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맞이하여 누구나 여러 매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 동네 어떤 분은 교회는 안 다니지만 많은 시간 TV의 설교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참 좋은 말씀이 TV만 틀면 들려온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씀의 뜻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방송 설교를 하는 목사님들의 말씀을 재미있게 듣는다고는 하는데 그 말씀 속에서 복음을 만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렇다 하고, 답답한 것은 교인들조차도 주일 예배 시간에 듣는 설교의 내용 중에 핵심적인 복음의 내용은 제쳐놓고 그 핵심 내용을 쉽게 전하기 위해 들려주는 예화나 실화를, 그것도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변조하여 더 귀담아두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어느 마을에서 할머니 한 분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성격을 가진 듯했다. 금세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오후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내용의 설교를 했던가 보았다.
예수님을 시험코자 찾아온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라고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그 할머니는 하필이면 그 당시에 동네의 다른 할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목회자가 그것까지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불찰이었을까? 할머니는 그날 설교를 들으면서 기분이 몹시 나빴나 보았다. 다음 주부터 교회에 발걸음을 뚝 끊었다. 우리 부부는 몇 번 심방을 갔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왜 그럴까 하고 고심을 했다.
두어 달 후에 그 마을의 집사님으로부터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주일 오후 예배시간에 이웃과 사이가 나쁜 자기 들으라고 일부러 목사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하여 설교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할머니는 분개하면서 “내가 나이가 80이 다 되는데 50도 안 된 아들 같은 자가 감히 어머니뻘 되는 나에게 훈계를 하다니 기분이 몹시 나빠서 교회를 그만 다니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황당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우리가 뭘 아는데? 동네 사람끼리 사이 나쁜 것을 목회자가 어찌 다 알고 일부러 설교 시간에 그들을 훈계하겠는가? 그리고 목회자가 설교를 훈계에 이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가? 영의 양식으로 양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설교인데 어찌 하나님 존전에서 설교를 이용하여 성도의 잘못된 것들을 고치려 한단 말인가? 우리는 억울했다. 그것은 사실 말씀의 곡해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변명한다면 오히려 일만 더 커질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님은 아실 거야’ 하면서 한동안 몇몇 사람들의 오해를 견뎠다.
우리는 가끔 예배가 끝난 후에 ‘오늘의 설교를 몇 명이나 알아들었을까?’ 하는 자괴감을 갖는 때가 있다. 어떤 분은 설교 시간 내내 졸다가 끝날 즈음에 눈을 번뜩 뜬다. 어떤 분은 도무지 말씀을 듣는지 안 듣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분은 설교 시간에 성경책이나 찬송가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고넬료처럼 베드로를 초청해서 온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모아놓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러저러한 일로 인하여 고향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홀로 사는 50대 후반의 어느 분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난 후 가끔 사택에 놀러온다. 동네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어 시골 생활이 매우 심심하다는 사람이다. 그는 사택에 올 때마다 술을 마시고 온다. 맨 정신으로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말을 잘한다.
술 취한 정신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의 말 속에는 그의 진심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한 말이 정곡을 찌른 듯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썰렁하기도 했다.“내가 보기에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 30% 정도만 진짜 성도인 것 같아요.”“그럼 나머지는 어떻다는 거예요?”“음, 나머지는 하나님을 믿어서 나오는 게 아니고 목사님과의 의리 때문에 혹은 체면 때문에, 어떤 유익 때문에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설교말씀을 제대로 듣는 사람도 역시 30% 정도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던 그 분이 저번 주에는 주일날 저녁에 또 술을 몇 잔 마시고 사택에 찾아왔다. 사모님이 타주는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왔노라고 했다. 사실은 커피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 그날 주일 설교 말씀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온 것 같았다.
그 날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빌립보서 3장 1~3절 말씀을 가지고 <참 일꾼의 마음가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참 일꾼의 세 가지 마음가짐을 설교했다. 1절 말씀으로는 주의 일을 하는데 기쁨으로, 낙관적인 마음으로 봉사해야 한다. 2절 말씀으로는 하나님의 일꾼은 진리 안에서 허식 없이 봉사를 해야 하고 삼가야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삼가야 하는 일들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룩해야 함을 말했다.
성도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실제적인 한 예를 들었다. 목사님이 43살 때 어느 날 떡 찾으러 정읍의 천주교 골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희한한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리로 된 벽들에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반라차림으로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 곳이 바로 창녀 골목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것이 단 한 번 눈으로나마 본, 차마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봐서도 생각해서도 안 되는 그런 것이었다. 오늘날 목사들이 부적절한 성관계로 성도들과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많은 것은 가슴 답답한 일이다. 성도들은 몸도 마음도 정결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런 내용이었는데 그 성도는 얘기하기를 설교 내용의 앞 뒤 다 자르고 오직 그 부분만 들었는지 이렇게 말했다.“목사님, 내가 오늘 설교 시간에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이제야 드디어 목사님도 나랑 비슷한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뻤어요. 난 그동안 목사님은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고 생각해서 찾아오기도 좀 어려웠는데 오늘에서야 목사님도 역시 이 세상 모든 남자와 같은 욕망을 갖고 살고 있구나 싶어서 동질감을 느꼈어요. 오늘 설교 말씀 정말 좋았습니다. 저는 오늘 감동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 바라보며 뜨악했다. 더 계속 이어진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 집사님은 목사님이 43세 때 처음으로 윤락가를 방문하여 봤다는 것으로 들었던 것이다. 말씀이 그렇게도 곡해될 수 있는 거구나. 그러니 설교를 들으며 말씀 속에서 복음을 접하고 주님을 만나는 일이 어디 쉽겠나 싶었다. 어찌 할꼬.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 말씀을 잘 깨닫는 것 또한 엄청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니 교회당의 강단에서 수없이 선포되는 말씀들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성도들에게 전해져 영혼을 새롭게 하고 치유하는 일을 하게 될까 의아하다.
마태복음 26장 61절에 예수님을 고소할 거리를 만들려고 거짓 증인들이 많이 모인 중에 두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곡해한 것이었던가. 요한복음 2장 19절에 주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요2:21) 그런데 거짓 증인 두 사람은 그 말씀의 주어를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말씀을 곡해하는 많은 성도들이 어찌 주어만 바꿀 뿐이겠는가, 내용을 통째로 바꾸어 곡해하는 일이 허다하다. 말씀을 곡해하여 시험 들고 삐치고 다투고 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서에서 누차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또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는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라고 말씀하셨던 듯하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 하시면서 매 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외치고 있다. 귀 있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귀를 활짝 열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 깨달아 곡해하지 맙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