을 지키는 것을 가리켜 믿을만하다고 합니다. “믿을만하다”를 한자어로 바꾸게 되면 “신실(信實)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믿을만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반복하여 씨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창 15:5),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을 언약을 맺으셨는데, 하나님께서 자른 고기 사이에 연기와 횃불을 지나가게 하신 것을 통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음에도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종을 첩으로 취해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 완전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종을 통하여 아들을 얻은 후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야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완전하게 되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가 첩에게서 아들을 낳은 일은 하나님의 눈에 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오랜 세월이 흐를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함으로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늦었다고 생각될 때도,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많은 군중의 아버지”로 바꾸어 주시며 그가 많은 군중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다시 반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의 이름도 “왕후”를 뜻하는 “사라”로 바꾸셨는데 “왕후”라는 이름은 사라가 왕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이름을 부를 때 “많은 군중의 아버지”, “왕후”라고 부름으로써,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늘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불신앙의 언어에서 신앙의 언어로 바꾸어야 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길 수 있는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반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방문하셨고 사라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창 21:1). 사라가 그와 같이 오랫동안 기대한 일이 사라에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 그가 그의 약속을 지키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방문하실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문하시는 때에 우리의 삶에 웃음이 넘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약속하셨던 좋은 선물을 손에 들고서 방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약속하신 선물을 손에 들고서 사라를 방문하신 때에, 사라는 하나님께서 가져오신 그 선물 때문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브라함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름이 “이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 때 언젠가 웃을 날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웃음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며, 이삭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웃음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슬픔을 겪고 기대하는 바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삶을 사는 의인에게는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더디게 오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방문하시는 날에 눈물을 닦아 주시고 웃음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땅의 그 먼지처럼 놓으실 것이고, 먼지를 셀 수 없듯이 그의 씨도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입니다(창 13:16). 하늘의 별처럼 아브라함의 씨도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입니다(창 15:5).
하나님께서 이삭을 낳게 하셔서 이 약속을 이루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언약을 꼭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니, 약속을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한 주간 됩시다! 우리를 웃게 하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사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D. M.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이길상 옮김 (복 있는 사람, 2011), 47-48.
2)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9.
3) I. Howard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3), 김현광·배성진 옮김 (서울: CLC, 2012), 170.
4)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51-52.
5)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54-55.
6)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56-57.
7)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67.
8)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27.
9)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28.
10)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39.
11)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40.
12)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71.
13)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73-74.
14)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79.
15)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80.
16)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82-86.
17)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55.
18)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56-158.
19)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59-163.
20)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64.
21)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65.
22)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66.
23)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67.
24)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68.
25)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171.
26) 한기채, 『지명을 읽으면 성경이 보인다』 (위즈덤로드, 2010), 88.
27)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171.
28)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172.
29)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173.
30)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174.
31)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175.
32)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109.
33) 김상복, 『모험을 두려워 말라』 (도서출판 횃불, 1994),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