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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8련5계(八蓮五桂) 망와고택과 오록마을...........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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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정에서 바라본 망와고택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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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8련5계(八蓮五桂) 망와고택과 오록마을...........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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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정에서 아쉬움의 발길을 돌린 유랑자는 장암정 뒤쪽에 자리잡은 망와고택으로 간다. ‘망와고택’(忘窩古宅)
은 풍산김문의 29대손이자,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공의 15대 후손으로 현재 거주하며 장암정을 수시로 돌
보는 집이기도 하지만, 장암정의 주인공인 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공의 형님인 망와(忘窩) 김영조(金祖.1577-
1644)공의 집이기도 하기에 겸사겸사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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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물야면 오록1리 ‘창마을’은 풍산김씨 집성촌으로 유명하며, 전통가옥들이 즐비한 동네이다. 지명이 오록
인 것은 마을의 우백호가 봉황산이요, 상서로운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든다고 하여 오록(梧麓)이라 하며 마을
곳곳에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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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오록 마을은 다른 두 성씨(안동권씨, 의령여씨)가 살고 있었으나, 풍산김씨가 세거한 후부터 점차 김씨 일족의 동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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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록마을에는 고택체험을 할 수 있는 고택이 있다! ‘망와고택’(忘窩古宅)은 봉화고택 중에서 정원이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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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와고택의 돌담장은 2019년에 새로 쌓아올렸다. 전통적인 돌담장에 , 담장 위에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화단을 함께 조성하여 쌓았는
데 생각 보다는 너무나 아름다운 돌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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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김씨 유연재(悠然齋)의 팔련오계(八蓮五桂) 중 둘째 망와 김영조(忘窩 金榮祖, 1577-1648, 이조참판, 우승
지, 대사성), 셋째 장암 김창조(藏庵 金昌祖), 여섯째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 1587-1667, 공조참의, 대사간, 우
윤)는 봉화 오록(梧麓)마을로 새 터전을 마련하여 이주(移住)하였음을 유랑자가 이야기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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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여기에서 팔련오계란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가 8송
이의 연꽃과 5그루의 계수나무, 즉 ‘8련5계(八蓮五桂)’라고 하면서 ‘오미(五美)’라는 마을 이름을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경사는 아마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서 아주 드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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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유랑자가 앞서 여행기에 오록마을이 왜 살아있는 문화재라고 하였는고 하니 오록마을
의 풍산김씨(豊山金氏)는 지금까지 자손이 크게 번성하지는 않았으나 대대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
리와 의로운 일을 행하고 윤리와 덕으로 나라와 후손들을 다스리며 일가를 이룬 대표적 마을로 학식과 덕망이
높은 관리와. 또한 어질고 현명한 선비가 많았으며 뛰어나고 빛나는 이름으로 청렴세전(淸廉世傳)하여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유랑자 역시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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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앞마당은 잔디밭이 넓게 되어있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앞쪽이 넓게 뚫려있어 개
방감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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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잔디밭이 넓어 아이들이 안전하게 마음껏 뛰어놀수 있어 좋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지 찾아와도 예쁜 풍경을 가진
망와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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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와고택은 200년 가까이 된 한옥이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어 너무 깨끗하거니와 인위적인 한옥 숙소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한옥이
라서 그런지 문화적 가치는 더욱 높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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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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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풍산김문의 청렴세전(淸廉世傳)한 덕분일까 김문의 오록마을에는 총 9곳의 고택이 있다. 그중 한 곳인
망와고택은 추정 2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주택이다. 오늘 망와고택의 주인공인 김영조[金榮祖.1577-1644.(선
조10-인조22)]공은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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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사의 김농(金農)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 김대현(金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은 대 학자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사실 김성일은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뒤 임진왜란이 없
을 거라는 고언으로 파죽지세로 밀렸던 조선의 무참한 패배의 원인과 빌미를 제공했던 분열의 시대에 살았으면
서도 엘리트 과정을 밟은 김성일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접어 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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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숙종(1696년)때 풍산 김 씨 시조인 문적의 18대손 노봉 김 정 선생이 봉화의 서벽들을 둘러보고 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풍산 김씨 3파(망와공파, 장암공파, 학사공파)의 종손이 들어오면서 집성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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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제(春齊) : 뜻이 궁금하여 현 망화고택 대표님께 문의 한 결과 '증조부님의 호'로 "봄을 맞이하듯이 마음을 가지런히 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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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김영조(金榮祖)가문은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명망가의 가문이다. 유랑자는 이런저런 생각
들을 하면서 고택 앞 마당인 잔디밭을 지나 고택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김문의 망와공파 15대 후손이자 인정(人
情)많은 현재 고택의 주인장인 김기홍씨 가 그냥 가면 서운하다고 하두 들어와 차나한잔 하고 가라며 붙잡는 바
람에 유랑자는 잠시 시원한 거실이 앉아 향 가득한 커피와 더불어 망화 할아버지와 오록마을에 대한 일장 연설
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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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金榮祖)공은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전적(典籍)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 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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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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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인조1)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正言)·지평(持平)·부수찬(副修撰)·장령(掌令)·대사헌·대사성·대사간·부
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인조 2)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鄭
曄),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했으니 처벌해야 한
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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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인조 3)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 내용이 경망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주장하고, “인성
군 이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했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해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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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년(인조 11)에는 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받았다. 1642년(인조 20)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 때 인사 부정의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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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 하였다고 전한다.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忘窩集)]이 있다. 유랑자는 거실을 나와 고택 사랑채에 앉
아 한가로운 들녘을 조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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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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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딜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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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와 고택을 나와 고택 뒤에있는 이 고택은 제주 목사를 지낸 입향조 노봉(蘆峯) 김정(金政 : 1670~1737)공의 고택이다. 작년 까지
만 해도 103세되신 할머니께서 살았으나 노환으로 별세한 다음엔 할머니 자식들이 가끔 서울에서 내려와 관리만 한다고 한다, 명망 있
는 가문의 고택이 방치되는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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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사랑방 대청마루에 앉아있으면 앞쪽이 확 트여있어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은 상상 이상이다. 사실
이 고택은 한옥 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는데 농촌마을 고택의 운치를 그대로 담고 있다. 고택 마루에 앉아 바라
보면, 논과 밭을 지나 저멀리 시선이 머무는 곳엔 신비로운 천석산, 만석산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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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망와고택은 사계절 나름의 멋과 운치를 품고 있다. 봄이면 들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마을 무논에
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 소리는 메마른 영혼을 촉촉하게 적셔 줄 것이다. 여름이면 넓은 마당에 앉아 바라보
는 찬란한 별들은 우주 여행의 한 순간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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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풍산김씨 문중에서는 조선말까지 과거 대·소과에 51여명,음보, 수직, 중직에 60명 등 총 111명이 관직에 올랐으며 특히 정조,
철종, 순조 때에는 취헌 종태, 동서 중하, 오촌 규윤 등 세 사람이 참판으로 동시에 재직하여 세칭 옥당(玉堂)마을로 영남에 그 명성이 높
았다고 한다. 그 여세를 몰아 해방 이후에는 육군 대장과 공군 소장, 공군 준장 등 한 마을에 여러 명의 장군이 배출됐으니 가히 터가 좋
긴 좋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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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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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황금물결 넘실대는 들판은 농부의 땀방울과 함께 감사와 풍요를 가르쳐 준다. 겨울이면 장작불 지핀
온돌방에 앉아 군 고구마와 함께 긴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고요함 속에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고택의 집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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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딜방앗간, 옛날 펌프, 외양간, 가마솥, 굴뚝 등은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지금도 선조들이 부르던
이름 그대로 쓰고 있는 사랑방, 중방, 상방, 안방, 못방의 문이나 벽, 장판, 다락, 고팡, 벽장(장안) 등에서는 선조
들의 삶의 무늬와 결을 체험할 수 있으니 오록마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하룻밤쯤 묵었다 가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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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록마을은 역사와 전통을 입증하듯 창마에는 마을 앞 솔숲 옆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삼거리를 '솟대거리'라 부른다. 과거에서 소·대
과에 오르는 경사가 있을 때, 그때마다 이 곳에 솟대를 세워 경하한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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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ㅋ 맞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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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봉화군에 여행을 왔을 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청암정, 닭실마을, 석천정사에 이어 띠띠미마을, 오록마을은 힐링 그 자체로
강력하게 경북 봉화 여행지 추천할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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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이제 오록 마을을 둘러보기위해 나선다. 예스러운 돌담길이 마음에 드는 오록마을, 이러한 풍경들은
이곳 오록마을에서만 즐길수 있는 또 다른 농촌 풍경들이다. 마을을 돌다보면 하나의 정사를 만나게 되는데 한
석봉선생님이 직접 현판 글씨를 써서 걸었다는 유명한 노봉정사(蘆峯精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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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정사는 노봉 김정의 유덕을 추모하고자 조선 영조 18년(1742)에 유림에서 정자와 사당을 건립한 것이다,
노봉정사는 지방 사림의 명현들과 시사를 공론하며 시영을 즐기는 한편 후학을 기르면서 학업에 정진하던 곳
으로이 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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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위에 피어있는 능소화가 여름의 정취를 자아내고 대부분 한옥과 돌담으로 남아있는 풍산김씨 집성촌인 오록리가 아늑하고 소
박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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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오록리(창마)는 ‘봉황이 알을 품는 마을’로 장풍득수(藏風得水), 산포수회(山抱水回)의 명지여서 큰 인물과 장군이 나는
길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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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선생님이 직접 현판 글씨를 써서 걸었다는 유명한 노봉정사(蘆峯精舍)이다!. 노봉정사는 입향조 노봉 김정공의 유덕을 추모
하고자 조선 영조 18년(1742)에 유림에서 정자와 사당을 건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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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풍산김씨 문중에서는 조선말까지 과거 대·소과에 51여명의 인물이 배출됐다. 특히 정조, 철종, 순조 때에는 취헌 종태, 동서
중하, 오촌 규윤 등 세 사람이 참판으로 동시에 재직하여 세칭 옥당(玉堂)마을로 영남에 그 명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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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노봉 김정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달(士達), 호는 노봉(蘆峯)이다, 공은 중형 김개(김개, 동추)과 함께
가난과 싸우면서 마을에서 3리쯤 떨어진 신담에 움막을 짓고 이 터를 닦기 시작하였다.
내청룡 빈곳 어귀에 터를 닦고 남은 돌로 석축을 쌓아 그 앞에 성황당을 짓고 서편에 짐대라는 장승을 세다. 그
리고 집을 짓고 동네를 이루면서 마을 중간을 흐르던 물길을 서편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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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오록마을은 풍산김씨 시조인 김문적(金文迪)의 18대손 노봉(노봉) 김정(김정, 제주목사)공은 이곳 오록리
의 입향조로서, 특히 풍수지리설에 밝아 서벽 등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숙종22년 병자(1696)년 음력 11월 이곳
을 길지로 삼아 세거의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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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공은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는 [노봉집(蘆峯集)]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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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록마을에는 고색창연한 고택뿐만 아니라 돌담 또한 국보급 돌담으로 오록마을의 운치를 더욱 배가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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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위에 핀 능소화도 한폭의 그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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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록마을은 김공의 고조부 유연당공의 9형제 중 둘째자제 망와(휘 영조, 이조참판)공과 셋째자제 장암(휘 창조, 도사)공, 그리고 여섯
째 자제 학사(휘 응조, 우윤)공의 자손이 모여 한마을을 이루고 세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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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끝으로 마을의 특징을 살펴보면 유교문화의 계승지창마에는 마을단위로는 드물게 망와, 학사, 노봉선생을 불천위 제사로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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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북 북부지역 전통가옥 최대 보전 지역 장암정(만축정)과 노봉정사, 화수정사 등과 고색창연한 아홉여 채의 기와집들이 보전되어
있으며, 한국적 강학문화의 실천지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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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적 풍수 : ‘좌청룡, 우백호’마을 위쪽에는 진산으로 갈봉산(葛峰山)이 우뚝 솟아있고, 천석산(千石山 ; 좌청룡)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만석산(萬石山 ; 우백호)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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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울창한 송림현재 물야중학교 입구에서부터 마을 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약 120m 정도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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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집을 아우르며 흐르는 수로와 아담한 고샅길은 철저하게 계획된 터에 집을 앉힌 것처럼 어디하나 흠잡을 것 없이 정갈하다.
동글동글하게 쌓은 돌담과 골목마다 낸 수로에는 맑은 물이 집집을 지나 문전옥답(門前沃畓)으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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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오록 마을은 고색창연한 고택들과 정자가 나지막한 돌담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창마는 산도, 들도, 하늘빛 마저도 옹골
지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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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스테이 하실분은 연락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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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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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록2길 48
(지번)물야면 오록리 664
*한옥스테이 영업시간
매일 체크아웃 11:00 ~
매일 체크인 15:00 ~
망화고택 홈 페이지 :blog.naver.com/kh460400
주인장 연락처 :010-8292-2848 대표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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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지요?
ㅎㅎ 제법 조석으로 시원 합니다.
바야흐로 여행의 계절인데..ㅠㅠ